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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패자부활의 기적 / 사 2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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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패자부활의 기적 
본문 : 이사야 25:6~8   

서울 은평구의 한 입시전문학원에는 초­중­고 12년이 인생의 장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시기라는 뜻으로 「기회를 놓치면 영영 인생의 패배자가 된다」고 쓴 커다란 현수막을 걸어놓고 있다. 물론 공부하는 시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하면 마치 인생의 패배자인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글이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오랫 동안 기자로 근무하던 일본 사람이 떠나면서 한국에 대한 인상을 이야기하라고 했더니 “한국에는 패자부활전이 없다”는 단 한마디로 요약하고 떠났다고 한다.

한번 생각해 보라. 패자부활이 없는 인생은 얼마나 비참한가? 경쟁에서 한번 지면 다시 회생할 수 없는 상황. 대학 입시에서 좋은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면 계속해서 패자로 남을 수 밖에 없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인가? 패자부활이 없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라. 성경은 패자부활로 가득한 내용이다. 인생역전의 드라마로 가득한 것이 바로 성경이다. 아브라함은 우상숭배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인생을 살다가 죽고 말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아브라함에게 패자 부활의 기적이 일어났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버림을 받았다. 애굽에 팔려갔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패자로서 인생을 마무리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를 높이 들어 쓰셨다.

사사시대의 룻을 보라. 젊은 나이에 룻은 남편을 잃었다. 고향도 떠났다. 먹을 것도 없었다. 그러나 나오미와 룻 사이에 인생의 역전 드라마가 전개된다. 패배한 인생, 절망 중에 있는 인생이지만 하나님은 패자 부활전에서 다시 승리하게 하셨다.

에스더서의 이야기를 보라. 하만이 모르드개와 온 유대이을 죽이기로 음모를 꾸몄다. 유대인은 몰살 위기에 있었다. 그 위기를 축복의 기회로 바꾸었던 것은 에스더의 헌신이 있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금식하며 기도했다. 금식하고 기도한 후에 죽음을 무릅쓰고 왕에게 나아갔다. 그 당시에는 왕후라 할지라도 왕이 부르지 않았을 때에 왕에게 나아가면 죽임을 당할 수가 있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에게 나간다. 에스더의 헌신으로 모든 것이 역전되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준비했던 장대 위에 모르드개 대신 하만이 매어 달려 죽었다. 슬픈 날이 변하여 기쁜 날이 되었고 애통한 날이 변하여 축제의 날이 되었다.

성경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패자부활의 기적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완전히 끝난 것 같았다. 군중으로부터 버림받았고, 제자들로부터 버림받았고, 십자가 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까지 버림을 받은 상태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패자부활의 기적을 보여 주셨다. 패자 부활의 기쁨을 가져다 주셨다.

하나의 문이 닫힌다고 하여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을 열어 두신다. 사방이 우겨쌈을 당하여 끝난 것 같지만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하늘을 향한 문을 열어 두신다.

하나님은 언제나 제 3일째를 남겨 두신다. 요나가 큰 물고기 뱃 속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끝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제 3일째를 남겨두시고 그를 니느웨 성에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돌 무덤에 갇혀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 같았지만 제 3일째를 남겨 두셨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예수님께서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예수님은 “패자부활”의 나무와 같다. 포도나무 가지에 연결되어 있으면 포도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에게 연결되어 있는 가지는 패자부활의 열매를 거두게 되어 있다. 수백년이 흘러도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열리고 수천년이 흘러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께서 패자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으니 우리도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패자부활의 드라마가 우리 삶에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에 물이 없어서 고통을 받았다. 어렵게 물을 발견했는 그 물이 써서 도저히 마실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넣으라고 하시니 그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인생의 광야 길을 가는 동안에 얼마든지 쓴 물을 마실 수 있다. 얼마든지 고통의 물을 마실 수 있다. 한 나무가 쓴물을 변화시킨 것 처럼,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인생의 쓴 물을 달게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러한 기적이 일어난다.

본문의 말씀을 보라.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그 가리워진 면박과 열방의 그 덮인 휘장을 제하시며”라고 말씀한다. 면박은 장례식 때에 쓰는 얼굴 가리개이다. 가리워진 면박을 제하신다. 죽은 장례식때에 사용하는 면박을 제하여 버리신다. 부활하신 주님은 죽음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다.

“사망아 너희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죽음은 마치 인생의 패배자처럼 느낄 때가 많다. 불치병에 걸려서 몇 달을 살지 못하고 죽는다는 진단을 받으면 얼마나 괴롭겠는가? 얼마나 마음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심정이 가득하겠는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임상 경험을 토대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심리 과정을 밝혔다. 처음에는 자신의 죽음을 부인한다. 나는 죽지 않는다. 그 진단이 잘못된 오진이었을 것이라. 두 번째에는 화를 낸다. 다음에는 죽음에 대해서 타협하고, 우울증에 걸렸다가 결국에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서 죽어간다고 한다. 죽음을 나의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그렇게도 어렵다. 그 이유는 죽음 자체가 곧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 같고, 홀로 남아있는 것 같고,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하는 많은 염려와 걱정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사망아 너희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바울은 로마서 8:11에 분명히 말씀하신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사야 26: 19 말씀에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이슬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스라엘 땅이 메마른 건기에는 이슬이 얼마나 중요하지 모른다. 이슬은 생명을 가져다 주는 근원이다. “빛난 이슬”이라고 표현하였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자들을 향한 “빛난 이슬”이다.

이같이 죽음은 인생의 패배가 아니다. 인생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 허무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패자부활의 기적이 일어난다.
그 다음 본문의 말씀을 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살면서 실패의 눈물, 패배의 눈물을 씻겨주신다.

1940년대에 에드먼드 힐러리라는 영국의 청년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에베레스트 산 정복에 나섰다가 실패했다. 그는 내려오는 길에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산아, 너는 자라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자라날 것이다. 나는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기어이 네 정상에 설 것이다.” 약 10년 후에 그는 다른 산악인 두 명과 함께 역사상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정복했다. 이 청년은 실패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산은 자라지 못하지만 나는 자랄 것이라. 이 말이 얼마나 감동적인가?

우리가 살면서 실패할 수도 있다. 패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얼마든지 패자부활의 기적은 일어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패자부활의 기적을 가르쳐 주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나의 눈물을 씻어주시고 패자부활의 기회를 다시 주셨다. 문제는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이 문제이다.

유명한 골프 선수 아놀드 파머가 이러한 말을 남겼다. “만약 당신이 패배했다고 생각하면, 당신은 패배한 것이다. 만약 당신이 과감히 패배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당신은 패배한 것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우승하기를 원하면서도 우승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면 십중팔구 당신은 우승하지 못할 것이다. 인생의 전쟁은 강한 사람이나 빠른 사람에게 항상 승리를 안겨 주지 않는다. 조만간 승리하게 되는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아놀드 파머의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이라고 한다.

한 사람의 생각이 이렇게 중요하다. 이미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만 해도 이렇게 승리할 수 있다는데 부활하신 주님이 나에게 승리를 주신다는 확신은 우리를 일어서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사랑하는 성도여! 인생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물질을 의지하지 말라. 실력을 의지하지 말라. 지식을 의지하지 말라. 부활하신 주님을 의지하라.

알렉산더 대제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고전을 하더니 결국 지고 말았다. 그는 싸우면 이기던 사람이었는데 페르시아 전투에서는 패전을 했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괴로왔을까? 이름난 막강한 부대가 보잘 것 없는 페르시아 부대에게 패하고 만 것이다. 그런 어느 날 그는 자신의 군인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행군하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들이 무엇인가를 무겁게 지고 다니는 것이 있기에 군인 몇 명을 불러놓고 배낭에 지고 다니는 것을 조사해 보니 전쟁에 필요한 물건들이 아니고 점령지구에 들어갔을 때 취한 값진 물건들을 가지고 다니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전쟁에 나갔을 때 생명을 내걸고 싸울 수가 없었다. 부패한 군인이 전쟁에 나가서 싸우면 지게 되는 것은 정한 이치였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더 대제는 명령을 내리기를 모든 군인은 장교와 사병을 가릴 것 없이 군인에게 필요한 보급품 외에는 모든 물건들을 한 곳에 쌓아놓으라고 했다. 군인들에게 불필요한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이자 알렉산더는 그 물건들 위에 불을 질러 버렸다. 그리고서 다시 전쟁에 임했을 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내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가? 물질이 채워졌다고 자신 만만한가? 승리자가 되지 못한다. 내 속에 부활 신앙이 있을 때에 인생 최후의 승리자가 된다.
우리는 아직도 월드컵 때에 이탈리아와의 경기를 생생하고 기억하고 있다. 우리 교회의 뒷 마당에서 수 천명이 모여 함께 보았다. 1:0 으로 지고 있었다. 후반 거의 시간이 다 되었다. 설기현이 동점골을 넣었다. 연장전에 들어갔다. 손에 땀을 쥐면서 보았다. 안정환 선수가 골을 넣어 극적으로 이겼다. 우리는 모두가 마음을 졸이면서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 경기를 보아도 조금도 마음 졸이지 않는다. 이미 승리의 스코어를 알고서 보기 때문이다. 역전의 드라마를 보았기 때문이다. 패자 부활의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 부활의 사건이 바로 패자부활의 기적이다. 이미 우리는 인생 최후의 스코어를 알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 패자부활의 나무에 연결되어 있는 사람에게 이러한 기적이 일어난다.
사랑하는 성도여! 패자부활의 기적이 계속해서 일어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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