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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시 면류관 / 마 27: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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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 면류관 (마27:20~31) 

오늘은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으로 들어오실 때 가두에 있는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맞이했다고 해서 종려주일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으로 들어오셨을까?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그렇게 예수님을 영접하며 환영했을까요?
그 때는 예루살렘 명절 중에 가장 성대한 유월절이었습니다. 유월절이란 우리나라에 비하면 광복절과도 같은 절기입니다. 우리가 시청 광장에 모이듯이 이스라엘사람들도 예루살렘 성으로 다 모여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자유인이 된 것을 축하하는 절기가 유월절이므로 엄청난 축제였습니다. 그리고 왜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도 환영했을까요?

모세 시대에는 애굽에서 자유를 얻었지만 이제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하실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유를 얻게 해 주실 것이라는 증거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가지각색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소경을 보게 하셨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셨고 ·문둥 병자들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 것뿐입니까?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를 5천명을 먹이시고 몇 광주리가 남게 하셨습니까?
·또 그 풍랑이 출렁거리는 갈릴리 바다 위를 걸어오셨고 그저 말씀 한마디로 그 풍랑을 잔잔케도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신다고 하니 사람들이 와! 이제야 왕이신 예수님께서 오시는 구나하며 열렬하게 맞이하였을 것입니다.
마 21:8-9을 찾아보겠습니다. 다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그런데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왜? 왕이 살 수 있는 금 면류관이 아니라 가시로 얽어서 만든 가시관을 쓰셨을까요?

사실 지금 우리도 예루살렘에서 소리치며 환호하는 군중의 모습과 너무나도 비슷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이유가 금 면류관 쓰시고 그저 나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시는 예수만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십자가를 지려는 생각은 꿈에도 가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자청년처럼 혹시나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내놓으라고 하면 어떡하나!! 혹시나 가족과 함께 즐기려는 나의 시간을 더 예배에 내 놓으라고 하시면 어떡하나 염려하지는 않습니까?
우리 예수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마 10:38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금 면류관이 아니라 가시관을 쓰셨을까요? 그리고 우리에게도 왜 십자가를 지라 하셨을까요?


첫 번째>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죄가 얼마나 수치스러우며 죄의 결과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저 단순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려고만 하였다면 꼭 가시면류관이 아니라 짚으로 만든 관을 씌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면류관은 짚이 아니라 가시줄기로 된 나무를 엮어서 머리에 푹하고 씌운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자라나는 가시나무는 줄기처럼 자라나는데 가시 하나의 길이가 5㎝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가시나무로 된 둥근 관을 예수님 머리에 씌웁니다. 그것도 푹 누르니 머리가 찢겨나가고 이마가 찢겨져 나가고 온 머리를 가시들이 찌릅니다. 피가 흐릅니다. 비명의 외마디 소리가 저절로 울려 퍼집니다.
아―아―아 죄가 이리도 고통스러운 것이란다.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렇다면 그 누가 하나님의 절대적이며 완전하신 말씀 앞에 온전할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예와 아멘 밖에는 없다라고 하신 사도바울 조차도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치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하면서 "나는 매일매일 죽노라"하였습니다.

사랑의 사도였던 사도요한도 "죄 없다 하면 이는 거짓말쟁이요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롬 3:23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악한 생각을 하면 그것조차도 죄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죄를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
큰 죄냐? 아니면 작은 죄냐?
적게 지었느냐? 많이 저질렀느냐도 문제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죄에 대한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파하고 있습니까?
그 죄 때문에 괴로워합니까?
그것 때문에 수치스럽고 창피한 것이라고 가슴아파하고 있느냐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고 모이기를 힘쓰라! 모이기를 폐하려는 자들과는 멍에도 같이 매지 말라 그래서 담임목사도 시간시간 예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를 보세요! 그는 기도에 대해서 "나는 기도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마가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행 1:14에는 "저희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 힘썼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항상 기도에 힘쓴다"고 골4:2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딤전 2:1에서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와 간구를 한다고 하였고 사도베드로는 벧전4:7에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하였습니다.

소망의 성도들이여!
2003년 오늘까지 우린 얼마나 예배를 사랑하셨던가요?
다윗은 시 122편에서 "사람이 내게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하였을 때 나는 기뻐하였다" 하였습니다. 다윗처럼 소망의 성전을 찾을 때 기뻐 뛰놀 것 같았습니까?
뼈가 쇠하여질 정도로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였습니까?
기도하지 못한 것 때문에 가슴 아파한 적이 있었습니까?
만일 2003년도에 나의 예배에 내 기도생활에 나의 전도에 문제가 있다면 아파해야 합니다.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가슴이 저리도록 시려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신 이유는! 죄의 고통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가시관 쓰고 주님 따르다가 부활의 면류관을 받아쓰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신 것은 오늘 우리 자신들도 얼마든지 예수님 머리 위에 가시관을 씌울 수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로마의 군병들만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얼마든지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법을 어긴 사람들을 다루는 사람을 검찰이라고 한다면 나라의 경제가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경제 최고의 검찰을 공정거래 위원장이라고 한답니다. 그런데 한 나라의 경제를 바르게 인도해야 할 사람이  SK Group으로부터 뇌물을 받아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육군에서는 5천만원의 뇌물을 받은 육군 준장이 들통이 나서 수갑을 차는 가슴 아픈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정거래 위원장이 뇌물 받은 것만이 문제일까요?
육군 준장이 뇌물 받고 수감된 것만이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이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에 미움이 살아 있다.
미움이 곧 살인이라는 이 마음과 원망의 얼음칼이 예수 믿는 사람의 속에 있다면!!!! 아니! 있으니 이게 더 무서운 일입니다. 돌아보면 얼마나 감사할 조건이 많은데 아직도 불평과 불만 속에 사로 잡혀 산다면 이게 더 무서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슴을 만져 보세요!
주머니를 뒤져보세요
어떤 가시가 잡혀 지십니까?
예수님의 머리에 쑤셔 넣은 가시가 5㎝였다면 우리 가슴속에 있는 미움과 원망의 가시는 과연 그 길이가 얼마나 될까요?
예수님은 주님이시오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으시면 아멘 하십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면 우리는 그 분만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 왕이시라면 우리는 그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왕으로 인정하지를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입니다. 누가 거짓말쟁이 입니까?

1873년 Constantinople의 한 수도원에서 120개의 양피지에 희랍어로 쓰인 "디다케"라는 책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책에는 "거짓 전도자"라는 내용이 있는데 초대교회에는 전도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많다 보니 거짓 전도자들이 자꾸 생겨나서 교회와 성도들을 혼란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참 전도자와 거짓 전도자를 구별할 수 있는 글을 적어 놓았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너희에게 오는 모든 전도자는 주님처럼 영접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하루 이상을 머물러서는 안되며 필요한 경우 이틀을 머물 수 있다. 그가 3일 이상 머문다면 결코 참된 전도자가 아니다. 그리고 전도자가 떠날 때에는 다음날 먹을 양식 외에는 아무것도 받아서는 안 된다. 그가 만일 돈을 요구하거나 그냥 할 일 없이 머물기를 원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주의 종을 주님처럼 영접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저를 포함하여 우리교회의 모든 교역자들은 대가 이상의 희생을 해야 합니다. 우리교역자들이여. 출퇴근하는 마음입니까?
아니면 하루 24시간 전체가 비상대기와 같은 심령으로 사명을 수행하고 있습니까?
만일 그러지 못했다면 우린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앞잡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주의 종을 비난하고 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또다시 가시관을 씌우는 이요 거짓말쟁이입니다.
우리 주의 종들이 게으르고, 욕심에 사로잡혀 있다면...
나 때문에 또 다시 예수님께서 피 흘리시는 배역이 없기를 바랍니다.
다 같이! "나 때문에!"


세 번째로> 예수님의 가시관은 고통 중에 얻은 승리의 가시관 이였습니다.

이 가시관의 고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지 예수님조차도 "이 잔을 내게서 물리쳐 주시옵소서"라고 외치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겁내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한마디의 원망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이 모습에 로마의 군인들이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이 사람이야말로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백부장은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이 나를 비웃고 조롱하고 핍박해도 복수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원수로 생각해서 가슴에 묻어서도 안됩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 옆에 조립식 건물을 지었습니다. 유아원 아이들이 그곳에서 놀면 옆 아파트에 사시는 분들이 그 소음 때문에 견디기가 힘들다고 해서 창고로 허가를 받아 지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여자분이 구청에 전화를 해서 만일 그 창고 안에 아이들이 들어가기라도 하면 고발해 버리겠다고 전화를 했다면서 오히려 구청에서 당분간 아이들이 들어가서 놀지 말라고 전화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분들이 시끄럽다고 해서 소음을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 분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솔직히 미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나서 할테면 해봐라 하는 마음도 들더군요. 그러나 이럴수록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스데반집사님처럼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하시면서 까지도 용서하셨던 그 마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로마의 백부장 까지도 감동을 시키신 주님께서 저들의 독함 마음을 녹여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시 면류관입니다.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죄를 아파하십시다. 부끄러워하십시다. 그리고 다시는 또 다시 나의 원망과 불평으로 예수님을 피 흘리게 하지 마십니다. 오히려 인내하고 감사하면서 박해자들 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시면류관 주일 종려주일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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