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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생활에 기쁨이 있습니다 / 요 1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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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생활에 기쁨이 있습니다
요 15: 7-11

  오늘은 요한복음 15장 7절에서 11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그 생활에 기쁨이 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1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에서 "이것을"이라고 하는 말씀은, "이러이러한 생활"을 의미합니다. 즉 주님이 지시하시는 생활을 말합니다. 또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가리켜 주는 생활을 하게 되면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마음속에 충만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생활에나 다 기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 전까지는 모든 홈페이지 주소가 영어로만 등록할 수 있게 되어 있었지만 요즘은 한글로 등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홈페이지 주인이 영어 주소를 등록하면 고유의 것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한글 주소도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광성교회라는 한글 이름을 합동측 신학생 그리고 개척교회의 전도사가 등록해 버렸습니다. 왜 개인이 광성교회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까? 부산장신대학교의 이름도, 대전신학대학교의 이름도 자신의 것으로 등록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연락을 취하였더니 광성교회라는 한글 주소를 사용하려면 사용료를 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도 아닌 전도사가 이럴 수 있는 것입니까? 이런 일을 하고도 그런 생활에 기쁨이 있겠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생활을 하고 그 후에는 반드시 기쁨이 충만해지는 생활을 해야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어떤 생활에 기쁨이 있는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기도의 생활 (7-)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그 말씀을 듣는 척도 않고 잠만 자던 베드로가 큰 시험에 빠집니다. 평생을 두고두고 한을 남길만한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기도해야 할 사람이 기도를 안 할 때에는 전혀 기쁨은 없고 한으로만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너희가 성령 즉, 약속된 성령을 받기까지 기도하라고 하셨을 때 다락방에서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그 성령 충만함이 곧 기쁨 충만으로 이어졌습니다. 기도하는 생활의 결과는 기쁨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 두고도 기도할 때와 안 할 때가 밤과 낮처럼 차이가 났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부부로서 금실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많을 때까지 아기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이 여인은 수태하지 못하는 여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부부는 낙심치 않고 계속 기도하였습니다. 남편도 기어이 자기 아내를 통하여 아들을 달라고 기도하고 아기 못 낳는다는 엘리사벳도 아기를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천사가 나타나 말하기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네 집에 아기가 태어날텐데 네 가정은 물론이거니와, 그 아이의 생일이 되면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축하하며 기뻐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보통사람이 이렇게 됩니까? 예수님께서도 세례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중에 가장 큰 자라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길잡이요, 앞잡이로서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예수님을 얼마나 정확하게 증거 합니까? 그래서 세례요한을 가리켜 말하기를, 말라기에 예언된 엘리야가 곧 세례요한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굉장한 아들, 훌륭한 일꾼을 어느 가정에 보내실 것입니까? 주정뱅이의 가정에 보내겠습니까? 도둑의 가정에 보내겠습니까? 기도를 많이 하는 집을 고르고 골라서 보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들 딸들이 그렇게 훌륭한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로, 부부사이에 금실을 좋게 가지십시오. 싸우는 집안에 훌륭한 일꾼을 보내주실리 만무합니다. 두 번째로, 기도를 많이 하십시오. 기도하는 가정의 아들 딸들을 하나님께서 크게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기도가 그 가정에 얼마나 큰 기쁨을 선물합니까? 기도의 생활 끝에 주어지는 것은 주님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생활에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7절을 보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포도나무 비유의 말씀 끝에 주신 것입니다. 어느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그 포도나무가 열매를 아주 많이 맺었습니다. 그리하여 농부에게는 큰 영광이 되었고, 포도나무는 자랑거리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 원체에 붙어있지 않으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다 이루리라라고 포도나무 비유 끝에 주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라는 말씀은 포도나무 가지가 원체에 붙어있는 것과 같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말씀은 예를 들어, 귀신을 섬기는 사람은 무당에게 가서 점을 치지 않습니까? 지금 어느 곳으로 이사를 가야하는데 손이 없는 날이 어느 날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무당이 점을 치고 귀신에게 물어봐서 대답을 해주는데 어느 날, 어느 날은 손이 없으니 그 날 이사를 가라고 합니다. 점을 본 사람은 죽어도 다른 날에는 이사 안 갑니다. 아무리 손해를 봐도 안 갑니다. 꼭 그 날에만 이사를 갑니다. 무당이 한 말, 귀신이 해준 말이 그 사람 마음속에 꽉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꽉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하라고 하면 죽어도 하고, 하지 말라 하셨으면 죽어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쯤 되었을 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나 다 이루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주님의 말씀은 듣지 않고 내 소리만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 충만해 있을 때 그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곧 기도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메아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생활 하게 되면 기도 응답의 결과가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해 진다는 것입니다. 기도생활을 통해서 기쁨이 날마다 새롭고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Max Hendel이라고 하는 사람이 "기도는 전기 스위치를 켜는 것과 같다. 그것은 전기를 만들지 않는다. 단지 전기가 흐르도록 통로를 만들어 주는 것뿐이다."고 말했습니다. 발전소에서는 어마어마한 양의 전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면 그 전기가 우리 가정까지 오도록 시설을 합니다. 우리들의 집 문턱까지 전기가 왔다고 해서 그냥 사용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집안에 전기설비를 합니다. 모든 가전제품을 구입해 놓습니다. 그래도 사용할 수 있습니까? 그 때 스위치를 키면 비로소 전기가 무한정으로 흘러 들어옵니다. 캄캄한 밤에도 대낮같이 밝힐 수 있는 전등에 불이 들어옵니다. 온갖 가전제품이 작동합니다. 큰 공장에 있는 엄청난 기계도 작동합니다. 그러나 스위치를 내리면 당장에 모든 것이 정지됩니다. 도무지 쓸 수가 없습니다. 기도가 바로 그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스위치 자체가 전기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기도 자체가 능력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에게 통할 수 있도록, 우리 생활에 흘러 들어올 수 있도록, 주님의 축복이 통하고 흘러 들어올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들어 주는 것이 기도입니다. 신·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과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라고 하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하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예수님 안에 죽으나 사나 거하십시오. 말씀으로 충만케 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는 날 반드시 응답이 있고 응답의 결과는 날마다 주님의 기쁨으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생활에 기쁨이 있습니다.


  둘째, 결실의 생활 (8-)

  결실의 생활이라는 말은 성령의 열매맺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한달란트를 맡은 종은 주인이 돌아왔을 때 내놓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한달란트 그대로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본래 주인의 것입니다. 주인께 드릴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즉, 그의 생활에는 열매가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주인에게 책망을 받습니까? 마지막에는 빼앗기고 저주받고 쫓겨납니다. 영원히 이를 갊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열매맺지 못하는 삶에는 이처럼 비참함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다섯달란트를 맡은 종은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열매맺은 것들도 바칠 수 있었습니다. 주인이 얼마나 기뻐합니까? 주인께 얼마나 영광이 되었습니까? 온갖 칭찬과 축복을 다 받습니다. 우리들의 삶에 내놓을 만한 열매가 있을 때 주인에게 영광이 됩니다. 동시에 주님의 기쁨이 우리에게 충만해진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사는 동안 많은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 앞에 드릴 열매가 많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8절을 보면,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이라는 말씀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포도원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원체가 있고, 그 다음에는 가지가 나옵니다. 그러면 반드시 새 가지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를 다 거둔 후에는 그 가지를 다 잘라내야 합니다. 사명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즉, 묵은 가지에서는 절대로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잘라낸 후에는 또 새 가지가 나옵니다. 그 새 가지에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평생에 한번 열매를 맺고 사명이 끝나면 우리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새 가지가 나와 열매를 맺습니다. 그 아들, 딸들이 열매 맺으면 사명이 끝나고 손자, 손녀라는 새 가지가 나와서 또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자자손손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가정, 또는 자자손손이 농부 되시는 하나님께 바칠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매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서 5장 22절부터 23절까지 있는 말씀대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예수님이 나의 죄 때문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나의 구주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성령 받지 않고는 절대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면 성령 받은 증거를 우리 생활속에 나타내야 합니다. 그것이 아홉가지 열매라는 것입니다. 이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 가지는 찍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열매를 계속 자자손손 맺어나가면 농부 되시는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는 말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제자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옵니다. 일단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됩니다. 여러분의 아들 딸이 태어나서 아장아장 걷는다고 하여 일꾼이 됩니까? 사람 축에는 들어도 일꾼 축에는 못 들어갑니다. 일꾼이 되려면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훌륭한 인격자로 성장을 해야합니다. 제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고 해서, 즉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다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는 스승을 배워 가는 사람입니다. 스승을 닮아 가는 사람입니다. 스승의 삶을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스승을 높이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생활 속에 맺을 때 비로소 제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실의 생활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쁨이 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무를 심을 때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재목으로 쓰려고 심는 나무가 있습니다. 그 나무는 아름드리 나무가 되고 열길 스무길 자라는 것입니다. 그 것은 재목으로 쓰려는 용재목입니다. 재목을 위해서 키우는 것입니다.

둘째는, 관상수입니다. 여러분들의 집에 가보면 큰 화분에 나무를 예쁘게 키우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또 화분이 아닐지라도 정원에 예쁜 나무를 가꾸어서 보기 좋게 만드는 관상수가 있지 않습니까? 관상수를 심어놓고는 재목으로 쓰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눈을 즐겁게 하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관상수는 그 것으로 자신의 사명을 끝내는 것입니다.

셋째는, 재목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관상수로 쓰는 것도 아닌 유실수입니다. 열매를 구해서 심는 것입니다. 열매를 얻기 위해서 심는 유실수를 재목으로 씁니까? 관상나무로 씁니까? 전혀 아닙니다. 오직 열매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나무는 열매만을 위해서 심어졌기 까닭에 열매를 많이 맺을수록 주인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됩니다. 오늘 본문의 포도나무는 분명히 유실수입니다.

  1년, 2년, 20년, 30년 되었다는 신앙의 연조만 내세우면서 목에 힘을 주지 마십시오. 내가 얼마나 성령의 열매를 맺었는가?를 돌이켜 보십시오. 이 열매가 맺어질 때 하나님께 영광이요, 나에게는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결실의 생활에 기쁨이 있다는 말입니다.


  셋째, 사랑의 생활 (9-11)

  가정에 사랑이 충만해 보십시오. 부부가 금실이 좋고 서로 사랑하면 천국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곳이 있지 않습니다. 또 어떤 집에서는 부부가 날마다 싸우고 교회에 나와서는 온갖 경건한 모습을 보입니다. 집에서는 지옥의 생활을 하고 교회에 나와서는 천국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서는 지옥과 같은 생활을 하고 죽은 후에 천국가게 되어 있습니까? 아닙니다. 사랑이 있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미움이 가득한 곳이 바로 지옥이 아닙니까? 부부가 서로 미워하고, 부모 자식이 서로 미워하고, 집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도살장에 가는 거 같고 미움이 충만한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안데르센은 천국과 지옥을 이렇게 그려놓았습니다. 천국은 모두다 몸이 건강하고 웃음이 충만합니다. 그리고 식탁을 차려주었는데 그곳의 규칙이 수저가 자신의 키만한 겁니다. 키만한 수저를 어떻게 밥을 떠서 자기 입에 넣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먼저 앞에 사람을 먹여줍니다. 또 앞에 사람도 밥을 떠서 나를 먹여줍니다. 그러면서 서로서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에서는 서로서로 먹여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신이 먹으려다 보니 수저가 옆사람을 건드리고 돌아서서 싸우는 것입니다. 똑같은 조건인데 왜 천국은 감사를 연발하고 지옥은 항상 싸웁니까?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사랑과 미움에 차이입니다. 사랑의 생활에 기쁨이 있고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9절부터 11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10절에서 말하고 있는 그 계명이 무엇인지는 12절에 나와있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의 표준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가지고 내가 너희에게 베풀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즉, 너희가 나를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먼저 사랑했다는 선행적 사랑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너희는 내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은 사랑 밖으로 떠나지 말라는 말입니다. 즉, 미운 짓을 하지말고 사랑 받을 짓을 하라는 뜻입니다. 사랑 받을 짓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는 서로 사랑하는 사랑의 생활에 주님의 기쁨이 충만하다는 말입니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교장이었던 오긍선 박사님이 있습니다. 그의 이력은 굉장히 찬란합니다. 미국에 유학을 가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는데 한국인으로서는 서재필 박사 다음으로 제2호 의사가 된 분입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많은 공헌을 합니다. 그리고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교장이 됩니다. 이분은 항상 전차를 타고 출퇴근을 했는데, 한번은 퇴근길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뺏지를 달고 있는 학생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의 얼굴이 너무 창백했습니다. 의사라면 당장 알아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털어서 그 학생의 손에 쥐어주면서 어서 가서 밥을 사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그 학생은 거절할 겨를도 없이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굶으면서도 공부는 해야되겠다 싶어서 굶기를 밥먹듯 하고 공부하는 가난한 학생입니다. 그리고 그 교장선생님은 그 학생에게 다음날 교장실로 찾아오라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찾아가 보니 추천서 한 장을 써주면서 어떤 독지가를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그 추천서를 받은 독지가는 그 학생의 생활비와 학비 전부를 책임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학생이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까지 모두 그분의 도움으로 다녀왔습니다. 정말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는 그 곳에 얼마나 기쁨이 충만합니까? 주면서도 기쁘고, 받으면서도 기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과의 사랑, 너와의 사랑, 가정에서의 사랑, 교회에서의 사랑, 사랑이 충만한 생활에 주님의 기쁨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사랑의 생활이 날로 새로워지고 기쁨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기도의 생활에 기쁨이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라도 기도하지 않을 때 베드로는 큰 실수를 범하고 한으로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락방에서 열심히 기도한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얼마나 기쁨이 충만하며 보람 있는 삶을 살았습니까? 기도 생활에 기쁨이 있습니다.

둘째 결실의 생활에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는다면 그 성령 받은 증거가 바로 생활 속에 나타나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열매를 알알이 많이 맺고 자자손손이 열매를 맺어서 기쁨이 충만한 가정과 가문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사랑의 생활에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랑, 이웃과의 사랑, 사랑이 있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하나님은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미움이 있는 곳은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노니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이 사랑의 생활을 통해서 여러분의 가정에 천국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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