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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 눅 22:3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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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눅22:39-46)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들과 함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기뿐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여기 앉아 있는 동안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1996년 10월에 한번 왔는데 그 후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를 기억합니다. 그때는 저쪽 상가 빌딩에 있었는데 이 새 교회당이 건축 중에 있었습니다. 이제 성도들의 수도 많이 증가되었습니다. 그전에 보던 것과 다른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때는 회색의 콘크리트와 기둥이 아주 보기가 좋지 않았는데 지금은 매우 좋습니다. 여러분이 이 새 교회당에 와서 기쁨이 넘칠 줄 압니다. 빛이 가득하고 환한 색으로 페인팅을 해 아주 새로운 생명이 약동하는 것을 느낍니다.

제가 인간의 삶과 비교해 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삶은 욕심, 두려움, 의심에 지배를 받으며 재미없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복음을 듣고 마음을 열어 성령님이 들어오시면 삶이 바꾸어집니다. 빛이 가득하고 기쁨이 가득하고 확신에 가득한 삶이 됩니다. 저와 제 아내는 아프리카의 선교사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교 종족들이 사는 지역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10명중에 9명은 복음에 응답하지 않았던 이교도들이 사는 곳에 있었습니다. 악령이 지배하여 점을 치고 주술을 하고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 속에 있었습니다. 언제 악령이 들어올지 모르는 그런 두려움 가운데 살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에 왔던 선교사에 의해서 복음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의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변화된 사람들은 얼굴부터 달랐습니다. 웃는 얼굴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같은 변화가 한국에도 있었습니다. 초기에 한국에 왔던 서양 선교사들의 기록에 의하면 의심이 많고 배타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이 복음을 받은 후 변화되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모든 지구상의 사람들이 복음을 받을 때 나타나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주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일어나는 건축학적인 아름다운 변화뿐 아니라 성가대의 찬양, 여러분들이 예배드리는 모습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된 삶으로 찬양할 수 있는 그일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 모릅니다. 아직도 여러분들을 초대할 수 있는 장소가 남아 있습니다. 왜 아직까지 바깥에 머물러 있습니까? 저 위에 자리가 있는데 바깥에 아직도 머물러 있습니까? 아직 2층에 빈자리가 있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천국에 자리가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제가 다시 돌아와서 전에 알던 사람들을 만나는 기쁨을 여러분들에게 전한 것 뿐 입니다.


제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바로 이런 사순절기간 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 본문을 주님이 수난 당한 부분을 택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고민했습니다.  물론 어릴 때부터 이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를 생생하게 느낀 것을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였습니다. 9년 동안 아프리카의 선교사로 있다가 예루살렘을 가게 되었습니다. 선교사역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주님이 걸으셨던 그 장소에 가 보고 싶었습니다. 여러 곳을 방문했습니다. 제 마음을 가장 깊이 흔들어 놓은 것은 겟세마네 동산 위에 지어놓은 교회당이었습니다. 감람산 언덕 위에 지어진 교회당이었는데 후랜시스칸 수도사들이 잘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된 나무가 지금도 있는데 예수님 당시부터 심겨진 나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당에 들어갔는데 아주 어두웠습니다. 앞에 제단이 있었고 아주 거칠게 보이는 바위가 있었습니다. 그 바위는 담으로  둘러 있었습니다. 나는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 바위 위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고민하시고 그리고 슬퍼하셨던 것을 생각했을 때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바로 주님이 잡히시기 전 십자가에 잡히시기 바로 전에 주님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던 바위를 보았습니다. 누가가 기록한대로 고민이 너무 극심해서 머리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리는데 피가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기도를 했습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실 수는 없습니까?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이 주님이 하신 기도가운데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리켰던 깊은 핵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기도문의 세 번째 기도문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를 실천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 기도를 할 때마다 주님이 친히 보여 주셨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 번째 목록인 주의 뜻이 이루어 지이다 이 말씀을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와 연결해서 이해할 때 3가지 내용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 우리의 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했던 것 놀라운 장면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여 가능 하시다면" 우리의 앞날에 높여있는 모든 일을 아시는 분은 아버지 한 분이십
니다. 우리는 이런 가능성 저런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능성 가운데 꼭 한 선택만이 최상입니다. 즉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그 길,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길만이 가장 좋은 길 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내 뜻을 맞추는 것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리저리 넘어질 필요도 없고 방황할 필요도 없고 그 한 길로 계속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 평생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당황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해놓은 목표를 알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동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해 놓은 목표가 옳은지는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 다른 방향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떨때는 주님이 방해를 놓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바로 선택했는지 깨닫게 하시기 이해서 주님께서 방해물을 놓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버려두셔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가게 버려 둘 수도 있습니다. 잠깐동안 행복하게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만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구나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벽에 부딪칠 수 있습니다.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 주여 주의 뜻을 알게 하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좋은 기회가 내 앞에 놓일 때 유혹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까? 기도해 보아야 합니다.

제가 9년 동안 아프리카에 살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목사를 양육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주 흥분된 편지를 독일로부터 받았습니다. 튜빙겐 대학의 교수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이건 흥분되는 뉴스였습니다. 아주 전통있는 유명한 대학교의 교수가 된다는 것을 아주 귀한 일입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
까? 저는 제 선교사역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아직은 해야할 일이 많은 아내가 떠나면 내 동역자들은 어떻게 할까? 그래서 엎드려 고민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응답을 받았습니다. "피터야 아직은 때가 아니다, 아직까지 네가 여기에서 필요하다" 그 순간 저는 편지를 썼습니다. 제가 그 초청에 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제가 가졌던 느낌은 실망의 느낌이 아니라 주님을 따른다는 확신의 느낌이었습니다. 1년 후에 또 편지가 왔습니다. 그때 이루어지지 않았던 여러 가지 일들을 했던 때였습니다. 그때도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받은 응답을 가라는 응답이었고 그래서 저는 행복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깨닫는 것 중요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의지하게 도와주는 것 중요합니다.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것 공동체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골 1:9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로서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둘째 : 우리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네" 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세 번씩 간구를 하셨는지 생각해 봅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옮겨 주시옵소서. 사실 예수님은 그 답을 미리 알고는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리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의 역할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붙잡혀 처형을 당하는 그 일이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아닌 것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세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내가 붙잡혀 장로들과 제사장 앞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이미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예" 란것이었습니다. 유다에 의해 배신을 당했고 다른 제자들이 버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조롱을 받았습니다.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무자비한 생애가 놓여지질 않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에겐 순교의 고난이 주어지기는 합니다.  저는 최근에 한국의 순교자들에 대한 글을 읽고 있습니다. 손양원목사님에 대해 읽고 있습니다. 손양원목사님이 나환자들과 산다는 것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에게 고문을 당하고 5년동안 감옥에서 무자비한 고문을 당한것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고문하는 사람들에게도 선한 행동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같이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했습니다. 그가 죽은 다음에는 그의  헌신적인 삶이 수많은 사람에게 감화와 감동을 주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 들이는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과 내 생각과 어긋날 때 힘이 듭니다. 왜 사람들간에 분쟁이 있습니까? 조그만 공동체안에서 가정안에서 왜 의견이 갈라지고 싸움이 있습니까? 깨지지 않는 자기 생각대로 갈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고집스러운 자녀에게는 무엇이라도 시킬 수 없습니다. 부시, 사담 후세인, 김정일도 문제입니다. 이 깨지지 않는 자기 고집이 문제입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공산국가들이 무너진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무너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부르짖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믿음을 자유롭게 고백할 수 없는 그들에게 자유롭게 신앙을 고백하게 해달라
고 하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할 역할을 성령께서 그들을 변화시키도록 기도하는 것 뿐입니다.


셋째 :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 제일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이 무자비하게 보여질 수도 있고 왜 다른 사람들이 다 즐기고 있는데 나한테는 세상의 행복을 거두십니까 얘기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해라 하지마라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속에 그 뜻은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드리기 시작할 때 그때 우리에게는 기쁨과 축복을 발견하고 제일 좋은 것을 얻게 됩니다. 우리 앞에  좋은 길이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충만해 집니다. 그렇게 되면 나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행복을 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나타난 기쁨은 또 나에게 되돌아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많은 희생이 따를 수 있지만 마지막에는 더욱 충만한 것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고 교제하는 삶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충만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삶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달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한 도구들로 여러분들을 사용하게 됩니다 이 세 가지 통찰력 이 세 가지 교훈은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얻으셨다고 생각합니다. 누가가 기록한대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예수님을 격려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그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죽음은 무의미 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영광스러운 미래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그날 밤 주님은 환상가운데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이 구원 얻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새로운 인류 새로운 교회가 탄생되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매일 매일 주님의 피로 화해와 구원을 이루는 환상을 보셨을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의 기도로 마칩니다. 이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와 치유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비추게 하소서,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와 이해를 받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이해하게 하소서,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을 하게 하소서, 주는데서 사실은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용서할 때 용서를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향해 죽을 때 영혼을 향해 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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