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친구가 되라 / 고전 5:9~10

  • 잡초 잡초
  • 251
  • 0

첨부 1


  본문 : 고린도전서 5:9~10 
  제목 : 친구가 되라
  설교 ; 정근두 목사 (울산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서 이 자리에 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생명 사랑 나눔 축제가 한 주간씩 다가오고 있습니다. 3월은 태신자 접촉의 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남은 전도의 첫 걸음입니다”라고 써서 그 동안 만남을 시도해 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시간을 내어서 만나는 분들의 입장을 먼저 잠간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문제가 생기면 어디로 갑니까? 도움이나 충고를 받으려면 누구를 찾습니까? 무슨 문제냐에 따라서 물론 다를 것입니다. 예컨대 새 차를 사려고 하면 누구를 만나겠습니까? 아마 여러분과 차종이 같은 차를 타고 다니는 분에게 물어 불 수 있을 것입니다.

보험에 가입하려면 누구를 찾으면 좋을까요? 교회도 보험은 영업을 하는 분들이 많으니까 아마 여러분 아는 사람 같은 값이면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겠습니까? 그보다 더 중요한 삶의 문제를 가지고는 누구를 만나면 좋을까요? 우리 중 아무도 그런 문제를 생판 모르는 사람하고 의논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적 문제를 가지고 낯선 사람과 말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신앙 전파 방법에 대해서는 다시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안하무인격으로 다가서면 큰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은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면 너무나 빤히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갑자기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다가와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택일을 강요하면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들까요? 주일날 오후에 가족과 함께 편안한 차림으로 쉬고 있는데 누가 ‘딩동’해가지고 전도지를 들고 왔으면 여러분은 쌍수를 들어서 환영할까요? 여러분이나 제가 신앙인이라고 해도 여러분이 편안히 쉬는 시간을 누군가가 침범한다는 느낌을 갖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온갖 잡동사니 우편물들을 얼마나 눈여겨봅니까? 교회에서 발행한 전도지나 소책자라고 해서 특별히 관심을 가질 리 없습니다. 업종별 전화번호부에 실린 광고나 기독교 신문 국민일보에 실린 광고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동차에 붙이고 다니는 기발한 스티커라도 별반 감명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가끔 교회 앞에 주차시키는 트럭에 보면 전도 문구를 써 붙여 놓았습니다. 상당히 공격적인 전도 문구를 써 붙여 놓은 것을 봤어요. 우리 한번 까놓고 이야기 한번 해보지요. 차에다가 그렇게 큰 글씨로 써 붙였다고 해서 어쩌면 그것도 구약에 있는 선지서의 말을 떠 올리면서 ‘달려가더라도 볼 수 있게 하여라’그런 말씀을 우리가 믿으면서 써 붙인다고 해서 그 말을 보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우리 입장에서 생각만 하지 말고 좀 남의 입장이 되어가지고 한번 생각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공격적인 전도 문구가 큰 감동을 주리라고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우리가 붙이고 다니는 극동방송국 스티커로 인해 가끔 주파수를 맞추는 운전자가 있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은 때때로 이런 방법을 통해서도 사람들을 감화시키기도 합니다.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런 일방적인 방법에 사람들이 점점 더 식상해 하고 있기에 우리가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생의 중대한 영적 문제라면 당연히 이미 알고 신뢰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할 것입니다. 친구는 친구의 말을 듣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친구를 신뢰하고 친구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친구를 통해서 모임에 들기도 하고 물건을 사기도 합니다. 물건뿐 아니라 생각을 산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려고 한다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과 친구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들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염려에 대해서 우리가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다가서야만 합니다. 그때 신뢰와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입니다. 소금은 본래 효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짠맛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지난 몇 주간 동안 우리는 소금의 짠맛을 높이는 방안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진실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겨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희생해야 한다고 ......
사람들은 자기들은 전혀 그렇게 살지 않지마는 신앙인에 대해서, 특별히 기독교인에 대해서 그렇게 살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그들은 여차 없이 우리에 대해서 비난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보다 조금 나은 것 가지고는 그들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철저하게 우리의 특성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짠 소금이라도 소금 그릇 속에 담겨 있으면 제 역할을 감당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신실하고 희생적이고 불쌍히 여기는 크리스챤이라고 하더라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섞이지 아니하면 그 영향을 제대로 미칠 수가 없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야만 합니다. 손을 잡아줄 만큼 다가서야 합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반성해보면 이런 시도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어색하고 서먹하게 끝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은 사실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노력을 요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관계를 빨리 갖고 싶은 나머지 상대방이 준비되었는지 확인도 해보지도 않고 우리는 영적 도전장을 내밀고 싶어합니다.

게다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결국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빨리 서둘다가 결국은 한 사람도 제대로 돕지 못하고 맙니다. 돕기는커녕 그 사람을 영적 길에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강요받는 분위기를 느끼면 그들은 주저하거나 물러설 것입니다.

그래서 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처음부터 부담되는 제의는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복음에 충성해야 하는 것 맞습니다. 가서 전하라고 하는 주의 말씀을 순종해야 되는 것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뱀같이 지혜롭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충성심은 탁월한데 지혜라고는 전혀 나타내지를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떤 젊은 집사님이 아버지 집사님을 향해서 이렇게 평가 하더라고요.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에게는 지혜를 안주셨는지 모르겠다고..

지혜도 접근할 때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예컨대 제가 평창아파트 1207호에 살고 있는데 7호, 8호가 쭉 일층부터 22층까지 있지 않습니까? 제가 거기 입주하면서 이사떡을 낸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에 같이 타는 사람들 보니까 그 통로에 사는 사람들은 제가 목사인 것을 알고 있더라고요. 조금 더 관심 있는 사람들은 울산교회 목사인것도 알고 있더라고요. 제가 그 집 중에 한 집 ‘딩동’하고 들어가면 사람들은 “야 고대하시던 목사님 오셨구나”이렇게 영접하겠습니까? 마음에 딱 준비할겁니다. 그렇죠? 목사가 나타났다는 것은 우리 보고 교회오라고 할거야. 다 완전 준비태세를 할겁니다. 방어하려고.
그래 찾아가서 5월달 축제 이야기를 앉자마자 꺼내면 그 사람들이 감동할 리가 만무하죠. 제가 시간을 내서 찾아간다면 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야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목사인 것 알고 있기 때문에 영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내가 말을 안 해도 나한테 가지고 나올 것입니다. 오히려 저는 가능하다면 일찍 만나지 못한데 대해서 변명이라도 해야 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 집 형편에 대해서 조금 들어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 사는 일들은 크게 서로 다르지 않으니까, 그 집 아이들 일도 한번 물어보고 그러면서 우리가 그냥 첫 만남에서 가질 수 있는 평범한 대화들을 하고 제가 나올 수 있다고 하면 “이상하다 정말 저사람 울산교회 목사 맞아?” 하고 사람들이 좀 뭔가 기대했던 것이 어그러지는 그런 반전이 있어야 안 되겠습니까? 그저 한번씩 또 언젠가 만나보고, 또 갑자기 찾아오기 시작하더니 지금 거기 가서 산지 3년동안 한번도 안 찾아오던 사람이 3주간 동안 연속 찾아오면 이것도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할 것 같아요 그렇죠? 조금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상대방 입장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지 생각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저보다 좀 나을지 모르지요. 여러분은 어쨌든 울산교회 담임목사는 아니니까 같이 할 수 있는 여건이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를 신뢰하고 존경하게 되면 신앙의 문제로 대화를 이끌어가기 전에 그들이 대개는 먼저 말하게 될 것을 믿어도 좋습니다. 우선 자연스럽고 평범한 토대위에서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를 바탕으로 영적 문제가 나올 수 있는 토양 준비를 하면 많은 사람들은 중요한 문제를 함께 나눌 믿을 만한 친구를 찾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놀랍게도 주님은 당시 (종교의) 제도권 밖에 있는 사람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유대 종교의 핵심 내부스쿨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하고는 별반 접촉이 없었어요. 접촉할 때는 그들이 잘못 하는 것, 그들의 입장이 틀렸다는 것 지적해 주셨고 그들에게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에게는 중요한 존재인지를, 그들이 무시하는, 그들이 등한시 하는 사람들 하나님께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소위 종교라는 제도권 속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주님은 대부분의 시간을 전혀 예루살렘 한번도 올라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하고 성전 들어가서 제사하는 것 정기적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 만난다고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억압받는 동족들에게 지나친 착취를 하는 세리들을 만났습니다. 돈을 받고 성관계를 가지던 창녀들을 정말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주님은 의도적으로 당시 영적 타락자들인 가장 비천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들이 소중하였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려 노력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라고 찬양하면서 정말 주님이 우리의 죄짐을 맡아주신 사실을 알고는 감격해 합니다. 그러나 정작 아직도 동일한 죄짐을 지고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아직도 남의 재산을 착취하고 성을 매매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을 살면서 그들에게서는 애써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오늘 우리는 태신자 접촉의 달 네 번째 주일을 맞이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친구관계를 갖는 데 뭐가 걸림돌이 되는지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만남은 전도의 첫 걸음”인데 만남의 길에 놓여있는 장애물들을 우선 살피려고 합니다.

맨 먼저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성경말씀들을 오해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과 벗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줄 알지 못하느냐”이런 구절이라든지“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 따로 있으라” 이런 구절들을 반복해서 들으면서 우리는 자라왔습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친구가 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된다고 느끼고 또 성경 가르침을 심하면 거역하는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구절들을 피상적으로만 대하지 말고 좀 더 가까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야고보서 4장 4절은 우리가 이 세상과 벗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성경의 다른 부분과 비교해서 살펴보면 이 말씀의 뜻을 바로 알게 됩니다.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세상이란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서 사람들이 범하는 죄와 악을 가리킵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행하는 나쁜 일을 사랑하고 관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죄에 빠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죄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의해서 더럽혀지지 않고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하는 동시에 더럽혀진 세상 사람들을 사랑으로 건져내어야 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요한복음 17장 14절에 나오는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을 신앙인 말고는 다른 사람들과 사귀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구절에서는 예수님이 세상에 보냄 받은 것처럼 우리를 세상에 보내었다고 말합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습니까? 주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눅 19:10)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파송을 받은 것처럼 나도 너희를 파송하노라” 주님은 그렇게 분명히 이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파송 받은 이유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일에 있다면 우리가 파송되는 이유도 동일해야맞습니다.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마라”(고후 6:17)는 권면은 어떠합니까? 바울은 거기서 불신자들과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일상적인 친구관계를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공식적인 동맹관계를 맺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표현은 경멸하는 말로서 사용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부인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찬사처럼 받아들였으며 그렇게 사셨던 분이십니다.

만남의 길에 놓인 또 다른 장애물은 실제적인 위험입니다. 전도할 생각을 가지고 불신자에게 다가가는 것은 성경적인 입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하며 대항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어떤 위험이 있는지 미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33절에서 바울은 무슨 생각으로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라고 했을까요? 그 한절만 보지 말고 앞뒤 문맥을 보면 분명해 집니다. 거기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선생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전체가 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얼마나 성경적인 사실이고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나신, 다시사신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기독교의 바른 진리를 전하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가 조심해야 합니다. 대단한 조직력이 있는 것 같아요. 골목길 다니면서 박옥수 성경집회 한다고 써붙여놓은 것 많이 보셨지요? 한국 교회가 모두 일치하게 이단으로 규정한 집단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조심시켜야 할 것입니다. 잘못된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것은 교회의 일관된 입장입니다.

빠져 들어가지고 지금까지 믿고 있던 진리에서부터 흔들려서 회의주의에 빠지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진리가 아닌 것을 신봉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할 때 우리는 자신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교제를 나눌 때에 방어보다는 공격적이어야 합니다. 그 사람 말을 듣기 보다는 우리가 믿는 진리를 설명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영향을 주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우리가 선 자리에서 상황을 잘 대처하기 위해서는 유리한 고지를 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깃발을 분명하게 세워야 합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타파하며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고후 10:4-5) 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만나는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우리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되면 잠시 동안은 뒤로 물러나야 할 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우위를 확보하십시오. 도덕적이고 영적인 문제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자리를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아주 어려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십시오. 변화시키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십시오. 친구를 사귈 때에 여러분, 여러분은 그 친구에게 영향을 입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향을 주기 위해서야 합니다. 하다보니까 내가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영향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면 한걸음 뒤로 물러설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남의 길에 놓인 세 번째 장애물은 좋지 않은 소문이 날 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아마 여러분이 불신자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을 교인들이 본다면 여러 가지 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대포 한잔 하는 자리에 여러분이 동참해야 될 자리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여러분은 냉수를 마셔도 좋지 않은 소문이 날지도 모릅니다. 사이다에 콜라를 섞어놓으면 맥주를 마신다고 누가 말할지도 모릅니다. 불신자들과 관계를 맺으려는 여러분의 노력은 다른 교인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오해할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훌륭한 교제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신앙공동 체로 인해 자신의 명예를 떨어뜨린 것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신앙공동체를 박살을 내고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주님의 목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번역을 부드럽게 해서 그렇지 어쩌면 그때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그대로 옮긴다면 “예수 그 사람은 포도주 독에 잠겨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까지 악날하게 비난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의사가 필요한 것은 건강한 사람사이에서가 아니라 병든 사람들 사이에서 의사가 필요하지 않느냐. 소위 세상에서 제껴진 무리들과 가까이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의사가 건강한 사람들과 더불어서 언제나 골프나 치고 지낸다면 그는 의사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면허증을 왜 받았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의사는 아픈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할때에 의사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의사를 필요로 하는 병든 사람들이기에 그들에게 가까이 한다고 주님은 답하셨습니다. 길 잃은 양, 목자에게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잃어버린 동전, 여인에게는 찾도록 찾을만한 가치 있는 것입니다. 집나간 아들, 아버지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것 여러분 추측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모두가 하나님에게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고 그것이 얼마나 부적절하며, 잘못되었는지 숙덕거리는 사람들을 반박하셨습니다.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죄인들과 세리들에게 가까이 가는 것은 그릇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잃어버린 사람들을 중요시 여기기에 그렇게 하는 것은 마땅한 것임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누가복음 15장에 긴 세 가지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것은 쉽지만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남들이 수군거려서만 아니라 내가 시간을 내어서 없는 시간을 쪼개어서 막상 다가가보면 교제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려운 신앙생활한 사람들일수록 더 그런 느낌을 받을지 모릅니다. 소위 말해서 그들이 지금 살고 있는 문화가 우리가 속해있는 문화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언사는 불쾌할 수 있습니다. 유머는 상스럽고 황당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가치관과 활동범위는 우리의 것과 판이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지금 막 그런 환경에서 벗어나온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다시 들어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한잔하세” 당장 친구들은 그렇게 이야기 할 것입니다. 요새 교회 나간다고 한두달 못 봤거든요. 그러니까 반가움에 서로 철철 넘치도록 한잔 같이 나누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들의 문화 아닙니까. 그러니까 자기 식으로 우리를 반기면서 한잔 하자고 할 것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그런 환경을 접한다는 것,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우리의 소중한 사람이 아직도 거기에 속해있다고 판단되면 우리는 거기에 다가가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분명히 불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만나야만 합니다. 대고 욕지거리를 안주로 삼는 사람들도 만나야 합니다. 만남은 전도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큰 소리로 떠들어대고 쓰는 말마다 욕지거리가 따라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욕을 중간 중간 넣지 않으면 말을 못하는 것처럼 대화를 이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또 여간해서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지만 기분이 좋게 얼큰해 지면 그때부터 속에있는 이야기를 막 쏟아놓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빈 마음을 술로서 채우려고 발버둥치는 그들을 누군가 만나주어야 합니다.

정말로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다리를 건설하는 중입니다. 지금부터 새로운 관계를 가질 수 있는 터전을 닦는 작업이기 때문에 그 작업 자체가 그렇게 유쾌하고 신나는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증거하는 바탕을 먼저 마련해야 그다음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옛날 예수께서 하시던 방법입니다.

오늘 말씀을 여기서 맺겠습니다. 여러분이 만나야 할 사람을 선정하셨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만나게 하시는 사람 선정토록 요구하시면 순종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영향권 내에 있는 사람들을 선정해야 합니다. 만나서 우정을 나누며 궁극적으로 진리를 나눌 대상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정하지 못한 사람들은 오늘 오후에 끝을 좀 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어떤 분이 새생명 훈련을 받으러 와서 제가 면접을 해 보니까 왜 이번에 41기 새생명 훈련을 받으려고 합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답을 솔직하게 했어요. “주위사람들의 압력 때문에...” 그래요 새생명 훈련 받지 않고 울산교회 신앙생활 하는 것도 쉬운 일 아닙니다 그렇죠? 그런데 해마다 그 스트레스를 잘 견뎌 내시는 분들이 가끔은 있습니다. 그렇죠? 여러분 처음 2월말에 태신자 정할 때 딱 써서 내면 그때부터는 그 사람들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다음 작업이 시작됩니다. 아직도 태신자 이름을 써내지 못하면 내가 “태”자만 이야기해도 여러분 가슴이 덜컹하지 않습니까? 참 취미가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무엇 때문에 그런 스트레스 받아가면서 꼭 일을 하려고 생각합니까? 받지 말고 하시라는 겁니다. 작정하고 나면 홀가분 할건데 왜 그렇게 꼭 기다리고 있습니까? 저는 숙제를 내주고 나서 숙제검사하지 않는 선생님들은 존경하지 않습니다. 숙제를 내주면 반드시 검사를 해야 아이에게 도움이 되거든요 여러분에게 할 일을 주었으면 반드시 마르고 닳도록 그 일이 끝나도록 저는 도우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꺼번에 다는 안 되겠죠? 그래서 저는 우리교회 2,000면 주일 예배자들이 다 다섯명 작정하면 만명의 태신자가 되겠지만 그런 일은 기대하지 않습니다. 저는 반으로 뚝 잘라가지고 그중에 천명, 적어도 서리집사 이상 되는 분들은 올해 반드시 작정하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서 도우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교적부 딱 뜨면 몇 명 작정했는지 명단이 뜨도록 되어 있습니다. 몇 년도에 누구를 작정했는지, 그래서 그 사람이 관심신자로 변하고, 출석신자로 변하고 훈련 교인이 되는 길을 가도록 도와 드릴 것입니다.
우선 태신자 다섯명 적으셔서 구역장 전화하기 전에 “이제 정했어요”하고 이야기 하면 구역장이 여러분 얼마나 예쁘게 생각 하겠어요 그렇죠? 여러분도 장차 구역장 될 거니까 지금부터 심정을 좀 헤아려 주십시오.

막연히 누군가에게 찾아가서 복음을 전할 그런 생각은 접고 여러분이 알고 있는, 관심을 가지고 있는 소중한 다섯 사람 돕겠다는 목표를 올해 세우십시오. 그래야 그들을 위한 특별한 행동을 개시할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을 선택할 때 먼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계속적으로 그들에 대해서 아뢰십시오. 하나님 내가 이런, 이런, 이런 사람을 태신자로 정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여러분이 정한 태신자에 대해서 소상하게 말씀 드리십시오. 그런 가운데서 여러분은 그 사람들에게 어떻게 지혜롭게 접근할 수 있을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깨우쳐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태신자에 대해서 충분히 하나님께 아뢴 다음에 그 태신자에게 언젠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 하는 것이 순서인 것 같습니다. 서로 소개할 때 높은 사람을 먼저 소개합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사람을 먼저 소개하고 그 다음 하나님을 소개 하는 게 순서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계속 그들에 대해서 아뢰십시오. 그들의 마음을 열어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사랑과 진리로 그 마음이 열리도록 성령님께 부탁 드리십시오. 조건 없는 사랑과 이해타산 없는 우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지혜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 관해서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바른 순서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메시지를 들고 여러분의 태신자에게 다가갈 때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는 걸음마다 지혜를 달라고, 힘을 달라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태신자를 얻느냐 마느냐는 하는 것은 만나는 일에서 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첫 만남이 어떠하냐에 상당한 영향을 받습니다. 친구는 친구의 말을 듣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친구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친구가 되기 전에는 사람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흥미진진한 놀라운 일이 우정을 기초로 일어날 것입니다. 신뢰가 깊어지고 교제의 세계가 확장 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새싹이 움터 나오는 것을 여러분은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 엄청난 새 창조의 역사를 위해 친구가 되는 첫 걸음을 내딛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