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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인을 알면 길이 열립니다 / 욘 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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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을 알면 길이 열립니다  (성완석 목사)
본문 : 요나서 1장 11~17절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요나서 1장 11~17절 말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길에는 때가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얻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얻었는가 싶더니 잃어버림이 또 오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건강하다고 장담 못하는 것이 인생이고, 오늘 가졌다고 영원히 내 것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것이 변하고, 아무 것도 그대로 있는 것이 없이 우리 곁을 떠나가는 것을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내 인생 내가 주인이 아니구나" 주인이 따로 있더라는 것이지요. 오늘 이 시간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이기에 아무렇게나 살수 없는 것이 인생이더라는 것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습니다. 후회한들 소용이 없어요. 주님이 기회 주실 때, 은혜 주실 때,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됩니다. 모든 것에 때가 있습니다. 잘 깨달을 때 인생이 바뀝니다. 잘 깨닫는 인생! 복된 인생 되어질 줄로 믿습니다. 남길 것이 있는 인생 사시기를 바랍니다. 헛 인생 살지 아니하고, 후회하는 인생 살지 않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인생의 의미가 바뀌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만히 있는 자에게 은혜가 임하지 않아요. 엘리야에게 떡과 생수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지요.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 떡과 생수를 먹어야 힘을 차리겠기에 준비해 주셨는데, 하나님은 먹여주시기까지는 않더라는 거예요. 일어나서 먹으라고 했어요. 지체하는 엘리야를 보고 재촉하셔서 일어나서 먹은 것은 엘리야 자신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예비하신 은혜를 쏟아 부어주시지만 은혜를 받고, 깨닫고, 바로 사는 것은, 의미있는 인생 사는 것은 내 몫이더라. 내가 안 하면 그만 이예요.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합니다. 주님 주신 기회를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 주신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볼 것을 보게 하시고, 들을 것 듣게 하시고, 엘리야에게 떡과 생수를 주셨던 것처럼, 주여 내게도 새 힘, 새 은혜, 새 능력 주셔서 넉넉히 이기게 하옵소서! 의미있는 인생 살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남길 것이 있는 인생 살게 하옵소서. 개가 토한 것을 먹듯이 과거의 삶 되풀이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후회하는 삶 살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앞에 열매를 남기게 하여 주옵소서! 은혜주실 때 은혜받고, 능력 주실 때 능력 받고, 깨닫게 하실 때 잘 깨달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하옵소서! 승리의 삶 살게 하여 주옵소서! 나를 제물 삼으셔서 가정과 일터가 새로워지게 하옵소서! 주여! 주여! 주여! 나를 일으켜 주옵소서! 주저앉아 있던 자리, 방황하던 자리, 후회하던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옵소서,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게 하옵소서!" 이것이 우리 심령의 피맺힌 절규요, 기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얼마나 이루었느냐? 오늘 무엇을 가졌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것이 인생을 결론 짓는 게 아니에요. 넘어졌을 때라도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갈등하고 방황하다가도 다시 말씀을 붙잡는 거예요. 주신 약속을 붙잡는 거예요. 하나님 기뻐하시는 길을 선택하는 거예요. 축복의 길, 보장의 길을 가는 거예요. 미래를 차지하는 사람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누가 과거를 이야기 합니까? 미래에 자신이 없는 사람일수록 과거를 많이 이야기합니다. 과거 이야기 할 필요 없어요. 과거에 연연할 필요 없어요. 우리는 미래를 차지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주님 주실 좋은 결말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보는 대로 주리라" "보는 대로 줄 것이다" 아멘. 헛된 것을 좇아 살지 아니하고, 은혜 주실 때 은혜 받고, 기회 주실 때 잘 깨달아 승리의 삶, 축복된 삶, 주님 기뻐하시는 역사의 주인공들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으로 받은 심령마다 이런 역사가, 이런 은혜와 축복이 충만, 충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 82 1.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뿐일세 5.나의 진정 사모하는 예수여 음성조차도 반갑고 나의 생명과 나의 참 소망은 오직 주 예수 뿐일세 아멘. 

  요나, 그러면 생각나는 것은 풍랑인데, 연단, 고난, 풍랑, 남의 이야기가 아니지요. 오늘날 세상살이 속에서 영육 간에 겪어야 하는 풍랑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풍랑을 겪을 때 그 원인을 아는 것입니다. 풍랑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었습니까? 요나에게 있었습니다. 원인을 알아야 역사가 나타나는데 우리 마음속에는 한 쪽으로는 알기를 원하고, 다른 한 쪽으로는 알기를 원치 않는, 거부하는 마음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축복해 주시지 않느냐? 왜 이런 답답한 환경을 나에게 주시느냐? 원망스럽고 낙심되는 때에 기억 할 것은 축복받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원인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곳에서 엉뚱한 곳에서 원인을 찾으려고 하니까 안 되는 거예요. 믿은 지 오래되고, 기도한지 10년, 20년이 지나도 응답이 없고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는 거예요. 배 안에 탄 사람들이 한참 풍랑을 겪은 후에야 배 밑창에서 잠자고 있는 요나를 발견합니다. 축복받지 못하는 원인이, 응답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는 원인이 깊은 곳에 숨겨져 있어서 잘 모른다는 거예요. 찾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저마다 풍랑의 원인이 있는데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있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요나를 찾아야합니다. 거기에 해결의 실마리가 풀려요. 

  유대 랍비들 사이에 전해지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는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난 한 천사가 광야를 지나가고 있는 두 나그네와 동행을 하게 됩니다. 세 사람이 길을 걷다가 서로 헤어질 때가 가까워 왔습니다. 그 때에 천사가 말하기를 "나는 천사인데 헤어지는 마당에 한 가지 소원은 들어주겠습니다. 한 가지씩만 말씀하십시오" 그런데 한 사람은 욕심쟁이고 한 사람은 심술쟁이였어요. 남 잘되는 것을 보지 못하는 질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말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고, 두 번째 사람은 첫 번째 말한 사람의 배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받는 것도 좋지만 다른 사람이 배를 받는다니까 두 사람은 고민이 되는 거예요. 욕심 많은 사람은 꼭 배를 받아야 되겠고, 질투가 많은 사람은 내가 못 받으면 못 받았지 다른 사람 많이 받는 것은 못 봐주거든요. 서로 먼저 말 안하는 거예요. 정말 헤어질 때가 되었습니다. 천사가 재촉을 합니다. 떠나야 될 때가 되었노라고, 욕심 많은 사람이 그 질투많은 사람 목덜미를 붙들고 "이놈아 빨리 말해. 말 안 하면 죽여버리겠어" 말 안할 수가 없어요. 그랬더니 질투많은 사람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 "나는 눈이 두 개가 필요 없거든요. 눈 하나가 없는 애꾸눈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욕심쟁이는 그 시간 두 눈을 다 잃게 된 거예요. 그냥 웃고 넘길 수 없는 기가 막힌 이야기예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사람마다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분석해 보면 원인은 두 가지더라는 거에요. 하나는 욕심이고 하나는 질투예요. 끝없는 욕심도 문제지만 이 시기, 질투 때문에 나도 못살고 남도 못사는 경우가 많더라는 거예요. 나도 못 받고 저도 못 받는 경우가 많더라는 거예요. 내가 많은 것 받아도, 더 받은 사람에 대한 욕심과 질투,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더라는 거예요. 이것을 넘어설 때 참 평안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이것을 넘어서지 못하면 불행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넘어설 것을 넘어서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나에게 영의 깊은 곳에서 주님께 부르짖는 기도가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합니다. 의례적인 기도, 의례적인 믿음, 의례적인 찬양이나 봉사가 아닌 주님과 열려있는 통로가 있어야되요. 내 영이 깨어 있어야합니다. 밖에서의 풍랑의 원인이 배 밑의 요나에게 있었던 것처럼 내 환경의 풍랑도 외부적인 풍랑의 원인도 알고 보면 내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이것을 인정하고 나아갈 때 거기에 문제 해결의 시작이 있습니다. 계2:6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영적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육적 방법으로는 도무지 해답이 안 나와요. 영적 능력, 영적 방법이어야 합니다. 요나는 자신의 불순종이 풍랑의 원인임을 알았을 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 고백을 합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내 탓입니다. 나를 바다에 던지십시오. 모든 것이 내 책임입니다" 실패의 순간은 오히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신호입니다. 내 곁에서 땅에 것들이 멀어져 갈 때에 하늘의 것들이 가까워져 옵니다. 땅에 것들이 다 나를 떠나도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만 있으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주님은 인생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문제의 정답을 가지고 계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는 길이 있어요. 때로 나의 힘으로 해결하고, 풀어보려고 몸부림을 해 보지마는 헛된 수고일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더 꼬이고, 헝클어져 갑니다. 자꾸 문제가 커집니다. 주님으로부터 정답을 찾아야되요. 주님을 가까이 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원인을 바로 알 때 회복의 길이 열립니다. 먼저는 알아야 하고, 또한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본성이 있더라는 것이지요. 자꾸 핑계를 대서라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어느 대학 교수가 이런 불평을 하더랍니다. 학생 가운데 골치 아픈 문제아. 아무리 바로 가르쳐 보려고 해도 구제 불능한 학생을 놓고 생각하기를, "중.고등학교에서 잘 가르쳤어야 하는데" 중.고등학교 교사보고 물어 보니까 "초등학교에서 잘 해야지, 기본적으로 초등학교에서 잘못 가르쳤기 때문에 애들이 이 모양이다" 초등학교 교사에게 물어 보니까 "그건 유치원에서 잘 가르쳐야지" 유치원 교사에게 물어보니까 "가정교육이 잘 돼야지" 가정으로 돌아가서 엄마에게 물어보니까 "종자가 좋아야지" 아빠에게 물어보았더니 "무슨 소리! 종자야 좋지. 밭이 못돼서" 원인을 발견할 뿐 아니라 인정하는 곳에 해결의 길이 열릴 줄로 믿습니다. 최용덕 집사는 성령충만한 삶을 살았는데, 사소한 실패로 영적인 침체를 겪게됩니다. 낙심스럽고 좌절감에 시달리며 자기를 자학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버리신 것 아닌가? 하나님은 나를 떠나신 것 아닌가? 몸부림하며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젖은 눈으로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때에 그의 등 뒤에서 안타까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었더라는 거예요. "나는 너를 떠난 적이 없느니라. 네가 나를 배신하고 등지고 도망가는 그 자리에서도 나는 너의 등 뒤에서 한번도 눈길을 뗀 적이 없느니라. 나는 언제나 너를 밀어주고 있었느니라. 네가 울고 있을 때 언제나 나는 다시 승리하고 일어서리라 기대하고 잔잔한 미소로 나는 너를 바라보고 있었노라"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과 도우심을 깨닫고는 흐르는 눈물을 두 주먹으로 닦아 내리며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 찬양이 바로 "나의 등 뒤에서"입니다. 


  ♬ 1.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 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2.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3.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때때로 뒤돌아 보면 여전히 계신 주 잔잔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나를 재촉하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요나가 자신의 잘못을 알고도 그냥 덮어 버렸다면, 고백하기를 거부했더라면, 끝까지 불순종의 자리로 나아갔더라면 그 인생 거기서 끝났습니다. 소망이 없었어요. 자신만이 아니라 그 배도 결국은 깨어지고 말았을 거예요. 이런 고백의 자리로 나아갈 때 요나의 심정은 죽을 각오했을 거예요. 죽음을 각오하니 오히려 살길이, 자신만 아니라 모두가 살길이 열리더라.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죽을 각오한 요나를 하나님은 버리지 아니 하셨습니다. 더욱 요긴하게 쓰셨습니다.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실수하지 아니하고, 큰 얼룩이나 잘못없이 살 수 있으면 더욱 좋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원치 아니하게 실수할 수 있고, 잘못할 수 있더라는 거예요. 1960년대에서 80년대에 미국의 캐서린 쿨만이라는 여자 부흥사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처녀 시절부터 촉망받는 부흥사였는데, 유부남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상대도 캐서린을 너무 사랑해서 자기 아내를 버리고 캐서린과 결혼하게 됩니다. 캐서린은 처음부터 이 결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결혼해서 함께 살게 되는데, 늘 하나님 앞에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어요. 함께 식사기도도 못할만큼, 그러다가 캐서린이 회개하고, 본 부인에게 남자를 돌려 보내고, 일평생을 독신으로 살게 됩니다. 얼룩이지요. 큰 오점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 캐서린이 집회를 인도할 때마다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한 거예요. 목회가 이전보다 더 능력있게 되었고, 세계적인 부흥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언제 어떤 경우라도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붙들기만하면 생각한 것 이상의 역사가 나타나고, 열매를 보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요나가 그랬잖아요. 불순종한 요나였는데, 그냥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른 사람 들어 사용하시지 않고, 기어코라도 요나를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인내!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너무 조급할 때가 많습니다. 작은 일도 참지 못할 때가 많아요. 우리가 커피나 시원한 캔 음료를 마시기 위해 자판기에 동전을 넣습니다. 그런데 자판기가 그냥 동전을 삼겨 버린다고 할때, 보통은 손바닥으로 자판기를 두드려도 보고, 흔들어도 봅니다. 그러다가 성격이 급한 사람은 자판기를 발로 차기도합니다. 내 동전이 자판기에 몇 개 들어갔다고 참지를 못해 합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때로 인생살이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참지 못하고 혈기를 부릴 때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만일 나에 대하여 참아주시지 않았다면, 나의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일에 대하여 기다려 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내가 참기 어려울 때, 때로 인내하기 힘들 때, 나의 연약함을, 나의 불순종하고 거역함을 아시고도 참아 주셨던 주님의 그 인내와 사랑을 기억할 수 있다면, 내 속에 인내할만한, 참을만한 힘과 능력이 생겨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제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풍랑이 일어나고 환란이 일어나는 것을 수습하는 길은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풍랑을 인간의 힘으로 아무리 막으려해도 해결이 안되었는데, 회개하니까 풍랑이 멈추어 진 거예요. 하나님앞에 잘못을 고백할 때 풍랑은 수습이 되었습니다. 요나가 회개하고, 요나가 손을 드니 문제가 해결된 거예요. 내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손을 들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 보지 마세요. 다른 사람 하기 기다리지 마세요. 내가 하나님 앞에 두손 들고 나아가면 풍랑은 수습이 되고 해결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나가 자기에게 제비가 떨어지자마자 고백을 하는데, "나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히브리 백성인데 하나님이 니느웨로 가라고 하신 말씀이 싫어서 도망하다가 오늘 이 꼴이 됐습니다" 정신을 차린 거예요. 비록 도망갈 때는 형편없는 사람처럼 보여도 어려운 문제를 만나자 하나님의 깨우침앞에서 "이것은 나 때문이구나" 인정하고 두 손을 든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믿음있는 사람과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선원들이 물었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그럴 때 나를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나 하나 죽으면 모두가 살고, 풍랑이 조용해 질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정말 새로워지고 깨어나면 주변이 깨어나고, 달라지고, 새로워집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거나 진노하실 때 늘 사람을 통해서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축복의 도구로, 어떤 사람은 진노의 도구로, 악한 도구로 쓰시는 것입니다. 잠언 16:4에 보면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악한 도구로 쓰여진 사람입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이 그랬고, 이스라엘을 침노한 앗수르, 바벨론 민족이 그랬고, 다윗을 괴롭힌 사울이 그랬습니다. 우리는 꿈속에서라도 악한 도구가 되지 아니하고 축복의 도구로 살아가야 합니다. 잘못 생각하면 나만 잘살고, 나만 높아지고, 나만 건강하고, 나만 평안하면 복 받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인생살이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복을 받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복을 끼치는 사람이 참으로 축복의 사람인 것입니다. 요나가 정신을 차리니 그 주위 사람까지 복을 받게 됩니다. 14절을 보면 그 주위 사람들의 기도하는 대상이 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배에 탄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의 신들을 부르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거예요. 믿음의 대상이 달라진 것입니다. 요나가 회개하고 고백하니 불신앙의 사람들이 깨어나는 역사가 나타나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내 주변의 변화도, 재앙도 축복도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나 한사람 깨어지면, 변화되면, 바로 서면 주님 영광 거두실 뿐 아니라 그것이 내 가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거, 내 일터에 영향을 미치고, 내가 속한 교회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거, 내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일이 잘못되면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조상 탓, 세상 탓, 환경 탓, 다른 사람 탓, 믿음 생활에 다른 사람 볼 것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내 탓입니다. 나 때문입니다. 이런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이런 진실한 믿음의 고백이 필요한 때입니다. 역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하나님, 내 탓입니다. 이 폭풍우는 전적으로 내 잘못입니다. 내 자녀의 방황도 내 탓입니다. 우리 사업의 흔들림도 내 탓입니다. 우리 가정의 어려움도 내 탓입니다. 내가 걸어가는 인생 길, 힘들고 고달픈 것도 결국은 내 탓입니다. 이것이 문제 해결의 시작이고, 축복의 시작입니다. 


  요나가 불순종 한 것은 원인이 2가지였는데, 하나는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지금 자기 생각에 집착합니다. 과거를 잊지 못해요. 민족이 당한 굴욕을 지금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저 앗수르 나라가 쳐들어 와서, 짓밟아 버리고, 착취한 과거를 용서하지 못하는 거예요. 여기에 붙들리니까, 자기 생각에 집착되다 보니까, 앗수르는 망해야된다,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앗수르 나라를 망하게 하고 싶은데, 죄 때문에 망한다는데, 손 안대고 망한다는데 얼마나 잘된 일이냐, 통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니느웨가 앗수르의 수도였거든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니느웨가 회개하고 구원받는 거였어요. 어느 것이 옳은 생각입니까? 말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자기 생각이 다를 때 자기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거예요. 자기 생각을 꺾어버리지 못한 거예요. 마음에 들던 안들던, 자기의 생각과 같든지 다르든지 순종해야지요. 그러나 이것이 안 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안 풀리는 거예요. 안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고 반항하게 될 때 피곤한 인생 살게 됩니다. 힘든 인생 살게 됩니다. 내가 할 일이 있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전하라고 하면 전하면 됩니다. 그 다음 일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흔히 주제 넘는다는 말을 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하나님의 일까지 침범하려 하더라는 거에요. 하나님의 원하심 앞에서 내 뜻을 꺾고, 내 생각을 꺾고, 내 의지를 꺾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때,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고, 새로운 길이 열려질 줄로 믿습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심령과 생활에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체험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회 주실 때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 하나님은 하늘의 별들을 움직여서 그만 두어라 더 이상 가지 마라 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들이 가도록 허락하십니다. 처음부터 우리의 길에 큰 장애물을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고 산다 해도 선지자를 보내서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기를 그만 두고 기도 없이 산다고 할찌라도 갑자기 무슨 재난을 보내거나 징계하시지 않습니다. 전도 안한다고 당장 우리의 다리를 부러뜨려 놓지는 않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살다 보면 내리막 길을 가게 되고 결국은 어리석은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될 때가 있더라는 거예요. 우리가 계속 불순종하면 더 거친 방법으로 깨닫게 하시더라! 평안하던 가정에 갑자기 질병의 고통이 찾아오고, 사고가 생기고, 사업이 위기를 만나고,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고, 부인이 우울증에 걸려 살고 싶은 의욕을 잃어버리는 것, 우연은 아니라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이 직접적인 범죄의 대가나 징계는 아닐지라도 이때 깨달아야 합니다. 요나가 풍랑을 보고 깨달았던 것처럼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회복의 길이 열리고, 살길이 열리게 됩니다. 이런 깨달음이 없이 아무리 다른 대책을 세워 보아야 한참 더 고생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결국 깨닫게 되는 거예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가 가장 복된 자이고, 매를 맞고서라도 깨닫는 자도 복된 자입니다. 여기에 소망이 있기 때문이에요. 은혜 주실 때 은혜 받고 새 출발해야 합니다. 내가 회개할 것 회개하고, 바로 설 때 하나님은 나를 통하여 내 가족을 깨우실 것이고, 내 이웃을 깨우실 것입니다. 우리 땅을 고쳐 주실 것입니다. 역사를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내 가정이, 우리 일터가 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교회가 잘 되어지고, 이 나라 민족이 복을 받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특권이요 사명임을 깨달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나 때문에 가정이 새로워지고, 우리 주변이 새로워지고, 이 나라의 한 부분이 달라지는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제물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축복의 하나님과 단절된 인생은 은혜와는 상관없는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해결해야 할 것 해결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것이 막혀 버립니다. 길지 않은 인생 축복의 도구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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