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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너그럽게 삽니다 / 마 5: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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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너그럽게 삽니다(마5:38-42) 
박상훈 목사 (승동교회)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중국의 유명한 복음 전도자였던 워치만 니의 글을 읽어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젊은 시절 농사를 지으면서 살 때였습니다. 어느 해 날이 몹시도 가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양수기로 물을 퍼서 자기 논에 어느 정도 물을 채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그가 아침 일찍 자기 논에 가보니까 물이 많이 줄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웃 논 임자가 논둑을 터놓아서 말도 없이 그쪽 논으로 물을 빼내 가버린 까닭이었습니다.
그는 몹시도 화가 났지만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모른 척 하고 참았습니다. 그는 또 다시금 양수기를 동원해서 자기 논에 물을 채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 논에 나가보았더니, 또 물이 많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생각에 이웃 논 임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정중하게 항의를 했습니다. 물론 이웃 논 임자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웃 논 임자로부터 사과를 받았습니다. 다음부터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워치만 니의 마음 속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분명히 틀린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또 이웃 사람이 잘못했다고 사과도 하고, 앞으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 속에 기쁨과 평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날 저녁 잠자리에 들기에 앞서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어찌 저의 마음 속에 기쁨과 평강이 없습니까?"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떻게 일의 옳고 그름만을 따져서 꼭 정당한 일만 해야겠다고 생각하느냐? 그것보다도 더 위대한 일을 할 수는 없다는 말이냐?"
그러한 음성을 듣고서 그는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양수기를 준비해서 먼저 이웃 논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여러 시간 동안 물을 퍼 올려서 이웃 논에 충분하게 채워 주었습니다. 그 뒤에 그는 양수기를 자기 논으로 옮겨서 자기 논에도 물을 채웠습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웃 논 임자는 마음에 큰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일이 계기가 되어서 이웃 논 임자와 그의 온 가족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악한 자를 대적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코 악으로는 악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함께 점점 더 악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들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까지라도 선대합니다.

이미 예수님은 8복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은 온유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입니다. 또 의를 위해서 받는 핍박을 오히려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악한 자를 대적하려고 하지 않고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까지라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어줍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선으로 악을 이기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얼마나 복있는 사람들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첫째, 성경에 나타난 보상법의 정신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둘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셋째,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이렇게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죄많은 우리들이지만 하나님은 변함없는 사랑, 너그러운 마음으로 지금도 우리를 선대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언제나 너그러운 마음으로 우리의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함으로서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면서 승리로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성경에 나타난 보상법의 정신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본문 38절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잘 알려진 말입니다. 고대 바벨론의 함무라비 법전에도 똑같은 말이 나옵니다. 이 법을 라틴어로는 전통적으로 lex talionis, 곧 탈리오의 법칙이라고 부릅니다. 여러 가지 다른 말로 번역이 되지만, 저는 이것을 보상법이라는 말로 번역해 보았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만큼 보상해 주어야 하고, 내가 피해를 받은 만큼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뜻에서 그렇게 번역해본 것입니다.

그러면 보상법, 다시 말해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의 근본정신은 무엇입니까? 크리소스톰이라는 교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을 하시니까 그 말이 조금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만일 하나님이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셨다면 오히려 잔인할 뻔 하셨다."
보상법의 정신은 하나님의 자비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계명의 배후에는 사랑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보상법의 근본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보상법을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우리가 배울 수 있습니다. 보상법의 정신은 한 마디로 사랑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보상법이 세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출21:24입니다. 둘째, 레24:20입니다. 셋째, 신19:21입니다. 가장 먼저 나오는 출애굽기 21장의 말씀을 찾아봅니다. 출21:22-25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찌니라."

우리는 여기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몇 가지로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을 본시 누구에게 주셨습니까? 22절 끝 부분에 보면,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보상법은 우리 개개인이 이 원리를 적용하도록 주신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본시는 재판장의 판결 원리로 주신 말씀입니다. 재판장이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 위한 원리로 주신 것이 바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 개개인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 권한이 없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우리는 창4:23-24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뽐내면서 했던 말입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라멕이 무슨 뜻으로 이 말을 했습니까? 누구든지 자기를 해하면 자기는 그에게 칠십 칠배로 되갚아주겠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복수심이 바로 그렇습니다. 예컨대 내가 다른 사람에게서 한 마디 욕을 먹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 마디만 해주면 직성이 풀립니까? 두 마디, 세 마디 해야지 갚은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본심입니다. 만일 내가 실수로 다른 사람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는데, 그 사람이 내게 두 배, 세 배로 보복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따라서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개인적으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도록 허용치 않으셨습니다. 반드시 재판장의 공정한 판결을 통해서만 보상이 가능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둘째, 재판장은 판결을 내릴 때 어떻게 판결을 내려야 합니까? 반드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그 이상도 안되고 그 이하도 안됩니다.
예컨대 내가 가해자라고 생각해 보십시다. 내가 실수로 다른 사람의 이를 부러뜨렸습니다. 그러면 재판장은 어떻게 판결을 내려야 되겠습니까? "이는 이로 갚으라"고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재판장이 "이는 눈으로 갚으라"고 판결을 내리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너무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해 보십시다. 다른 사람이 내 눈을 상하게 했습니다. 그러면 재판장은 "눈은 눈으로 갚으라"고 판결을 내려야 내가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판장이 "눈은 이로 갚으라"고 판결을 내린다면, 내가 얼마나 큰 손해를 보겠습니까? 이처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 위해서 이 법을 주신 것입니다.

셋째, 이 법을 통해서 우리는 이웃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컨대 내가 다른 사람의 눈을 상하게 했습니다. 그러면 그 즉시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내 눈도 저렇게 상하게 되겠구나!" 이러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눈은 눈으로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다른 사람의 이를 부러뜨렸습니다. 그러면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내 이도 저렇게 부러지겠구나!" 그러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이로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법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몸을 내 몸처럼 귀히 여기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의 원리입니다.
이와 같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재판장의 판결 원리로 주셨고, 또 재판장은 반드시 이 원리에 따라서 판결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이웃의 몸을 내 몸처럼 귀히 여기면서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보상법, 곧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의 근본정신은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전적으로 잘못 이해했습니다. 아울러 그들은 그 당시 사람들을 잘못 가르쳤습니다.


둘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38절 말씀입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예수님은 이 말씀의 끝 부분에서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말씀 드린 대로, 예수님은 긍정적인 차원이 아닌 부정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까지는 이렇게 들어 왔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이러한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은 무엇이었습니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 자체가 잘못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본 대로 이 말씀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보상법을 있는 그대로 압축을 해놓은 것입니다. 말씀 자체는 전연 잘못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39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볼 때, 우리는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밝히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39절 말씀을 보십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가르쳤겠습니까? 그들은 악한 자를 대적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명백하게 잘못된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들은 보상법의 적용을 잘못했습니다. 아울러 그들은 보상법의 정신도 완전히 무시해 버렸습니다.

우선 그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보상법의 적용을 잘못했습니다. 본시 보상법은 재판장의 판결의 원리로 주신 말씀입니다. 개인은 사사로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 권한이 없습니다. 반드시 정당한 재판을 통해서만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을 개인에게 적용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악한 자를 사사로이 대적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의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 당시의 열심당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 하더라도 유대인들은 얼마나 원통하게 생각했겠습니까? 그런데 로마는 유대인들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헤롯을 그들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헤롯은 에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방인인 헤롯이 자신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으니까 유대인들이 얼마나 분개했겠습니까?

급기야 유대인들 가운데는 로마인들에게 당연히 복수를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들에 의해서 조직된 것이 바로 열심당이었습니다. 그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영향을 받아서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고, 폭력은 폭력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 군인들에 대해서 폭력과 살인을 일삼았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당하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로마 군인들은 즉시 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증오심이 조장되었습니다. 사회는 점차로 질서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을 잘못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은 보상법의 정신을 망각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조금 전에 살펴본 대로 보상법의 근본정신은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 바로 보상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망각해 버리고, 사람들에게 "악한 자를 대적하라"고 가르침으로서, 개인이 복수하는 것을 정당화했습니다. 그들은 복수심을 조장시켰습니다. 성경 어디를 찾아보아도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원수를 갚으라고 하신 말씀도 없습니다. 오히려 신32:35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보수는 내 것이라."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될 일은 무엇입니까?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선대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될 책임입니다. 레19:18에 있는 말씀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또 잠25:21에 있는 말씀입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악한 자를 대적하라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원수까지라도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보상법의 정신을 완전히 망각해 버리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사랑 대신 미움을 심어주었습니다. 용서 대신에 복수를 심어주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 사회가 얼마나 악해졌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세대를 가리켜서 여러 번씩이나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여!"라고 탄식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이런 낮은 수준의 의를 가지고 어떻게 천국의 백성이 되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39-42절의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예수님은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신 분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보상법을 우리에게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권세로서 보상법의 참된 의미를 우리에게 일깨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우리에게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개인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 권한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개개인에게 적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재판장에게 판결의 원리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잘못 해석해서 개인들에게 악한 자를 대적하라고 잘못 가르쳤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악한 자를 대적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원수라도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곧 이어서 예수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보상법의 근본정신이 사랑에 있다는 사실을 네 가지 실례를 들어서 우리에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첫째, 39절 하반부입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예컨대 제 앞에 어떤 사람이 서 있습니다. 제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뺨을 때립니다. 이때 오른편 뺨을 때리는 것이 쉽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왼편 뺨을 때리는 것이 쉽겠습니까? 내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오른편 뺨을 때리려면 손등으로 때릴 수밖에 없습니다. 불편합니다. 세게 칠 수도 없습니다. 왼편 뺨이 훨씬 쉽게 세게 때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우리의 오른편 뺨을 때리면 맞붙어서 싸우지 말고, 상대방이 더 쉽게 때릴 수 있도록 왼편 뺨도 돌려대라는 것입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그만큼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라는 뜻입니다.


둘째, 40절입니다.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예수님 당시만 하더라도 옷이 매우 귀할 때였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겉옷은 밤중에 잠을 잘 때 덮고 자는 담요와 이불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의하면 겉옷을 전당 잡더라도 해지기 전에는 반드시 그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겉옷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누가 재판을 해서 값나가지 않는 속옷을 빼앗고자 하면, 그것 때문에 맞붙어 싸우려고 하지 말고 더 값나가는 겉옷까지 주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빼앗기는 삶을 살지 말고, 주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관대한 마음, 넓은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41절입니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그 당시에는 이러한 법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은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해서 피지배국의 사람들에게 강제부역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오리에 해당되는 거리만큼은 임의로 동행케 하고 그 이상을 넘으면 대가를 지불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에도 그 예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길을 힘들게 걸어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 쓰러지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군병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을 억지로 예수님 대신에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바로 그 법에 의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들랑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고 기꺼이 십리까지 가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역시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넷째, 42절입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내가 가진 물질이라고 해서 내가 주인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누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면 인색하게 굴지 말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베풀면서 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의도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가 내게 속옷을 달라고 하면 그에게 겉옷까지 주고 나는 발가벗고 살라는 뜻입니까? 또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해서 구걸하는 거지에게 월급 봉투 째 다 주고, 나와 내 가족은 한달 내내 굶고 살라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돈이 필요해서 친구에게 가서 돈을 꾸려고 할 때, 이 말씀을 인용하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악 이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다른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깨뜨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보상법의 정신을 망각하고서 사람들에게 악한 자를 대적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강퍅해졌겠습니까? 사람들은 누가 자기의 오른편 뺨을 치면 돌려댈 생각을 하지 않고 왼편 뺨을 치려고 했습니다. 누가 속옷을 달라고 하면 주기는커녕 그 사람의 겉옷을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누가 무엇을 달라고 하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것을 빼앗아서 자기의 배를 채우려고 했습니다. 그만큼 세상이 악해졌습니다. 그러니 그런 낮은 수준의 의를 가지고 어떻게 천국의 백성이 되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예수님 의를 옷 입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라도 대적하지 않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날마다 선으로 악을 이기면서 승리로운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6·25 동란때였습니다. 어떤 남자 집사님이 퇴각하던 인민군에게 붙잡혔습니다. 인민군은 그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앞장 세워 걷게 했습니다. 그는 땡볕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무거운 짐을 힘겹게 지고서 걸어갔습니다. 뒤에서는 인민군이 총부리를 겨누고 있어서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 속에 불현듯이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들랑 그 사람과 십리까지라도 가 주어라."
정말 자신의 처지가 이와 같았습니다. 그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지금까지 자기가 예수님의 말씀에 별반 순종해서 산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이제 자신의 마지막 순간이 될는지도 모르니까 그에게 문득 "한 번 마지막으로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 앞에 서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십리까지 가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도 편해지고 오히려 짐도 가볍게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한 오리쯤 갔을 때입니다. 인민군은 그를 불러 세웠습니다.
"동무! 수고했소. 이제 짐을 내려놓으시오."
그때 그는 진심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좀 더 갈 수 있습니다."
그러자 인민군은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무, 빨리 가시오! 사실은 내가 여기 와서 동무를 총으로 쏴 죽이려고 했는데 동무가 친절하게 하니까 그럴 수가 없구려. 그러니 어서 빨리 가시오!"
그렇게 해서 그는 살아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악을 악으로는 이기지 못합니다. 선으로만이 악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빼앗기면서 살지 마십시다. 주면서 삽시다. 억울하게 당하면서 살지 마십시다. 기쁘게 친절을 베풀면서 삽시다. 인색하게 살지 마십시다. 너그럽게 살아가십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선으로 악을 이길 수가 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허물이 많습니다. 아울러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너그럽게 대해 주십니다. 우리를 언제나 선대해 주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우리 이웃에게 늘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갑시다. 그리함으로서 날마다 선으로 악을 이기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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