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아브라함의 미국자손 / 창 5:1, 마 1:1

  • 잡초 잡초
  • 303
  • 0

첨부 1


아브라함의 미국자손
창세기 5:1, 마태복음 1:1
배성산 목사([email protected])


미국은 대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서 세계 만국의 나라들로 온 세계가 들끓고 있습니다. 세계 각국은 이라크에서 일어난 전쟁의 참상을 보고 유엔의 결의를 무시하고 전쟁을 하고 있는 미국에 대하여 반전 운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9.11테러 이후에 부시 대통령은 “세계 질서는 미국 중심으로 짜여져야 한다”는 콘돌리사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지론에 따라 대외 정책에 있어서 초강경 자세를 고수하고 있고, “악의 축”발언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의 신국제 질서구상은 역사적 추세와 미국의 힘의 변화에 맞는 일인가? 이라크 전쟁을 보면서 생각해 보게 합니다. 21세기 벽두에 벌어진 9.11테러의 참혹한 전쟁의 현장을 전세계가 목격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 금융 시장의 핵심부가 어이없게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전쟁은 끝이 아니고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수천년의 역사를 통해 이런 대결과 갈등 그리고 비극을 온몸으로 수없이 격고 되풀이해 온 민족입니다. 그런 후에는 반드시 그 손실을 넘어서는 반사 이익을 거두었습니다. 더구나 오늘날 유대인들은 더 이상 게토의 담장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전세계 자본주의 시장의 사실상 실세이며 초강대국인 미국의 정치를 배후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21세기의 새로운 전쟁”이라고 부시 미국 대통령이 명명한 이 전쟁을 뒷전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저 “가나안”이란 이름으로 처음 불러진 팔레스타인 땅에서 주변 민족들과 수천년 전부터 생존을 건 싸움을 벌여 온 유대인들과 이웃 민족들과의 갈등과 분쟁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웃민족들은 시대에 따라 바빌론이 되기도 했고, 페르시아나 희랍계가 되기도 했으며 기원 원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로마가 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오늘날에는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범아랍권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렇게 대상도 달라졌지만 그 대결의 무대도 수천년 분쟁의 이끼가 낀 예루살렘을 끼고 도는 팔레스타인에서 미국의 심장부 뉴욕이나 워싱턴으로 옮긴데 불과합니다.

새 시대를 사는 유대인의 주요 무대가 그곳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무대는 달라졌지만 분쟁의 본체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대로 유태인입니다. 그러니까 부시 대통령이 말하는 “21세기의 새로운 전쟁”의 저변에 깔린 뿌리는 유대인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오늘의 이라크는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의 본향입니다. 그런 이라크가 지금 폭탄 세례를 받고 불바다가 되고 있습니다.

구약 성서에 따르면 “열국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로 가나안으로 향하기전 지금의 이라크 남부 갈대아(칼데아) 우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뒤 그는 현재 터키의 동남부 하란으로 이동했으며 그곳에서 부친상을 당한 뒤에 아내 사라 및 조카 롯 등을 데리고 약속의 땅으로 한걸음을 옮겼습니다. 이라크는 구약성서의 기록의 중심지이자 세계 역사의 무대입니다. 터키국경의 아르메니아 산악 지대에서 발원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관통하는 이 지역은 곧 옛 4대 문명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입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역대 통치자들은 이곳을 가장 중요한 장소로 여기고 권력의 중심지로 삼아 왔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605년과 597년, 586년 예루살렘에서 차례로 끌려간 포로들은 결박돼 이곳으로 끌려갔으며 그들 속에 있던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왕에게 발탁돼 다년간 총리 자리에 있기도 했습니다.  바그다드 북방 500여km지점에 있는 모술(니느웨성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을 중심으로 아시리아 제국의 유족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성서에서 앗수르로 표현되는 이 아시리아의 도성은 니므롯이 정복 니느웨성을 건설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성지는 구약에 나타난 성서의 기록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두고 아들을 두었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입니다. 그런데 장자인 이스마엘은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의 이집트 출신 몸 종 하갈이란 여인이 낳았고, 두 번째 아들인 이삭은 본처 사라가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으로 전통을 잇는 과정에서 대립이 일어났습니다. 두 아들이 모두 아브라함의 혈통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라가 낳은 이삭이 아브라함의 적자로 유산을 잇게 되고 곁가지로 처지게 된 이스마엘은 어머니 하갈과 함께 눈물을 머금고 쫓겨납니다. 이스마엘은 아랍 민족의 조상이 되고 한 뿌리에서 낳은 형제가 원수가 되어 인류 역사의 마지막까지 갈등과 대립을 되풀이 하고 있는 그 와중에서 문명사회가 끝없이 휘말리고 있습니다. 마호메트가 창시한 이슬람교는 아담에서 시작하여 방주로 유명한 노아 아브라함 그리고 유대교 대부인 모세와 솔로몬 다윗 등 그 계보를 이어서 예수까지 하나님이 선정한 예언자의 계열로 세웁니다. 그리고는 마호메트를 이 모든 예언자들을 결론짓는 마지막 최대 예언자의 위치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호메트가 창조주이신 유일신 종교의 종지부를 찍었다는 것입니다. 그 유일신은 유대교나 기독교의 “야훼”라는 명칭 대신 “알라”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최고 예언자인 마호메트 이후 예언자가 이 세상에 출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코란에 의하면 유일무이한 하나님 알라신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수없이 나타난 인격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믿었던 하나님은 바로 알라 신이었고, 아브라함의 신앙은 유대교는 물론 그 뿌리에서 나온 기독교도 아니며 이 두 종교는 본원적인 뿌리가 되는 유일한 알라 신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요약하면 이슬람교는 유일 인격신의 종교인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라는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완결된 영원불변의 유일 인격신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역사가 흐르면서 이제 세계는 같은 신앙의 텃밭에서 발아한 유대교와 기독교 문화의 한 묶음인 서구 세력의 문명권과 이슬람의 범아랍 문명권과의 대결 양상으로 치닫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50여년전 이스라엘 건국이 아랍권 등 중동 지역의 화약고가 된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기원전 70년 로마에 의해 유데아가 망한 이후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의 고토를 잃고 뿔뿔이 흩어져 2000년에 이르는 이른바 “디아스포라”를 맞게 되었습니다.  반면 이슬람교는 마호메트 본 고향인 아라비아 반도에서 활동하여 중동 전지역은 물론 아시아의 일부까지 석권하는 광대한 이슬람 세력의 아랍권으로 성장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중세기에도 오늘날처럼 이슬람과 기독교권의 양대 세력으로 나눠졌습니다. 이 시기의 대결은 6차례에 걸친 이른바 “십자군 전쟁”이 잘 설명해 줍니다. 양대 충돌과 대결 거듭되는 이 시기에 유대인들은 비대하게 성장한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의 양 진영을 넘나들며 잉여 공간의 국외자로서의 생존을 영위했습니다. 강요된 배교나 탄압은 오히려 기독교권에서 심했던 시기였습니다. 후기에는 종교적 성숙기를 맞은 이슬람교권에서는 그렇지 않았지만, 기독교권에서는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죄인의 멍에를 짊어지고 3류 시민의 위치를 감수하며 살던 시기입니다.

4천년의 긴 년대의 유대의 민족사를 돌아볼 때 아마도 그 절반에 해당되는 이 시기는 유대인들이 가장 조용하게 역사의 뒤안길에서 숨죽이며 살았던 시기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문명권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정신이 부활된 이슬람교의 범아랍민족문명과의 대결 형식으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지만 세계사의 향방은 이 양대 세력의 움직임에 좌우될 것이 분명합니다.

분쟁의 몸통인 유대 민족의 세계사 등장은 기록으로 보아 기원전 2천년 이전으로 추정합니다. 여기서 이슬람교의 행동적인 신앙양식을 살펴보면 이슬람이라는 명칭은 본래 자기 자신을 절대자 앞에 내어던지며 그 뜻에 완전히 맡긴다는 아라비아어에서 비롯됩니다. 하루 5차례 시간을 정해 온몸을 던져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예배에서 그런 의지가 잘 드러납니다. 절대유일신에 대한 이런 절대복종의 신앙관은 기도를 마음속에서만 드리는 신앙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행동적인 것이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이슬람은 출발부터 보다 일상생활과 밀착된 종교이었고 일찍부터 사회성이 강한 역동적인 종교였으나 따라서 이슬람교는 현실에 대한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자세를 갖습니다. 현실 세계가 악과 고통으로 가득차 있다면 이를 피해 갈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연히 대결해서 알라신의 뜻에 따르는 악이 없는 세계로 변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문명권과 이슬람 문명권의 틈바구니에서 잉여 인간 그룹으로 끼어있던 종족이 20세기 초입부터 세계사의 전면에 등장하고 이제는 양대 문명 세계의 뇌관으로 자리매김 되기까지 유대 민족은 세계사의 큰 비극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기독교세계의 복판에서 벌어진 인류 사상 가장 끔찍한 대학살극 바로 나치스의 6백만 유대종족 인멸극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대학살극을 민족부흥의 발판으로 전환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고토에 재건됨으로서 중동이 다시 세계의 분쟁의 핵심지역으로 등장하더니 그 무대가 21세기 벽두 미국의 심장부로 옮겨 9.11 대참상을 맞고 이라크전쟁의 비극의 역사를 만들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이슬람과 유대교와 기독교가 지나온 과거 역사 그리고 현재에 있어 인류는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0.3%의 세계 인구로 노벨상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는 민족이 유대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자, 예술가, 학자들을 양산한 유대인의 한목소리가 억눌려 지내 온 소수 민족답지 않게 크게 들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격동의 20세기 물리학의 최고봉에 우뚝 선 아인슈타인과 인간의 의식 세계를 무의식의 언덕 너머로 확대한 프로이트, 한 세기를 소요와 동란으로 만든 칼 마르크스 등을 세상에 내놓은 유대 민족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가설과 역설 등 이들이 내 놓은 주장은 일파만파로 논란과 소용돌이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옳던지 틀리던지 항상 시대에 앞선 새로운 지평선을 내다보았고 역동적인 인류 역사의 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계의 분쟁의 몸통입니다. 세계는 이들로 인해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분쟁의 몸통이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라 온몸을 던져 새로운 한계에 도전했기 때문에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모든 면에서 갈등과 분쟁이 잇따랐고 그 몸통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9.11사건과 이라크 전쟁의 맥을 이어 볼 때 문명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자리로 돌아보며 이라크 전쟁은 어떤 명분도 평화를 저해한 요소임을 깨닫고 신구약성서를 통하여 아담의 역사와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의 족보를 생각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마태복음 초두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족보는 그저 형식적인 기록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필수적인 가교(架橋)요, 하나님의 언약을 입증해주는 증표(證票)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족보는 구약의 핵심이요 신약의 근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문의 족보를 통해서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언약을 좇아 유대인으로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인류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깨닫고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의 전쟁과 예수의 족보를 통하여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약성서의 첫 권 첫 장 첫 절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족보를 무심코 흘려보내서는 안됩니다. 참으로 구약예언의 완성이요 신약내용의 서론으로서 이 부분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 이주 때까지 열네 대이며 바벨론 이주 후로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로 42대의 인물 족보가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속에서 우리는 참으로 귀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고 무한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예수의 하나님관(觀)을 갖고 이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좇아 이 땅에 오신 메시아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왕국의 건설을 위해 왕의 혈통과 권위로서 이 땅에 왕으로 오신 왕임을 알아야 할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병든 자,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를 위로하고 억눌린 자를 해방하러 오신 구세주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가 완전수요 “7”을 두 번 곱한 수 곧 14대로 구성되었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예수의 교훈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신 메시지임을 깨닫게 합니다. 명백하게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 제일 신앙심이 좋다는 부시 미국 대통령이 주도한 싸움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음을 깨달으면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미국 족속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