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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자를 실족케 하지 맙시다2 / 마 18: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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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진 목사 (부산영락교회)
소자를 실족케 하지 맙시다2
마태복음 18:5-10


지난 주일에는 소자가 누구인가, 또 소자를 왜 실족시켜서는 안되는가하는 첫 번째 이유를 말씀드렸습니다. 소자는 연령적으로 어린아이를 소자라고 합니다. 또 아이들이 부모를 절대 신뢰하듯이 하나님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 하나님을 부모처럼 절대 신뢰하는 사람이 연령과 관계없이 소자입니다. 사회적으로 힘이 없는 약자가 소자입니다. 신앙적으로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과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지라도 신앙적으로 자라지 않은 사람이 소자입니다. 이런 사람을 실족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런 소자와 예수님 자신이 하나>라고 했습니다. 이런 소자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이런 소자를 영접하지 않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영접하지 아니하면 실족하기 때문에 실족케 하는 죄가 그렇게 크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1. 소자를 실족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

두 번째 이유는 6절에 보면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소자>라고 했습니다. <나를 믿는 소자>가 누구입니까? <나를 믿는 소자>는 예수님을 믿는 소자인데 예수님을 믿는 소자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했는데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교회에서 아무리 보잘것없는 소자라고 할지라도 연령적으로, 사회적으로, 신앙적으로 아무리 작은 소자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는 자는 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아십니까? 아무리 작은 소자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자녀로 삼기 위하여 지불한 댓가를 생각하면 엄청난 댓가입니다. 한 자녀가 태어나기까지는 어머니가 열달동안 잉태하는 수고를 합니다. 열달동안 필요한 온갖 영양분을 어머니의 몸에서 빼서 다 공급해 줍니다. 아기를 잉태하고 있는 기간에는 약을 마음대로 먹습니까? 먹고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습니까? 혹시라도 아기에게 해가 될까하여 감기에 걸려도 감기약을 먹지 않고 견뎌냅니다.
어떤 경우는 임신중독 때문에 어머니의 생명이 위협받기도 합니다. 요즘은 어려우면 수술을 할 수 있어서 아기를 낳다가 죽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만 옛날에는 아기가 거꾸로 나오면 아기도 죽고, 산모도 죽습니다. 그래서 아기를 낳으러가는 산모는 다시 저 신발을 신을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자기의 신발을 본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명을 걸고 자식을 낳습니다.
아기를 낳다가 몸을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땅에서 70-80년 사는 생명을 위해서 어머니가 이런 댓가를 지불하고 우리는 다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내어놓는 엄청난 댓가를 지불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생명의 값으로 지불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한 사람 한사람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내어주고 살만큼 가치있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를 값어치로 치면 얼마짜리가 되겠습니까?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 값을 따지면 얼마짜리가 될 것 같습니까? 시장에서 100원을 주고 물건을 사면 그 물건은 100원짜리입니다. 100만원을 주고 물건을 샀다고 하면 그 물건은 100만원 짜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주고 나를 샀으니까 나는 얼마짜리입니까? 예수님짜리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천지만물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장하고 계시고 온 세상만물을 붙들고 계신 분이십니다. 장차 인류를 심판하실 대심판주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생명을 지불하고 우리를 샀으니까 우리는 예수님짜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나님이 우리 대신 죽어주실만큼 가치있게 여기시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비록 모든 면에서 소자일지라도 나는 하나님께서 대신 죽어주실만큼 가치있는 존재라고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보통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냥 먹고 자고, 일하고, 자식낳고 그럭저럭 살다가 죽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을 상속할 사람들이요, 예수님의 신부들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짜리의 사람으로 삼아주셨을까 생각해보면, 신랑신부가 결혼할 때는 거의 비슷한 사람들끼리 결혼을 합니다. 너무 차이가 많이 나면 살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100점짜리 신랑하고, 1점짜리 신부하고 살면 되겠습니까? 거의 비슷하게 만나야 됩니다. 예수님은 위대하신 분이신데 우리가 예수님의 신부라고 하면서 형편없는 신부가 되면 어떡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합당하게 해 주시려고 우리를 예수님짜리로 만들어서 오늘 이 장소에 우리를 앉게 해 주시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대신 죽어주실만큼 가치있는 존재들입니다. 이렇게 귀한 것이 우리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볼 때 아무리 보잘것없는 소자라고 할지라도 이런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입니다. 나 자신만 귀한 존재가 아니라 내 옆에 앉아있는 형제자매들도 역시 그렇게 귀한 존재들입니다. 이렇게 귀한 소자를 실족케해서 지옥가도록 만든다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 죄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무효화(無效化)시키는 엄청난 죄,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피값을 지불하고 구원한 하나님의 자녀를 실족시키는 것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고 바다에 빠져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비록 소자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귀할 뿐만 아니라 내 옆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귀한 존재임을 인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을 실족케하는 죄가 얼마나 큰지를 다시 한번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를 실족케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의 신앙을 잘 북돋아주고 신앙생활 잘 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소자를 실족케 말아야 할 세 번째 이유

소자를 실족시키지 말아야할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태어나기까지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뒤에도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승리하도록 천사를 파송시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소자를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볼 때는 연령적으로 소자이고, 사회적으로 소자이고, 신앙적으로 소자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를 개별적으로 관심을 가지시고 돌아보십니다. <저희 천사들>을 보내서 돌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저희 천사>라고 했는데 다른 번역에는 <그들의 천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 한사람 한사람에게 수호천사(守護天使)들을 보내서 지금도 지키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베드로가 옥에 갇혀서 다음날 처형을 당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교회는 이 사실을 알고 모든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마가 요한의 집에 모여서 베드로를 위해 기도합니다. 밤을 새워가면서 베드로를 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셔서 기적적으로 베드로를 옥에서 끌어내십니다.

옥에서 나온 베드로는 마가 요한의 집으로 가서 대문을 두드립니다. 그러자 로데라는 여자아이가 나와 누구냐고 묻습니다. 베드로라고 하니까 로데가 너무너무 좋아서 문열려고 나갔다가 문도 열지 않은채 집안으로 뛰어들어가서 베드로가 돌아왔다고 알렸습니다.
당시 베드로가 갇혀있던 감옥은 베드로의 양 다리에 쇠고랑을 채우고 그 양 옆에 두 군인이 똑같이 쇠고랑을 찼습니다. 그러니까 도망을 어떻게 갈 수 있습니까? 밖에는 군사들이 몇겹으로 감옥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런 옥에서 베드로가 나왔다고 하니까, 베드로가 나오게 해 달라고 기도해 놓고는 정말로 나왔다고 하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로데를 보고 미쳤다고 했습니다. 로데가 아니라고, 정말로 베드로가 왔다고 강하게 말하니까 그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그러면 베드로의 천사가 왔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주셔서 한사람 한사람을 지키고 보호해 주시는 것을 믿었고, 오늘 본문에도 <저희 천사>들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베드로를 옥에서 이끌어 내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고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건져내시고 사셨는데, 그런 우리를 너희들 마음대로 살라고 그냥 던져 놓으실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를 세상 끝날까지 돌보시고 천사를 보내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시고, 보호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1장 14절에 보면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얻을 후사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혼자 버려두지 않습니다. 우리를 지키고 붙들어 주시고 섬기도록 천사들을 파송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나 혼자 여기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곁에 천사가 나를 지키고 있습니다. 교회올 때도 같이 왔고, 예배마치고 갈 때도 같이 갑니다. 언제나 천사가 곁에서 보호하고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는다>고 했습니다. 왜 천사가 하나님을 항상 뵈옵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너는 내려가서 아무개를 섬겨라, 아무개를 보호하라, 아무개를 지켜라, 아무개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주어라, 아무개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건져주어라>그렇게 임무를 주어서 보냅니다.
천사는 하나님께 그 임무를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뵈옵습니다. 또 그 임무를 받고 이 땅에 내려와서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다가 하나님께로가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 잘 하고 왔습니다.’하고 보고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항상 뵈옵는 것입니다. 항상 뵈옵는다고 했습니다. 항상 임무를 받고 항상 보고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혼자 살지 않습니다. 성령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천사가 배정되어 있습니다. 나를 섬기기 위해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나를 돕기 위해서 내가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나를 건지기 위해서 돕는 천사를 보내주셨습니다.
<천성을 향해 가는 성들아 앞길에 장애를 두려말아라 성령이 너를 인도하시리니 왜 지체를 하고 있느냐
앞으로 앞으로 천성을 향해 나가세 천성문만 바라고 나가세 모든 천사 너희를 영접하려 문 앞에 기다려 서 있네>
모든 천사가 영접하기 위해, 도와주기 위해, 지키기 위해, 섬기기 위해 문 앞에 기다리고 서 있습니다.
소자라도 하나님은 이렇게 사랑하고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소자를 업신여겨서 실족케하면 그 죄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소자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비록 소자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랑하심을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소자를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믿고 소자를 실족케 하는 것이 아니라 소자를 세워주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실족케 한다는 뜻과 실족케 되는 경우

그러면 ‘소자를 실족케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실족케 한다’는 말은 ‘함정에 빠지거나 감정을 상하게 하거나 심한 괴로움을 겪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던 길에서 벗어나게하고 죄를 짓게 하는 것’을 실족케 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실족케 한다는 말을 대부분의 다른 번역에서는 ‘죄를 짓게 한다’ 또는 ‘죄를 짓게하는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쉬운 말 성경에서는 ‘실족케 하는 자’를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방해물과 같은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방해물과 같은 사람’. 얼마나 실감나는 번역입니까? 또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 때문에 신앙의 방해를 받아서 신앙에서 벗어나는 죄를 짓거나, 신앙이 약화(弱化)되는 것이 실족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값을 주고 산 하나님의 자녀, 너무너무 귀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서 천사까지 파송해서 지키시고, 돌보고, 관심가지시는 그 소자를 누군가가 신앙의 방해물이 되어서 신앙을 버리게 하거나, 약화되게하는 죄를 짓는 것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고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남을 실족케하는 그 죄가 얼마나 큰 죄인가를 다시 한번 깨닫고 내 평생 소자를 실족케하는 일을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떨 때 소자가 실족합니까? 어떨 때 신앙의 방해를 받아서 실족하게 됩니까? 10절에 있는 것처럼 <업신여길 때> 실족하게 됩니다. 업신여긴다는 말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멸시한다, 관심가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초신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은 다 인격체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소외감을 느끼고 실족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 나오는 귀한 초신자들을 마치 태어난 어린아이를 대하듯이 감싸안고, 사랑하고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만 실족하지 않습니다. 5절에 있는 것처럼 영접해야만 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리스도의 가슴으로 품어야 됩니다.

세상에서는 소위 텃세라는 것이 있습니다. 끼리끼리 모이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교육부장관도 진주교대파니, 서울교대파니 하는 것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런 것은 안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세상에만 그런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소위 텃세라는 것이 있어서 초신자들을 배척하고, 끼리끼리 모이고, 다른사람들을 못 들어오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몸에 있는 모든 세포는 끼리끼리 놀지 않습니다.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기체(有機體)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끼리끼리 노는 세포가 있습니다. 그것이 뭔가하면 바로 암세포(癌細胞)입니다. 암세포는 다른세포와 연결하지 않습니다. 끼리끼리만 놉니다. 그래서 암세포가 커지면 사람의 생명을 삼킵니다.

교회에도 끼리끼리 모이는 단체가 많아지고, 집단이 커지게 되면 그 교회는 생명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안에는 절대로 끼리끼리 모인다든지, 교회에서 정해주는 조직 외에 다른 것으로 모이는 것은 암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다 수용할 수 있는 건강한 교회가 되도록 노력해야지 끼리끼리 모인다든지, 계를 한다든지 하는 일은 절대로 안되는 일입니다. 그런 유사한 집단 있으면 암적인 존재인줄 알고 다 해체하기를 바랍니다.

에스겔 34장에 보면 거짓목자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목사로서 그 성경을 읽으면 가슴이 철렁합니다. 목자에 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양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거기보면 힘있는 양들이 소자와 같은 양에게 꼴을 자기가 먹고 남기면 되는데 남긴 것을 밟아버립니다. 그래서 어린 양들이 흙묻은 꼴을 먹고, 물도 바깥에서 먹으면 되는데 발을 넣어서 휘휘 저어서 자기 뒤에 오는 양들이 구정물을 먹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먼저 된 양들이 소자와 같은 어린양들을 옆구리로, 어깨로 밀쳐버리고, 병든 양을 뿔로 받아서 무리 밖으로 흩어져 버리게 합니다. 그래서 이런 양 떼를 심판하겠다고 했습니다. 먼저 신자된 우리 성도들이 나중 된 신자들을 어린 양과 같이 잘 돌보고 연한 꼴을 먹이고 그들을 관리해야 하는데, 건강하지 못한 교회는 먼저 된 양들이 나중 된 양들을 괴롭힐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수용해야 됩니다. 끼리끼리 모이면 안됩니다. 오히려 모르는 사람과 같이 앉아서 교제하고, 식당에서도 모르는 사람을 찾아가 서로 기도의 제목을 나누고 격려하는 교회가 되어야 건강한 교회입니다. 소자와 같은 새가족을 영접하고, 수용하고, 품어야만 건강한 교회가 됩니다. 안그러면 외톨이가 되고 결국 실족해서 교회를 떠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약한 성도들을 잘 돌보는, 사랑이 넘치는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나가는데 앞장서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을 가지고 소자를 실족케 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 나와서 처음 복음을 접하고 구원받게 되면 정말 너무너무 기뻐서 마치 남녀가 첫사랑에 빠진 것처럼 예수님과 사랑에 빠집니다. 교회에 자주 옵니다. 드리고 싶습니다. 크게 찬송하고 싶습니다. 크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얼마나 보기가 좋습니까? 그들을 격려하고, 잘 한다고, 열심히 하라고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처음 나오면 다 그래, 나도 그래 봤어.’라고 하면서 풀을 죽입니다.
‘아무도 안하는데 너 혼자서 해? 너보다 더 나은 사람도 가만있는데 너 혼자서 그렇게 해?’하면서 봉사하는 사람의 기를 꺽습니다. 헌금을 좀 낫게 하면 ‘요즘 돈벌이가 잘 돼?’하면서 빈정거립니다. 별별 말로 새롭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줄 때가 있습니다. 비난하고, 흉을 보며 상처를 입힙니다.
이제 말 조심해서 상처주지 아니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들이 모인 교회에 고치고, 지적해야 할 부분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라고 하지 않습니까?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는 ‘저항한다’ ‘날마다 개혁한다’는 말 아닙니까? 교회에는 날마다 개혁해야 할 요소들이 있습니다. 날마다 개혁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부분을 가지고 가정에서 이야기 해 보세요. 어린 자녀들이 있는데 아무개 장로, 아무개 집사, 아무개 권사의 욕을 부부끼리 한번 해 보세요. 어린아이들이 그 이야기를 들을 때 교회는 그런 곳이구나, 교회의 성도들은 그런 사람들이구나하고 영원히 교회를 떠나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초신자들에게 좋은 말 해줄 것도 많은데 왜 그렇게 안 좋은 말을 해서 신앙을 떨어뜨리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어떡하든지 초신자들에게는 연한 꼴, 좋은 꼴을 먹이고 어린아이처럼 관리해야 되는데 말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게 된 것이 주로 어떻게 해서 믿게 되었습니까? 하나님보고 예수님 믿게 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처음에는 사람보고 예수믿습니다. 그 사람보고 교회 오고, 그 사람 권유 때문에, 그 사람 때문에 신앙의 본을 받고 신앙의 깊은 단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먼저 믿은 우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내가 신앙생활 잘 하게되면 아, 나도 저런 모습을 본받아서 신앙생활해야 되겠다고 신앙으로 들어가고, 혹시라도 잘못된 사람 만나서 그 사람 때문에 신앙 팔아먹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특별히 먼저 믿은 우리 성도들은 신앙의 좋은 본이 되어져야 합니다. 내가 신앙의 본이 되지 못하면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지 모릅니다. 신실치 못한 삶이나, 신실치 못한 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상처를 받아서 그런 예수 나는 안믿겠다고 나가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돈 문제가 깨끗하지 못해서 남에게 경제적인 피해를 주거나, 남녀관계가 분명치 못해서 어려움을 당하거나, 성격이 과격해서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말하거나, 가정을 등한시해서 그런 예수는 안믿겠다고 실망시키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런 생활 때문에 소자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말, 우리의 행동, 우리의 신앙, 본이 되게 해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됩니다. 내가 아무렇게나 살면 나 혼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소자를 실족케 하는 엄청난 죄를 짓고 있음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소자에게 신앙의 방해물과 같은 사람이 되면 되겠습니까? 특별히 교회의 항존직원은 하나님이 세우신 모델입니다. 본입니다. 일본말로 가다(かた)입니다. 모델이 잘못되어 있으면 그 다음의 모양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먼저 믿은 자, 특별히 목사와 장로와 권사와 집사가 신앙의 본이 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고, 다른 사람의 신앙에 방해가 됩니다.

주일을 성수하는 것은 성도의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낮예배 뿐만 아니라 저녁 예배까지 온 종일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삼일예배까지 나와야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항존직이 되어가지고 그것도 못한다고 하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장로님도, 권사님도, 집사님도 안 나오는데 내가 뭣 때문에 저녁예배에 나가고, 수요일에 나가, 그렇게 하면 바로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신앙에 방해물이 되어지고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일성수 안하고, 내가 주일 저녁예배, 수요예배에 안 나옴으로 내 신앙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의 신앙까지 떨어뜨리게 되고, 남의 신앙까지 방해하게되고, 잘못하면 남을 실족시키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내가 헌신하지 않고, 내가 섬기지 않으면 내게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신앙을 방해하고, 남을 실족케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남을 방해하고, 실족케하는 자에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아니하고 들어가려고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서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교역자의 일 중에 사람 때문에 실족케된 자, 마음에 상처난 시험받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세우는 것이 큰 일 중에 하나입니다.

이제 사람 때문에 실족하지 마십시다. 본되지 않는 사람을 보고 왜 저럴까 하지 말고 나는 저런 사람이 안되어야겠구나하고 돌려서 생각해 보세요. 예를 들어 말하면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에 레갑의 자손이 있었습니다. 레갑이 술을 많이 먹어서 아마도 패가망신을 한 것 같습니다. 레갑이 유언을 하기를 우리 자손들은 앞으로 술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레갑의 자손들은 아버지처럼 저렇게 술먹으면 안되겠다고 하여 300년 동안, 예레미야가 살고있던 그 당시에 이르기까지 술을 먹지 않았습니다.
술먹는 아버지의 자녀는 술먹는 인자(因子)가 있기 때문에 나도 술 먹어야지하고 그 아버지처럼 되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아버지가 술을 먹기 때문에 반대급부(反對給付)로 술을 더 안먹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데, 신앙적으로 본이 되어야 할 사람이 본되지 못한 모습을 보면 그것 때문에 상처도 받지말고, 나는 저런 사람이 안 되어야겠다고 오히려 다시 결심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조심없는 말 한마디, 무책임한 행동이, 나의 미지근한 신앙이, 남의 신앙을 죽이고, 남의 신앙을 방해하고, 실족케 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 실족케하는 성도가 아니라, 방해하는 성도가 아니라, 남의 신앙을 죽이는 성도가 아니라 남의 신앙을 살리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을 실족케하는 죄가 얼마나 큰지, 그런 자는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연자(硏子)’라는 말은 ‘나귀’라는 어원에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연자맷돌은 집안에서 여자들이 돌리는 맷돌이 아니라 나귀가 돌리는 큰 맷돌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에는 그런 풍습이 없었지만 로마와 헬라에서는 살인한 사람이나,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사람에게 실제로 목에 맷돌을 달아서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러면 영원히 올라오지 못하고 물고기의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소자를 실족케하면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실족케하는 죄가 얼마나 큰가를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을 실족케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남을 실족케하는 자는 그렇게 하라고 했는데 자기를 실족케 하는 손이 있다면, 자기를 실족케하는 발이나 눈이 있다면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8절과 9절에 보면 손은 찍어 버리고, 발도 잘라 버리고, 눈도 빼 버리라고 했습니다. 성한 몸 가지고 지옥가는 것보다 차라리 불구자로 천국가는 것이 더 낫다고 했습니다. 죄 짓는대로 잘라 버리고, 죄 짓는대로 눈 빼 버리면 여기에 손 가지고 나올 사람 누가 있습니까? 발 가지고 나올 사람 누가 있습니까? 눈뜨고 나올 사람 누가 있습니까?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런 자세로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실족케하는 죄가 얼마나 큰지, 자기를 실족케하면 실족케하는 지체를 제거해버리고, 남을 실족케하면 내가 연자맷돌을 매고 자살하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자르고, 실제로 자살하라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실족케하는 죄가 얼마나 큰 가를 예수님은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죽을 각오를 가지고 실족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다른 사람을 지옥가게 하지말고, 너 자신도 지옥가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실족한 사람은 없습니까? 오늘 이 시간, 나 자신을 돌아 보십시다. 특별히 말을 많이하는 목사는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을 실족시킬 수도 있습니다. 혹시 저의 불찰로 실족한 성도가 있다고 하면 정말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소자 중의 한 사람도 실족시키지 않으리라고 다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자녀삼으신 소자, 천사까지 보내서 지키시는 소자, 예수님과 같은 소자를 실족케하여 신앙에서 떠나게 하고 상처주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고 죽어도 남을 실족케 아니하리라, 내 손과 발을 잘라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실족케 하는 삶을 살지 아니하리라고 다시 한번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본이 되어져서 다른 사람을 더 잘 믿게하고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삶을 살아가리라, 우리 부산영락교회의 소자들을 더욱 더 잘 돌보아서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나가리라 다짐할 수 있는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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