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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권위 있는 가르치심 / 수 17: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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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관지 담임목사 (목양교회)
제목 권위 있는 가르치심
본문 여호수아 17:14∼18


마태복음 5장·6장·7장을 '산상보훈'이라고 합니다. '산에서 주신 보배와 같은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산상보훈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 정말 보배와 같이 귀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행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세상은 남의 말을 듣고 평가를 하고 조목, 조목 비판을 잘 하는 사람을 지혜로
운 사람이라고 하는 일이 많습니다. 만일 이런 사람이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라
면 요즘은 지혜로운 사람 되기가 아주 쉽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남을 비판하고
공격하기 아주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반대로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26절과 27절의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부딪치매 무너
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라는 말씀은 팔레스타인의 지리, 기후와 연결하여 생
각하면 좀 더 실감 있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강이나 냇물이 비가 오지 않을 때에는 물이 하나도 없고 그
대로 모래밭입니다. 성지 순례를 할 때 지도에 '세렛 강'이라고 적혀 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아, 신명기 2장에 이스라엘 백성이 38년 동안 광야를 방황하다가
세렛 시내를 건너 북으로 향한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그 지점이로구나!'
반가워서 가이드에게 세렛 강에 이르면 꼭 알려달라고 했더니 얼마 가서 '여기
입니다' 하는데 보니까 그냥 모래벌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비가 오면 순식간에 급류가 콸콸 소리를 내면서 흘러내립니다. 이것
을 '와디'(Wadi)라고 부릅니다.
비가 안 오는 때, 그곳이 모래밭일 때, '여기 좋구나!' 하고 거기에 집을 지으면
우기가 되었을 때 금방 무너져 버립니다.

우리는24절에서 27절까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이 말씀은, 말씀을 듣
고 행하는데 힘을 쓰면 삶의 위기를 만났을 때 극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면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그대로
무너지고 주저앉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비, 홍수, 바람은 자연현상으로만 해석할 것이 아니라 삶의 위기
로 해석해야합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데 힘쓰면 심판 때에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산상보훈을 끝내면서 마태는 그 가르침이 매우 권위 있어서 사람들이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산상보훈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가르침은 권위가 있는 것이었음을 우리는 복음
서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 21절과 22절을 보면 "그들이(예수님과 제자들을 말합니다) 가버나
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
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 귀신을 꾸짖어 쫓아
내셨습니다. 그 귀신이 쫓겨나는 것을 본 사람들은 다 놀라 서로 물으며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막1:27 중)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의 이 기록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첫 번째로 가르치신 것
인데 예수님은 권위 있는 가르치심으로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7장을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셔서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바라새인들이 에수님을 잡아오라고 아랫사람들을 보냈습니다. 아랫사람들은 예
수님을 보고도 잡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힐책하였습니다.
아랫사람들은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요7:46 중) 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이 권위가 있어서 잡아올 수 없었습니다.'라는 뜻
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학교 교사 임명순서를 갖습니다.
교회학교 교사들이 가르치는 것이 이렇게 권위 있는 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
다. 아니, 권위 있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교사들이 가르치는 것이 이렇게 권위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나라에 각급학교 19,000개가 있고 학생들이 1천2백만 명인데 교단이 권위
를 잃고 있는 것이 한국 교육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나라의 기틀이 흔들리는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부모로서 자녀들을 가르칠 때가 많습니다.
선배로서 후배들을 가르칠 때가 많습니다.
직장의 상사로서 신입직원들과 하급직원들을 가르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가르침이 이렇게 권위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르침이 권위를 잃으면 그 사회는 질서를 잃고 질서를 잃으면 혼란과 위기를
겪게 됩니다.

감사하게도 성경을 깊이 살피면 우리도 권위 있게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발견
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권위 있는 가르침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주신 권위에 의지할 때 권위 있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서기관들은 전해 내려오는 가르침에 의지해서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이 있었고 전해 내려오는 교훈들을 모은 「탈무드」라는 경전을 가지고 있었는
데 그것을 가지고 가르쳤습니다.
논문도 자기가 스스로 자료를 발굴하지 않고 남이 주장만 인용하면 가치가 떨
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주신 권위에 근거를 두고 가르쳤
습니다.
산상보훈을 잘 보세요. '어디에 이렇게 적혀 있으니 이대로 해라' 하는 말씀이
없습니다. 반대로 '율법에는 이렇게 적혀 있는데 이제부터는 이렇게 하라'하면서
새로운 것들을 가르치셨습니다.
6장 21절과 22절의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
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
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
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하는
말씀에서 시작해서 '율법에는 이렇게 되어 있으나 나는 이렇게 새 계명을 선포
한다' 하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율법을 이렇게 뒤집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는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교회학교 교사 여러분, 잘 아셔야합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이 주신 권위에 의지
해서 학생들을 가르쳐야합니다.
오늘 새로 임명받은 교사들은 담임목사 명의로 된 임명장을 받겠는데 담임목사
의 권위에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군에 가면 연락장교라는 직책이 있는데 담임
목사의 역할은 그저 하나님의 연락장교입니다.
제가 교사자격증을 둘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받은 중등학교 이급 정교사 일반
사회 교원자격증은 문교부장관 명의로 되어 있고, 뒤에 시험 쳐서 받은 중등학
교 준교사 국어 자격증은 중앙교육연구원장 명의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 때
문교부장관(지금의 교육부장관)의 이름이 무엇인지 몰랐고 대단히 죄송합니다
만 중앙교육연구원이라는 기구가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교사로 임명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제일 끝인 28장 19절에서 20장까지를 보세요 "예수께서 나아와 말
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
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것을 '지상명령'이라고도 하고 '대위임'이라
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기의 권세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밝히고 그것을 우리
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는 그 권위에 의지
해서 세례를 주고 가르치고 전도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하셨는데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내가 준
권세를 잘 활용하나, 못 하나?' 지켜보십니다.
우리는 주어진 것도 잘 활용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
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나는 이렇게 말한다'
하고서 새로운 주장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이단입니다.
구약이 미완성의 성경이었다면 신구약은 완성된 성경, 일점일획도 가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깊이 생각해 보니, 그대로 살아보니 그 말씀
은 진리이더라. 여러분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가르쳐야합니다.

유아원에서 대학교수까지, 일반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사들도 '이 일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다' 하는 인식을 가질 때 범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 권위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큰 힘을 가지고 있고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로 생각하고 가르쳐야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주신 영적
인 능력을 얻을 수 있고 잘 가르칠 수 있는 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천직(天職)'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이 준 직업'이라는 뜻입니다. 크리스천
교사들은 이 말을 '하나님이 주신 일' '하나님이 맡기신 일' 이렇게 인식해야 합
니다.
제가 '천직'이라는 말의 뜻을 정확하게 전하기 위해서 동아출판사에서 나온 사
전을 찾아보았더니 '하늘이 준 임무' '마땅한 임무' 이렇게 풀이해 놓고 용례로
'그는 교원을 천직으로 생각한다'라고 했습니다. 많은 직업들 가운데 교사직을
들고 있습니다. 교사직은 천직의식이 있어야 감당할 수 있는 직업인 것 같습니
다.

진리를 가르쳐야 권위 있는 가르침이 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2장 14절을 보면 바리새인과 헤롯당 사람들이 예수님께 옵니다. 책
잡으려고, 꼬투리 잡으려고, 올무에 걸려고 온 것입니다. 이들이 와서 내놓은 문
제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나이까" 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들은 와서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
심이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높이 추켜세웠다가, 요즘 쓰는 말로 하면 비행기 태
웠다가 떨어뜨리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지만 그들도 예수님이 오직 진
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친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진리는 소곤소곤, 낮은 목소리로 말해도 권위를 갖습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하는데 그것은 일단은 그런 것 같습니다. 나중에 보면 진리인 쪽이
이깁니다.
길에서 접촉사고 났는데 한쪽은 삿대질을 하고 목소리를 높여 욱박지르고, 한
쪽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교통경찰이 와서 시비를 가리니까 반대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가르쳐야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8절에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이런 말씀이 있는데 교회는
진리를 가르쳐야 하고 진리를 말해야 하고 진리대로 행하는 곳이 되어야합니
다.
그저 알기만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지식이라고 부릅니다.
그대로 행할 때 우리는 그것을 진리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진리를 가르치고 진리를 말하고 진리대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진리 가운데 진리는 성경말씀입니다.

주변에 있는 생생한 사물들을 가지고 가르칠 때 권위 있는 가르침이 됩니다.
산상보훈을 보세요.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
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주린다' '목마르다' 이런
말들은 유대인들이 아주 실감 있게 이해할 수 있는 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해서 굶주렸고 물이 적은 곳이라 늘 갈증에 시달렸기 때문입니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고 하셨는데 그 당시 사람들은 로마군인들에게 많이 맞았습니
다. 그리고 로마 군인들이 자기의 짐을 들고 따라오라고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로마군인들에게는 그런 권리가 법으로도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말을 아주 실감 있게 받아들이고 마음에 새길 수 있었습니
다.

6장 25절에서 31절까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주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
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은 주변에 나르
고 있는 새를 가리켰을 것이고 사람들은 '아하, 그렇지!' 하면서 고개를 끄떡였
을 것입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느냐 생
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
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라" 하
실 때는 가까이에 있는 백합화를 가리켰을 것입니다. 사람은 또 '아하, 그렇지!'
했을 것입니다.
(전에는 예수님이 백합화를 꺾어들고 이렇게 말하셨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지금
은 그렇게 말했다가는 예수님이 환경을 파괴한 분이 되니까 가리키며 말씀하셨
다고 해야합니다)

이렇게 주변에 있는 것을 가지고 가르칠 때 또 그런 것들을 통해서 배울 때 생
동감과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감리교는 3월 둘째 주일을 학원선교 교육주일로 지킵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
감리교 계통 학교가 예순네 개가 있습니다. 학원선교 교육주일은 이 학교들을
위해 기도하고 학원이 선교의 황금어장임을 생각하면서 학원선교에 힘쓸 것을
강조하는 주일입니다.
감리회본부 교육국에서 오늘 예배 드리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집을 보냈는데 거
기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수원에 있는 어느 여자정보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쓰신 이야기인데 이 교장
선생님은 5년 전부터 출근할 때 교문에서 만나는 학생에게 가방을 좀 들어달라
는 부탁을 하였다고 합니다. 학생은 영문을 몰라 얼떨결에 교장 선생님이 내
미는 가방을 받아들고 교장실까지 따라옵니다. 교문에서 교장실까지는 5분쯤
걸리는데 그 사이에 학생의 이름, 학년, 반을 지나가는 말처럼 물어본답니다.
학생이 교장실까지 오면 학생의 손을 잡고 예수님의 초상 앞에서 그 학생을 위
해서 기도하고 학생을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이 학생이 이 학교를 선택하기 이
전에 하나님이 이 학생을 선택하고 사랑하는 것을 알게 해 주세요' 기도한다고
합니다.
5년을 그렇게 하면서 어느 날도 그렇게 하려는데 그날 가방을 들고 온 학생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오늘은 제가 교장선생님을 위해 기도해 드릴게요'
그 다음의 일을 그 교장 선생님의 글에서 그대로 읽어드립니다.

그날 나는 학생을 위해 기도해 주는 대신 학생의 투명한 영혼이 드리는 기
도를 받았다 교장실의 예수 초상 앞에서 두 번째의 기도를 받는 기회를 얻
은 학생은(아마 이 학생은 두 번째 교장선생님의 가방을 들어드린 것 같습
니다) 한번의 기도는 나를 위해 선물로 기꺼이 준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참
기쁜 선물이다.

황금어장으로 불려지는 학원선교는 참 중요하다 한 사람의 영혼이 천하보다
도 귀하다고 말씀하신 예수의 가르침과 사랑을 가르치는 학원선교는 그것이
선교의 교두보요 기독교의 미래가 된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인
성교육의 근간을 이룬다는 점에서 그렇다.
인간 자체에 대한 가장 깊은 관심과 동시에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엄중한
선포들이 예수의 사랑과 교훈에 녹아 있다. 어떤 인성 교육 프로그램이 예
수의 사랑과 교훈이 주는 영향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숭고한 역할을 하는 학원선교에 있어서 교사의 사명은 남다르다.

이 교장 선생님은 아주 가까운 일, 매일 하는 출근길에서 중요한 신앙교육과
전도를 했고 그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여러분, '큰 바위 얼굴'이라는 미국 단편소설의 내용을 아실 것입니다. 어느 마
을 건너편 골짜기에 사람 얼굴을 닮은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마을에는 이 큰 바
위 얼굴을 닮은 위인이 출생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습니
다. 그 마을 출신으로 돈 많은 갑부, 장군, 정치가, 그리고 시인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그가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위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
르고 나니 아니었습니다.
그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그저 생활 속에서 얻은 평범한 지혜를 사람들에
게 들려주는 어네스트 존이라는 바로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위인이었습니다.

저도 교회학교 교사, 고등학교 교사, 대학 강사 등 가르치는 일을 오래 했는데
가르치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되는 일을 가끔 체험하고 그런 이야기
를 종종 했습니다. 두 주일 전에 방글라데시와 캄보디아에 다녀왔는데 이번에
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 봉헌예배와 집회를 인도하고 캄보디아 프놈펜 공항에 밤에 내
렸는데 그 때 대단히 피곤했습니다.
교회에서 주일 예배 인도하고 오후까지 여러 일을 하고 공항 가서 비행기 밤새
타고 방콕에 도착해서 공항에서 새우잠 자고, 비행기 갈아타고 방글라데시에
들어가서 한 두 시간 쉰 다음에 부흥회하고, 그 다음날은 봉헌예배 인도하러
국경마을까지 다녀오느라고 봉고차를 열다섯 시간 넘게 타고, 그 다음날 오전
에 신학교 채플 인도하고, 다시 비행기 타고 방콕으로 오는데 비행기가 늦게
떠나는 바람에 방콕 공항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뛰다시피 해서 프놈펜 가는
비행기 탔는데 공항에 내려보니 짐은 오지 않고, 휘청거리면서 공항 밖으로 나
왔는데 그저 빨리 호텔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공항에 저희 교회 협력선교사인 김경일 목사님과 저희 교회에서 교육전도사 생
활을 한 박도한 선교사님이 마중나와 있었습니다. 또 낯모르는 선교사 부부가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J침례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 부부라고 합니다. 저는 그
들을 몰랐기 때문에 다른 일로 공항에 나온 줄 알았더니 저를 맞으러 나왔다고
합니다. 이십 년 전에 신학교에서 저에게 배웠다고 합니다.
그 선교사 부부는 제가 몰라보는 것이 대해 대단히 서운했던 모양입니다. '목사
님, 저희들이 결혼할 때 축전도 보내주시지 않았어요' 하는데 그것도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 대단히 피곤해 보이니까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다시 시간
을 내겠습니다'하고서 헤어졌습니다.
캄보디아를 떠나기 전날 점심 대접을 받으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놀랬습니다.
'목사님, 그 때 이렇게,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저는 기억나지 않는 이야
기입니다. '목사님, 결강을 꼭 한 번 하셨는데 이런 일로 결강하시지 않았어요'
간신히 기억나는 이야기입니다.

가르치는 사람들. 잘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친 사람들은 가르친 것을 잊어먹어
도 배운 사람들은 배운 것을 많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시니까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28절 끝에 "놀라
니" 라는 말은간단하게 번역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대단히 놀랐다', '놀라서 얼
떨떨해졌다', '놀라서 와글 와글거렸다' '한 대 맞아서 정신을 빼앗겨 버렸다'는
뜻입니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이런 권위를 가지고 세상에 선포되면서 세상을 놀라
게 해야합니다.

지난 주일 새문안교회 주일예배에서 목사님이 한 설교가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오늘날의 이런 대결구도는 가깝게는 북한이 갑자기 핵
확산금지조약의 탈퇴를 선언하고 세계를 긴장시키고 실망시키는 일련의 조치들
을 연달아 취하며 전쟁불사론까지 들먹거리는 바람에 참예화되기 시작한 것이
고 조금 멀리는 지난 5년간 김대중 정권이 국민적 합의없이 친북노선과 햇볕정
책을 밀어붙였기 때문에 불거진 것'이라고 하고 '우리가 건네주는 모든 것이 고
위층 당간부들의 배만 채워주며 북한이 군비를 강화하고 우리에게 직접적인 위
협이 되는 일에 쓰여지는 것이 분명한데도 무조건 갖다주는데 찬성할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하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도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북
한은 범죄국가가 아니라 협상대상이라고 말했는데 이 발안은 해방 이후 지금까
지 대한민국을 지지해주고 도와준 우방국가들을 배신하며 분노하게 하고 우리
나라를 국제적으로 우스갯거리로 만드는 것' 이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 설교가 관심을 끄는 것은 새문안교회가 한국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교회이
고 그 목사님이 서울대학교를 나오고, 어디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신학교 교수
를 오래하고, 한 마디로 해서 그 교회의 강단은 권위 있는 강단이기 때문이라
고 「국민일보」는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의 강단만 권위 있는 강단이 아니고 모든 교회의 강단이 권위 있는 강
단이 되어서 세상을 놀라게 하는 말씀을 선포해야합니다.
이번에 새문안교회의 설교가 관심을 끄는 것은 새문안교회가 광화문 부근에 있
다는 점과 과거 군사정부 시절에 이 교회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억도 많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서 민주화를 위한 기도회, 참 많이 했
습니다.
1970년대 중반에 「동아일보」가 정부를 심하게 비판하니까 정부에서 기업들에
게 압력을 넣어서 동아일보에 광고를 싣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때도 새문안교
회에서 언론자유를 위한 기도회가 제일 먼저 열렸는데 가보니까 교회 정문에서
교회당까지 가는 사이에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누가복음 19장 40절의 말씀을 쓴 플래카드를 붙여 놓았습니다.
이번에 새문안교회에서 이런 말씀이 선포되었다는 것도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
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이 이런 설교를 하자 사람들의 반응은 찬반 양론으로 갈라졌다고 합니
다. 교인들도 그렇다고 합니다.
제가 이런 설교를 하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지난 정권의 대북한 자세는 공도 없다고 못하겠지만 의연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분명히 잘못되었습니다. 이번 정부가 그것을 이어받아서는 안 됩니다.
지난 정권 시기에 북한과의 접촉이 좀 활발해졌다면 그것은 역사의 흐름 속에
서 이루어진 일이고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이 사람을 감화시킵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이 생명력을 가지고 오래 전해집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가지고 진리를 가르치고, 가르칠 것을 먼 곳에서 구하지
않고 가까운 것의 일들을 가지고 가르치며 선포하여, 배우는 사람들과 세상을
놀라게 하는 고사들, 여러분과 저, 그리고 목양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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