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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쟁과 평화 / 요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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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전충현 목사 ([email protected])
본문 / 요 10:7
제목 / 전쟁과 평화


여러분께서도 알고 계시는 것처럼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지난 20일 <목요일>, 이라크 현지 시간으로 새벽 5시 35분에 시작된 미국과 영국의 대 이라크 전쟁은 조기에 끝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장기 레이스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27일까지의 피해상황은 이렇습니다.
이라크인 500여명 사망, 4,000여명 부상, 이라크군 포로 3,500여명 !
미영 연합군 48명 사망, 실종 미군 8명, 포로 7명 !

단 일주일동안의 피해상황이 이렇다면, 장기레이스에 들어간 이 전쟁으로 인한 피해상황은 앞으로 엄청나게 늘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
미국이 이 전쟁을 일으킨 <명분>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지난 해 9. 11 사건 이후 미국은 <악의 축>이라는 이름으로 몇몇 나라를 지목했는데, 그들 나라 중 하나가 <이라크>입니다.

미국이 보는 이라크는 대단히 위험한 나라였습니다.
언젠가는 <대량살상무기>를 만들어서 사용할 나라가 바로 <이라크>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 나라를 <무장해제>를 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미국이 전쟁을 일으킨 <명분>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세계평화>를 위해서 미국은 지금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여기 이 논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평화>를 얻기 위한 <전쟁> !
그것이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되십니까 ?
여기 이 논리는 힘으로 우리가 얼마든지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
정말 <힘>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

아닙니다.
<힘>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불과 일주일만에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습니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지금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안>과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한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쟁>은 인간이 범하는 죄 가운데 <가장 큰 죄악>이다"라고 말입니다.
미국의 정치가 <벤자민 프랭클린>은 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좋은 전쟁>이 없고, <나쁜 평화>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전쟁>은 언제나 <비참>하며 <비극>입니다.
<힘>으로 우리가 <평화>를 살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이제 <기도해야> 합니다.
<전쟁>이 속히 끝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평화>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소득>이 향상되면 평화가 오리라 !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 평화가 오리라 !

하지만 그것도 <오해>입니다.
지난날에 비해서 우리가 지금 어떻습니까 ?
<엄청난 풍요> 속에서 우리가 오늘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
그런데 요즘 훨씬 더 많은 가정들이 깨어지고 부서지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오 천년> 역사이래 우리는 지금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요즘 이렇게도 많은 가정들이 깨어지고 있습니까 ?
많은 사람들이 요즘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
너무나도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불안해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
<참된 평화> !
그것은 <유한한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리적인 힘>과 <높은 소득> !
그런 것들은 우리에게 <평화의 터전>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 와서 일을 하던 한 <이라크 노동자>가 지난 목요일 아침에 전쟁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고국으로 떠났습니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네 명의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막내 아이>는 아직 가슴에 안아보지도 못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다섯 명>의 가족들이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자신만이 안전한 이곳에 더 이상 머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쟁이 나고 일주일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의 마음은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습니다.
도무지 그의 마음이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미 전쟁터가 되어버린 고국으로 떠나갔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보다 더 평화로운 모습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아빠의 가슴에 안겨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 !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모습>은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것은 <물질의 유무>와는 전혀 상관없이 임하는 평화입니다.
바로 그 평화를 위해서 <이라크 노동자>는 이 땅을 떠나 포탄이 비가 오듯 쏟아지는 땅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평화를 맛볼 수 있겠습니까 ?
마치 어린 아이가 누릴 수 있는 평화가 그를 위해서 생명을 아끼지 않고 달려와 주신 <아버지>에게서 비롯되듯이, 우리 인간의 <진정한 평화>는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 !
바로 그 분께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인 우리 육신의 아버지>에게서 오는 평화와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평화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유한하신 인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우리의 아버지>는 늙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늙어 가시면 결국 그 분은 자식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가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버지로부터 오는 평화는 지극히 <일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평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분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에게는 <변함>도 없으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그러기에 그 분께서 주시는 평화는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 평화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 평화는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어떤 무기>도 깰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평화를 우리가 <어떻게>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
그것은 이렇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평화를 누릴 때는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신들과 함께 있을 때입니다.
그것처럼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우리가 확인하고 느낄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이것이었지 않습니까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
예수 그리스도 !
그 분은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

사람들은 흔히 <양>이라고 하면 언제나 <평화>를 연상합니다.
그처럼 <양>은 우리에게 <평화>를 연상하는 동물로 각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양을 가까이에서 본 사람들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양은 너무나도 불결한 동물이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을 통해서 우리가 평화로움을 연상하게 되는 것은 양의 불결함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역겨움을 마다하지 않고 날마다 양을 닦아주고 쓰다듬어 주는 <목자>가 있기 때문이랍니다.

오늘 우리가 죄와 허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목자>가 되십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근거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정말 <충분한 대답>은 오늘 <본문> 말씀 안에 있습니다.
보십시오 !
거기 예수님께서 당신 스스로를 우리에게 어떻게 소개하고 계십니까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
거기 그리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

나는 <양의 문>이라 !
성도 여러분 !
여기 이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중동의 양치기들>을 조금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동지방>에서는 목자와 양들이 들판에서 종종 <야숙>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가설 우리>를 만듭니다.
대체로 <목자들>은 주변의 <돌맹이들>을 주워다가 <울타리>를 만듭니다.
특이한 것은 그렇게 <돌맹이들>로 울타리를 만들고 나서는 <문>을 따로 만들어 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목자 자신>이 출입구에 누워서 문이 되어 줍니다.
밤사이에 맹수가 나타나더라도 자신을 넘지 않고서는 양을 절대로 해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목자들>은 그렇게 거기에 누워서 잠을 청하는 것입니다.

보이십니까 ?
양들을 지켜내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조금도 아끼지 않는 목자들의 모습이 말입니다.
<목자들>에게 이런 모습이 있기 때문에 양들은 맹수들이 간혹 등장하는
<들>에서도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양들은 <스스로> 평화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도 <양>하면 우리가 평화를 연상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내 인생의 <출입구>가 되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
우리에게 예수님은 그런 분이시기에 우리는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여기 이것을 가장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 본문이 그 유명한 <사 53:5-6> 말씀입니다.
기억하십니까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겪으셔야 했던 <시련>과 <아픔> !
그것을 우리가 진정 <가슴으로> 느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오늘 평화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내 삶의 정황이 아무리 험악하고 불리해도 우리는 평화를 말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의 가슴에 안겨 있을 때 !
그 때 그 아이가 누리는 평화는 물질의 양과는 전혀 상관없는 평화입니다.
주변에서 터지는 <포탄소리>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평화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로마 감옥에 갇혀있던 <사도바울> !
그도 우리에게 그런 평화를 말해 주었습니다.
보십시오 !
<빌 4:6-7> 말씀입니다.  신약성경 322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

성도 여러분 !
<사도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입니다.
<감옥>이 어떤 것입니까 ?
언제나 <춥고 배고픈 곳>이 바로 그런 곳이지 않습니까 ?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평화를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
하지만 오늘 <바울>은 그런 환경에서 평화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평화를 말하고 있는 여기 이 사람의 모습 !
이 모습은 <원주교도소>에 있는 형제들을 통해서도 우리가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권사님들>과 자매가 되어서 이제까지 10년 이상의 세월을 함께 하고 있는 형제들 !
그 형제들 가운데 그곳 원주교도소에서 <기독교 회장>이 된 <김일군 형제>가 있습니다.
그는 사회생활을 할 때 <인테리어 사업>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은 일을 하고 돈을 받으러 갔다가 감정이 격해지면서 유리로 된 재떨이를 던졌는데 그만 그것에 사람이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우발적인 사고>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단 한 번의 실수>는 그로 하여금 <영어의 사람>이 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곳에서의 <12년> !
그는 그곳에서 그렇게 <젊은 시절>을 다 보내버리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  어떻습니까 ?
참으로 <절망적인 상황>이지 않습니까 ?
하지만 아닙니다.
그는 우리 가운데 그 누구보다도 그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사람입니다.
갈 때마다 그 사람의 얼굴에는 <평화>가 가득합니다.
<자신의 입술>로도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곳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서 날마다 찬양하며 예배하며 살아가는 삶 !
여기 이곳에서의 삶이 너무나도 좋다고 말입니다.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답니다.

<무엇>이 !
<무엇>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렇게 평화를 노래하게 만들었습니까 ?
과연 <무엇>이 사도바울로 하여금 그렇게 차디찬 <감옥>에서도 평화를 노래하게 만들었느냐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인생의 출입구>가 되어주신다는 사실 !
예수님께서 <자기 인생의 파수꾼>이 되어주신다는 사실 !
바로 그 사실에 대한 <믿음>이 저들로 하여금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평화>를 노래하게 만든 것입니다.

미국에 있었던 <어느 중년부부>의 이야기를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내의 시력이 너무 나빠져서 눈 수술을 했는데, 그만 아내가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부터 남편은 아내를 그녀의 직장까지 매일 출근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아내에게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우리, 각자 출근하자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아내는 너무나도 섭섭했습니다.
<배신감>도 느꼈습니다.
<두려움>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남편의 그 말을 수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는 하는 수 없이 그 날부터 <지팡이>를 의지하며 출근을 시도합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많이 부딪히고 넘어졌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그녀도 이제는 서서히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2년의 시간이 지나자 이제는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를 운전하던 기사가 말합니다.
  부인은 참 복도 많습니다.
  매일 남편이 부인보다 한 발 뒤에 따라 가면서 버스에 함께 타 주고
  부인이 직장 건물에 들어설 때까지 지켜보다가 등뒤에서 손을 흔들어주고 있으니 말이오 !

버스 운전기사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내의 눈에서는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 동안의 <섭섭함>이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까지 아내는 혼자인 줄 알고 다녔지만, 실상은 그녀의 뒤에서 언제나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는 남편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아내에게 <커다란 위험>이 닥쳐왔다면 남편은 그녀를 위해 몸을 던졌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영암의 가족 여러분 !
우리에게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
여러분께도 이런 소리가 들리고 있습니까 ?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아시네 당신의 약함을
  사랑으로 돌봐주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

사랑하는 영암의 가족 여러분 !
여러분께 <우리 주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롬 8:34> 말씀을 보실래요 ?  신약성경 250면.
  누가 정죄하리요 ?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

보십시오 !
예수 그리스도 !
그 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열심히 기도하신다 하지 않습니까 ?

그러기에 여기 서 있는 제가 <나태의 늪>에 빠져서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지 못하고 있는 순간에도 <여러분의 주님>은 여러분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십니다.
여기 이 사실에 대한 <믿음>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언제나 평화를 노래할 수 있습니다.
<원주> 감옥에 있는 <김일군 형제>처럼 !
<빌립보> 감옥에 갇혀있던 <사도바울>처럼 !
우리도 그렇게 상황을 초월해서 평화를 노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런 모습이 오늘을 사는 여러분과 저의 것일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옛날 옛날에 바닷가에 조개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중에 특별히 사랑하시는 조개 속에 모래를 넣어주셨습니다.
조개 속에 박힌 <모래> !
그것은 <상처>요, <아픔>이요,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조개>는 도리어 그 상처, 그 아픔으로 인해서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갑니다.
결국 그 <조개>가 우리에게 내어놓는 것은 무엇입니까 ?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그렇게도 갖고 싶어하는 <진주> 아닙니까 ?

성도 여러분 !  보이십니까 ?
<고통>과 <시련>과 <아픔>이 변하여 <진주>가 되는 것이 말입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러기에 <모래가 박힌 조개>야말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조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정황 속에 이렇게 <하나님의 좋으신 섭리>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
그리고 이제는 그 <믿음>으로 상황을 초월하여 <평화>를 노래하십시오 !

<평화>는 <전쟁>으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평화>는 <힘>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지금의 전쟁>은 빨리 끝나야 합니다.

<평화>는 <풍요>에서 오지도 않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우리 인생의 <문지기>가 되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
내가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 !
그 분으로부터 <평화>는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 <평화>를 사모하십시오 !
그 <평화>로 여러분의 인생을 채우십시오 !
여러분과 저의 삶 속에 채워지는 그 평화로 이제는 우리 모두가 그 어떤 삶의 정황가운데서도 평화를 노래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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