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님이 부르십니다.(2) / 눅 19:1 ~10

  • 잡초 잡초
  • 239
  • 0

첨부 1


◎ 이름:이윤형 목사
◎ 2003/3/11(화)

예수님이 부르십니다(2)(눅19:1~10, 3/9) 


제 목 : 예수님이 부르십니다.
성 경 : 누가복음 19장 1 ~10절
설 교 : 이윤형 목사 (하늘문교회)


셰익스피어의 3대 비극작품중의 하나인 “햄릿”은 “살 것 이냐 죽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하는 유명한 독백을 했습니다.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사람은 딜레마에 빠져 죽음의 병에 이르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기로에 선 처절한 인간의 모습은, 인간을 마침내, 절망의 심연으로 떨어뜨리고 야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겠다”는 명쾌한 부르심은 인간에게 불안속의 방황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인간 편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삶 가운데 개입하셔서 주권적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율종교에서 볼 수 있는 불가항력적인 소명인 것입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는 음성을 듣는 두 번째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Ⅰ. 예수님의 부르심은 개인적인 부르심입니다.

본문 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여리고 성내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본문 2절 “삭개오는 키가 작고 사람들이 많아 할 수 없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여리고 사람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이적적 행사로 인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겠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병 고치심의 소문을 듣고, 병 고침 받고자 나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혹은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시다”란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보러 나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삭개오처럼 키가 작은 어린 아이들은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나무 위로 올라간 아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리고 도상을 지나가시던 예수님께서는, 삭개오가 올라 앉아 있는 뽕나무 밑에 오셔서 “삭개오야!”라고 부르셨습니다. 
삭개오 하나만을 자명하여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이렇게 개인적으로 하나, 하나 부르십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도 “나사로야”라고 부르셨습니다.  “달리다쿰!” 소녀야 일어나라!  “청년아 일어나라!”  이렇게 개별적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만 부르셨습니다(창12:1).  실로의 성전에서는 “사무엘아”부르셨습니다.  옆방에 자고 있는 엘리 제사장은 부르시지 않았습니다(삼상3:9).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예레미야를, 에스겔을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 나무아래서 나다나엘을 부르시고(요1:47), 베드로와 요한은 고기 잡는 어장에서 부르셨습니다(눅5:10).  마태는 세관에서 부르시고(마9:9),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아! 사울아!”그렇게 부르셨습니다(행9:7).

오늘 나와 여러분들도, 열심히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르심이 귀한 것입니다.  그렇게 부름 받은 나와 여러분이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의 부르심은, 삭개오가 열심을 다해서 뽕나무에 올라갔기 때문에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삭개오의 구도심이나, 열심의 공로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창세전에 우리의 이름을 아셨다”고 했습니다(시139:16).  “모태에서 조성되기 전에 우리를 취하셨다”고 했습니다(시71:6).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택정하시고, 그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그 택정된 삭개오를 찾아서 여리고성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세상 중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별하시는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택자를 세상이라는 큰 덩어리에서 떼어 내시고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사43:1).


Ⅱ. 급히 부르시는 부르심입니다.  본문 5절에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속히 내려오라”는 말씀은 머뭇거리거나, 지체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구원의 긴박성이 내포되어 있는 부르심입니다. 
왜 그런가?  세상의 종말은 찰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오늘 결단하지 아니하면 내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내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믿으라, 그러나 내일 믿어라!  하나님께 충성해라, 그러나 내일하라.  전도도, 선교도 내일하고 십일조도, 감사도 내일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달력에는 내일은 없습니다.

성도의 종말이 아! 하는 순간에 닥쳐오기 때문입니다.  아! 하는 순간에 여객기가 레이더에서 사라져서, 산등성이를 들이 받습니다.  아! 하는 사이에 군함의 함교가 날아갑니다.  아! 하는 사이에 지하철이 불에 타 없어집니다.  아! 하는 사이에 수십 층의 무역센터 건물이 먼지처럼 사라집니다.
이 세상어디에 나를 위한 내일이 있는가?  언제 천천히 예수 믿고, 언제 천천히 천국 가겠는가?  기독교의 복음 초청은 “속히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탄 천국열차는 간이역마다 쉬어가는 완행열차가 아닙니다.  우주를 27번이나 왕복한 콜롬비아 우주 왕복선이 음속의 250속도로 공중분해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너의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했습니다(약4:14).  그러므로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고 했습니다(고후6:2).
지금이 구원의 때입니다.  지금이 은혜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회개한 우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눅23:43).  속히 응답해야 합니다.  속히 예수를 영접해야 합니다.  구원도 충성도, 봉사도, 전도도, 효도도, 오늘입니다.  속히 결단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Ⅲ. 내려오라고 부르십니다.

본문 6절에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고 하셨습니다.
지금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 앉아 내려다보고,  예수님께서는 땅에 서서 삭개오를 우러러 보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종종 인간이 만들어 놓은 높은 자리, 성공의 자리, 명예와 권력의 자리, 자혜와 지식의 자리 부요의 자리에 올라앉아서 세상을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정점이라는 인생 목표를 달성하고, 그 위에 올라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은 먼저 그 자라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높고 높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낮은 땅 위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겸손의 걸음을 걸어 지금 여리고 까지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뽕나무 밑에 서서 삭개오를 우러러 보시기 때문입니다. 
내려옵시다!  겸손의 자리로 내려옵시다!  우리는 땅에 엎드려, 주님을 우러러 보고, 주님은 서서 우리를 내려다 보셔야 합니다.  겸손!  그것은 크리스천의 최고의 덕목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인생을 겸손케 하시는 부르심입니다.  마음으로 겸손하고, 말에도 겸손하고, 행동에도 겸손해야 합니다.  낮은 자리에서 주님을 우러러 볼 때 우리는 주님을 바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이시고 축복하십니다.  교만한자는 낮추시고 미워하십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