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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꼭 기억해야 할 여인 / 막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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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기억해야 할 여인(막 14:3-9)


여러분들은 어제 신문보도를 통해 노 대통령이 눈물을 훔치는 사진을 보았을 것입니다. 지난 4일 청와대에서 열린 동티모르 순직, 실종 유가족과의 오찬에서 대통령은 인사말을 하려고 마이크를 잡았으나 맞은편의 故 민병조 중령의 모친 김정자 씨가 울먹이자 20여 초간 말을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대통령은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제가 여러분 모시고 잠시 얘기 나눈다고 ... 국가가 진 빚을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여러분 모시고 잠시 인사하는 것이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라 생각합니다.’라고 한 뒤 몇 초간 말을 잊지 못했습니다. 대통령은 이어 ‘제가 먼저 목이 메면 안 되는데...’라면서 또 말을 끊었습니다. 결국 눈물이 떨어지자 냅킨으로 닦고 ‘또 다른  군인들을 파병하게 돼 마음이 무겁다.’고 하였다는 보도입니다. 개인적으로 대통령의 눈물은 순수하고 따듯한 마음을 증거하는 귀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점점 더 강퍅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눈물은 소중한 것입니다.

더욱이 다른 사람의 아픔이나 슬픔으로 인해서 내 눈에 눈물이 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떤 일에 감정적으로 공감하여 깊이 슬퍼하거나 아파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 아픔에 구체적으로 동참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 이라크 전쟁이 한창인데, ‘인간방패’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그것도 이라크 사람이 자국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국인들의 모임이고 그 중 한국인인 배상현, 한상진, 유은하 씨 등이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전 평화팀으로 활동하던 이들이 지난 달 30일 이후 차례로 바그다드에서 철수했지만, 28살의 여인 유은하 씨는 아직도 바그다드에 있다는 것입니다. 독실한 크리스찬인 그 녀는 정치, 이념적 신념보다는 종교적 신념으로 ‘나라도 끝까지 옆에 남아서 이들의 고통과 외로움을 달래주고 싶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전쟁을 반대한다고 시위하며 평화운동을 하기는 쉽지만 지금 그들이 당하는 고통과 아픔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동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말 감탄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명상하며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얼마나 이해하며 그의 고통과 아픔을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가? 우리가 그의 고난과 죽으심에 공감하여 눈물을 흘린다하더라도 그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은 어떤 것이 있는가? 예수의 제자들마자도, 심지어는 수제자 베드로까지도 주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주님이 가시는 수난의 길에 방해가 되었으며 모두 멀찍이 도망가 있었다는 것, 부끄럽지만 모두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도 그 대열에 서 있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마가복음 14:3-9에는 이름 없는 한 여인이 예수의 머리에 기름을 부음으로써 ‘저가 힘을 다하여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온 세상 어디서든지 이 여인의 한 일도 전해져서 기어하게 될 것이다.’는 칭송을 들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여인의 사건은 4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무게 있는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 사이에는 다른 차이점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4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택하였고,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하여 그 차이점을 찾아보며 그 의미를 헤아려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마태는 이 여인에 대한 마가의 보도를 거의 그대로 전하는 반면, 누가와 요한에서는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여인을 많은 죄를 지은 ‘죄인’으로 부각시킵니다. 그 녀는 예수의 머리가 아니라 눈물로 예수의 ‘발’을 씻고 자기 머리털로 닦은 후, 그 발에 입 맞추며 기름을 바릅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에서는 눈물을 흘리거나 예수의 발에 입 맞추지 않고 단지 예수의 발에 기름을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 여인의 이름이 베다니에 살고 있던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라고 밝힙니다. 이렇게 누가와 요한은 ‘예수의 머리에 기름 부은 여인’을 예수의 발을 씻은 ‘죄인’으로 변형시키면서, 여인을 칭송한 예수의 말을 보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교회 전통은 네 복음서의 차이에 주목하지 않았고, 실제로 이 여인이 어떠한 인물이었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단순히 네 복음서를 적당히 혼합해 교회의 필요에 따라 신화적 인물을 만들어 냈습니다. 즉 마가복음이 보도하는 ‘예수의 머리에 기름 부은 여인’을 누가복음과 결부시켜 ‘죄 많은 여인’으로 말하면서, 이 죄 많은 여인이 값비싼 향유의 옥합을 깨뜨려 예수에게 드리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은 헌신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그 녀의 많은 죄를 용서받은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여성신학자인 엘리자베스 피오렌자는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이름 없는 여인’을 실제로 예수를 메시아로 인지하고 예언자적 직무를 감당한 여인이었으나, 누가와 요한은 이 여인의 이야기를 그리스-로마인 청중들에게 적응시키기 위해 단지 예수에 의해 용서 받은 큰 죄인과 예수의 친구인 베다니의 마리아로 변형시켰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로부터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그 녀를 기억하며 그 녀가 한 일이 말해지리라.’는 칭송을 들은 이 여인의 행위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망각되었다고 항의합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수난 기사가 시작되는 첫 서두(14:1-9)에 예수의 머리에 기름 부은  여인의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유월절과 무교절 이틀 전에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흉계를 꾸미고 있던 바로 그 때(막14:1-2)에, 예수는 베다니에서 나병으로 고생하던 시몬의 집에 머물며 식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한 여인이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기름이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붓습니다. 이것을 본 몇 사람이 그 기름을 팔면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큰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화를 내고 그 녀를 꾸짖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그 사마들에게 ‘왜 그 녀를 괴롭히느냐.’고 꾸짖으며 여인으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가만 두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언제든지 하려고만 하면 너희는 가난한 삶들을 도울 수 있다.’고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8절에서는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준비하였다.’고 합니다.

당시의 권력자들인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던 그 무서운 때에 예수를 찾아가서 옥합을 깨뜨려 값비싼 기름을 예수의 ‘머리’에 부은 여인의 행위는 무엇을 뜻합니까? 본래 구약에서 ‘머리에 기름 붓는 일’은 왕이나 제사장을 임명하는 일과 관련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론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라고 명하였고(출 29:7), 사무엘은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운 사실을 알려 줍니다(삼상 10:1). 따라서 우리는 ‘이름 없는 여인’이 예수의 ‘머리’에 기름 부은 일도 예수를 ‘기름 부은 이’인 메시야로 승인해 고백하는 일과 관련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기자는 14:8에서 그 여인이 예수의 ‘머리’가 아니라 ‘몸’에 기름을 부은 것으로 변형시키면서 그 여인이 예수의 몸에 기름을 부은 것은 예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추측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즉, 마가복음 기자는 한 ‘이름 없는 여인’이 예수를 메시아로 인식하고 예수의 머리에 기름 부은 사건에 대한 옛 전승 자료들을 입수한 후 그 자신의 신학적 관점에 따라 이 여인이 예수의 ‘몸’에 기름 부은 것으로 변형시키면서 예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행위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전승에 대한 마가복음의 신학적 해석에 의해 이 여인은 예수의 머리에 기름 붓는 행위로 죽임 당한 예수가 바로 종말의 메시아임을 알리고 동시에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길을 예비한 예언자의 직무를 감당한 여인으로 증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 기자는 분명히 예수의 머리에 기름 부은 여인이야말로 그 때까지 그 어는 누구도 볼 수 없었던 사실, 즉 예수가 종말의 메시아인 ‘사람의 아들’로서 수난을 당해야만 하는 사실을 올바로 인식한 여인으로 증언하고 있으며 또한 예수가 그토록 피하려고 했던 십자가의 그 길을 굽히지 않고 곧게 가도록 ‘주의 길을 예비한’ 예언자적 행위를 수행한 여인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마가복음의 핵심이 되는 ‘복음’과 관련하여 단지 이 여인만이 예수로부터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마가복음 기자는 이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보도하는 앞 뒤 문맥에서 예수의 모든 제자는 예수가 메시아로서 가야할 수난의 길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으며 게다가 예수를 배반하고 부인하여 한 명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가벗고 도망친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 강조하고 있습니다.(막 9:10,32, 14:10-52, 66-72) 특히 본문에서 예수의 머리에 기름 부은 여인을 칭찬하는 이야기와는 대조적으로 8:31-33에서 예수가 수제자인 베드로를 무섭게 꾸짖은 이야기를 보도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마태복음처럼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베드로가 예수가 가야 할 수난의 길을 만류하자 베드로를 ‘사탄’으로까지 말하며 꾸짖었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 이 여인의 칭찬받는 모습이 더욱 돋보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예수의 머리에 기름 붓고 예수로부터 칭송받음ㄴ ‘이름 없는 여인’을 단지 ‘죄 많은 여인’으로 간주하여 그 녀를 단순히 사랑과 헌신의 모범으로 제시해온 것이 얼마나 마가복음의 증언과 거리가 먼 것인지 알았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의 남자 제자들이 예수의 사명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수난의 길을 만류하던 상황에서 수난 당할 예수를 메시아로 인식하고 수난으로 향하는 메시야의 길을 ‘곧게 만들며 예비한’ 예언자의 직무를 감당한 여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소유 중에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붓고 그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오늘 다시 발견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주님 곁에 있는 그를 따르기를 원하는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사순절을 지나며,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옳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의 십자가 고난에 걸림돌이 아닌 고난의 동참자인가 다시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당시에 그의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제자들이 예수의 수난의 길을 예비하는 이 여인을 꾸짖었습니다. 혹시 오늘 예수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교회와 우리들이 종말의 메시아인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을 꾸짖고 방해하는 것 아닌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 주님이 다시 오신다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분명 다시 십자가를 지실 것인데, 그 십자가는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는 그 주님의 십자가를 이해하고 동참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가? 사순절에 진솔하게 살펴보아야할 문제입니다.

성령님이여, 우리를 감동하시사 지금 우리들의 삶 속에서 우리 주님이 아파하시는 고난은 무엇인지 깨닫게 하시고, 우리들도 그 고난을 이해하고 그 길을 예비하여 그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며 한 주간을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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