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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을 위협하는 세력 / 마 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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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위협하는 세력 
분문: 마태복음 26:1-5


봄에 식물을 심으면 가을에 풍성한 결실을 거두게 됩니다.  생명의 역사가 온 땅에 충만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생명의 역사는 위대합니다.  생명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죽음의 땅을 생명으로 덮습니다.  그렇다고 생명의 역사가 수고와 노력이 없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의 역사를 가로막는 세력도 많습니다.  풍성한 결실을 가로막는 세력도 많습니다.  싹이 제대로 나기 전에 죽게 만드는 추위도 있습니다.  겨우 튼 싹을 말라 버리게 하는 가뭄이 있습니다.  조금 자라난 싹을 병들게 만드는 병충해가 있습니다.  성장의 장애를 가져와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가시와 잡초도 있습니다.  열매가 익기 전에 따 먹는 새들도 있습니다.  하나의 생명이 풍성한 결실을 거두는 것은 수많은 위협을 극복하고 이겼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열매를 맺게 하려는 생명의 힘과 막으려는 죽음의 세력이 끊임없이 싸우면서 세상에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해 갑니다.  어떠한 땅을 옥토가 변하여 사막이 되어가는 지역도 있으며 사막이 옥토로 바뀌는 지역도 있습니다.

지금 중국의 북부는 사막화 현상으로 더욱 황폐해져 가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황사의 피해를 더욱 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스라엘이나 엘에이같은 도시는 사막이었던 땅을 풍요로운 결실을 거두는 땅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생명의 승리를 이룬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된 것이 아닙니다.  수고의 결산입니다

자연의 세상에만 그러한 생명의 확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세상에서도 그러한 생명과 죽음의 확장을 위한 전쟁은 계속되어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나라와 악한 영의 죽음의 나라의 전쟁은 주님의 오시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는 이기는 역사입니다.  영적인 전쟁은 생명의 승리로 끝나는 전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세력은 계속 생명을 위협하려고 합니다.  생명의 역사를 가로막으려고 힘을 다합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는 생명의 승리를 증거한 역사입니다.  박해를 이기고 승리한 역사입니다.
스데반의 박해에서부터 오늘날 회교도의 땅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없에려는 시도는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능력입니다.  생명이 이기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게임중에 이러한 게임이 있습니다.  고깔 모자들을 바닥게 절반은 세워 놓고 절반은 쓰러트려 놓은 후 한 쪽은 넘어진 것을 세우고 한 쪽은 세운 것을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뛰면서 세우고 넘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기에서는 넘어지게 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넘어지게 하는 사람이 이길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전쟁에서는 반드시 생명이 이깁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승리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으며 우리가 생명의 길을 걷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생명을 위협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생명되신 예수님을 죽이려는 세력의 이야기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생명되신 예수님은 온 땅에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실 때에 생명되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한 날입니다.  생명의 예수님이 오실 때에 예수님 주변에 많은 무리가 있었습니다.  환영하는 무리도 있었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환영하는 사람만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들이 있는 가운데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과 백성들의 장로들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모였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을 맞이한 날이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고난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생명이신 주님을 죽이려는 위협이 시작된 날입니다.  위협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죽음이 이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생명이신 예수님은 그위협을 이기셨습니다.  죽음의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생명의 승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땅에 생명의 역사를 이루기 원하셨습니다.  이 땅이 생명의 땅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생명의 역사를 가로막는 세력이 왔습니다.  생명을 가로막는 세력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생명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건설하려는 생명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생명의 세상이 어떠한 세상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생명의 세상을 가로막는 것이 곧 사단의 위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세상은 사랑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믿는 자들이 넘치는 믿음의 세상입니다.
소망가운데 살아가는 소망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세상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뜻을 가로막는 세력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믿음의 자세를 정립하고 우리를 향하여 공격하는 악한 영의 역사가 어떠한 것임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위협하였고 예수님께 도전하였던 죽음의 세력은 지금도 우리를 공격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안에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려고 합니다.  막으려고 합니다.  죽음의 땅으로 있게 하려고 힘을 다합니다. 

우리안에 나타나는 생명을 가로막는 세력은 어떠한 것이 있을까요?


첫째로, 미움, 시기 질투의 영입니다.

생명이 사랑이라면 사랑을 위협하는 것은 미움입니다.  질투입니다. 시기입니다.  하나님은 이땅이 사랑이 충만한 땅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서로가 용서하며 용납하는 땅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단은 이 땅이 미움으로 가득찬 땅이 되기를 원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은 바로 미움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미움의 마음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고 미움이 마음이 결국 자신들이 죄를 짓게 만들었습니다.  그 미움의 마음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이기와 질투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침을 주실 때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곁으로 몰려 갔습니다.  앉은뱅이가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기 위하여 예수님께 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곁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 살 길이 있기에 무리들이 몰려 갔습니다.  공허한 이야기만을 일삼는 제사장들 곁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경건의 모양만을 가진 생명을 잃은 종교에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리자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단은 그들의 마음속에 미움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있었다면 예수님을 미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정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자신들을 떠날지라도 예수님을 미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사랑하였지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혼에 대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에 대한 욕심만이 있었습니다.  자신만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국 이기심과 시기와 질투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시기와 질투와 미움으로 인하여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미움은 인류역사속에서 끊임없이 사랑을 위협하였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미워하였습니다.  가인이 죄를 짓게 된 것은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고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가인은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부족을 채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아벨을 시기하였습니다. 질투하였습니다.  동생이 하나님이 사랑을 받는 것을 시기하였고 미워한 것입니다.  결국 시기와 질투는 미움으로 형제를 죽이는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동생을 죽였지만 가인은 영원한 죄인으로 남는 불행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울임금은 다윗을 미워하였습니다.  다윗이 전쟁에 나가서 이기고 돌아올 때 여인들이 외쳤습니다.  사울은 천천이며 다윗은 만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단은 사울의 마음에 미움을 심었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싸운 다윗, 자신의 나라를 위하여 생명을 걸었던 다윗,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한 다윗을 칭찬하고 도리어 죽하해 주어야 할 사울이 시기하고 질투한 것입니다.  결국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사울의 위를 폐하고 말았습니다.  미움이 사랑을 위협하였으나 미움이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세상은 시기와 질투와 미움으로 가득차고 있습니다.  가진 자를 질투합니다.  시기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복을 낳지 않습니다. 복을 잃게 만듭니다  죄를 짓게 만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축복받는 자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은 자신의 복을 잃는 어리석은 일일 뿐입니다.  시기와 질투와 미움은 하나님의 복을 가로막은 어리석음입니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은 영혼에 대한 사랑, 하나님에 대한 사랑, 그러한 사랑의 마음이 없었기에 결국 미움의 사람이 되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은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진정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백성이 잘 되는 것을 기뻐하여야 합니다. 소경이 눈을 뜨는 것을 기뻐하여야 합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을 기뻐하여야 합니다.  자신곁을 떠나도 살 길만 있다면 보내는 것이 사랑입니다.  전쟁통에 아이를 입양시킨 어머니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자신이 낳은 자식이 먹고 살 길이 있다면 포기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상대방이 잘 되는 것이 기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미움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였습니다.  사랑이 이기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잠시는 미움이 이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미움을 결국 이길 수 없음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살아가는 동안 어떠한 이유라도 우리의 마음에 미움이 지배하지 않고 사랑이 지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을 향하여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스데반은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미움을 미움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미움을 사랑으로 대한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마음이 사울을 바울로 만드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사랑으로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으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불신의 영입니다.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의 역사를 가로막는 세력이 있다면 그것은 불신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세력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주이심을 부인하려고 합니다.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사람을 막으려고 합니다.  한 때 독일에서는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가려는 사람들을 가로막았던 장벽이 있었습니다. 단순한 장벽이 아니라 저주에서 축복으로 향하려는 길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모든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불신의 어두운 늪에서 벗어나 믿음의 땅에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믿음을 주기를 원하였습니다.  우리들이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믿음을 주려고 기적도 일으키셨으며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그러한 주님의 마음에 못지 않는 세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신을 심으려는 세력입니다.  당시에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은 믿음에 앞장서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도리어 그들이 믿음의 장애가 되었습니다.  믿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장벽이었습니다.  그들의 어리석은 욕심과 이기심과 죄악이 다른 사람의 믿음의 길을 가로 막았습니다.

불신의 죽음의 세력은 예수님의 믿음의 생명의 역사를 위협하였습니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은 믿음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믿음의 역사를 가로막으려고 한 것입니다.  온 땅이 믿음의 세상이 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사람들의 가슴속에 싹트는 생명의 흐름을 막으려고 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믿지 않는 불신을 다른 사람에게도 심기를 원하였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믿음이 생기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은 분명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의도는 분명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일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기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서 믿음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후 사람들은 믿음이 생겼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뒤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이 고침을 받은 후 사람들이 믿음을 가졌습니다.
요한이 성경을 기록한 목적도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의 세상을 만들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는 것을 보고도 인정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위협하며 소문을 막으려고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부활하신 주님의 소문도 막으려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확산을 막으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믿음은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에는 큰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는 상급이 있습니다.  믿음의 결국은 구원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믿음에는 상이 있습니다.  면류관이 있습니다.  믿음에는 승리가 있습니다.

사단은 사람들이 믿음을 갖는 것을 원치 아니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기를 원합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만 살기를 원합니다.  인류 역사속에서 사단은 끊임없이 수많은 방법으로 예수를 부인하기를 원하였습니다.  믿은 자가 얻는 영생을 잃기를 바랐습니다.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기를 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구원이 이르는 것을 원치 않고 위협하는 세력을 몰아 내야 합니다.  믿음이 생명입니다.  믿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씨앗입니다. 불신은 생명을 가로막는 무서운 세력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불신의 세력이 너무나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셋째로, 절망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소망입니다. 소망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철학자는 사람에게 죽음에 이르는 병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무서운 병은 에이즈도 괴질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절망입니다.  사람에게 진짜 무서운 병은 소망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것은 살아야 한다는 소망이라고 합니다.  살려는 소망은 어떠한 죽음의 병도 이길 수 있다고 합니다.

절망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절망을 자살하는 사람들이나 가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기력해진 사람이 절망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절망은 간단합니다.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소망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열심히 살지만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부지런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 가운데 절망의 사람이 많습니다.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한 순간의 만족을 위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열심히 땅을 모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돈을 모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강한 의지와 열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은 진정한 소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것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관심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딤전 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참된 생명의 길은 참된 소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나라를 생각하며 선한 일에 힘을 다하여야 합니다.  영원하지 않고 헛된 것을 위하여 생명을 거는 인생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죽도록 일하다가 죽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영원한 나라를 위하여 살면서 많은 것으로 선한 일을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 평생 많은 것을 나누어 주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은 절망의 사람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열심히 살지만 영원한 나라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의 것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막은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영원한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단은 우리가 잠시 사는 이 세상에 모든 관심을 두고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생명의 길로 가야 합니다.  주님이 가신 그 길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는 길을 가로막는 세력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죽이려는 세력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위협의 요소는 항상 있습니다.  소리없이 우리에게 다가 옵니다.  나의 마음의 생각을 사로 잡습니다. 
그것을 이기는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반드시 걸어야 할 길입니다.
사망에 이르는 길을 넓습니다.  생명의 이르는 길은 좁습니다.  그러나 좁은 길로 가야 합니다.
천로역정의 내용과 같은 싸우며 가야 살 길입니다.  반드시 이기며 가야 할 길입니다.
이길 수 있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이기신 길입니다.  앞서 가신 길입니다. 생명의 승리의 역사가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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