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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혹에서 승리하라 / 호 4: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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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제목 :  유혹에서 승리하라 
> 설교자  :  황요한 목사 
> 본  문  :  호세아 4:12-19

노무현 대통령께서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을 하신 후, 사람들은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과 견주며 이제 우리 나라도 그만한 대통령이 나와야 된다며 기대 섞인 모습들입니다. 그 분이 당선자 시절,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들을 발표하였는데, 변변한 자가용이 없었던 한 인수위원에게 어느날 갑자기 고급승용차가 6대나 생겨 고민하다가 결국 돌려보냈다는 뉴스를 보고 시민들은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습니다. 아직도 사회 곳곳에 권력에 줄을 대려고 하는 부정한 사람들의 유혹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쉽게 사는 비결도 없지않습니다. 유혹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유혹을 받아 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사회는 모두가 쉽게만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업을 쉽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뇌물도 쓰고, 부정한 방법으로 인 허가도 받습니다.

최근, 인터넷 토털서비스 사이트인 'DAUM'에서 여론조사를 했습니다. 내용은 '노무현 정부가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였는데, 토요일 현재 36.1%가 부정부패 척결이었고, 23.7%가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 그 다음은 교육개혁 등의 순서였습니다.

지금 전 세계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의지로 전쟁에 대한 불안에 떨고 있는 상황입니다. 17일에 공격을 하겠노라고 최후통첩까지 한 상태입니다.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수십만의 군대가 쿠웨이트와 주변 국가에서 대기해 있고, UN의 결의와 관계없이 공격을 감행하겠노라고 미국은 연일 전쟁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습니다.

달력을 보니까 17일은 우리교회가 부흥회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아마도 양쪽에서 모두 불이 날 것 같습니다. 한쪽은 사람을 죽이느라 첨단무기가 불을 뿜을것이지만, 우리 교회는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한 성도의 눈물의 기도와 목자의 말씀으로 불이 붙을 것입니다.

북한은 또 동해 바다에 미사일을 쏘아대며 온통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는 가운데 조사된 설문조사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국민들이 새 정부에 바라는 최고의 요청은 바로 부정부패 척결이었습니다. 그만큼 이 사회가 부정부패로 심각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역대 정부가 깨끗한 정부를 표방하고 멋진 출발을 하였지만 언제나 용두사미로 끝난 뼈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쉽게 살기 위해서 사업도 그렇게 하지만 학문의 세계도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처럼 학위 좋아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습니다. 어렵게 10년씩 공부해서 학위를 받는 사람도 있지만 여기 저기서 대강 대강 학위 받고 거창하게 박사취임 축하식도 하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우스개 말로 우리 나라엔 박사가 너무 많아서 박사가 아닌 사람이 오히려 대접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제가 지난 98년 영국에 유학을 갔을 때 동역자들이 물어본 첫마디가 "무슨 학위하고 왔느냐"며 궁금해 했습니다. 교회에서 1년 안식년을 허락받아 유학한 것인데 무슨 학위냐고 하니까 남들은 그 정도 기간이면 박사 다 하고 온다며 오히려 저의 무지함을 나무라는듯 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최근엔 신앙생활까지도 쉽게 할 수 있는 곳을 찾는 시대가 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쉽게 할 수 있을까? 예배생활, 기도생활 대충하고도 예수 믿을 수는 없을까? 저희 교회가 심방, 음악, 행정 등 여러부분에서 동역자를 구하느라고 지난 해 가을부터 일찍 서둘러 본부와 연회 게시판에 광고를 올렸는데 각각 약 300여명이 그것을 보고 많은 이들이 문의를 하였습니다만 대부분 첫마디가 "새벽기도 안 가고 근무할 수 없을까요?"혹은 "보수는 얼마를 주는가요?"라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반드시 섬기는 교회 근처에서 거주하셔야 하고, 걸어서 오실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인지 제때에 사역자를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사람은 홍수같이 많은데 정작 함께할 동역자는 쉽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 쉽게 집사, 권사, 장로, 심지어는 목사가 되는 법이 없을까 하고 사람들은 머리를 짜내고, 그것을 이용해 돈을 받거나 이런저런 이해관계로 쉽게 과정을 통과시켜 주곤 하는 폐단이 아직도 곳곳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쉽게 사는 건 간단하지요. 유혹에 굴복하면 됩니다. 사업도 쉬워지고, 학위도 쉽게 받을 수 있고, 신앙생활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굉장히 고단한 신앙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요. 특히 우리 교회는 어려운 코스만을 골라 가는 것 같습니다. 오늘 장로님 기도하신 것처럼 교회가 창립된지 20년이 되도록 말입니다.

어느 기독실업인의 고백대로 믿음과 진실함으로 정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양심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하려고 했더니 이건 두 손 두 발 꽁꽁 묶어 놓고서, 운동복 차림으로 뛸려는 세상사람과 100m 경주를 시키는 것과 같다는 느낌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불가능한 이야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하여 10년쯤 지나 뒤돌아보니까 모두가 자기 뒤에 있더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

정말 우리가 바른 길을 간다고 하는 것, 의의 길을 간다고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평안의 교회 역시 그렇게 20년을 앞만보고 달리다가 뒤돌아보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많이 높여 주신 것 같습니다. 모든 역경을 극복하게 하시고, 열악한 환경조차 변화시키는 주님의 도우심을 맛보며 지나온 20년이었습니다. 생각하면 하나 하나 모두가 감사의 조건이요 제목인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호세아서 당시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호황을 누리던 시대입니다. 번영과 풍요의 시대입니다. 여로보암 2세는 그런 면에서 성공한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아니었습니다. 영적으로 너무나도 타락했고 도덕적으로 너무도 윤리가 땅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여기 보니까 우리의 딸들이 행음하고 며느리들이 간음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물질적 번영을 누렸던 시대의 공통적인 현상들입니다.

11절에 보면,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 후반에는, "이는 저희가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먼저 11절의 말씀을 영어 성경에는 "Take away the understanding of my people"이라고 했습니다. '내 백성의 분별력을 빼앗는도다' 라는 의미입니다. 음행과 묵은 포도주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분별력을 송두리채 뺏어 버린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잘 믿는 것 같던 분이 물질 문제 때문에 하루아침에 얼굴 바꾸고 세상 길로 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음행, 도덕적인 문제 역시, 그럴 사람 같지 않았는데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의 기초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져져 있다면 괜찮은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음행과 묵은 포도주가 그 마음을 송두리채 뺏어 가는 겁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내 백성이 나무를 향하여 묻고 그 막대기는 저희에게 고하나니.....' 말 못 하는 나무에게 자기들의 미래를 물어본다는 거예요. 여기서 나무는 아세라 목상입니다. 사람에게는 삶의 패턴이라는 것이 있어요. 제일 먼저는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무슨 단풍 구경가고 온천 가는 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다음의 이야기이지요. 50-60년대에 무슨 단풍구경, 온천여행이 있었어요? 하지만 대한민국 금수강산은 철마다 단풍은 들었었고 온천은 여전히 뜨거운 열기를 내품고 있었습니다.

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가장 먼저 마음을 빼앗긴 우상은 "바알"입니다. 바알은 풍요의 신이요 번영의; 신입니다. 농사 짓는 사람은 농사 잘 되게 해 달라고 빌었고, 목축을 하는 사람은 목축이 잘 되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기업을 하는 사람이 사업 잘 되게 해 달라고 돼지 머리 앞에 넙죽 엎드려 비는 것과 다를바 없습니다. 열심히 바알에게 가서 제물을 바치고 빌었는데 이상하게 잘 됩니다. 마치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한채 사명의 자리를 떠나 다시스로 도망치던 요나에게 순풍에 돛을 단듯 표도 쉽게 구하고 바람도 잔잔하여 낮잠자기 좋았던 상황과 같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해진 다음의 코스는 음행입니다. 바알 신을 섬기던 그들이 선택한 신은 :아세라ㅖ이었습니다. 아세라 목상은 쾌락과 행복의 신이라고 믿었습니다. 인생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것이지요. 아세라 신에게 제사하는 과정은 언제나 제물을 드리는 1부가 끝나면 2부 순서는 거기에 참석한 남녀가 성적인 행위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곤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 당시에 마게도니아 지역, 아가야 지역, 고린도지역 등은 모두 '아크로폴리스'라고 하는 도시국가 형태를 가지고 있었는데, 산 위에는 언제나 도시 분위기를 압도할만한 규모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신전부터 시작해서 도시가 형성되었고 시민들의 일상생활도 연계되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를 느낀 그들이 쾌락으로 눈을 돌리기엔 아세라신전의 제의는 너무나 잘어울리는 제도였습니다.

저는 참으로 마음이 아픈 부분이 있습니다. 21세기 들면서 우리 사회는 이상한 풍조가 물 밀 듯 밀려들어오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 전에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과거와는 사뭇 다른 상황이어서 염려도 되고 두려움도 느낍니다. 그 중에 하나가 소위 '운세'를 보아준다는 '점 문화'입니다. 젊은이들로 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신문이나 인터넷 사이트마다 온통 도배가 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심지어는 기독교 계통의 신문을 보아도 그런 것들이 차지하고 있는데, 아마 광고비 수익 때문에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에 더욱 마음 한켠이 씁쓸해 짐을 느낍니다.

최근에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은 단연 복권입니다. 로또 복권인가요? 수십억원이 당첨되었다며 복권으로 인생역전을 노려보자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물건을 사시고 잔돈이 푼돈이라 받기도 그렇고 해서 옆에 있는 복권 한 장 대신 받아 가는 정도라면 애교로 봐줄 수 있겠지만 거기에 목숨을 건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일가 친척에게 수천만원을 꾸어가지고 전국을 다니면서 복권을 샀다는데 일부만 당첨이 되어 빚더미에 올라앉았다는 기막힌 뉴스까지 들어야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우리나라를 가리켜 '카지노 공화국'이라고 말합니다. 폐광촌에서 부터 도시 호텔마다 카지노 도박판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광산촌의 경제적 어려움을 보전해준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카지노산업은 이제 곳곳마다 거액의 도박으로 빚더미에 앉은 사람들로 인해 가정불화의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됐을까를 고민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해답을 얻었습니다. 이 음란과 타락의 배후에는 무언가 큰 힘이 작용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성경에 그 답이 있습니다. 12절 후반을 보겠습니다. '이는 저희가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11절에서의 마음은 우리의 분별력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의 마음은 'spirit'입니다. 다시 말하면 음란한 영에 미혹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사회를 이끌고 가는 강력한 힘은 다름 아닌 사탕의 영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참으로 정신차려야 할 시기가 이 때인줄로 믿습니다.

베드로 전서 4장 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대적하라' 성경 가운데 우리 인생의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없는 경우가 없어요. 사단의 영이 지금 이 사회를 휘젓고 있다면 믿음의 자녀인 우리가 어느때보다 깨어 근신할 때인 줄 믿습니다. 이번 사순절 40일 특별 새벽기도회를 통하여 더욱 말씀으로 무장하여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14절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하리라' 말씀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망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당신의 백성들이 패망하는 걸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유혹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수 있습니까?

15절 중반에 보면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윈으로 올라가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유혹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바로 이것입니다. 길갈이란 본래 가나안 입성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서 거룩한 할례를 행한 곳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에게 기름을 부으셨던 곳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엘리야가 당신의 후계자들을 말씀으로 가르치던 선지학교가 있던 곳이 길갈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말씀을 가르치던 길갈, 하나님의 거룩한 종을 세웠던 길갈이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을 가지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벧아윈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벧아윈의 원래 이름은 벧엘입니다. 그 이름에 아윈이라고 하는 단어가 붙어 벧아윈이 되었습니다. 아윈은 고통, 슬픔 혹은 우상숭배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변하여 우상숭배의 집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변질된 것입니다. 음식이나 물건은 변질되면 버리면 그만이지만, 사람이 변질되면 골치덩어리입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우상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집이 우상의 집이 된 상황에서 호세아는 호소합니다. "길갈로 가지 말고 벧아윈으로 올라가지 말라"

"목사님 저 담배 끊었어요." 그래요. 잘하셨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심방을 갑니다. "축하드립니다. 어려운 결정 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장식장에 멋진 담배 재떨이가 있어요. "저건 뭡니까?" "아 저 것은요. 아주 귀한 분에게서 선물받은 크리스탈 재털입이니다. 그냥 기념으로 둔것입니다....."

"목사님 저 술 끊었어요" "아주 어려운 결단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심방을 가보니 장식장에 '조니 워커'부터 시작해서 멋지게 생긴 양주병들이 쫙 있어요 "저건 뭡니까?" 아 저거요? 너무 예뻐서 그냥 장식용으로 진열해 놓은 거예요....."

성도여러분, 다 버려야 할줄로 믿습니다. 크리스탈 재털이도, 조니워커 양주병도 모두 깨뜨려야합니다. 제가 전도사로 섬겼던 약대교회에서의 일입니다. 초등학교도 못 나온 할머니가 동네에 사셨는데 사람들은 그 분을 보살이라고 부릅니다. 방 한 칸에는 부처와 온갖 샤머니즘의 기구들이 장식되어 있었는데, 그 분이 전도를 받아서 교회를 나오게 되었어요.

성도여러분, 전도라고 하면 개중에는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도는 해야 하겠는데 어디 만만한 사람없나?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지요. 전도는 만만한 사람에게 하는 게 아니예요. 보살을 찾아가서 예수님 영접하라고 하는 것이 전도인줄 믿습니다. 초등학교 밖에 못 나온 사람이 대학교수에게 가서 주님을 소개하고 구원의 감격을 전하는 것이 전도인줄 믿습니다.성령의 역사는 사람의 생각과 한계를 훠씬 뛰어 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보살을 찾아가서 전도했는데, 그 보살이 감동이 되어서 예수를 영접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에게 연락이 옵니다. "심방을 받기전에 모든 것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마당에다가 우상의 도구들을 하나 가득 쌓아놓고 불을 지른답니다." 정말로 그는 집안의 우상적인 것들을 마당에 수북히 쌓아놓고 불을 질렀습니다. 참으로 감격이었죠. 그런데 얼마 지나서 이야기가 들립니다. "목사님 그 보살집에 아직도 좋은 것들이 남아있대요. 싸구려들만 내놨답니다"

목사님이 다시 찾아갔습니다. "성도님 지난 번에 내논 것이 다 아닙니까?" " 죄송합니다. 사실은 비싼 것들은 아까와서 남겨 두었어요."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제가 그것도 다 포기하겠습니다" 그분은 결국 온갖 비싼 것들을 다 꺼내어 깨뜨리고, 태우웠습니다. 할렐루야 !

하나님 앞에 새로워진다고 하는 것은 흉내내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철저하게 정리가 되야 할 줄로 믿습니다. 길갈로 가지 말고 벧아윈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 쪽을 쳐다도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끊기로 했으면 거기에 관계되는 것은 다 끊어야지 무슨 담배를 끊는 사람이 재떨이를 남겨놓습니까?




두 번째, 유혹에서 승리하려면 15절 후반에 있는 말씀처럼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죄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만만치 않아요.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을 얼마나 고약하게 만드는지, 오늘 16절에 보면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변질되고, 바알과 아세라를 찾아다니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가 완강한 암소처럼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잘 이해를 못 합니다. 솔직히 암소의 그 성질을 잘 몰라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이해는 합니다. 성경에서 성도와 그렇지 않은 불순종의 삶을 염소로 구별한 건 이해를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염소는 키워보았어요. 젖을 내는 염소가 되어서 크면 거의 송아지만큼 커지는 이 염소는 절대로 주인이 앞장서서 인도를 하면 따라오지 않습니다. 제가 중학교 시절에 염소를 끄는데,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하고 제가 잡아 당겼습니다. 앞 두발을 버텨놓고 부들부들 떨면서도 따라오질 않습니다. 조금 더 당기면 앞다리가 부러질 것 같아서 못 당기겠어요. 그래서 제가 뒤로 돌아가니까 그 다음엔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달려갑니다. 염소는 절대로 따라오지 않습니다. 불순종의 사람의 특징적인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이 목축을 하는 나라인 이스라엘에서 완강한 암소라고 호세아 선지자가 표현한 것을 보면 이 암소의 성질도 아주 더러운 것 같아요. 우리 여성들은 '왜 하필 암소냐? 수소라고 하지.' 저는 그것은 잘 모르겠어요. 제 책임은 아닙니다.

중요한 건 이스라엘의 상태가 고집불통이 되었다는 거예요. 누구에게? 하나님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이제는 통하지 않아요. 그전에는 말씀 앞에 눈물을 흘리고, 그 전에는 찬송 속에 눈물이 있고, 그 전에는 기도 속에 눈물이 있었는데 이제는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절대로 들은 척도 않습니다. 완강한 암소 같은 그러한 상황으로 바뀌어 버린 거예요. 그리고 큰 소리 칩니다. 장담하지 말라는 거지요. 교만하지 말라는 겁니다. 잠언에서 말씀하기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니라' 조금 배웠다고, 조금 가졌다고 교만하지 마세요. 그건 사람 앞에 차이는 날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겸손하라'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베드로 전서 5장 6절에 보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교만할 것이 아니라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말씀 앞에 겸손하라는 거예요. 순수하라고 하는 겁니다. 저는 20년동안 평안의 교회를 담임하면서 많은 것들을 깨닫지만, 성도들을 대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을 느낍니다. 신앙이 깊지 못 할 때에는 굉장히 까다롭고, 복잡하고, 말도 많고 그러던 사람들이 성숙되어져 가면서 단순해 지고, 편안해 지고, 사실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관계가 되면 복잡할 이유가 없지요. 하나님 앞에 까다로울 이유가 없잖아요. 이해가 안 되나요?

여러분 남녀가 사랑할 때 처음에는 사랑 전에 사귀게 되지요. 뭐, 서로 미팅을 하거나 소개팅을 해서 만날 때 그 처음 만나는 장소는 얼마나 까다롭고 피곤합니까! 뭐, 시간을 5분 늦었다고 떠나는 사람도 있고, 뭐 음식을 먹는데 소리를 내서 먹었다고 헤어진 사람도 있고, 오른쪽에는 나이프요 왼쪽은 포큰데, 그런 거 잘 못 들었다고 무식하고 매너 없다고 떠난 사람도 있고, 얼마나 복잡하고 까다로워요. 그런데 사랑하고 나면 가까워지고 나면, 부부가 되고 나면 오른손에 칼을 들든 왼손에 칼을 들든 무슨 상관이 있어요! 맛있게 먹어서 소리내면 "아이구 내가 만든 거 맛있게 먹어서 고맙다고 생각되지. 상식 없고 무식하다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사랑하면 복잡하지 않아요. 까다롭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과 거리가 멀면 멀수록 까다롭습니다. 절차가 복잡해요. 하지만 주님과 가깝다면은 그런 절차는 필요 없어요. 저와 여러분의 관계도 그렇고, 여러분과 여러분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이제 너희들 하나님 앞에 까다롭게 굴지 말고, 교만하게 굴지 말고, 능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여 주리라. 진정한 이 시대에 수없이 많은 유혹이 우리를 도전하는 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분별력을 가지시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가야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분별하면서 하나님 앞에 겸손과 온유함으로 나아가실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승리로 이끄실 줄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은 보혈의 능력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고백합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오늘 귀한 말씀을 통해서 다시금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 시대에 이 세상의 유혹 속에 믿음의 승리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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