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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사람들 /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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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사람들
사도행전 3:1-10. 
유흥준 목사 (전주광성교회)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 우리는 외국교회들의 많은 도움을 받아왔습니다.

①수많은 선교사들의 파송과 교회, 학교, 병원, 고아원을 세우고 식량원조... 등등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②그리고 세계 2위의 선교사 파송 국가가 되어진 지금도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교회들의 여러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③지금도 한국교회에서 실시되고 있는 세미나들 가운데 아마 90% 이상은(?) 미국 등지의 교회에서 실시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④많은 신학서적이 번역되었고 신학교의 거의 모든 교수님들이 외국에서 학위를 받은 분들입니다.
⑤목사님들 가운데도 해외 신학교에서 공부한 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너무나 많은 도움을 받아 왔습니다.
어쩌면 한국교회는 복음의 빚을 가장 많이 진 나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감사한 게 하나 있습니다. 수입만 되고 있는 게 아니라 한국교회의 뜨거운 기도가 외국으로 수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두 기둥(양대 축)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①말씀에 있어서는 외국교회의 도움을 많이 받아왔고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역사에 기록될만한 설교자들을 많이 배출했고 탁월한 강해설교가들도 수두룩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형편은 어떻습니까? 겨우 1980년대 초에야 두란노 서원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강해설교 세미나가 시작되었고, 지금도 100년, 200년 된 외국의 강해설교집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나라가 언제쯤이면 스펄젼 같은 설교 가를 배출할 수 있을까요? 언제쯤이면 우리나라의 강해설교집이 외국 목사님들에게 두고두고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요?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한국교회 목사님들의 말씀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기에 머지않아 웨슬레와 같고 스펄젼과 같은 설교자들이 수없이 배출되리라 확신합니다.


②반면에 기도하면 한국교회를 따라올 데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기도원을 본 따서 외국에 기도원이 세워지고, 우리의 새벽기도회를 본 따서 외국 교회에도 새벽기도회를 실시하는 교회가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왜 우리가 기도를 수출하는 교회가 되었습니까?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교회 수가 몇 개입니까? 5만입니까? 그 중에 아마 99%이상이 매일 새벽기도 할 것입니다.
아마 90%이상이 금요 철야 기도회 모임을 가질 것입니다(혹 다른 요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도에 불이 붙지 않겠습니까?

사도행전을 살피면서 저는 초대교회와 우리한국 교회가 너무나도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고 모이기에 힘쓰고 특히 기도에 전심전력하였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 한국교회도 초대교회처럼 될 소망이 있다는 것이고 그럴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십시오. 동창회 모임을 힘쓰지 말고, 취미 생활하기에 모이기를 힘쓰지 말고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오순절날 성령의 역사가 120명에게 임했습니다. 그들은 뛰쳐나가서 외쳤습니다. 그러자 단 하루 만에 믿는 자가 3000이나 더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모여서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모임 속엔 사도의 가르침이 있었고, 교제가 있었고, 떡을 뗌이 있었고, 하나님께 찬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최초로 놀랄만한 사건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바로 본문의 내용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약40세) 사람을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므로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으며 뛰면서 기쁨과 흥분으로 열광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적과 행동은 자연히 군중의 주의를 끌게 마련입니다. 이 이적은 단순한 이적 이상의 것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보여 주는 표적입니다. ①하나는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예수님이 이 땅에 살아계셨을 때와 똑같이 동일하게 오늘날도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②또 하나는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통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통하여 지금도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을 치유하고 구원하십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예수님의 도구요, 특사요, 대사이며 대표이며 사자이며, 고통과 죽음, 죄와 수치 가운데 잃어진 세상에 대하여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최초로 기록된 이 교회의 이적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능력을 드러내시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통하여 증거하고 계십니다. 이 가운데, 하나님께서 복음을 증거함에 있어 항상 발견되는 위대한 교훈 몇 가지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1. 첫째 예수님은 지금도 자신의 제자들을 통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자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임재와 능력은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나타나며 효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사랑과 세상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지금도 예수님의 발이 아닌 우리들의 발로, 예수님의 손이 아닌 우리들의 손으로 예수님의 목소리가 아닌 우리들의 목소리로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서 행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일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지금도 기도에 충실한 자들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본문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충실한 기도의 용사들이었습니다. 즉 기도와 모이기에 힘 쓴 자들을 통하여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1절에 보면 <제 구시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이 오후 3시(제 구시)에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제 삼시(오전 9시), 제 육시(정오), 제 구시(오후3시) 기도시간을 지켰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전에서 만나 주십니다. 집에서 기도 할 수 있고 집에서 하나님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성전에 오르지 않았다면 기적이 일어났을까요? 성전은 하나님과 우리가 만나기로 약속되어진 장소입니다.
그러기에 성전에 자주 와야 합니다. 자주 모여야 합니다. 기적은 기도를 통해서 많이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꼭 그 것 만은 아닙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도 기적이 나타나고, 찬양을 통해서도 기적이 나타납니다. 봉사하다가 기적을 체험한 사람도 많습니다.
평소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십시오. 평소에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기도하는 자들을 통하여 필요할 때 기적을 베푸십니다. 
예배드리러 오는 시간에, 성경 공부하러 오는 시간에, 교회 청소하러 오는 시간에, 작정 기도하러 오는 시간에, 새벽 기도 하러 오는 시간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통하여 기적을 나타나게 하시고 체험하게하십니다. 믿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2) 예수님은 고난당하는 자들의 절실한 필요를 주목하는 자들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2절에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매고 오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메고 와야 합니다. 주님은 그런 자를 통해서 이적을 베푸십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은 40년이 넘도록 앉은뱅이로 지냈습니다. 태어나서 한번도 걸어 본적이 없습니다.
그 앉은뱅이가 구걸하게 위하여 성전 문까지 가려면 누군가가 옮겨주어야 했을텐네, 그렇게 앉은뱅이를 옮겨주던 사람! 그 사람은 업어다가 옮겨주는 생활을 몇 년간이나 했겠습니까? 10년, 20년, 30년 했을까요?
하나님은 지금도 고난당하는 자들의 절실한 필요를 주목하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앉은뱅이가 왜 성전을 찾았습니까? 구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람을 상상해 보세요. 앉은뱅이를 부양할 가족이 없었습니다. 일할 능력이 없습니다. 자활의 능력도 없었습니다. 무력했습니다. 그를 받아들여 도와줄만한 재력을 가진 자도 없었습니다. 무시당해 왔습니다. 결코 사회에 적합한자가 아니며, 그 누구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전에 와서 구걸하기 위하여 왔던 것입니다. 

주목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앉은뱅이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상처를 받았었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을 대표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이기적이며 욕심을 내는 세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갖지 못한 자들에게 나아가 자기의 소유를 나누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시하기 때문에,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고 고통을 받는지 모릅니다. 
더욱이 치명적인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까지도! 모든 사람을 위해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안다고 고백하는 성도들의 무관심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은 많은 고통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무관심하고 이기적이고 욕심을 부립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 어디를 보아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는 존재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상처 입은 사람들의 절실한 필요를 돌아보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일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은 사람들의 필요에 주목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십니다(4).

사람들의 상처입고 고통당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필요한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멈추어 서서 <주목해야> 합니다.
주목한다는 말은! <주의를 기울인다>는 의미입니다. 즉 <진지하고 강렬하게 응시하면서, 계속적이고도 꾸준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필요를 보고 그 필요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그 필요가 채워질 때까지 계속 시선을 집중시키고, 관심을 집중시키고,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고도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눈길을 피해서 그 앉은뱅이를 그냥 지나쳐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에 대다수 사람들은 그냥 지나쳤지만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속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고 계셨고, 베드로는 주님을 위하여, 세상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하여 이 땅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 사람에게 그의 주의를 기울여 온전히 관심과 긍휼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적을 베푸실 때에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기를 워하십니다. ①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②어떻게 필요를 채워줄 것인지 생각하고 계획할 때에, ③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그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고 믿으며 기대하고 있을 때에, ④우리가 필요를 채워주려고 믿음으로 나아가서 행동하는 의지가 있을 때에 하나님은 이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2. 둘째 예수님은 살아계셔서 임재하심과 능력을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알려주고자 하시는 가장 중요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죽지 않았습니다. 세상 역사 현장에서 사라져버린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살아계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오른 손으로 영원히 높임을 받은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임재하심과 능력은 여전히 이 땅에 나타나며,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예수를 참되게 따르는 자들의 삶 속에서 계속 역사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효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사라아시고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해해야할 중대한 세 가지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1) 첫째 예수님의 임재와 능력은 금이나 은에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 앞을 지나가자 손을 내밀고 구걸을 합니다. 구걸하는 그에게 베드로가 뭐라고 말합니까?
6절에 보면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그렇게 말했습니다.
베드로에겐 금이나 은, 돈이나 다른 물질, 음식이나 옷, 집이나 거할 곳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금이나 은, 돈을 줄 수 없었습니다. 대신 그는 자기에게 있는 것을 주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이것이 있다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나를 너무나 자랑합니다. 돈, 지식, 명예와 배경.....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내 안에 내가 있어선 안 됩니다. 내 안에 내가 있다면 나는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갈라디아  2:20절에 나오는 바울의 고백을 아십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미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고 나를 자랑하나요? 우리 교회들을 살피고, 우리 믿는 자들을 살펴보십시요.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도 괜찮은 것들만 추구합니다.
진짜 자랑해야 할 것은 자랑하지 않고 천국에서 아무 소용없는 것들만 자랑합니다.

우리 광성교회가 가지고 있는 게 무엇인가요? 여러분들이 전도 대상자들에게 우리 교회를 소개할 때 무엇을 자랑하나요?
어떤 교회는 몇 천 평, 몇 백 평 성전 건축했다고 자랑합니다.
교역자 수가 많음을 자랑하고 교인 수가 많음을 자랑합니다.
선교비 지출 많고 구제비 지출 많다고 자랑합니다.
헌금이 많이 나온다고 자랑합니다.
지식수준이 높은 것도 자랑합니다.
생활수준이 높은 것도 자랑합니다.
젊은 층이 많은 것도 자랑입니다.

반대로 생각해봅시다. 그렇다면 개척교회, 임대교회는 부끄러운 것입니까?
몇 명, 몇 십 명 앉혀 놓고 예배드리는 게 부끄러움인가요?
헌금 적게 나오는 게 부끄러운 일인가요?
나이 드신 분들만 많다고 해서 그게 풀 죽을 일인가요?

이런 자세는 앉은뱅이의 자세입니다. 앉은뱅이는 오로지 돈밖에 몰랐습니다. 돈보다 더 귀하고 귀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선 알지도 못했고 모시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우리 교회들이 헌금 자랑하고, 건물 자랑한다면 앉은뱅이와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앉은뱅이의 관심사하고 똑 같은 게 아닌가요? 그러면서 어떻게 교회라고 할 수가 있나요?

교회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자의 자랑은 미모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남자의 자랑은 돈 많이 벌고 출세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까? 그러면 그 분을 자랑하고 그 분을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가요?
그렇다면 우리 광성교회엔 예수님이 계신다고,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고 자랑하십시오. 이보다 더 큰 자랑은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값어치 있는 자랑은 없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기에 나에게 또 우리교회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면 우리는 최고의 교회요 최고의 사람입니다. 믿습니까?
우리 광성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졌음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 땅에서 우리 광성교회보다 더 귀한 교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보다 더 큰 자랑이 어디 있습니까?

불신 세상을 향하여 값어치 있는 것을 줍시다. 돈은 세상이 더 많습니다.
좋은 건물도 세상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불신 세상은 가장 귀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는 없습니다.
교회가 해야 될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는 일만 제대로 하면 오늘 우리들의 교회도 초대교회처럼 칭송 받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믿는 자가 더욱 더 많아 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없이 교회가 세워지고 어떻게 예수님 없이 예수님 믿는 자가 될 수 있나요? 예수님을 주시기 바랍니다. 주고 주고 또 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주는 것과 돈을 주는 것 중 앉은뱅이에게 어느 것이 더 큰 축복입니까? 돈은 한 끼의 양식을 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여러분 그래도 돈 없는 게 부끄러움입니까?

2) 예수님의 임재와 능력은 예수님의 이름에서 발견됩니다.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했습니다(6절).
<이름>이란 그 사람의 인격, 특성, 직위, 능력, 권위를 의미하고, 이름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표합니다.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한 것은 <너를 치유하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이름과 능력과 권위뿐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①우리 인간의 필요를 만족 시켜 주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이름이나 능력뿐입니다.
은이나 금도 아닙니다. 베드로도 아닙니다. 은이나 금이나 돈아나 건강을 가져다주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금, 은, 돈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돈은 잠깐 문제를 해결하지만 예수님 만나면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가장 큰 축복을 누립니다.

②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리스도 그분 안에 거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 자신의 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임재와 능력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가 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베드로가 이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대표하여 대신해서 전 세계에 고통당하고 상처 입은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누어주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입니다. 믿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③베드로와 우리는 주님을 대표하는 대사, 사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사람들에게 다가가실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으십니다. 왜요? 예수님은 하늘나라로 올라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육체, 손이나 발로, 목소리와 몸을 지니고 게시지 않기 때문에 이 땅에 남겨두신 저와 여러분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앉은뱅이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기에 40여 년 동안 걸어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러니 걷겠다는 소망도 없고 걷는 기쁨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걷는다는 것을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걷는 것은 그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이지만 또한 가장 큰 불가능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걷는다는 가능성은 0%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근본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베드로는 강력하게 명령합니다. 베드로가 특별히 기도한 게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 이름으로 강하게 명령했을 뿐입니다. 강하게 명령했다는 것은 믿음이 충만하다는 것이요 자신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능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 이론적으로는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 이름으로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없습니다. 의심하면서 기도하거나,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기적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이 기도합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니 무슨 능력이 나타나겠습니까?

어떤 성도 한 분이 (훗날 기도원 원장이 됨) 집회에 참석해서 은혜를 충만히 받았습니다.
집회에서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데 차안에서 어린 앉은뱅이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은혜도 받았겠다 그 아이를 붙잡고 한참 기도했습니다. 그 다음 일어서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얼마나 창피했던지 그 다음 정류장에서 쏜살같이 내려 도망을 쳤습니다.....

내 안에 예수가 계신데 왜 능력이 안 나타납니까? 베드로가 모신 예수님과 내가 모신 예수님이 차이가 있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믿음 차이입니다. 오늘 설교가 끝난 다음 질병치료 및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①그 때 어떤 분에게는 능력이 나타나고 어떤 분에게는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②내가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신다는 믿음을 99%가 아닌 100%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나타납니다. 주님은 온전한 믿음을 원하십니다.
7절에 보면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자(앉은뱅이가) 발과 발목에 힘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일어선다는 베드로의 확신을 볼 수 있고, 동시에 베드로가 도와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①능력은 그리스도의 능력이었으나 도움의 손은 베드로의 손이었습니다.
②힘들고 지친 이웃들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능으로 치료하고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일어서도록 돕는 손길이 되어야 합니다.
③병들어 오랫동안 누워 있는 사람을 일으키는 것은 주님이십니다. 하지만 혼자 일어선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옆에서 누군가가 붙잡아 주고 거들어 준다면 쉽게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맡기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다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신다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도와야 합니다. 치료되도록, 일어서도록, 부축하고, 기도해 주고, 나누고 ...그럴 때 일어서고 회복됩니다.
여러분이 힘들 때! 제가 곁에 서서 일어서도록 여러분의 손을 붙잡겠습니다. 제가 힘들 때! 여러분이 제 곁에 서서 저의 손을 붙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또 여러분! 서로가 서로를 붙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길을 가든 우리의 인생에 주님께서 끝까지 동행해 주십니다. 그러나 나와 주님만 동행하는 게 아니고 내 곁에 다른 친구들이 함께 동행 해 준다면 얼마나 즐거운 여행이 되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예수 안에서 한 형제라는 게 무엇이고 한 가족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한 공동체라는 게 무엇입니까?
그저 일주일에 한 두 번 함께 예배드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이기에 아픔도 슬픔도 기쁨도 축복도 함께 해야 합니다. 서로를 의지하고 서로를 돕고 서로를 사랑하고 적은 것 하나라도 함께 나누고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옆에서 일어서기 위해서 안간 힘을 쓰는 이웃이 보입니까? 여러분이 한쪽 손만 잡아 준다 해도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모세는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손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잡았습니다. 각각 모세의 한쪽 손을 잡아 줬을 뿐인데 그 결과는 이스라엘의 대승리였습니다. 서로를 도웁시다.
오늘 특별히 제가 여러분을 돕겠습니다. 베드로가 일어서라고 명령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킨 것처럼! 저도 오늘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으로서 여러분에게 명령할 것입니다. 질병에서 일어서라고, 문제에서 해결 받으라고 명령하고 기도로 도울 때 다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누군가 나를 도울 때는 일어서야 합니다. 내가 끝까지 일어서지 않으려고 하면 일어 설 수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수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도움 받고 있고 특히 성령하나님께서 돕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돕고 또 옆에 계신 분이 도울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일어설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안된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일어서십시오. 일어서도록 몸부림치십시오. 설교를 듣고만 끝낸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도행전의 말씀을 전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을 이루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예배가 끝나기 전까지 이뤄야 합니다. 내일 이루자는 게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야 합니다.
사실 앉은뱅이에겐 믿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강권적으로 역사하사 치료해 주셨습니다.
본래 주님은 믿음을 보시고 믿음대로 이루어주십니다. 그래서 먼저 믿음을 키워 주시고 나서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간혹 믿음이 없을지라도 강권적으로 역사하사 기적을 일으키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포기해버린 문제, 포기 해버린 질병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제가 하나님이 세우신 종의 자격으로 강권적으로 명령하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여러분의 믿음과 설교자의 선포가 동시에 이뤄진다면 엄청난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베길 수 있겠습니까?
설교가 끝난 다음 저는 병 치료와 문제 해결을 위해 선포할 것이고 여러분은 믿음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그때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불가능하다고 생각 말고 믿음으로 치료를 그리시고 해결을 그리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기적은 나타납니다. 능력은 나타납니다. 여러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질병이 치료됩니다. 가정이 일어서고 교회가 일어섭니다.
이 기적, 이 능력은 사도행전을 일고 믿는 모든 교회와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기적도 나타내 주시지 않으면서 한국교회를 살리겠다고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안된다고 생각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못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목사님들에게도 의외로 많은 질병이 있습니다. 성도들의 병을 위해서는 열심히 기도하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기도할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자의 심정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직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자가 들어가는 3가지 의사, 검사, 목사입니다.
①의사는 병든 사람만 치료합니다. 병든 사람의 표정은 전부 다 죽을상이다. 그러니 의사가 받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②검사는 도둑놈과 범죄자들만 상대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험하고 못된 자들만 상대하니 그 고충 또한 얼마나 크겠습니까?
③그럼 목사는 어떻습니까? 병자, 도둑놈, 범죄자뿐입니까? 영혼 병든 자까지 상대하니 3사 중에 목사가 가장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병도 많을 수밖에, 스트레스는 쌓이고 어디 마음 터놓고 얘기 할 사람도 없고, 같이 싸울 수도 없고, 그러다 보니 병들고 쓰러집니다. 

오늘 설교가 끝난 다음에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에 여러분 전체가 치료가 나타나도록 통성으로 합심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목사님을 비롯해서 성도들이 수많은 치료의 기적을 분명히 맛보게 됨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약해지셨습니까? 아닙니다.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러니 오늘 분명히 나타나고 체험합니다.
8절에 보면 <앉은뱅이가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하고 뛰기도 하면서(환희에 젖어)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뛰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완벽하게 치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베드로가 치료한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치료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믿는 자가 날마다 더하니라> 믿습니까? 이런 모든 일이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성전에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이 바로 문제 해결과 질병 치료의 기적의 시간이 됨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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