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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 결산을 위한 믿음 / 히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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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결산을 위한 믿음
히브리서 11:22
설교자 : 김형준
 

가끔 저는 ‘목사님, 제가 살아온 이야기를 하자면 몇 권의 책으로도 모자랄 것입니다.’ 혹은 ‘제가 바로 슬픈 영화의 주인공 같은 인생을 살아 왔습니다. 누군가 드라마로 만든다면 요즘 말로 히트 칠겁니다.’ 라는 이야기를 교인들로부터 듣습니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요셉도 정말 드라마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여러 명의 계모 밑에서 배다른 형제들과 함께 복잡한 가정에서 자라며 많은 설움을 당했습니다. 형제에게도 늘 소외당했습니다. 결국 형제들에 의해 애굽의 노예로 팔렸습니다. 애굽 시위대장 집에 팔려가 노예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섬기던 시위대장 부인의 유혹을 거절한 사건으로 오히려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됩니다. 감옥에 갇힌 요셉은 그 곳에서도 열심히 봉사하며 어려운 사람을 도왔지만, 요셉의 도움을 받은 술 맡은 관원장은 은혜를 잊고 맙니다. 나중에야 이 관원장의 추천으로 바로의 꿈을 해몽해주게 될 뿐 아니라 앞으로 될 일을 준비할 방법도 알려주게 됩니다. 요셉은 이방인으로 그것도 노예의 신분으로 하루아침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억울함을 풀 수 있는 높은 자리와 권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팔아버린 형제들과 억울하게 옥살이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을 용서해줍니다. 더욱 겸손히 나라를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이방 사람인 애굽 사람도 무려 70일간이나 통곡하며 슬퍼하였습니다. 본문은 바로 요셉이 후손을 위해서 유언을 하고 세상을 떠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파란만장한 인생이 또 있을까요? 그러나 인생이 평탄하지 않았던 요셉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한결같은 신앙입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도, 노예였을 때나 국무총리가 되는 높은 지위에 올랐을 때도, 혼자 있을 때나 여럿이 함께 있을 때도, 어릴 때나 늙었을 때도, 살아있을 때나 죽는 순간의 때도 변함없었습니다.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달라집니다. 출세를 하거나 혹은 사업에 실패하면 변합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직분을 받으면 사람이 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어떤 것이 달라진다 해도 변함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변함없을 수 있었던 이유를 히브리서 기자는 요셉이 삶을 마감하는 장면을 클로즈업하면서 바로 믿음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이 떠날 것을 말하고’ 히브리서 11장 22절 앞 구절에는 없는 표현 ‘죽을 때에’를 주목해보십시오. 헬라어 ‘텔류톤’은 단순한 죽음이라는 표현과는 달리 결산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요셉은 삶을 결산하면서 후손들에게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믿음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 우리 믿음이 과연 어떻게 보이고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믿음은 삶의 현장에서 어떤 모습, 어떤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인생을 결산하는 날, 요셉처럼 ‘이것이 믿음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요셉의 믿음이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었는가 보면서 우리 믿음의 특징은 무엇이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요셉 믿음의 첫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비전’을 가진 믿음이었습니다. 요셉이 자손과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하여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떠날 것을 명하는 유언은 곧 자신이 품고 있던 하나님의 비전을 전달하는 행위입니다. 요셉의 일평생은 하나님의 비전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시간이었습니다.

창세기 37장 5-17절에 나오는 요셉의 꿈 이야기를 보십시오. 그가 밭의 곡식을 묶었더니 요셉의 단은 일어서는데 나머지 단이 그의 단에 절을 하는 꿈을 꿉니다. 다시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열한별이 요셉에게 절하더라는 내용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꿈을 믿었습니다. 그것을 이루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비전이란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 사이에 어떤 삶의 태도를 갖고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비전을 품은 사람이 보여주는 삶의 자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삶의 현장에서 어떤 문제를 만나더라도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는 시각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문제를 보기 때문입니다. 현실 상황을 보면 도무지 해결할 방법이 없을 것 같으나 능히 이루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결과를 보고하는데 10명의 정탐꾼은 문제가 무엇인지 만을 보고했으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문제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았기에 문제를 긍정적으로 보고했습니다.

또 하나 하나님의 비전을 품은 사람은 환경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기 원하시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갑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오는가?’ 고민하며 쉽게 팔자타령을 합니다. ‘왜 하필 나인가?’

요셉은 어렵고 힘든 고비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형제들에 의해 노예로 팔리고, 팔려간 집에서 누명을 쓰고 감옥까지 갑니다. 감옥에서 요셉은 높은 관리의 꿈을 해몽해주어 복직되도록 그를 도왔지만 잊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자기 앞길이 막다른 골목과 같아도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점점 더 힘들어지더라도 해결될 것을 믿으며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참아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그곳에 처하게 하신 하나님에 대해 불평하거나 불신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 상황 속에서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역경과 유혹 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비전 때문이었습니다.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에 살아온 삶을 정리하며 후손에게 위대한 교훈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비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굳게 믿는 믿음에서 나온 비전으로 인해 요셉은 끝내 다시 일어선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셉이 알고 있었던 자신의 삶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복이 임하고 흐르게 하는 사명입니다. 그러기에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도 사람들은 요셉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임을 알았고, 요셉을 통해 자신들이 복 받음을 보았습니다. 감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 죄수의 신분으로 오히려 섬기고 사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도 마찬가지로 요셉을 통해서 온 애굽이 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요셉이 이러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까닭은 보냄 받은 자의 사명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5장 5절 말씀 아버지 야곱이 죽고 형제들은 불안했습니다. 예전에 요셉을 팔아 넘겼던 일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야 아버지 보호아래 있었지만 야곱이 죽고 난 후에 보복당할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런 형들에게 요셉은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라고 안심시켜줍니다. 즉 ‘팔려온 자’가 아니라 ‘보냄 받은 자’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나를 통해서 내가 속한 가정과 교회 그리고 직장이 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당신이 있음으로 우리가 함께 기쁨과 복을 누리는 영향력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있다고 하는 우리의 삶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문제 앞에서 해결할 방법이 있을 것이라 진지하게 믿고 낙심치 않으며 극복해나갑니까? 아니면 낙심하고 있습니까? 고통과 어려움이 닥칠 때 흔히 하듯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에게 주신 지금의 상황 가운데 주님은 내가 무엇 하기를 원하실까요?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이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이웃과 이 민족위에 흐르기를 원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동안교회 때문에 동대문구와 서울, 우리 민족이 복 받는 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으로부터 증거된다면 우리는 요셉처럼 참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겠습니다.

요셉이 가진 믿음이 두 번째 특징은 바로 ‘역사의식’을 가진 믿음입니다. 즉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역사의식을 가지고 역사를 책임지는 삶을 삽니다. 본문을 보시면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는 헬라어로 ‘엠네모뉴센’입니다. 이 단어의 원형인 ‘므네모뉴오’ 는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생각나게 하다, 숙고하다, 기억하다, 언급하다’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요셉은 지금 성공한 사람입니다. 온 애굽 사람이 요셉을 우러르고 따를 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까지 환대해 주었습니다. 편안하고 안전한 곳입니다. 언제까지나 이 안락함을 누리고 살 것 같은 환경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왜 자신이 죽는 마지막 순간에 현실과는 동떨어진 유언을 합니까?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을 언급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창세기 15장 13-14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 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말씀하신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임을 굳게 믿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 뒤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며 고통을 당할 것을 보았습니다. 그 기간이 무려 400여년이 될 것도 알았습니다. 바로 그 때에 그들에게 가장 필요하게 될 것은 하나님의 약속임을 알았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들을 고통과 탄식의 땅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가나안으로 인도하신다는 확신만이 그들로 죄를 범하지 않고 희망 가운데 살 수 있도록 할 것이었습니다. 마치 혹독한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약속과 꿈으로 이겨내었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을 예언하고 그 증표로 자기 해골을 가져가게 함으로 얼마나 분명하게 일어날 일인지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자신의 관심은 애굽이 아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이 있음을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

유명한 주석가였던 아더 핑크 목사님은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유언은 요셉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 것이며, 요셉의 형제와 후손들에게 참된 희망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었고 나아가서 공개적으로 약속의 말씀을 후손들에게 기억하게 함으로써 진정한 믿음의 본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앞으로 될 일에 대한 역사의식을 갖습니다. 역사의식은 오늘의 현실을 보고 생각하며 판단하는 것이 아닌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 가신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마태복음 24장 25절의 말씀에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우리 뒤에도 이 세상은 존재하며 역사는 주님의 재림을 향하여 어둠 가운데로 서서히 걸어 들어갈 것을 압니다. 종말을 향해 나아갈수록 고통하며 혼돈이 일어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3절에 ‘말세에 어려운 때가 올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며 감사할줄 모르며 불경스러우며 무정하며 원한을 풀지 않으며 비방하며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 선을 좋아하지 않으며 배신하며 무모하며 자만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할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 후손들이 고통당할 때 우리가 요셉처럼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요셉은 지금 당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유언을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앞으로 다가올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힘을 얻고 승리할 수 있도록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우리도 반드시 다시 오실 주님을 가르치고, 말씀 안에서 저들이 희망을 가지고 어려운 세대를 이길 믿음을 선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듣고 열심히 훈련합니다. 어려움이 오면 기도하고 이겨내기도 하고 때로는 지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만을 위한 믿음 생활이라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목사님, 이렇게 별나게 믿어야 합니까? 그냥 살면 되지요. 주일날 예배 나오고 가볍게 친교하고 생활에 부담 없이 신앙생활하면 되는데…… 기도 훈련에 성경연구훈련에 너무 요란스럽지 않습니까?’ 하는 분도 있습니다만, 우리는 요셉처럼 진정 머물러야 할 곳이 하나님 나라임을 가르쳐야합니다. 그 희망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이기고 믿음으로 승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비전을 선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평안함과 안락함보다 다가올 마지막 때를 위한 영적 훈련을 중요시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만을 위함이 아니라 다가올 시대와 반드시 이루어질 약속을 위해서 오늘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복됩니다.

요셉의 믿음 세 번째 특징은 바로 ‘공동체를 위하는’특징으로 나타났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믿고 그 약속을 신뢰하던 요셉은 자녀들뿐 아니라 형제와 친척들을 사랑하고 그들도 약속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섬겼습니다. 요셉처럼 진정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은 공동체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더불어 사는 가족과 민족에 대한 책임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죽기 전, 창세기 50장 24절에서 ‘요셉이 그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하고 유언을 합니다. 이어서 25절을 보면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합니다. 그의 관심이 가족을 넘어서 공동체로 향하였습니다. 앞서 20절을 보시면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요셉이 아는 하나님은 개인만을 위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을 통해서 펼쳐질 많은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았고, 개인이나 혹은 가족뿐 아니라 더불어 가는 공동체가 함께 약속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자기 속에 있는 고통과 근심은 바로 형제 친척들이 주님의 구원을 함께 받기를 원한다는 간절함에서 온다 하였습니다. 얼마나 간절했는지 자신은 하나님의 구원과 상관없게 된다 할지라도 공동체가 구원받기를 사모했습니다.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기 32:32에 보면 ‘그러나 합의 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라고 간절히 외칩니다. 이 큰 구원의 역사를 함께 나누고 싶은 부담감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실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개인이 축복을 받고 자녀들이 성공하도록 기도하는 것이 잘못되지는 않았습니다만,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뜻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요셉은 일생을 통해서 자신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통해서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보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밑에서 술 맡은 관원장으로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민족의 공동체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때, 권세와 안락이 있는 자리에서 오히려 공동체를 위하여 헌신하는 자리로 바꾸어 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일은 개인적인 결단이요 역사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순간 천국 시민의 공동체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더불어 사는 삶이 시작됩니다. 그 삶은 단순하지 않고 주님의 관심과 뜻을 펼쳐나가는 사명 공동체의 삶입니다. 나의 생활과 가족도 중요하지만 우리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이웃을 위한 기도와 봉사, 선교의 책임을 지기 원하십니다.

요셉은 자기중심적 생각과 사고, 자신의 성공과 평안함에 머무를 뻔했었습니다. 만약 요셉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고 성숙되지 못했더라면 자기를 팔아버린 형제들을 용서하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애굽에 팔려온 기억을 단순히 상처 입은 배신감과 그로 인해 겪은 고통과 아픔에만 초점을 맞추었더라면 결단코 자기 형제들을 죽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만민을 구원코자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기에 받아들였고, 그 고통과 아픔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용서는 나 중심적인 생각에 머물러 있을 때는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조명해 볼 때만 가능합니다.

이제 우리의 삶도 이웃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세계를 볼 때도 공동체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유은하 자매가 지금 바그다드에서 고통 받는 저들과 함께 있습니다. 매스컴에서 보도하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가 유은하 자매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쉽게 이야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하 자매는 시야가 우리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고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라크를 향한 복음의 부담감으로 인도했습니다. 열방을 향해 하나님께 진심으로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우리 청년들과 성도님을 바라보며 그 가운데 하나님의 기쁨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런 청년들은 우리교회, 우리교인, 우리나라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저를 발견케 하여 부끄럽게 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신앙의 시야는 어디쯤 머물러 있습니까? 나 자신이 아닌 공동체로 향하는 믿음 속에 선교와 전도의 열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 삶 속에 있는 문제만을 보지 맙시다. 그 문제를 알고 계시고 능히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갑시다. 노예로 팔려가 감옥에 들어갔을 때도 능히 풀어 가시는 하나님을 보았던 요셉처럼 말입니다.

오늘의 삶을 단순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사랑하심을 선포하며 삽시다. 기도, 구역예배, 선교, 섬김, 봉사, 훈련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선포하는 믿음의 삶의 모습입니다. 나 아닌 나 이후로 이어질 역사를 생각하며 점검해봅시다. 마지막으로 나를 넘어 복음 증거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관심에 다시 한번 헌신하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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