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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마음으로 살자 / 빌 2:5-11, 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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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의 마음으로 살자(빌 2:5-11, 마 21:1-11)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승리의 입성이라고 불리는 이 종려 주일이란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종려(Palm tree)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환호하며 주님의 입성을 환영한데서 유래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생전에 여러 번 예루살렘에 가셨었는데, 오늘의 입성은 마지막 유월절, 즉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스스로 걸어가신 십자가의 입성이시기에 기념할만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를 꺾어들고 환호하는 승리의 입성, 영광의 입성인 것 같지만, 사실은 고난을 위한, 죽음을 위한 행진이므로 비장한 입성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은 주께서 행하시고, 가르치던 모든 것을 이루시려는 결단에의 입성이기에 우리는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슨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까요?

  먼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었습니다.  군대와 함께 위풍당당한 대왕의 입성과는 대조적인 마치 희극에서나 나옴직한 해프닝과도 같은 장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나귀는 비록 날쌔고, 위풍당당한 동물은 아닐지 모르지만 비둘기와 함께 평화, 온유, 겸손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핵무기로 세계를 제패해 보려는 강력한 왕의 모습이 아니라, 평화와 사랑으로 전 세계를 녹이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상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흔히들 위세 당당하고, 높은 자리에 앉고, 권력을 갖고, 금력을 가져야만 남에게 대접받고, 영향력을 행세하고 세계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약삭빠른 사람들에게는 코웃음 치게 하는 장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때로 인간의 지혜와 자랑을,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무색케 하시는 가장 어리석은 데서 가장 미천한데서, 가장 없는 것 같은 무의 상태에서 있게 하시는, 승리하게 하시는 놀라운 방법임을 다시 깨닫게 해주십니다. 인간을 움직이는 일, 세계를 움직이는 힘은 권력이나 핵의 힘이 아닌 겸손과 온유, 평화와 사랑에 있음을 실증해 보이셨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스스로 높아지기를 원하는 우리들, 겸손한 것을 미덕으로 알기 보다는 힘만이 만능이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현대인에게 주시는 놀라운 교훈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겸손한 자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능력, 온유한 자에게 임하시는 하늘의 위로, 사랑으로 이 세상을 움직이고, 사랑으로만 진정한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만고의 진리를 그 분은 우리에게 실증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교만과 허영의 못된 것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놓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생애를 바칠 때에 평화의 왕 예수는 오늘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의 성에 4입성하게 되실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당시 군중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호산나! 호산나! 주를 찬송하던 무리들의 환호 속에는 자기들의 약속된 미래, 행복한 내일을 향한 맹목적 군중심리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요즈음의 교회가 이런 동상이몽 가운데서 교인들을 살게 합니다. 교인된다는 것이 자기의 이익과 직결될 때 그들은 열심을 내게 되고, 환호하는 군중이 되 버립니다.  군중심리에서의 믿음을 경계해야만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를 생각해보면 교회 나가는 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성경책도 숨겨서 다니던 때, 요즘은 떳떳하게, 아니 당당하게 성경책을 들고 다닙니다. 교인이란 것이 어떤 면에서는 유리하게 작용하는 시대입니다.

  이제 현대인들은 고난의 예수 이야기보다는 영광의, 축복의 예수만을 떠올립니다. 만능의 하나님을 믿어서 나도 만능이 되기를 열망하는 심리에서 환호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가까이에 다가오는 예수님의 쓰디쓴 잔과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뜻은 아랑곳없고, 오늘 우리에게 임하셔서, 영광스럽게 왕이 되시고, 잘 사는 나라, 풍요한 세상을 구가토록 해주실 것에만 관심이 급급합니다. 그래서 환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게 좀 서운하지만 까짓것 나귀타고 들어오시는 것은 문제가 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왕이 되어서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고, 잘 살도록 해준다면, 누구든지 어떻게 되든 환호하지 않을 수 없는 군중 심리만이 예수님의 입성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자기들의 기대가 저버림을 받게 되자, 어제의 환호와 열심을 몽땅 내동댕이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앞장서게 되어버렸습니다.

  제사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온통 관심을 갖는 동상이몽의 신앙생활은 길게 갈 수가 없습니다. 뿌리 없는 나무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참 신앙을 갖기 위해서, 독생자들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그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의 자리에 있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참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의 길, 참된 희생이 없이는 부활의 영광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광의 뒤안길에 있는 숱한 어려움과 고난을 외면하지 말고, 오히려 그 고난을 통해서 승리하려는 참된 믿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없이, 봉사와 희생의 정신없이 참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신 주님의 믿음을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에는 회개와 용서의 경험 없이 구원의 축복만을 기다리는 구름을 잡는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참된 믿음의 결단,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믿음의 태도 없이, 하나님의 축복만을 얻으려고 한다면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깨어지는 아픔 후에는 생명이 창조되는 것같이 결단의 아픔을 거친 후에야 참다운 신앙은 싹틀 수가 있습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부활이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등한시하는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 참된 십자가의 길을 보이시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희극적인 입성을 감행하셨던 것입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죽음을 통한, 희생을 통한 인류 구원의 대사업을 이루시려고 결단하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을 감행하실 수 있으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나를 깨뜨리는 아픔, 나의 부족함을 스스로 고백하는 처절함이 없이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구원의 기쁨을 참된 축복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의 부족함과 죄 됨을 느끼고, 용서를 구하는 결단 속에서 십자가의 참뜻을 알게 되고,  물과 피를 남김없이 쏟으신 예수의 고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자기 십자가의 희생을 강담할 때만이 내일의 영광과, 부활을 향한 꿈을 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아프리카에서 내 생의 대부분을 보냈다는 사실을 헌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 주신 말할 수 없는 은혜의 빚을 생각하면 그것은 보잘것없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 빚을 갚을 수 있나요? 그리고 우리가 건강하게 활동하고 선을 베풀며 마음의 평화를 얻고 영광스러운 내일을 희망하는 것이 헌신이 될 수 있나요?

결코 그러한 말과 그러한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절대 헌신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것은 특권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때때로 고민하고 병들며 위험에 처하는 것은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며 또한 잠시 동안의 일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때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나는 결코 헌신을 해 본 일이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높이 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는 헌신이라는 말을 감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드는 리빙스턴의 고백입니다. 스스로 십자가를 향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 앞에서 우리도 리빙스턴처럼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오늘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예수님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권면 아니 명령 앞에 섰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그것은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 하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십자가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부정입니다. 버림의 출발지이며 버림의 과정이며 완성은 바로 자기 부정입니다.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도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가 살아있는데 십자가를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자신의 욕심과 욕망과 탐욕이 있는 사람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왔었지만 주님의 길을 따르지 못한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그랬고, 물욕에 빠진 가룟 유다가 그랬고,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심지어는 공회원인 니고데모도 처음에는 이 문제에서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야심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자기를 부인하는 마음이셨고, 자기를 부인하는 마음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완성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아멘.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읍시다.  우리가 예수의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사회와 그리고 우리의 교회 안에도 그리스도의 마음, 십자가의 영성이 채워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이렇게 십자가의 죽으신 주님이 결코 패배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바울사도는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10절)’ 라고 뜨겁게 증거 합니다.  십자가의 방법을 세상의 모든 영혼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길입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의미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항복한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며,  주님께 충성과 복종을 한다는 뜻도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주님께 온전히 예배하는 예배의 백성이 된다는 의미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예수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이 소극적이요,  손해요, 패배만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귀를 타고 비무장으로 입성하신 예수님을 이해하고 그의 마음을 품고,  그의 마음으로 살기로 작정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예수를 향하여 오해 없이 호산나, 호산나 외치며 환영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호산나’는 여호와께 구원을 구하는 짧은 기도로써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 하소서’란 뜻입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를 향하여, 진심으로 ‘호산나,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 하고 그를 영접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요, 그분을 알고 영접할 때 그분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11절)’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예수의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나를 비우고,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할 때에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그 주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갈 때에 그를 통하여 이루신 부활의 영광이 우리를 통하여도 나타나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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