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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앞서 가는 자 / 눅 10:1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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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앞서 가는 자
본문 : 누가복음 10 : 1 - 20) 
설교 : 김창인 목사 (광성교회)


예수님께서는 70인을 따로 세워서 철저하게 훈련도 시키고 추수해야 할 온갖 은혜와 권세도 다 주신 다음에 자기가 친히 가고 싶어하는 각 동네에 먼저 이 70인들을 보내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70인은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보냄을 받들어 앞서간 사람들이기에 '앞서 가는 자'입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달려가는 우리들은 앞서 가는 사람도 있고 떨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뒤따라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가는 사람은 귀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라고 하는 사람은 자기의 철학, 즉 인생 철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강철 왕이 되기까지 무엇을 하든지 제 1인자가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우체국에서 편지를 배달하는 배달부가 될지라도 많은 배달부 중에 일등 가는 배달부가 된다, 내가 장사를 하게 되면 그 분야에서 제1인자가 된다, 내가 어떤 것을 하든지 그 분야에서 제1인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생활 철학이었습니다. 그러한 그의 신념은 그로 하여금 강철계를 주름 잡는 강철왕이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I. 추수하는 일꾼 (1 -3 절)


본문에서 추수하는 일꾼은 바로 앞서 가는 자다 그런 것입니다. 추수하는 일꾼이라 하면 농사하는 것을 연상합니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물을 주고 김을 매고 가꾸어 놓으면 곡식이 무럭무럭 잘 자라 꽃 피고 열매 맺어 가을이 되면 거두어들입니다. 만일에 거두어들이지 않는다면 일 년 농사는 헛 짓는 것입니다. 씨 뿌리며 수고한 것, 거두어들이지 않고 밭에서 다 떨어지고 흐트러지고 썩어지면 소용이 없기 때문에 다 거두어서 곡간에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도 추수하는 일꾼이란 말이 단지 세상 농사짓는 추수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들판이 있고 거기에는 지어 놓은 곡식이 있고 쌓아 놓을 창고가 있는데 이 창고는 교회를 가리키고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추수할 곡식들은 우리 인간의 영혼을 가리킵니다. 그냔 내버려두면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르익은 이 영혼들을 전부 우리가 인도하고 전도해서 주님의 곡간인 교회로 갖다 쌓아 놓아야 됩니다. 바로 그런 일꾼, 전도하는 일꾼, 추수하는 일꾼, 이런 일꾼은 앞서 가는 일꾼, 즉 앞서가는 신자라는 뜻입니다.


① 달리 세운 일꾼


추수하는 일꾼은 따로 세운 일꾼이란 말입니다.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1절).


여기 보면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 외에, 택한 백성 이스라엘 전체 외에, 그 가운데서 70명을 따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따로 세운 70명은 사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길리움 받아 마지막에 사도가 된 사도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주님께 부름 받고 한평생을 같이 먹고 또 함께 자고 함께 일하면서 주님께서 떠 먹이듯이 가르쳐 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배울 것 다 배우고 받을 것 다 받은 다음엔 "나가서 너희들은 다른 부업하지 말고 복음만 전하라"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입니다.


그런데 그 70인은 그것이 아닙니다. 70인은 자기 가정 다 가진 사람이요. 자기 직업을 다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부르시니까 함께 모여서 전도 훈련을 받고, 지금 전도하러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돌아오면 또 자기 직업에 봉사하고 또 주님이 부르면 나와서 봉사하고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70인들은 평신도들입니다. 일반 교인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따로 세워 철저히 훈련시켜서 추수하러 보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특별히 주님께서 쓰신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많은 성과를 보았습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오늘날 달리 쓰는 교인들은 누굽니까? 따로 세워 놓고 쓰이는 교인들은 누구입니까? 직업 다 가졌고, 가정 다 갖추었고, 내 할 일 해야 하고 부모노릇, 자식노릇 다 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주님이 필요로 한다, 시간내라, 나를 위해 봉사하라"고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나와서 훈련을 받고 전도하러 나가고, 또 돌아오면 자기 가정, 자기 직업에 돌아가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는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바로 평신도들 중에 앞서 가는 신자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생업에 봉사하는 자라도 주님이 "시간 좀 내라, 힘을 좀 바쳐 봉사하라"고 요청할 때, 70인처럼 따로 세워서 쓰시려고 할 때에는 기쁨으로 응하는 사람, 바로 앞서갈 수 있는 신자라는 뜻으로 믿어야 합니다.


② 적합한 일꾼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 (2절).


여기 보게 되면 추수하는 주인은 분명히 하나님을 가리키고 추수할 것은 많다는 것입니다. 농사를 지어 곡식은 막 무르익었는데, 추수할 일꾼은 적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께 이야기해서, 즉 하나님께 말씀드려서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낸 일꾼만이 하나님께 적합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지 않았는데 자기가 욕심내서 그 일감을 떠맡은 사람은 하나님의 일꾼, 추수할 일꾼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지 않았는데도 제 욕심에 겨워서 떠맡은 사람은 반드시 제 고집 부립니다. 자기의 뜻만 관철하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방법대로 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키우시고 하나님이 훈련시키시고 하나님이 보낸 사람은 자기의 뜻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고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찾아서 그 뜻에 충성합니다.


예컨대 교회라고 하는 것은 세상과 다릅니다. 교회는 교회 나름대로 봉사하는 방법이 있고 일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학교는 학교 나름대로 봉사하고 일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국회 의사당에서 하는 식으로 학교에서 하면 안 됩니다. 학교에서 하는 식을 교회에서 하면 안됩니다. 나름대로 방법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일은, 즉 교회 일은 교회 방법대로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회사를 보십시오. 회사는 주판을 놓아서 수입이 얼마고 지출이 얼마니까 얼마 남는다, 이건 할 만하다, 할 수 있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이 회사 아닙니까? 그것이 안될 때는 "안 된다"이것입니다. 교회도 이런 방법으로 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무엇 하려고 세웠겠습니까? 주식회사를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라고 하는 데는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수입이 안되고 지출과 맞지 않아도 우리는 믿음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남자만 5천명되는 그 많은 무리들, 그리고 거기에 여자와 어린 아이 합하면 적어도 만 명, 2만명 되겠지요. 그 많은 사람들이 다 굶주렸을 때 예수님은 빌립에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먹이겠느냐?" 빌립은 계산을 한참하고 주판을 놓아 보더니 사람은 얼마고 지금 떡 한 덩어리엔 얼마씩 하는데 200냥을 가져도 모자라겠습니다. "이것은 안 됩니다"해요. 계산해 보더니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계산해 보고되면 된다 안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식회사 사장을 시켰으면 아마 빌립은 사장 노릇 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은 들은 척도 안 했습니다.


그 다음엔 안드레를 보십시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사람들을 그냥 찾아보더니 어린아이가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주께 바쳐 주님으로 하여금 해결하게 하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가지고 수지 타산이 맞습니까? 주식회사라고 하면 얼토당토않은 소리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주님께 갖다 바치면 주님이 해결할 것을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축복하사 5천명이 먹고도 남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주님의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추수하는 일꾼은 "하나님이 키우고 하나님이 훈련시킨 하나님의 사람", 바로 그 사람을 뜻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에 적합한 일꾼입니다. 교회에 적합한 일꾼, 이런 사람은 추수할 일꾼이요 앞서 가는 신자인 줄 믿습니다.


③ 양 같은 일꾼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3절)


본문 중에서 70인에게 하는 이야기가 "너희는 가라 가는데 꼭 너희를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낸 것과 같은 심정이다" 했습니다. 바로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70인은 어린양이고 밖에 나가게 되면 이리떼가 우굴거린다는 것입니다. 이리라고 하는 건 육신을 잡아먹고 우리 육신을 해치는 그러한 이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을 해치고 우리의 영혼을 해치는 이리떼가 많다는 것입니다. 양에게 이리는 가장 무서운 존재입니다. 또 이리에게 양은 정말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이 이리 가운데 가서 견뎌낼 재간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나가 보십시다. 우리들의 믿음을 혼자 잘 믿으라고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을 어떻게 하면 갈기갈기 찢어 놓고 해칠까 하는 이리 떼들이 얼마나 많이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느 해인가 중학교 방학 책에서 크게 문제가 된 것이 하나 있는데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그것이었습니다. 내용을 보면, 비가 오는 것은 대기의 수증기가 결정이 되어 쏟아지는 것인데 이 대기에 있는 수증기를 계산해서 전 세계에 비가 내리는 것을 생각하면 하루에 아무리 많이 내려도 2.5센티미터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40일 동안 와봐야 그것이 몇 센티미터 쌓이겠느냐는 것입니다. 1미터밖에 더 쌓이겠습니까. 40일 와봐야 그러니 저 에베레스트 산 제일 높은 꼭대기까지 홍수가 넘쳤다고 하는 이런 허무 맹랑한 소리가 어디 있느냐, 그러니 "35만 배나 엉터리로 과장해 실은 것이 성경이라" 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 아들, 딸들의 중학교 겨울 방학 책에 나왔습니다. 이것은 대한 교육 연합회와 사립 학교 교장 협의회에서 발행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아들, 딸들이 가서 이런 것을 보고 들으면 믿음이 갈기갈기 찢어지지 않고 빼앗기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합니까? 마귀란 놈은 교묘한 수단 방법으로 교육계를 통해서라도 이런 못된 짓을 합니다. 때로는 정치계를 통해서도 못된 짓을 합니다. 때로는 사업계를 통해서도 우리들의 신앙을 정말 여지없이 매질하고 찢어 버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과 같이 이리 노릇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양이라고 하는 것을 아십니까? 주인이 없으면 몹시 불안해합니다. 주인이 안보면 그만 태산같은 걱정입니다. 그러나 주인을 보기만 하면 무척 만족합니다. 나 하나 못 먹여 주고 잠 잘 못 재워 주고 나를 보호 못해 주고 나를 마시지 못하게 할 그럴 주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백 퍼센트 주인만 믿고 살며 주인에게 자기를 의뢰하고 살면 주인이 푸른 초원 잔잔한 물가와 쉴 만한 터로 인도합니다. 전적으로 주인만 믿는 양, 그래서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뢰하고 사는 그 사람, 진정 추수할 수 있는 일꾼이요, 앞서 가는 신자라 하겠습니다.


II. 평안을 받을 자 ( 4 - 16절)


앞서 가는 사람은 평안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평안의 축복을 받을 사람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① 영접으로 평안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4 - 6절).


여기 보게 되면 앞서 가는 신자가 꼭 평안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70인을 보내시면서 축복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하고 복을 비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주님이 하라 하니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만일에 그 집에 열 사람이 있어서 복을 아무리 빌어도 그 중에 평안을 받을 사람이 없으면 빈 평안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평안을 받을 사람이 있으면 그 평안은 그 집에 임하고 받을 사람이 없으면 열 사람이 앉아 있을지라도 평안이 돌아오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저주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이 저주받을 사람이 아닌데 저주해 버리면 그 저주가 내게 와버립니다. 그러나 축복을 하게 되면 그 사람 축복 받을 사람이면 받게 되고 받지 못할 사람이면 내게 돌아옵니다. 그럴 때에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할 때 가서 복을 빌면 반드시 그대로 임하겠다. 그래서 영접하는 자 평안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보낸 주의 일꾼들을 영접하는 자입니다. 주님께서 훈련시켜 보낸 사람입니다.


요즈음 우리 교회 목사님들이, 열심히 여러분들 가정을 심방합니다. 주님이 보낸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안타까워서 여러분들 집에 가서 굽실거리겠습니까. 얻어먹으려고 가는 것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먹을 것 주는 것이 귀찮아요. 가서 여러분들의 믿음을 생각하여 권면 할 것은 권면하고 책망할 것은 책망하고 깨우쳐 주고 복을 빌고 싶어서 가는 것입니다. 구역장, 권찰도 주님이 보낸 사람들입니다. 받아서 영접하게 되면 비는 복이 그대로 임한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곧 나를 영접함이라" 주님께서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안을 받을 자, 주님의 일꾼들을 영접하는 자는 평안을 받을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② 믿음으로 평안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는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치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7 - 11절)


이 내용을 보면 너희를 영접하고 너희 앞에 모든 것 차려 대접하고 너희가 하는 말 그대로 믿을진대 거기 있는 병자를 다 고쳐 주어라.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이 집에 가까이 왔다고 선포를 하라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병 고침 받을 만한 믿음을 가지고 살고 이 집에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선포를 받을 만큼 믿고 사는 사람이 평안의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에 참 반가운 분을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신학교 졸업하기 전에 처음 전도사로 나갔던 교회가 있습니다. 저는 그때 총각으로 자취하면서 무척 고생을 했습니다. 돈 한 푼 생기면 아꼈다가 등록금 마련해야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분은 그때 저하고 동갑이었습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결혼을 했고 아기 하나 낳고 고등학교 선생을 하면서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그때 선생 노릇하시는 분들 생활이 넉넉지 못할 때입니다. 한 교회에서 제가 전도사로 그 분은 집사로 열심히 봉사했어요. 나는 신학교로 갔고 그 분은 그 분대로 갈 길을 갔습니다. 그 후 그 분의 소식을 모르고 살았는데 그 분과 헤어지고 15년이 지난 5년 전 제가 영주 동산교회 부흥회를 갔더니 어느 날 밤에 왔어요. 정말 15, 6년 만에 만나니까 어찌나 반갑던지요. "어찌 된 일이냐" 그랬더니 자기가 지금 영주 어느 고등학교 선생을 하는데, 어머니가 이 교회 교인은 아니지만 이웃 교회에서 부흥회 한다니까 왔다가 날 가만히 보더니 왠지 모르게 옛날 자기가 어느 교회에 나갈 때에 전도사인 것 같더래요. 그 어머니가 돌아와서 아들에게 " 얘야 한번 가봐라 아무 전도사 같더라" 하더랍니다. 그래서 와보니까 틀림없어, 너무도 반가워서 저녁예배 마친 다음 왔다는 것입니다. 반갑게 이야기를 하고 그 후 편지도 왕래하면서 지내고 있는데 바로 지난 목요일 날에 찾아왔습니다. 참 반갑게 만나고 내려갔습니다. 그 분에게는 간증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자기 어머니가 23세, 자기가 세 살 때 자기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23세 때 과부 된 자기 어머니, 세 살에 자기 아버지를 잃어 버려서 아버지 얼굴조차 기억을 못하고, 자기 동생은 어머니 태중에 있어서 유복자라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청도 지방에서 살게 되었으나 자기네 이씨 가문이 아주 양반이고 완고해서 예수라는 예자도 빈틈이 안 들어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가 여덟 살 때에 홍역을 앓았습니다. 자기 할아버지가 진짜 한의사도 아니고 들은 풍월로 짓는 풋내기 한의사라 다른 한의사에게 직접 갔으면 좋은데 할아버지가 나름대로 감기약을 지었습니다. 먹었더니 나오던 열은 쑥 들어가 버렸으나 꼬치꼬치 말라 석 달 반 동안 그저 정신 없이 헤맸답니다. 그러니까 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럴 때 자기 어머니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스물 세 살에 과부 되고 남은 아들이 지금 죽게 되었는데. 그래서 안타까이 이리저리 다니다가 하루는 동네 입구에서 왠 점잖은 분이 오더랍니다. 여보시오. 당신 보니까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내 아들이 지금 이런 상황에 있으니 당신 비방이 있으면 가르쳐주시오 하고 붙잡은 것입니다. "그거야 사는 길이 있지요." "어떻게 하면 삽니까? 무슨 약을 쓰면 됩니까?" "나는 기도밖에 모르는데 하나님이 고쳐 주면 삽니다." "그래요? 가십시다." 그래서 자기 집으로 모셨더니 그 분이 바로 전도사라 이 동네 전도하러 오는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던지 그 기도가 끝나자마자 혼수 상태이던 아이가 물 달라고 외치더랍니다. 그래서 물먹고 정신 차리고 그 다음엔 회복되어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어머니가 죽자 살자 예수 믿으니까 난리가 났지요. 자기가 13대를 내려오는 종손 집안인데 집안 어른들이 나오더니 족보 빼앗아 가고 종손 집안에 주던 땅 다 빼앗아 버리고 내쫓아 버렸습니다. 하지만 내쫓기면서도 예수 믿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지금 권사가 되었고 자기 동생도 집사가 되었습니다. 족보 빼앗긴 것이 문제가 아니고 땅 빼앗긴 것이 문제가 아니고 예수 믿고 보니까 권사 된 것이 얼마나 기쁘고 내가 정말 예수 알고 지금 이렇게 보람 있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고 지금도 바꾸자면 안 바꾼다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믿고 사는 사람, 복 있습니다. 믿고 사는 사람, 평안을 얻습니다. 마음의 평안, 육신의 평안, 할렐루야!


③ 들음으로 평안


"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16절).


여기 보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참 복이 있고, 평안의 복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공부 잘 하는 학생은 공부 잘 해서 성공하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공부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아십니까? 첫째 열심히 들어야 합니다. 듣지 않으면 공부 못합니다. 공부하는 학생이 다른데 정신 팔고 듣지 않아 보십시오. 그는 공부 안 할 학생이요, 아예 안 하는 학생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드리고 설교하며 주님의 말씀들을 때 정신을 딴 데로 돌리는 사람은 예수 안 믿을 사람입니다. 듣지 않는데 어떻게 믿겠습니까. 듣지 않는 학생과 똑같지 않습니까. 한시간 듣고 난 다음에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한시간 듣고 나도 깨닫지 못하면 안 들은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설교할 때엔 될 수 있는 대로 쉬운 말로 설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됩니다. 깨닫고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오래오래 기억해야죠. 2×2=4, 3×3=9. 셋을 세 번 세어 보세요. 한참 세어야 하는데 "삼삼은 구" 하면 금방 답이 나오니 신기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고 말면 공부 못 할 사람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오래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써먹어야 됩니다. "8×8=64" 해 놓고서 쌀 한 말에 80원씩 하는데 8말은 판 사람이 한 말 꼽고 두 말 꼽고 세 말 꼽아 나가 보십시오. 다 기억해 놓고도 써먹지 못하는 사람은 헛 공부한 겁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 열심히 듣고 깨닫고 오래 기억하고는 나가 써야 됩니다. 쓰지 않으면 예수 헛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써먹기까지 하는 사람이 예수 바로 믿고 공부 제대로 한 사람이라면, 써먹기 전에 기억을 해야 되고, 기억하기 전에 깨달아야 되고, 깨닫기 전에 근본 문제를 열심히 들어야 합니다. 여기 보니까 예수 말씀하시기를 "너희 말을 듣는 사람은 내 말을 듣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를 말을 그대로 보내었기 때문에 너희 말을 듣는 건 내 말을 듣는 거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 열심히 듣고 깨닫고 기억하고 써먹기까지 하는 사람, 바로 평안의 복을 받을 사람이요 믿음의 생활에 앞서갈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III. 녹명 된(기록된) 자 (17 - 20절)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7절).


① 승리하는 자로 녹명


하늘에 기록된 자는 악한 영, 즉 귀신에게 사탄에게 누구에게나 승리합니다. 70인이 돌아와서 주님께 너무도 신이 나서 보고하였습니다.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즉 귀신 들린 사람 한두 사람이 아니라 누구라도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명령만 하면 항복하고 무릎꿇고 쫓겨가더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에게 배운 소리, 들은 소리 아닙니다. 남의 간증을 간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네들의 체험담, 마귀의 부하들 전부 내쫓고 승리한 자기들의 간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기록된 하나님의 아들, 딸들에게 주님이 도우실 때, 주님이 배경이 되어줄 때 마귀의 권세, 악의 권세는 그를 당하지 못하고 꼭 승리하고 만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기록된 사람은 반드시 귀신을 내쫓고 승리한답니다. 귀신 들린 사람한테 가보십시오. 가서 쫓아낼 수 있으면 좋고 "넌 무엇이야?"하고 달려들면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기록된 사람은 악령을 이기고 승리하는 신자입니다.


② 인정받는 자로 녹명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18절).


예수님의 인정입니다. "왜 너희가 그렇게 좋으냐, 나는 벌써 다 보고 있었노라." "아니 어떻게 아십니까?" "하늘에서 사단이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그 순간 내가 보았노라." 귀신이 쫓겨날 때 나는 다 보고 있었다는 주님의 인정입니다. 인정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아십니까? 아내가 음식을 정성껏 차려 놓았는데 남편이 혹은 손님이 와서 아내 솜씨를 인정해 주고 만족히 드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그때 인정 못 받으면 얼마나 섭섭합니까. 기술자가 자기의 기술을 인정받고, 글 쓰는 사람이 자기의 글을 인정받고, 그림 그리는 사람이 인정을 받을 때는 참 기쁜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우리의 믿음이 주님께로 인정받을 때 가장 영광인 줄로 믿습니다. 하늘에 기록된 자, 바로 앞서 가는 신자는 이런 믿음을 인정받는다는 뜻입니다.


③ 권세 있는 자로 녹명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19 - 20절).


하늘에 우리 이름이 기록된 자는 권세가 있습니다. 전갈과 뱀을 밟아 버리고 원수, 즉 마귀의 모든 능력을 제어하고 밟아 버릴 권세를 너희에게 다 주었다 했습니다. 능력보다는 권세가 좋습니다. 일류 기술자가 물건을 만들었습니다. 권세입니까 능력입니까? 능력입니다. 병들어 죽어 가는 사람을 고쳤습니다. 의사의 능력입니다. 즉 병 고치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권세는 없습니다. 최고 권세자는 대통령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능력보다 더 큰 것이 권세입니다. 왜냐면 권세가 능력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혹시 능력을 가졌다 할지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제어하고 다스릴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기록된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이 천상 천하의 권세를 우리에게 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앞서가는 자는 추수하는 일꾼입니다. 즉 추수하는 일꾼이 앞서가는 자입니다. 그리고 앞서가는 자가 평안의복을 받습니다. 그런가 하면 앞서가는 자는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자들입니다. 우리들도 앞서가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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