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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미갈의 창 / 삼하 6: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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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미갈의 창
본문 : 삼하 6:16∼23
설교 : 배태현 목사 (뉴질랜드 참된교회)


저는 개인적으로 '창문'(window)이라는 단어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러나 창문의 사전적인 의미보다는 창문이 갖는 은유적 의미를 좋아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창문이 등장합니다. 바로 미갈이 서서 내려다보았던 창문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어떤 창가에 서서 창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미갈은 그 창문을 통해서 다윗왕과 예루살렘 성에서 일어났던 떠들썩한 축제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미갈이 서 있던 창문이 바로 미갈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보이지 않는 하나의 틀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좋아하는 창문이라는 단어의 은유적 의미입니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미갈과 같이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창문, 즉 자기만의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세계관'(world-view)이라고 해도 좋고, 혹은 그것을 '의식'(consciousness)이라고 해도 좋고, 그것을 '자아'(self)라고 하거나, 그것을 '주관'(subjectivity)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여하튼 우리는 하나의 보이지 않는 창, 곧 틀을 가지고 있고, 내가 사는 세상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내가 가진 틀에 맞추어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내가 가진 창 곧 그 틀에 맞추어 보아서 맞는 것은 선한 것이며, 맞지 않는 것은 악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또 맞은 것은 참된 것이고, 맞지 않는 것은 거짓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맞는 것은 옳은 것이며, 맞지 않는 것은 그른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어떤 사건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가진 창 곧 그 틀에 맞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맞지 않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해석합니다. 맞는 사람은 가치 있는 사람이고, 맞지 않는 사람은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해석합니다. 맞는 사람은 사랑할 수 있고, 맞지 않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고 해석합니다. 미갈이 다윗왕과 예루살렘 성의 축제를 내려다보았던 창문은 미갈 자신의 세상과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보이지 않는 틀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창을 통해 다윗왕을 바라보았고, 그의 행위가 왕의 체통을 지키지 못한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이었다고 판단했고, 끝내 그를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미갈의 창에는 어떤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에 관한 기록이 23절처럼 저주로 끝이 날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미갈의 창에는 도대체 어떤 문제들이 있었을까요?

미갈의 창이 가진 첫 번째 문제는 사실은 미갈 자신보다는 그녀의 아버지였던 사울왕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갈은 온 예루살렘이 떠들썩하게 축제를 벌였던 언약궤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창가에 서서 호들갑스럽게 소란을 피우고 있는 사람들을 비웃고 있었습니다. 왜일까요? 이러한 미갈의 태도는 아버지 사울왕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긴 것은 사울이 왕이 되기 전이었습니다. 블레셋인들이 언약궤를 빼앗았지만 두려운 나머지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보냅니다. 그 언약궤가 오랫동안 아비나답이라는 사람의 집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사울은 왕이 된 후에 가정 먼저 언약궤를 다시 제 자리로 옮겨와야 했지만 역대상 13:3에 따르면 사울왕이 통치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그 문제에 관해 언급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사울왕은 언약궤에 대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언약궤를 다시 옮겨오고 싶어했던 다윗왕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미갈은 아버지와 똑같이 언약궤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이거나, 그것이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거나, 그것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거룩한 백성,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하는 의미를 가지거나, 그녀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결국 사울왕은 자신만 하나님을 떠나서 저주받은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라, 불신앙이라는 유산을 그의 딸 미갈에게 고스란히 남겨주었고, 미갈은 아버지가 남겨준 불신앙의 창가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자신의 창으로 내다보이는 다윗왕과 예루살렘성의 축제가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보이는 유산만을 남겨주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유산은 그것이 수백억 달러의 재산이라고 해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유산입니다. 아버지의 저주받은 불신앙의 삶이 그 딸에게 그대로 상속되어서, 그 딸 역시 저주받은 불신앙의 삶을 똑같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도대체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수 있을 지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가 부모로서 영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없이 오직 보이는 물질만을 추구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의 자녀들 역시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미갈처럼 불신앙의 창에 서서, 혹은 왜곡된 신앙의 창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지 않도록, 부모로서 지금 내가 서 있는 창이 어떤 창인지, 내가 지금 바른 믿음과 바른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는 지를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미갈의 창이 가진 두 번째 문제는 미갈은 자신의 창을 통해서 오직 벗겨진 옷 사이로 드러난 다윗왕의 속살을 볼 수 있었을 뿐, 다윗왕의 영혼을 보지는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미갈의 판단은 옳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라면 그 위치에 어울리는 품행으로 자신의 왕으로서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다윗왕이 많은 백성들 앞에서 옷이 벗겨지도록 춤을 추었다는 것은 왕의 품위에 걸맞지 않는 경망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미갈의 창으로는 다윗왕의 영혼을 볼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다윗왕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 아닙니까? 다윗왕이 쓴 시편들을 읽어보십시오. 많은 시를 통해서 다윗왕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한 예로 시편 143:6에서 다윗은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되 그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듯 마음을 다하여 사랑한 것만이 아니라 그의 영혼으로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마치 마른땅이 단비를 기다리는 그러한 간절함과 갈급함으로 하나님을 사모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의 삶은 비록 크고 작은 실수가 있기는 했지만 평생에 걸쳐 어리석을 만큼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고, 신뢰하는 삶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가리켜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 13:22)고 하셨습니까? 미갈의 창은 그러한 다윗왕의 아름다운 영혼을 볼 수 있는 창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창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사람들의 영혼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창이 사람들의 영혼을 볼 수 없는 것이라면 마치 미갈이 왕이면서도 옷이 벗겨지도록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춘 다윗을 비난하고 비웃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사람들의 드러난 모습과 보여지는 행위만을 보고 그들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비웃고, 경멸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코 사람들을 용서하거나, 용납하거나, 세워줄 수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예수께서 서 계셨던 창 역시 사람들의 죄와 실수와 허물과 겉모습을 보는 창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바라보는 창이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낱 천한 어부들이, 멸시받던 창기와 세리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 어떻게 그 분의 제자가 되고, 그 분의 친구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적어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사람들의 드러난 속살을 보고 비웃기보다는 그들의 아름다운 영혼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갈의 창이 가진 세 번째 문제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미갈이 아버지와 같은 불신앙의 창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의 영혼을 보지 못하는 창에 서서 사람들의 겉모습만을 바라보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그녀가 자신이 갇혀 있는 창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거기에서 뛰쳐나오거나 그 창을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녀는 그저 창가에 서서 계속해서 다윗왕과 예루살렘 백성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축제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왕이 덩실덩실 춤을 출 때도 그녀는 창가에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나팔을 불면서 기뻐할 때도 그녀는 창가에 서 있기만 했습니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나서 온 백성들이 떡과 고기를 나누어 먹으며 즐거워할 때도 그녀는 그저 창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미갈은 마땅히 창가에서 뛰쳐나와 다윗왕과 함께 춤을 추어야 했으며, 환호성을 지르며 나팔을 부는 백성들과 함께 기뻐해야 했고, 온 백성들과 함께 떡과 고기를 즐겁게 나누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미갈은 자신이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창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자연히 그녀는 그 창가에서 뛰쳐나오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창가에 서서 다윗왕과 백성들을 비웃고 있었을 뿐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11:16∼17에서 주님께서는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미갈의 창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향한 탄식이 아니었을까요? 저는 교회 안에서 이런 분들을 많이 봅니다. 오랜 세월을 신앙 생활을 해왔지만 자신의 창 곧 그 틀에 갇혀서 그것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이고, 얼마나 위험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또 자신의 창에 어떤 문제가 있는 지 전혀 돌아볼지 않은 채, 계속해서 그 바뀌지 않는 창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판단하고, 비난하고, 멸시하고, 비웃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기도는 소리내어 하면 안 된다고, 아니 기도는 부르짖어 해야 한다고, 찬양은 정숙하고 경건하게 불러야 한다고, 아니 찬양은 내 영혼과 마음만이 아니라 내 온 몸으로도 뜨겁게 찬양해야 한다고, 성령은 비둘기처럼 고요히 사람들을 사로잡는 존재라고, 아니 성령은 불처럼 뜨겁게 임하셔서 각양 은사와 증거들을 보여주시는 존재라고 각자 자신의 창으로 내려다보면서 나와 같지 않은 사람들을 보이지 않게 판단하고 비웃는 사람들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가엾은 사람들은 죄가 많은 사람들이나, 실수가 많은 사람들이나, 허물이 많은 사람들이나, 약점이 많은 사람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이 가장 가엾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서 있는 창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기 전에 그것이 어떤 것인지, 어떤 문제가 있는 지를 먼저 바라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열려야 할 것입니다.

다윗왕이 미갈에게 대꾸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그렇소. 내가 주 앞에서 그렇게 춤을 추었소. 주께서는, 그대의 아버지와 그의 온 집안이 있는데도, 그들을 마다하시고, 나를 뽑으셔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통치자로 세워 주셨소. 그러니 나는 주를 찬양할 수밖에 없소. 나는 언제나 주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 내가 스스로를 보아도 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소. 그래도 그대가 말한 그 여자들은 나를 더욱 더 존경할 것이오" 다윗왕은 미갈과는 전혀 다른 창을 가지고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세우셨다는 확신이 바로 다윗의 창이었습니다. 내 스스로 나 자신을 보아도 바보 같고 천박해 보인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그것보다 더 낮아지더라도 기쁜 일이라는 것이 다윗이 서 있던 창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보는 창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그런 자신을 오히려 존경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것이 다윗의 창이었습니다. 이 다윗왕의 말 앞에서 미갈의 창은 철저하게 깨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미갈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죽는 날까지 저주받은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몸에 문둥병이 생기거나, 불구가 되거나, 불의의 사고로 일찍 죽는 것이 저주가 아니었습니다. 자녀를 생산치 못하는 것이 저주였습니다. 생명을 잉태하지 못하는 저주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변화되지 못한 자신의 창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며 사는 한 우리는 결코 영적인 생명을 잉태하고, 그 생명이 자라게 하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불임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제 우리가 서서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며 살아왔던 옛 창을 깨뜨리고, 주님이 주시는 새 창을 가진다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은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새로운 창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하면서 여전히 낡은 창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면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새로운 창이란 곧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을 보는 믿음의 창이며, 사람들의 아름다운 영혼을 보는 창이며, 왜곡되기 쉬운 나만의 창을 주님 안에서 단호하게 깨뜨리고 늘 변화되기 간절하게 원하는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헌신은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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