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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아나신 예수님 / 마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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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나신 예수님> 마28:1-10
새문안교회 2003. 4.20 부활주일예배
설교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친히 예고하셨던 대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당하셨을 뿐 아니라, 역시 여러 차례 예고하셨던 대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 날부터 제3일 되는 날 동트기 전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처음 만나 뵌 이들은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보려고 갔다가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예수님의 무덤을 단단히 막고 있던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아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1-2). 천사는 여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는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다"(5-6) 했습니다. 이렇게 여인들은 처음에는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직접 뵙지 못하고 천사로부터 그의 살아나심에 대한 소식만 들었었으나 곧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직접 만나 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들에게 "평안하냐" 물으셨고, 그 여인들은 나아가 그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고 본문은 전합니다(9). "발을 붙잡는" 것은 왕이나 통치자에 대한 복종과 존경을 표하는 행위였습니다. 즉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행동입니다. 게다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는 행위는 그를 하나님으로 보는 것을 뜻합니다. 즉 그 여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과 메시야로 보내신 이로 온전히 깨달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과 메시야로 확증시키신 것입니다.

본문 9-10절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만난 여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이 본문 속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여인들에게 하신 말씀은 세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평안하냐" 하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서워하지 말라" 하신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신 것입니다.

"평안하냐" 하시고 "무서워하지 말라" 하신 것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을 안심시키시고 평안을 비시는 말씀입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도 하나같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눅24:36, 요20:19, 26). 눅24:50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실 때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위로와 평강의 주님이십니다. 비록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을 기뻐하며 반겼겠지만 주님을 다시 뵙는 그들의 심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비겁하게 예수님을 부인했거나 쉽게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던 일로 인한 수치심과 회한과 두려움에 싸여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지나간 허물에 대해 일체의 비난이나 질책이나 보복적 성격의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미 다시 살아나실 것을 여러번 예고하셨고 그 예고대로 예수님께서 실제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도록 다시 찾아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엄연한 현실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꾸중하기는 하셨지만(눅24:11, 막16:14, 요20:25-27) 예수님께 대하여 제자들이 저지른 지나간 허물을 탓하시는 말씀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그들에게 평강을 비셨을 뿐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은 이어서 하신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신 말씀 가운데서도 잘 드러납니다. 먼저 "내 형제들에게" 가서 말하라 하신 사실이 눈길을 끕니다. "내 제자들에게"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 형제들에게"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 못난 제자들, 겁쟁이 제자들, 거짓말쟁이 제자들, 허풍쟁이 제자들, 배신자 제자들에게"라 하지 않으신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일텐데, 그냥 "내 제자들에게"도 아닌 "내 형제들에게"라 하신 것입니다. 전에 보다 한층 더 가까운 존재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용서와 변함없는 사랑과 신뢰가 담긴 말씀인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신 사실도 유의할 일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날 볼 일도 없고 날 볼 자격도 없다. 나도 그들을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가서 갈릴리에서 내가 보잔다고 말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못나고 덜된 제자들이지만 변함없이 보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여기서 만납니다.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보기를 원하셨다는 사실 또한 주목할 만 합니다. 왜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보자고 하셨겠습니까? 갈릴리가 어디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처음 만나신 곳, 주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곳, 예수님의 사역의 대부분이 이루어졌던 곳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친근하고 동고동락의 정이 배어있는 그곳입니다. 예수님을 버린 제자들이 결국 돌아갈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보시리라 하신 것은 아마도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처음과 변함없는 마음을 표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을 버리실 것이었다면 갈릴리에서 그들을 다시 보자고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배신과 부정과 좌절과 수치의 도성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만남과 사랑과 나눔의 삶과 소망을 일으킨 땅 갈릴리에서 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품었던 꿈이 깨진 제자들은 갈릴리로 귀향해 물고기나 잡는 삶으로 되돌아가려 했습니다(요21:1-3). 주님께서는 그것을 이미 내다버시고 제자들의 그 자포자기의 자리에 서계실 것임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거기서 다시 그들을 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마치 "아니다 너희들이 할 일은 물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일이다. 너희들은 나를 잠시 버렸을지 몰라도 나는 너희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너희들도 나에 대한 사랑은 변함없을 줄 안다. 나는 너희를 믿는다. 내 양을 먹여다오"라고 말씀하시려는 듯이 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로 돌아와 다시 맥없이 고기 잡는 그물을 던지고 있던 베드로와 그 일행에게 처음 그들을 만나시던 모습 그대로 다시 찾아 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 하시며 제자들에 대한 사랑과 용서와 화해와 신뢰를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사랑과 화해와 새 소망의 주님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인하고 버렸던 제자들을 오히려 형제라고 부르셨다는 것은 단지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신뢰가 변함없다는 뜻뿐 아니라, 그들을 아버지 하나님의 일을 위한 동역자로 여기셨으며 이제부터 진정 그들이 하나님나라의 일을 감당할 것을 원하셨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무리들 앞에서 말씀하고 계신 예수님께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께 할 말이 있어 찾아왔을 때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12:48, 50)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이제 형제들이라고 부르신 것은 이제야말로 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복음전파의 사명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실제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시고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 그들에게 주신 지상명령이 무엇입니까?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그 말씀으로 마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은 그 자신의 부활과 함께 제자들의 부활, 믿음의 부활, 소망의 부활, 사명의 부활을 가져왔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심을 통하여 예수님의 제자들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영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없었던 제자들을 다시 일으켜 살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심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죽음을 이기시는 생명의 주이심을 믿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심을 통하여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시고 그들에게 복음전파를 명령하심으로써 그들의 복음의 사도로서의 사명을 부활시키신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부활과 그의 승천 사이의 일을 언급한 그의 복음서의 마지막 장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기록했습니다. 오늘 본문인 1-10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사실과 그 정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11-15절에서는 매수와 허위사실조작과 위증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사실을 은폐하려고 한 세상권력의 모의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묘지를 지키던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심과 관련하여 일어난 모든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렸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예수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의 시체를 도둑질하여 갔다"고 거짓말을 퍼뜨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시체를 도둑질 당했다는 말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도 문책과 처벌을 받을까 근심하지 않아도 되도록 잘 말해주겠다고 약속하며 그 군인들을 안심시켰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이 돈을 받고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가르친 대로 하였으므로 그 말이 그 이후로 계속해서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졌다는 것입니다. 16-20절은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선교의 지상명령을 내리신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살아나심, 예수님의 살아나심을 부인함, 살아나신 예수님을 증언함으로 요약할 수 있는 이 구조 자체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그것을 부인합니다. 이 세상의 합리적 이성과 그 논리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이 세상의 구원자 되심과 그의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사실을 온 천하에, 모든 민족에게, 세상 끝날까지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확인하고 다짐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심이 그의 제자들에게서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사명을 다시 살려 일으켰듯이, 오늘 우리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사명의식이 다시 확실히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열한 제자들처럼 주님을 따르는 믿음에 있어서 실패하고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좌절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실패와 자책과 좌절로부터 우리를 다시 일으켜 살리는 것이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심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실패와 실망과 좌절의 자리에 항상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 서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 앞에 찾아오시는 주님은 우리의 지나간 죄를 냉엄하게 따져 물으시는 주님이 아니십니다. 다시 살아나신 주님은 우리에 대한 평가를 끝내고 우리를 내던져버리는 심판자가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다시 기회를 주시며 우리를 신뢰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저 지금 "아직도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우리의 긍정적인 대답 듣기를 원하시며 우리에게 할 일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그를 증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다시 살아나심을 믿는 사람은 그 사실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신앙을 가진 이들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삶을 새롭게 다짐하는 오늘 이 부활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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