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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 고난의 뜻 / 고후 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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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 고난의 뜻 ♧
고후5:20-21,


어느덧 꽃피는 4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어저께는 3-4월 들어 모처럼 맞는 식목일 연휴인지라 많은 사람들이 벚꽃 나들이로 전국이 몸살을 앓았을 것입니다. 심방일정도 중단하고 하루 휴가를 드렸는데 어떻게 구경은 잘하고 오신 것입니까? 많은 성도 님들이 결석한 가운데서도 이렇게 주일을 성수 하고자 일정을 앞당겨 참석한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은 이번 주간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한 주전이라 예수님의 심경에는 많은 안타까움과 애처로움 그리고 분주함 등이 교차되어 나타나는 격동의 한 주간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남들이 바라보기에 수치와 조롱과 저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십자가의 형틀을 지고 골고다에서 돌아가셔야만 했을까? 십자가에 담긴 고난의 참뜻은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고난의 뜻"에 담긴 영적 의미를 함께 살펴보는 은혜의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는 「죄의 결과」가 무엇인가? 를 분명하게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 죄가 이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영혼의 죽음이 그를 사로잡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들은 벌거벗은 수치를 느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앞치마를 만들었지만 곧 앞치마는 시들어서 쭈글쭈글해지고 말았습니다. 떠나가 버린 영광을 다른 것으로 대치해보려고 하였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뒤늦게 야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다가오셔서 가죽옷으로 앞치마를 대신해주는 큰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 큰 사람이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다시 살리시고자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어 주신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덮으시고자 십자가라는 징벌을 받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대가는 아담과 하와 이상으로 십자가에서 채찍과 침 뱉음과 옷 벗김과 같은 갖은 조롱을 당하셔야만 했습니다. 비록 예수님은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지고 가시는 것이지만 죄는 추악하며 더러우며 저주스러운 것이기에 그토록 끔찍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죄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는 윤리 도덕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저주를 받아 내어 쫓김을 받는 것이 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죄를 대신 짊어지셨을 때는 처참하고 무자비하게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가 지옥 불에서 처참한 고통을 당하는 것을 통해 죄의 대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결과를 쉽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세상 살다보면 다 그럴 수 있는 것이지 하고 슬쩍 넘어갈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믿음의 사람들이 죄의 문제를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슬쩍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그처럼 처절한 고난을 통해 죄악 가운데서 우리를 건져주셨는데 오늘날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의 은총을 배척하고 세상과 짝하여 사는 사람들은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무서운 죄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 아들이라도 죄를 대신 짊어질 때는 그토록끔 처참한 죽음을 당하도록 하였는데 하물며 그 아들의 사랑조차 배반하고 떠나가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그냥 놔두시겠습니까?

성경은 "그들이 놀라며 괴로움과 슬픔에 잡혀서 임신한 여자같이 고통하며 서로 보고 놀라며 얼굴은 불꽃같으리로다,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 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사13:8-9) 하셨습니다.

이제 머지 않아 역사의 종말이 다가올텐데 그 때에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불의 심판만이 있을 것입니다. 이 심판이 얼마나 처참하고 무서운 것인가?를 아신 주님께서는 심판 받을 가롯 유다를 향하여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다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마26:24)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당신의 깊고 크고 위대하신 사랑의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쉽게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줄 분명히 아십니까? 헬라 원어에는 '사랑'이란 말이 여러 가지 단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랑에는 먼저 이성간의 조건부적인 사랑인 에로스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성간에는 결혼을 조건으로 서로 사랑하다가 사랑이 깊어지면 결혼합니다. 그러나 그 조건이 깨어지면 이혼해 버리고 남남이 되어 버립니다.

또한 친구간의 사랑인 필레오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아무리 친구가 좋고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있고 난 다음에 친구가 있지 나를 없애고 친구만 위하는 사랑은 없습니다. 그 때문에 필레오 사랑은 깨어지는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그 다음에 부자간의 사랑인 스톨게의 사랑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최고 최대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이란 자기 친자식 골육에 대한 사랑이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사랑이 아무리 좋고 아름다운 것이라도 이는 한정된 사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씀하신 그 사랑은 어떠한 사랑일까요? 그것은 에로스, 필레오, 스톨케가 아닌 아가페 사랑입니다. 아가페는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일반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아가페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죄 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 손 든 그대로의 인생을 일방적으로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고 말씀하셨습니다.

말로써 우리가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주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희생의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사랑한다면 희생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고 말씀하셨는데 원수 된 우리들을 위해 그 아들을 보내 사 십자가에 못박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도저히 인간의 생각으로 측량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통해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세상적 승리의 개념은 적을 물리치거나 어떤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승리하기 위해 남을 죽이고 모함하며 넘어뜨리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승리는 스스로 낮아지고 죽기까지 복종하는데서 나타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남을 지배하고 죽임으로써 승리를 얻고자 하는 곳에는 언제나 갈등과 증오와 싸움뿐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죽음으로써 얻게되는 승리에는 언제나 화해와 사랑과 평화가 깃들게 되어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섬김과 자기 희생을 통해서 진정한 승리를 이루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① 주님은 종으로써 승리하셨습니다. .....
주님은 고난의 종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세상사람들은 남위에 군림하고 지배자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섬기는 종으로 오셔서 제자들을 섬겼고, 많은 사람들의 손발이 되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섬김으로 인해 인류의 15억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매주일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어 경배하며 주의 이름을 높이 찬양하고 있습니다.

② 주님은 낮아지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
사람들은 높아지고 우월해지며 교만의 자리에 이르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말구유에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낮고 천한 자들과 함께 사시며 겸손의 극치를 보이셨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가 됨을 실제로 증거해 보이셨습니다.

③ 주님은 죽으심으로써 승리하셨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자기 희생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제 목숨을 잃으면 찾게된다고 하셨습니다. 죽어지는 곳에서 새 생명이 태어나게 되고 그곳에서 많은 열매가 맺혀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향해 고난의 길을 묵묵히 순종하며 걸어가신 주님은 그 고난과 희생을 통해 진정한 승리와 영광을 얻게 되셨습니다.


넷째: 예수님의 십자가는 용서의 대가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의 복음에 대하여 비난하는 사람들은 "기독교는 불륜의 종교요, 부도덕의 종교이다. 왜냐하면 간음한 사람도, 살인한 사람도, 음란한 사람도 그밖에 어떤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회개만 하면 용서해 준다고 하니 부도덕을 조장하는 종교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라고 반박합니다.

성경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나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교인 율법사
들은 이 여인을 끌고와 "선생이여,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러한 여자는 돌로 치라 명하셨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 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허리를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시다가 다시 일어나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땅에 글을 쓰시니 저희가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님과 여인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요8:10)물으셨습니다. 여인은 "주여 없나이다."고 대답하매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요8:11)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약에 무작정 죄를 용서해 주시기만 하신다면 "굳이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고 말씀하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외에도 예수님은 남편을 다섯이나 바꾼 여인의 음란죄도, 바라바와 같은 살인자도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용서의 복음 죄 사함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 자신이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므로 다 감당하실 수 있기 때문에 당당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사53:5-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얼마나 그 대가가 처절하고 고통스러웠던지 예수님은 "아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셨고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말할 정도로 힘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용서의 능력,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온 우주에 버림을 당하였으며, 해도 달도 별도 빛을 내지 아니하고 산천 초목도 바다도 울고 떨었습니다. 이렇듯 십자가의 은혜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한 용서의 복음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용서를 받고 나면 가슴이 저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용서의 복음을 받은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할때마다 " 주님이시여 어찌하여 나같이 못나고 실수와 실패와 죄악투성이인 나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그 고귀한 생명을 받치셨나이까?"며 탄식하며 울뿐입니다.

용서의 복음을 죄 사함의 은총을 받은 우리에게는 천국의 기쁨과 은혜의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죄를 더 이상 얽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축복을 바라보며 희망과 용서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하는 우리들도 이 같은 용서의 복음에 접목하기 위하여 진정한 죄 씻음의 의미와 용서의 복음에 접붙임을 받아야 합니다. 야곱이 형 이삭을 속이고 장자의 명분과 안수를 받은 값을 치르기 위하여 야곱은 20년이라는 종살이를 해야했고,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너를 야곱이라 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하는 용서의 축복을 받고 나서야 야곱은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의지로 하나님을 쫓다가 오히려 참 하나님의 사람들을 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에 앞장섰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음성과 빛을 받고 눈이 감기고 앞을 못보고 식음을 전폐하고 회개하는 고통을 통하여 다시금 사울에서 바울로 거듭남을 받았습니다.

용서의 복음은 무작정 사함이 아니라 자신의 지은 죄가 주님의 은혜로 사함 받고 고침 받았다는 만남의 고백이 있기 전에는 결코 사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죄사함과 용서의 기쁨을 고난이라는 아픔이라는 절망이라는 좌절이라는 쓴잔을 통하여 맛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번의 아픔으로 주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주님의 거듭난 백성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작업입니다.

이 같은 용서와 화해와 사랑의 복음을 덧입은 이후에는 우리는 언제든지 주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며 용서를 구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십니다."(계3:2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사실 사순절 기간은 하나님의 넓고 넓으신 은혜와 사랑을 맛보는 축제의 기간입니다. 더 나아가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품으시는 사랑을 맛보는 은혜의 기간입니다. 우리는 이 귀한 주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네가 언제 어느 때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덧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용서의 복음 자유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는가?를 되돌아보며 천국의 은혜와 기쁨을 전하며 찬양하는 그런 사순절간의 모습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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