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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의 주를 맞으라 ! / 요 2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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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 20:11-18
제목 / 부활의 주를 맞으라 !

오늘 우리는 <부활의 아침>을 맞고 있습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
그 분은 참으로 우리에게 <소망>이 되십니다.

주님의 이 부활을 축하하기 위한 행사가 많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부활절 연합 예배>, <축하 공연>, <축하 음악회>등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교회마다 이 날을 축하하기 위해서 온 교인이 함께 하는 다양한 행사들을 준비하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도 오늘 <찬양예배>는 온 교회가 함께 하는 부활절 <칸타타의 시간>을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
그것으로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제대로 맞이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
모여서 함께 예배하고, 축하음악회를 하고, 해마다 그 어떤 다른 다양하고 특별한 행사를 했다고 해서 우리가 정말 <부활의 주님>을 제대로 맞이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저는 왠지 개운치가 않습니다.
올해도 우리가 어김없이 <고난주일 특별새벽기도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아침에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부활절 축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후 2시>가 되면 우리는 다시 이 자리에 모일 것입니다.
<성가위원회>가 주관하는 <칸타타의 시간>이 이곳에서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  어떻습니까 ?
우리가 이런 시간을 올해 처음으로 갖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
그런데 어떻습니까 ?
주님의 부활사건이 우리의 삶 속에 가져다준 <기쁨>이 있는지요 ?
그 사건으로 인해서 우리의 삶 속에 무슨 <아름다운 변화>가 있었는지요 ?

우리는 여기에서 진지하게 믿음으로 사는 우리네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부활의 주>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
그저 <행사>로만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삶>으로 우리가 부활의 주를 맞이할 것인가 ?
여기 이 문제로 고민하고 번민하는 모습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결단해야 합니다.
  부활의 주 ! 
  그를 이제는 <행사로> 맞이하지 아니하리라 !
  이제는 내가 부활의 주를 <삶으로> 맞이하리라 !
저는 이 시간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잘 알고 계시다시피 우리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외양간>이었습니다.
<외양간>이란 어떤 곳입니까 ?
짐승들이 먹고, 싸고, 드러누워서 자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는 곳 !
거기가 바로 <외양간>이지 않습니까 ?

그렇다면 거기 그 <외양간>이 어떤 곳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
세상에서 가장 추하고, 더럽고, 냄새나는 곳 !
거기가 바로 <외양간>입니다.
거기가 그런 곳이기에 <비위>가 어지간히 좋은 사람이 아니면 그곳에 잠시동안도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  잊지 마십시오 !
우리 예수님은 바로 그런 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말할 수 없이 낮고 천한 곳 !
우리 주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왜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런 곳에서 태어나셔야만 했을까요 ?
여기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만한 곳 중에서
  그래도 거기가 가장 깨끗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성도 여러분 ! 
여기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
우리 인간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 !
거기는 짐승들이 살고 있는 외양간보다 훨씬 더 더럽고 추한 곳이라는 말이지 않습니까 ?
그러기에 거기에서는 우리 예수님께서 도무지 태어나실 수가 없으셨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여기 이 사람의 이야기를 말입니다.
그가 말한 대로 지금 우리네 삶의 현장은 어떻습니까 ?

우리는 불과 얼마 전에 <새 대통령>을 맞이했습니다.
새 대통령에 피선된 <노무현>씨의 <제 일 성>은 이것이었습니다.
  국민이 승리하셨습니다.
  이제는 국민이 대통령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맞고 있는 현실은 어떻습니까 ?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이라는 사람은 대통령의 최 측근 중 측근이라는데, 그가 벌써 다 쓰러져 가는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아먹었다고 해서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그제는 이 나라 경제를 깨끗하게 운영해야 할 책임자가 자신이 다니는 절에 10억을 시주해달라고 해서 구속이 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가 앉아 있던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 자리 !
그 자리는 누군가에게 부탁을 했을 때 그 누구도 거절할 수 없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강요도 아니었고, 대가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렇게도 더럽고, 추하고, 냄새납니다.
그런데도 우리, 지금 어찌하고 있습니까 ?
  그래도 아직은 여기가 살만 한데 왜 그러지 ?
여기 이런 생각이 오늘 우리의 생각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기억하십니까 ?
예수님께서 <아이들>을 대단히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러셨겠습니까 ?

아이들은 순수합니다.
아이들은 단순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깨끗합니다.
예수님께서 머물고 싶으셨던 자리는 바로 그런 자리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인간답지 않은 인간 !
그런 인간을 <짐승 같은 인간>이라고 말입니다.
그보다 좀 더 심하게 말할 때는 이렇게 말합니다.
<짐승보다 못한 인간> !
하지만 그 말들은 모두가 <틀린 말>들입니다.

구약시대에 <라멕>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대부분 땀을 흘려가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라멕>이라는 사람의 눈에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
그 모습은 정말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가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노아>라고 지었지 않습니까 ?
<창 5:29> 말씀이 여기 이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노아> !
그 이름이 지니고 있는 뜻은 <위로>라는 뜻입니다.
<라멕의 시각>으로는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
그들은 모두가 위로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는 존재들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바로 그 <다음 장>으로 넘어가 보면 똑같은 사람들을 놓고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각>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홍수>로 쓸어버려야 할 더럽고, 추하고, 냄새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참으로 중요한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땀을 흘리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 !
그것만으로는 우리가 <인간다운 인간>, <짐승보다 나은 인간>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그렇겠습니까 ?
짐승들 역시 먹고살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어떻습니까 ?
짐승들은 <부정한 짓>을 하지 않습니다.
짐승들은 인간들처럼 욕망에 사로잡혀서 많은 것을 쌓아두는 법이 없습니다.
<자기자식을 향한 사랑>만 하더라도 우리 인간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새끼를 위해서 자기 몸을 기꺼이 내어주는 어미 !
새끼를 위해서 그렇게 기꺼이 죽어주는 어미가 한 두 종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보셨습니까 ?
홍콩의 한 임신한 여인이 <사스>에 걸렸는데, 치료를 받으면 아이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다 줄까봐 치료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 여인은 죽고 말았지만 아이는 <제왕절개 수술>을 해서 살았습니다.

어떻습니까 ?
참으로 <감동적>인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
여기 이런 이야기가 <왜> 그렇게도 <감동적인 이야기>로 우리 가슴에 와 닿습니까 ?
그것은 그런 일이 어쩌다가 한 번 씩, 가물에 콩 나듯이 우리 인간들 세계에 있는 일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하지만 <짐승들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너무나도 <일상적>인 것입니다.
<저들의 삶> 자체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이야기는 적어도 <짐승들 세계>에서는 뉴스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짐승보다 못한 인간>, <짐승 같은 인간>이라는 말은 우리가 이제는 정말 삼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승과 인간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창 2:7> 말씀을 보시겠습니까 ?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

<창 2:19> 말씀도 보실래요 ?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

성도 여러분 !
무엇이 다릅니까 ?
우리 인간과 짐승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똑같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사람에게만은 우리 하나님께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여기 <이 차이>는 대단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짐승들과는 다르게 <영적인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인간과 짐승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이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영적인 면>을 상실해 버리면 그는 그야말로 짐승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아니 그 순간부터 인간은 짐승보다 못한 인간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영적인 면>을 상실해 버린 사람들 !
그런 사람들이 짐승들보다 더 잔인하고, 더 냉혹하고, 더 탐욕적이라는 것은 이미 충분히 증명이 되었습니다.
<그 어떤 맹수>보다도 더 잔인한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탄식소리>가 그치지 않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통곡소리>가 그치지 않는 이유도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다투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 이유도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모두가 <영적인 면>을 잃어버린 사람들 !
그런 사람들이 이 땅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
여기 이런 소리가 우리네 삶의 현장에서는 전혀 들을 수 없는 소리입니까 ?
탄식소리, 통곡소리, 다투는 소리 !
이런 소리들이 우리네 삶의 현장에서는 전혀 들리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영암의 가족 여러분 !
지금 내 삶의 현장에서 이런 소리가 들리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영적인 면>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지난 한 주간 우리가 마음으로나 <골고다 언덕>에 올라서야 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언덕 위에 서서 눈을 들어 <십자가 위의 주님>을 바라보아야 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의 시간>을 갖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 !
그것은 이제 우리가 나누는 빵과 포도즙 위에 <영적으로> 임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빵>과 <포도즙>을 먹고 마심으로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영성 회복>을 위해 !
우리 안에 <영적인 면>을 회복하기 위해 !
우리는 이렇게 1년에도 <몇 차례>씩 이런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의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대낮에 요란한 팡파르와 함께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많은 사람들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시간 !
참으로 조용한 그 시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도 보십시오 !
<부활하신 주님>을 여인들이 <동산지기>로 알았다 하지 않습니까 ?

무슨 뜻이겠습니까 ?
<주님의 부활>은 너무나도 평범한 가운데, 너무나도 조용한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어떤 거창한 행사>로 우리가 부활절을 맞이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 주님의 부활정신>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과 만나자고 하신 곳은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갈릴리>였습니다.
제자들의 <삶의 현장> !
바로 거기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만나고 싶어하셨습니다.

주님의 그 마음은 오늘도 여전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와도 <우리네 삶의 현장>에서 만나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으로> !
이제는 <우리의 삶으로> 우리가 부활의 주를 맞이해야 합니다.
<무덤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
그 분께서 정말 우리를 보고 싶어하시는 곳은 바로 거기입니다.

사랑하는 영암의 가족 여러분 !
부활의 이 아침에 우리가 성찬의 시간을 갖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이 성찬의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삶의 전환점이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짐승 보다 못한 인간 !
짐승 같은 인간 !
우리에게서 <영적인 면>이 사라져 버리면 우리는 그런 인간으로 오늘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다운 인간으로서의 삶 !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불어넣으신 생기 !
그것을 우리가 우리 안에 간직할 때에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기억하십니까 ?
<아기 예수>가 탄생했던 <외양간> !
바로 그 외양간에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와서 무릎을 끓었던 <거룩한 처소>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우리의 가정>이 외양간 같다 하더라도 !
겉으로 보기에 <우리의 일터>가 정말 외양간 같다 하더라도 !
우리 안에 <영적인 면>으로 가득 채우기만 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 가정, 우리 일터를 얼마든지 <거룩한 처소>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부활의 아침이 우리 모두에게 <그런 날의 시작>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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