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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을 향해 고개를 들라 ! / 요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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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 10:9
제목 / 영원을 향해 고개를 들라 !


어린 시절에 유달리 <연>을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집안 사정이 그리 넉넉하지 못했던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연>을 살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가게에서 파는 <연>은 언제나 그에게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몇 번이나 <어머니의 돈>을 훔쳐서 <연>을 사곤 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그는 지금 <세계적인 법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저술활동>과 <강연>을 통해서 많은 돈을 모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한 두 개의 <연>이 아니라 몇 천개, 몇 만개의 <연>을 살 수 있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마음은 전혀 즐겁지 않았습니다.
<돈>도 많이 생겼습니다.
<연>도 이제는 얼마든지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가 왜 전혀 즐겁지가 않습니까 ?
그것은 그가 어린 시절의 자신을 지금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그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그는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설령 내가 나의 돈으로 한 대의 비행기를 살 수 있다 할지라도
  조그마한 연 하나가 내 마음속에 불을 질렀던 그 때 그 시절을
  어찌 되찾을 수 있으리요 ?

어떻습니까 ?
요즘 여러분의 심경은 이런 것이 아닌지요 ?

몇 주전에 저는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에 일부러 가 보았습니다.
그 동네는 친구들과 메뚜기를 잡기도 하고, 구슬치기도 하고, 딱지치기도 하고, 자치기도 하고, 때로는 씨름도 하던 동네였습니다.
하지만 그 동네 어디에서도 <지난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을 거기에서 도무지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의 제 아버님은 이미 세상을 떠나신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의 고백>은 정말 <진리>입니다.
기억하십니까 ?
<시 144:4> 말씀 속에 담긴 다윗의 고백을 말입니다.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

여기에서 <다윗>은 <인생>을 <그림자>로 정의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탈무드>는 다윗의 이 정의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인생은 그림자라 <경>에 일렀으니
  서 있는 <나무>와 <바위>의 그림자인가 ?
  아니다 !
  <날아가는 새의 그림자>로다 !
  새가 날아간 뒤에는 새도 없고, 그림자도 없느니라 !

성도 여러분 !
여기 이 주석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나무>나 <바위>의 그림자는 어떻습니까 ?
그것들은 해가 지면 곧 사라져 버리지만, 나무나 바위 <그 자체>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새>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
<새의 그림자>가 사라진 곳에는 <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사라져 버린 <나무>나 <바위>의 그림자는 내일 아침에 해가 뜨면 다시 나타납니다.
하지만 아무리 해가 빛을 발해도 <새>가 이미 날아가 버린 곳에서는 <새의 그림자>를 더 이상 볼 수는 없습니다.

<나무>나 <바위>의 그림자는 해가 떠 있는 한, 그 모습 그대로를 언제나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새>는 한 자리에 오랫동안 머무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해가 중천에 떠 있어도, 새가 날아오르는 순간 <새의 그림자>는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
인생이란 <날아가는 새의 그림자>라는 여기 이 <탈무드의 지적>은 정말
<진리>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
속절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우리네 인생> !
정말 <날아가는 그림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
우리에게 주어진 이런 현실을 가슴에 끌어안고 그저 <한숨>이나 내쉬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
우리네 현실이 이러니 그저 <탄식의 소리>만 내고 있어야 하겠느냐는 말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네 인생>이 그렇게도 빠르게 지나간다고 하는 사실 !
그 사실 때문에 우리 안에는 <더 큰 감사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과 제 안에는 <영원한 생명>, <영원한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말입니다.
  나는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으리라 !
거기 그리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

주님 앞에서 <한 마리의 양>이 될 수밖에 없는 <우리> ! 
그런 우리로서는 여기 이 한 마디의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감격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우리 인생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그 문으로 들어가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탈출>입니다.
<구원>은 그러기에 <자유>입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
그것들이 가져다주는 <두려움>과 <떨림>으로부터의 <자유> !
바로 그 <자유>가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요 11:24-25> 말씀도 보십시오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거기 그리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
성도 여러분 !  무슨 말씀입니까 ?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

지난 번 <대구 지하철 참사>는 아직도 우리 가슴에 <커다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시신들의 신원>이 하나 하나 확인되어 가면서 일부는 이미 <장례>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들으셨습니까 ?
그 때 가족을 잃은 사람들마다 지금 무엇을 소망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장례를 치르면서 저마다 하는 이야기가 이제는 더 이상 사고가 없는 곳, 더 이상 아픔이 없는 곳, 거기 천국에서 편안히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저들의 <한결 같은 소망>이었습니다.
그것은 화재로 숨진 <천안 초등학교> 축구부 아이들을 떠나 보내는 부모들의 소망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
그런 소망이 그저 그렇게 소원하기만 하면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문제의 열쇠>는 오늘 말씀 안에 있습니다.
보십시오 !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문으로 삼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지 않습니까 ?
왜 그렇습니까 ?
그것은 <그 분 안에> 영원한 생명, 영원한 삶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을 살다가 <어떻게> 죽느냐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수많은 이라크 아이들과 여인들처럼 <전쟁으로> 죽느냐 ?
아니면 <그 어떤 불의의 사고>로 죽느냐 ?
아니면 지금 세계를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는 <괴질>로 인해서 우리가 죽느냐 ?
그런 문제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문제는 <죽음 다음>입니다.
<죽음 다음>에 우리는 과연 <어떤 시간> 속에 머물 것인가 ?
그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말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시간> !
우리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라면,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뭐가 그리도 탄식할 만한 일이겠습니까 ?
<영원>이라는 개념 속에서 시간의 길고 짧음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
그 분의 <공적인 인생>은 단 3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면 그 3년은 너무나도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보십시오 !
그 짧은 3년으로 인해서 지난 2,000여년 동안 예수님께서 이 땅에 미친 영향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지 않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 !
그 분은 <영원한 생명>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영원한 시간>을 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여기 이 땅에서의 <그 분의 짧은 생애>는 예수님께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시간> !
우리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라면, 우리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실패로 인해서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그 어떤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그것을 두고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영원한 시간>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실패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시간>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아닌 <영원> 속에서 그 무엇인가를 거두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000여년 전,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나 <사도바울>의 경우를 보십시오 !
그 당시 사람들의 시각에서 보면 그들은 한결같이 실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살아생전에 저들의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
저들이 이루어 놓은 <가시적인 업적>은 또 무엇이었습니까 ?
드러내놓고 자랑할 만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인생 !
저들의 인생은 그런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어찌했습니까 ?
낙심했습니까 ?  실망했습니까 ?  통곡했습니까 ?
아닙니다.
저들은 오히려 <기쁨으로> 자신들의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저들은 이 땅에서가 아니라 <영원한 시간> 속에서 거둘 것이 있음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2,0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사람들은 누구도 저들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시간> !
우리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라면, 우리네 인생에 아무리 속절없이 빠르게 지나가도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덧없이 흘러가는 우리네 인생 !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가는 우리네 인생 !
우리네 인생이 그렇다는 사실을 절감하면 절감할수록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가 소유하게 된 <영원한 생명>을 더욱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영원한 생명> !
그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전쟁의 소문>이 전혀 잦아들지 않고 있는 요즘 !
이 전쟁 다음은 <한반도>라는 소문이 자자한 요즘 !
전쟁 이후 <경제사정>은 더욱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만 가득한 요즘 !
지금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는 <괴질>로 볼 때 우리나라도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라고 말하는 요즘 !
요즘이 바로 우리가 <영원>이라는 것을 향해서 고개를 들 때입니다.

사랑하는 영암의 가족 여러분 !
지금은 우리가 <발등에 떨어진 불씨>만 바라보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이제는 고개를 들어 <영원>이라는 것을 바라볼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
그 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시간>을 바라볼 때라는 말입니다.

이번 주간은 사순절 <다섯 번째 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시기 위해서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기 전 40일 중, <다섯 번째 주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은 <고난주일>입니다.
해마다 우리에게 이런 기간을 주심은 이 기간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조명해 보라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지금 <우리 인생의 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
그 분 안에 머물고 있는가 ?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하는 사실 !
그 사실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인식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가 ?
과연 내가 <영원이라는 시간>에 잇대어 오늘을 살고 있는가 ?
그처럼 <영원>을 향해서 고개를 들 때가 바로 요즘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지요 !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
거기 그리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
여기 이 말씀에서 <또는>이라는 말은 <둘 중의 하나>를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구원을 얻든지 <아니면>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
여기 이 말씀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습니까 ?
우리가 알고 있는 주님은 이런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께서는 이것도 저것도, 모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성경 원문>은 그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영어성경>도 보시면 그곳을 가 아니라 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것이 그렇다면 여기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
우리가 오늘 예수님 안에 들어가 머물게 되면 !
오늘 우리가 <영원>을 향해서 고개를 들기만 하면 !
그리하면 우리가 <구원>을 얻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며 나오며 영원한 꼴,
<생명의 꼴>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주님으로부터
<꼴>을 받아먹으며 오늘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
여기 이 말씀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꼴>을 받아먹지 않으면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끊임없이 <꼴>을 받아먹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라도 <잘못된 인생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사람들을 한 두 사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 최초의 인간 <아담>을 기억하십니까 ?
그가 에덴에서 <범죄한 인생>을 살았지 않습니까 ?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
그것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금하신 선악과를 먹기만 하면, 네가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사탄의 유혹> !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것이 <결정적인 화근>이었습니다.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스스로 하나님 행세를 하려고 했던 <교만한 마음> !
바로 그것이 그로 하여금 범죄케 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 
우리 안에는 지금 이런 모습이 없습니까 ?
우리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모습 !
그런 모습이 우리 안에는 지금 없느냐는 말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을 기억하십니까 ?
그가 어쩌다가 <피를 나눈 동생>을 돌로 쳐죽이는 그런 끔찍한 살인자가 되었습니까 ?
그것 역시 아주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나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린 동생을 향한 <시기심> !
바로 그것이 그로 하여금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
여기 이 사람의 이런 모습이 오늘 우리 안에는 없는지요 ?
나보다 너무나도 잘 나가는 그 어떤 사람을 향한 <시기심> 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밤이 우리에게는 없느냐는 말입니다.

단 하루 밤의 정욕을 이기 못해서 충성스러운 장군의 아내를 빼앗은 다윗 ! 그것도 모자라서 <치밀한 계획>까지 세워가며 그 장군의 생명마저 빼앗아 버린 다윗 !
그의 마음속에 숨어 있던 <정욕>과 <음심>과 <교활함>과 <이중성>이 오늘 우리의 것은 아닌지요 ?

오늘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오는 <꼴>을 끊임없이 먹지 않으면 우리도 별 수 없습니다.
자기가 무슨 하나님이나 되는 것처럼 행세하려고 하는 아주 교만한 모습 !
<시기심>으로 인해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모습 !
하루 밤 <정욕>을 이기지 못해서 앉지 말아야 될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 !
그런 모습은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모습입니다.

<꼴>을 먹지 않으면 !
주님께로부터 오는 <꼴>을 <지속적으로> 먹지 않으면 !
우리도 그런 모습으로 오늘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우리 인생의 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
그 분 안에 들어가서 그 분이 주시는 <꼴>을 끊임없이 받아먹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내고 있는 <사순절 기간>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기간입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개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개가 <앞쪽 다리>를 들고 소변을 본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개는 <뒤쪽 다리>를 들고 소변을 보지 않습니까 ?
그것은 그야말로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동일합니다.
하지만 그 개는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마을의 <원로>가 되시는 분이 그 개가 그렇게 오줌을 누는 것을 보고는 당장에 그 개를 마을에서 쫓아버리라고 했습니다.
저렇게 앞다리를 들고 오줌을 누는 개는 분명히 미친 개일 것이고, 그렇다면 그 개는 언젠가는 분명히 커다란 사고를 칠 개라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동네 아주머니>가 말합니다.
그 개는 <미친 개>가 아니라 <목사님네 개>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 노인이 물었지 않겠습니까 ?
그런데 왜 저 개가 앞 다리를 들고 오줌을 누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 때 그 아주머니의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늘 손을 들고 축복기도를 하시니까, 주인 흉내를 내느라고 저 개가 저렇게 앞 다리를 들고 오줌을 누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스개 소리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의 심장>을 찌를 만한 교훈이 여기에 있습니다.
개는 사람과는 전혀 비교가 안 되는 한낱 짐승에 지나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보십시오 !
개가 얼마나 주인을 잘 알아보는지 아십니까 ?
아파트 계단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도 개는 주인을 알아봅니다.
개는 주인을 얼마나 열심히 따르는지 모릅니다.
<사흘>이면 개는 주인을 확실하게 알아본답니다.
그러니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들어가며 나오며 주인을 열심히 따라 다니기에 !
들어가며 나오며 주인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기에 !
들어가며 나오며 주인으로부터 꼴을 받아먹기에 !
그것은 가능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영암의 가족 여러분 !
지금은 <4월>입니다.
4월은 우리가 주님을 새롭게 만나는 달입니다.
온갖 시련과 아픔을 가슴에 끌어안고 <골고다 언덕> 위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 !
그 분과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달이라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
3년은 고사하고 10년이 가도 <주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 !
3년은 고사하고 20년이 가도 <진리의 풍월>을 읊어대지 못하는 모습 !
그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요 ?
그것이 우리네 모습이라는 사실을 진정 부인할 수 없다면, 우리는 오늘 이
<사순절 기간>에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헤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주변의 상황>만을 바라볼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우리가 주변의 그 어떤 상황으로 두려워 떨 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영원>을 향해서 고개를 들 때입니다.

<영원> !
그것은 그리스도 밖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문>으로 삼아 그 문안으로 우리가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 땅에서의 삶이 우리 인생의 전부인 줄로 알고 살아간다면 우리 가운데는 <억울한 인생>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로 그 생을 마감한 사람들 !
세계적인 축구선수가 되리라는 꿈을 안고 선수들 숙소에서 잠을 자다가 불에 타 죽어버린 <천안초등학교> 아이들 !
원치 않는 전쟁으로 인해서 비참하게 죽어간 <이라크>의 아이들과 어른들 !
그리고 단지 명령에 따라 그 전쟁에 투입되어 죽어간 수많은 미영 군인들 !
조금이라도 더 잘 살아보고자 건축현장에서 일을 하시다가 지금 사경을 헤매고 계시는 우리교회 <이준형 성도님> !
생업의 마당에서 열심히 일을 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주사 한 대를 잘못 맞고 지금 뇌사상태에 빠져 버린 우리 교회 <노진수 청년>의 누님 !
이들은 모두가 너무나도 <억울한 인생들>입니다.

그러기에 여기 이 땅에서의 생명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모든 것이 되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것은 세상이 너무나도 <불공평한 것>입니다.
제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골고다 언덕>을 오르게 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저,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 <영원한 시간>을 가져다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렇게 힘쓰고 애쓰셨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에게 <영원>을 선물로 주시는 바로 그 아버지와의 <온전한 만남>이
4월 이 한 달 동안에 우리 이 교회공동체 안에 가득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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