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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벨의 부활 / 창 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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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벨의 부활
본문 창세기 4:1∼13


오늘 본문은 아담의 둘째 아들인 아벨의 이야기입니다. '아벨'이라는 이름은 '허무' 또는 '공허'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번 휙 부는 바람' 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아벨은 그 이름 같이 형에게 맞아 허무하게 죽었습니다. 결혼을 하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후손을 남기지도 못했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억울한 죽음입니다.
성경에는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럿 있습니다.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 참 충성스러운 군인인데 다윗의 정욕 때문에 억울하게 전사했습니다. 욥의 자녀들도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반열에 넣을 수 있습니다. 욥의 믿음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몰살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제일 앞에 아벨을 서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일찍, 허망하게 죽은 것으로 아벨의 이야기는 끝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벨은 죽어서 하나님께 말하고 있고 하나님은 그 피의 호소를 들으셨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만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말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피흘림이 있어야 사함이 있다' 는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습니다.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 성경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농경문화와 유목문화의 갈등을 말한다. 가인은 농경문화를 대표하고 아벨은 유목문화를 대표한다. 구약성경은 유목문화를 배경으로 기록되어서 유목문화 편을 드는 일이 많다. 2절 뒷부분에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형의 이름이 앞에 나오는 것이 마땅한 데 동생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그것은 그저 참고할 이야기이고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에게 '희생이 있는 제사가 참다운 제사이다. 피흘림이 있어야 사함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은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벨은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큰 교훈으로 되살아나서 성경 가운데, 나가서는 우리 가운데 영원히 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살다가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제일 먼저 아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

그러므로 우리는 '아벨은 아벨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벨은 아벨이 아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벨이라는 이름의 뜻은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허무, 공허인데 아벨은 허무하게 죽은 것 같지만 살아서 영원히 말하고 있으므로 허무하다고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벨이 죽었지만 우리 가운데 살아나서 믿음으로 지금도 말하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 우리는 이것을 '아벨의 부활'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시작 부분인 창세기에서 아벨의 일을 읽으면서 우리는 부활의 의미를 좀 넓혀 볼 필요를 느낍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부활은 예수님의 육체적인 부활을 말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 육신의 호흡이 끊어지고, 맥박이 멈추고, 신체의 모든 기능이 정지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제자들과 동행하시며 말씀하시고 또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요20: 27 중)'하신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것, 예수님의 육체적인 부활을 믿습니다.
부활이 상징적인 사건이 아니고 실제적인 사건이며, 설화나 신화가 아니고 역사적인 사건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석 달에 한 번씩 기독교대한감리회 신앙고백을 가지고 우리들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린 그 신앙고백의 두 번째는 이렇습니다.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 승천하심으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육체적인 부활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 신앙고백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이 신앙고백에는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과 승천이 없으면 예수님은 대속자도 될 수 없고 구세주도 될 수 없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부활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육체적인 부활을 믿으면 거기에 머물지 말고 부활의 의미를 확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의 의미를 확대한다는 것은 부활의 범위를 확대한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부활에 대해 말할 때 예수님의 육체적인 부활을 강조하지 않고 다른 부활을 말하면 부활의 초점을 흐리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육체적인 부활에 대해서 말할 자신이 없으니까 둘러대는 것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사실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보수주의자들, 특히 근본주의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말할 때 육체적인 부활 이외의 것을 말하는 것을 금기로 여겼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육체적인 부활을 믿지 못하면서 다른 부활을 말하면 그것은 정말 얼버무리는 것입니다. 꿩을 내밀어야 하는데 꿩이 없으니까 대신 닭을 내밀면서 '이것이 꿩이요!'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육체적인 부활을 확실히 믿으면서 다른 부활도 말하면 그것은 부활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꿩도 내밀고 닭도 내미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활의 의미를 확대하자는 것은 이 두 번째의 경우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렇게 오래 노예생활을 했다면 그 민족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오래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았는데 지배하는 민족에 흡수되지 않고 살아남은 예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면서 다시 살아납니다. 이것도 부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기원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살다가 1948년에 다시 독립국가를 이루었습니다.
역사가들은 이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의 부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은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사실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욥 자신이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욥10:22)라고 탄식했습니다.
그 욥이 고난을 통해 더욱 깊은 믿음을 갖게 되고, 더 많은 복을 받으며 장수한 것, 부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병이 들었을 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사 38:1)라고 죽음을 통보했습니다.
그 히스기야가 건강을 회복해서 15년이나 더 산 것, 부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세계명작 「부활」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 소설이 1899년에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제목이 「부활」이 아니고 「코니의 수기」였다고 합니다. 톨스토이가 잘 아는 코니라는 사람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어서 소설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인 네플류도프 공작이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새 사람이 되는 이야기에는 그런 제목보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기 때문에 제목이 「부활」로 바뀌었습니다.
사람이 변화되어 새롭게 되는 것, 이것도 부활입니다.

부활의 의미를 이렇게 확대하면 우리는 부활이라는 말에 친근감을 느끼게 됩니다.
'부활? 예수님에게나 해당되는 것!'에서 '부활? 나와도 관계 있는 것!' 이렇게 됩니다.
부활을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부활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손을 내밀어 잡고 싶어집니다.

설교나 성경공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적용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생활에서 살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적용이 없는 말씀은 '실전용 말씀'이 아니라 '관상용(觀賞用) 말씀'입니다. '관상'이라는 것은 보고 즐긴다는 뜻이지요. '관상용 말씀'은 듣고 즐기는데서 끝나는 말씀을 말합니다.
88도로를 달리다보면 한강 고수부지에 보리를 심어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파란 보리가 참 보기 좋습니다. 그것은 거두어서 먹기 위한 보리가 아니고 88도로와 강변도로를 오가는 사람들이 보기에 좋으라고 심어놓은 '관상용 보리'입니다.
부활이 관상용 부활에 끝나서는 안됩니다.
부활의 의미를 이렇게 확대하는 것은 '부활의 적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을 실전용 부활로 만드는 것입니다.

부활의 의미를 확대하면서 우리는 의롭게 살기 위해서 힘써야합니다.
의는 부활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의로운 편이 패배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의의 패배는 잠깐입니다.
의가 잠시 패배하는 것을 보고 '의는 무력한 것이다. 의는 허망한 것이다. 의롭게 살려고 애쓸 필요 없다' 하는 것은 예수님이 무덤 속에 잠깐 계셨던 것을 가지고 '예수는 영원히 죽었다'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무덤 속에 '잠깐'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사흘 동안 무덤 속에 계셨다는 것은 72 시간 계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후 세 시에 숨을 거두셨다가 주일 새벽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시간으로 계산하면 마흔 시간이 채 되지 못합니다.
의의 패배, 그리고 불의의 득세는 잠깐입니다.

다시 한 번 기독교대한감리회 신앙고백을 보시는데 마지막 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우리의 몸의 부활과 영생 그리고 의의 최후 승리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다

의의 최후 승리를 믿는다는 것은 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부활의 의미를 확대하면서 우리는 진리 편에 서서 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진리도 부활합니다.

중세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지구가 모든 것의 중심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중세 교황청에서는 이것을 교리로 삼았습니다. 그것이 아니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바른 주장이 나왔을 때 교황청에서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처형했습니다.
지동설이 옳다고 한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자기의 주장을 취소했습니다. 갈릴레이는 그로부터 10년 동안 엄중한 감시를 받으면서 외롭게 지냈습니다. 눈도 못 보게 되어 더욱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다가 죽었는데 장례를 지내는 것도, 묘비를 세우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갈릴레이가 죽고 나서 200년이 지나도록 지동설을 주장한 「천문학대화」라는 책은 판매금지를 당하다가 1835년에 금서목록에서 해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구는 돈다는 진리는 죽지 않았습니다.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되살아나서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켰을 때 교황청에서는 루터를 탄압하고 위협하였습니다. 그 때 루터가 지은 찬송시가 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입니다. 이 찬송의 3절 가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 데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교황 편의 사람들은 저들은 크고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고 나는 보잘 것 없는 시골의 신부에 지나지 않지만 진리가 나와 함께 하기 때문에. 나는 진리의 편에 서 있기 때문에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진리는 부활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루터가 이 찬송을 언제 작사했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1521년 종교재판을 받으려고 보롬스 성에 들어갈 때 지었다, 1527년에 지었다, 1529년에 지었다, 여러 주장이 있는데 공통된 것은 모두 아주 힘들고 어려울 때였다는 것입니다.
그 어려움, 그 위기를 루터는 '진리는 부활한다'는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그래서 찬송가 384장은 '독일 역사상 가장 위태로울 때 가장 위대한 사람이 만들어 낸 가장 위대한 찬송'이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진리는 죽지 않고 부활하여 영원히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서 1장 2절에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로 말미암음이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진리의 성격을 우리 안에 거하며 영원히 우리와 함께 거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의미를 확대하면서 우리는 희생의 삶을 살기 위해 힘써야합니다.
희생도 부활합니다. 이 세상에는 헛된 희생이 없습니다.
많은 순국선열들과 국군장병들이 우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희생했습니다.
그들의 희생은 나라의 독립, 자유, 번영으로 부활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의미를 확대하면서 우리는 민족의 부활을 위해서 힘써야합니다.
이번에 2003년 남북교회 부활절 공동기도문이 발표되었는데 이 기도문에는 '민족의 부활'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 전체를 소개해 드립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며 기도합니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주님께서는 무덤 문을 여시고 부활의 아침을 밝히셨습니다.
누구도 줄 수 없는 기쁨을 주님은 모든 이들에게 선사하셨습니다.
전쟁을 반대하는 함성 속에서 맞이한 2003년 부활절은 어둠의 권세에 눌려살면서 주님의 복음을 삶과 역사 속에서 되살려내지 못한 우리의 허물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소서.
주님의 부활 앞에서는 갈등도, 반목도, 전쟁을 합리화하는 어떠한 주장도 합당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사랑과 화해, 평화와 이해만이 자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게 하소서. 갈라진 한반도, 갈라진 민족이 마침내 하나의 민족으로, 하나의 땅으로 부활하는 역사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부활이 온 세계에 희망으로 나타난 것과 같이 우리 민족의 부활이 온 세계에 평화의 징표로 나타나게 하소서.
우리는 민족의 부활을 위하여 지난 반세기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갈등과 반목을 넘어서 평화를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시련은 부활을 위하여 주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이라 믿습니다. 고난과 역경의 끝에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평화의 결실이 있음을 믿습니다.
부활의 주님, 생명을 주관하시는 주님이시어, 연약하지만 주님을 의지함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이루는 일을 감당하기 원하는 우리 남북의 교회에 은총을 내리소서.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기도문에서 말하는 민족의 부활은 통일을 말합니다.
이 기도문도 부활의 의미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우리 민족의 분단현실에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의미를 확대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이, 우리의 이야기가 아름답게 전해지기 위해서 힘써야합니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고 전해진다고 해서 무조건 다 부활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아벨의 이야기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인의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그렇다면 가인도 부활했다고 해야합니까? 아닙니다.
가인은 동생을 죽인 자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가인의 후예'라고 하면 '악인'이라는 뜻입니다. 동생을 죽이고도 하나님이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셨을 때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으로 전해집니다.

이것을 억지로 부활이라고 한다면 나쁜 부활이라고 해야합니다.
부활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낳은 부활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부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가룟 유다나, 빌라도나, 헤롯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4:10a) 라는 기록을 남겼는데 여기에 나오는 데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름이 전해지기는 하는데 나쁘게 전해집니다.
이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의가 아닌 불의, 진리가 아닌 거짓, 희생적 삶이 아닌 이기적인 삶은 부활하지 못합니다.
아름답게 살아나는 것, 감동적으로 전해지는 것, 이것이 부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가 그렇게 전해지도록 힘써야합니다.

부활의 의미를 확대하면서 우리는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도록 힘써야합니다.
이 말은 우리도 육체적으로 부활할 것을 믿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부활한다는 것은 성경 여러 곳에서 공통으로 기록되어 있는 진리입니다. 특별히 바울 사도는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서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0∼22)

기독교대한감리회 신앙고백의 마지막을 다시 한 번 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우리의 몸의 부활과 영생 그리고 의의 최후 승리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다

우리의 몸의 부활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감리교인은 이와 같이 예수님의 육체적인 부활을 믿으면서 그것의 연장으로 우리 몸의 부활도 믿는 사람들입니다.
감리교인들은 가장 복음적인 신앙인들입니다.

모든 사물의 운동에는 구심력 운동과 원심력 운동이 있습니다.
힘이 안으로 집중되는 것을 구심력 운동이라고 합니다. 힘이 바깥으로 향하는 것은 원심력 운동입니다.
물을 버킷에 넣고 돌릴 때 물이 쏟아지지 않는 것은 이 구심력 운동과 원심력 운동이 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원심력과 구심력이 조화를 이루어야합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 드리는 것은 구심력운동, 사회에 나가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원심력운동입니다,

예수님의 육체적인 부활을 믿는 것은 부활의 구심력 운동입니다.
이 부활의 의미를 확대하며 나의 삶에 적용하는 것은 부활의 원심력 운동입니다.

4월, 부활의 달 첫 주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육체적인 부활을 기초로 하고서 부활의 범위를 확대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의롭게 살기 위해 힘쓰기 바랍니다.
진리 편에 서서 살기 위해 힘쓰기 바랍니다.
희생하는 삶을 살기에 힘쓰기 바랍니다.
민족의 부활을 위해 힘쓰기 바랍니다.
우리의 모습과 우리의 이야기가 아름답게 전해지도록 힘쓰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도록 힘쓰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하여 부활을 가까이 하고 부활의 진리 안에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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