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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 눅 23:2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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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누가복음 23:26-38 
  제목 :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하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 이 자리에 함께 나아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 전에 그 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먼저 있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지난 주일은 종려주일이고 또 특별기도기간이라 기도에 관한 말씀을 나누었는데 고난의 메시지 없이 바로 부활절 메시지로 들어가기가 부담이 되었습니다.

주초부터 한 동안 고민하다가 오늘 오전에는 그 동안 살필 기회가 없던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오후에는 동천체육관에 함께 모여서 고신대 총장 황 창기 목사님의 부활절 메시지를 듣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오후 3시에 나오지 않는 사람은 부활절 은혜에 동참할 기회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다 함께 나오셔서 부활의 은혜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는 형편이 되면 주님이 십자가 못 박힌 것을 기념하는 성 금요일 저녁에 온 교회가 함께 모여 고난의 메시지를 듣고 성찬을 나누는 것도 생각해 볼 만 합니다. 그리고 부활절 새벽에 온 교회가 다 함께 모여서 부활의 영광을 축하하는 예배를 시도해 볼 만 합니다.
사실 주일 2부에 모이는 숫자만큼 성 금요일 저녁에도 우리 마음만 먹으면 모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새벽, 그게 가장 어울리지 않습니까? 부활 새벽에 1년 365일 한번도 새벽 다섯시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때는 한번쯤 나와서 예배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습니다.

자 그러면 오늘 본문 누가복음 23장 34절의 핵심 부분을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고백에 담겨 있는 주님의 크신 사랑을 묵상하는 오늘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향해서 소리치지 아니했습니다. 말씀 한 마디면 모두 다 도망 갔을법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체포하러왔을 때 “내노라”는 단 한 마디의 말에 그들은 뒤로 물러가서 땅에 쓰러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 한마디에 천지를 창조하신 그분께서 단 한 마디의 말로도 그 들을 다 쓰러뜨리거나 도망가게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단 한 마디의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늘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할 법도 합니다. “아버지여, 저들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에게 어떻게 하는 지 기억하시옵소서. 자기들을 사랑하는 자에게 저지른 악행에 따라서 심판해 주십시오. 자기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베푼 자에게 저지른 이런 배은망덕한 행위를 하나님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나 그 입에는 단 한 마디도 그러한 말이 나오지 아니했습니다. 그 옛날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 하였느니라”(사53:12)는 말씀이 성취된 장면입니다.

그 입술은 움직였지만 한 마디의 비난도, 원망도 없었습니다. “당신들은 왜 이럽니까? 내 손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내 발이 어디 못갈 데를 간적이 있습니까? 내가 여러분들을 향해서 축복 말고는 무엇을 했다고 나를 그렇게 조롱합니까?” 저주도 할 법한 상황에서 부드러운 책망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간청했지 “내가 너희를 용서 한다”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위엄을 내려놓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사죄를 베푸는 높은 자리가 아니라 간구자의 낮은 위치에서 부르짖습니다.

사람들을 용서하는 자리에서조차 자신을 내세우기 좋아합니다. “내가 너를 용서 한다”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간청하는 기도의 자리에서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해서 하늘 아버지께 호소합니다. 진정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을 살피려고 합니다. 비록 우리는 그 참혹한 현장에 있지 않았고 주님을 죽음으로 내몰지는 않았다고 해도 잘 생각해 보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아 갔던 것은 우리의 죄악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야말로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면 우리야말로 범죄 한 자들이었습니다. 죄 용서를 받은 우리들, 어린 양의 보혈로 씻음을 받은 우리야말로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살아왔던 자들입니다.

사단의 권세 아래 살았을 때 우리 모두는 자신을 섬겼고, 무지해서 죄를 짓던 자들입니다. 우리야말로 죄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죄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다 알지 못했기에 젊은 날 죄를 짓는 것을 자랑처럼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알지도 못했고 잘못의 결국이 무엇이라는 것도 보지 못했기에 잘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죄가 하나님을 반역하는 끔찍한 일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잘못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의 지혜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우습게 여기고 하나님의 사랑을 멸시하는 죄악임을 알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우리야말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다 알지 못한 자들입니다. 세상을 짓기 전에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택하셨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생각해 본 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죄를 지시고 값을 주고 사셨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같은 자들을 당신의 사랑하는 자로서 받아 주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와 영원히 하나 되시고 사랑하셨다는 것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여러분 모두가 그 때는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죄악이란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져 버리는 것이요 무한한 자비를 멸시하는 일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행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것이요 주님을 슬프게 하는 일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는 젊을 때부터 주님을 영접하신 분도 있습니다. 설교에 은혜를 받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도 세상에 빠져들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주위의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을 흘리게 했고 아버지의 마음에 부담을 안겨 주었습니다. 때로는 우리를 아끼는 사람들의 충고에 감동하기도 했지마는 다시 완악해져서 주님을 거부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죄악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부인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분께 경배해야 옳습니다. 우리는 그의 사랑을 무시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주님께 돌아서야 했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행동 하나 하나가 바로 주님을 십자가에 다시금 못 박는 행위임을 그 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알았더라면 우리가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는 아니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이 잘못된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망설이고 주저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했습니다. 때로는 주님께로 돌아서야 한다고 머뭇거리다가 다시 옛 어리석은 죄악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거부하는 것이요 주님대신 세상을 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머뭇거리는 순간이 바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순간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주저하는 순간이 바로 성령을 슬프게 하는 순간이요 우리를 사랑하시고 언제나 복 주시는 주님 대신 세상을 선택하는 창녀 같은 행위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완고한 자들이었고 기도 없이 살던 자들입니다. “이 일만 끝나면 주님을 잘 섬기겠습니다”라고 수없이 반복하면서 우리의 좋은 날들을 다 보내버립니다.

이전에 우리는 자기의 의를 신뢰하던 자들입니다. 우리야말로 스스로에 만족하던 자들입니다. 이처럼 주일마다 교회에 나오지요 시간마다 교회당을 찾습니다. 어릴 때 유아세례를 받았고 철들어서는 입교문답을 했습니다.

우리는 식사 때마다 기도드렸고 밤에도 한 장, 아침에도 한 장씩 성경도 읽었습니다. 우리야말로 잘못한 것이 별로 기억나지 않을 만큼 자랑스런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그렇고,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렇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다만 거기에 안주하고 사는 것이 우리의 문제일 뿐입니다.

특별 기도회를 가져도 통회할만한 특별한 죄는 기억나지 않으며 하나님의 자비의 보좌 앞에 엎드릴만한 간곡한 소원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대로 좋은 교회에 어울리는 착한 신자라고 여깁니다. 다만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 대한 최대의 모욕임을 알지 못할 따름입니다.

오직 주님의 자비에 자신을 맡겨야 할 만큼 죄인이 아니라면 주님의 자비에 우리 자신을 맡기지 않고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이야 말로 주의 십자가에 죽으심에 대해서 무시하는 자들입니다. 세상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은 착한 우리와 별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의로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면 왜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 애쓰셨을까요?

우리가 스스로 충분히 의롭다면 십자가에서 당한 속죄의 죽음은 무의미합니다. 쓸데없는 피를 흘리고 고통을 당하시고 생명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의 의를 무시한다고 생각해 오진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의 열심 있는 신앙생활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을 따름입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무시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는 끔찍한 행동입니다.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께서 절실히 필요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것만큼 주님을 무시하는 행동은 없습니다. 주님의 구원자로서의 위치와 그 영광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조용히 여러분의 옛날을 생각해보십시오. 죄악 가운데 살 때 어두움 속에서 영적 소경으로 살던 시절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범한 잘못이 떠오를 것입니다.

두 번째로 말씀드릴 주제는 우리가 알지 못했다는 것을 가지고 변명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우리 주님께서 호소의 근거로 사용하시고 계시지만 그것을 내세워서 우리 자신의 무죄를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한 바를 알지 못했다고 해도 그것이 조금도 무죄를 주장할 근거는 못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법은 무지를 항변의 근거로 허용하지 않습니다. 어느 나라 법이라도 몰랐다고 해서 용서해 주지 않습니다. 법을 어기면 죄를 지었고 알지 못했다고 해서 무죄로 여김 받지 않습니다. 혹 정상참작은 받을지 모르지만 결코 몰랐다는 것으로 면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지켜야만 합니다. 알지 못하고 율법을 어겨도 여전히 죄는 죄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도 알지 못하고 범한 죄를 처리하는 규정을 따로 주셨습니다. 부지중에 범한 죄에 대해서도 특별한 제물을 드리도록 명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본문에도 그 점을 분명히 합니다. 몰랐다고 해서 죄가 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그와 같은 탄원을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알지 못하고 지은 잘못에 대해서 사하여 달라고 주님은 탄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는 알지 못했다고 내세우는 대신 알았어야 했습니다. 특히 주일마다 이처럼 나와서 말씀을 듣는 자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선포되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펼칠 수 있는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을 수 있고,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 가운데서 우리의 행동을 살폈다면 죄악에 대해서 좀 더 많이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도 훨씬 더 알았을 법 합니다. 주님을 거절하고 그 분께 나아가지 않는 것이 배은망덕한 일임을 훨씬 더 잘 깨달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생각해 본적이 없다는 것이 변명의 구실이 될 수 없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을 흔히 합니다만 그것도 충분한 변명거리는 되지 않습니다. 정말 생각할 이유가 적은사람은 오히려 젊은 층이 아니라 노년층일지 모르겠습니다. 순종해야 할 남은 날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다릅니다. 그는 마땅히 생각해야 합니다. 톱질을 하고 나무를 자르기 전에 어떤 것을 만들 것인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들고 나서 어떻게 톱질하고 자를 것인지 계획을 세우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인생을 다 살고 나서 어떻게 살 것인지 계획하는 것은 이미 늦습니다.

젊은 날 마땅히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젊은 날 좀 더 충분히 생각했다면 지금보다 주님을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결혼을 앞두고도 누구를 배우자로 맞이할 것인지 생각합니다.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도 충분히 생각합니다. 자동차를 사든지 아파트를 사도 여러 가지 비교 검토하면서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주님이 요구하시는 말씀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요구에 대해서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은 악한 것이고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론 알지 못하고 범하는 잘못도 있습니다만 때로는 알고도 범하는 잘못도 많습니다. 한 번 기억을 되살려 보십시오. 안되는 줄 알면서도 행한 일들이 수없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범한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면 얻을 것처럼 보인 이익 앞에서 자신의 영혼을 팔아치우는 행동을 우리는 했습니다. 뻔히 잘못인 줄 알면서도 양심을 거슬려 행동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한 일도 가끔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 조용히 하나님 앞에 엎디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는 여기에 덧 붙여서 고백해야 옳습니다. “주님, 알고도 범한 죄들까지도 용서하여 주옵소서”

만약 어떤 사람이 무엇을 마땅히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면 그는 어떻게 해야 옳습니까? 알기까지는 행동하지 않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알지 못하고도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암중모색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 인생의 비극입니다.

죄인인 것을 알려면 버려두면 알 수 있습니다. 방치된 땅에서는 우연히 보리나 밀이 자라서 들판을 채우지 않습니다. 아무 쓸모없는 것들이 자랄 뿐입니다. 우리 마음은 악하기에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고는 선한 열매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특별 기도기간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노력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부르짖어 보는 것입니다. 노력하지 않고도 저절로 될 수 있는 선한 터전의 마음 밭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시도들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악된 자들이기 때문에 아직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지 아니하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 안에 주신 소원에 따라서 우리가 발버둥 쳐보는 것입니다.

무지한 인생은 대책이 없습니다. 빛이 비쳐도 눈을 감으면서 어둡다고 소리치는 자들입니다. 목이 말라도 생수를 마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을 위해서 돌아가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이 흘리신 보혈을 신뢰하십시오.

아직도 우리 위해 간구하기를 멈추지 아니하시는 복되신 주님을 찬송하십시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신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세 번째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호소하시는 복되신 주님에 대해서 좀 더 살피려고 합니다. 주님은 언제 이 호소를 하셨습니까? 그들이 주님을 못 박을 때입니다. 못을 박고 막 돌아설 때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십자가를 땅에 막 세운 직후입니다. 그 구덩이에 십자가를 세웠을 때에 그의 모든 뼈가 뒤틀릴 때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시22:14-15).

이러한 순간에 주님은 입을 열어 소리치거나 탄식하지 않고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이 하는 짓이 죄악이라는 것을 깨닫고 용서를 구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자기가 하는 짓이 무슨 짓인지도 모르는 자들을 향해서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손이 주님을 죽인 피로 흥건히 젖어있을 때입니다.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을 생각해봅시다. 현행범으로 죄를 짓는 자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용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로마서는 이 사실을 웅변적으로 증거 합니다. 하나님은 대책 없는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5:6)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여전히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롬5:8)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5:10).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기 전에 주님을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바로 그 순간에 주님은 우리 인생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의 기도를 잘 들어보십시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지금 주님께서는 자기의 아들 됨을 걸고 호소합니다. 우리를 위해 자기의 아들 됨을 두고 탄원합니다. “아버지여, 제가 아버지의 아들이오니 제 간구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들의 죄를 용서 하옵소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아들 됨은 엄청난 특권이요 영광입니다. 우리는 하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마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입양된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본래부터,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빛 가운데 빛이시오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지금 부르짖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양 손에 못이 박히고, 양 발에 못 박혀서 고통 중에 죽어가면서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제 소원을 들어 주십시오” 어떤 아버지가 그 참혹한 상항에서 마지막 애원하는 소원을 듣지 아니할 아버지가 있겠습니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 부르짖은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얻은 구원으로 함께 기뻐 노래합시다. “나 믿노라 나 믿노라 보혈의 공로를, 흠 없어도 피 흘리사 날 구원 하셨네”

이제 우리는 지금 여기서 기뻐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거기서 영원히 살아갈 새 희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로 말미암는 새 생명을 노래합시다. 우리의 죄가 완전히 사함 받은 것을 마음깊이 믿으시길 바랍니다. 왜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죽는 순간에 고통 받으면서 우리위해서 용서의 기도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지도 아니했을 그때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생각하지도 아니했을 그때에 우리 자신을 위해서 기도 해 본적이 없을 그 때에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고통가운데서 숨을 거두면서도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죄인이 받는 모든 용서는 주님의 십자가상의 기도의 응답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주님의 간구하심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노래합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가 예수를 믿어 그의 흘리신 피로 내 죄 씻었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가 예수를 믿어 그의 흘리신 피로 내 죄 씻었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값을 치루셨기에 우리는 결코 죄 값을 다시 지불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물밀 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이라고 우리는 목청을 높입니다. 이제 더 이상 알지 못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주님의 어떤 부분을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것입니까? 바로 십자가 위에서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신, 그 기도의 모습을 우리가 배워야 할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도 살면서 아니, 지난 한해동안, 아니 지금껏 여러분의 인생을 살면서 여러분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여러분 어떻게 대했습니까? 어떻게 지금도 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를 저렇게 못할게 하는 저 사람을 하나님은 그냥 두시렵니까?”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닮은 기도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주님 내가 이렇게 고난당하고 있는 것 기억하셔서 하나님 의로운 심판을 해 주십시오 라고 호소하는 것도 십자가 위에서 기도하신 주님이 모습을 배운 자의 기도가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들에 대해서, 아니 지금 상처를 주는 바로 그 사람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하셔야 옳습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용서의 기도를 여러분이 들은 적이 있다고 하면, 여러분이 본적이 있다고 하며는 어떻게 기도해야 옳습니까?“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신 부활의 능력이 여러분 안에서 역동할 때 여러분도 주님처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렇게 기도해야 옳습니다. 우리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맨 정신으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누가 내게 오른 뺨을 때리면 나는 두 뺨 다 때려주고 싶어합니다.
이유 없이 내 겉옷을 빼앗아 가면 그 사람의 속옷까지 다 벗겨놓고 싶은 것이 우리의 심정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처럼 살 수 있습니까?
주님처럼 살기 위해서는 주님의 마음에 충만하셨던 그리스도의 영이 찾아와야 합니다. 그 영광의 힘을 좇아서 모든 능력으로 우리에게 능하게 될 때에 예수그리스도를 죽음에서부터 살려내신 그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때에 우리도 우리를 모욕하는 자들,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들, 아니 우리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향해서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신 부활의 능력이 여러분 안에서 약동하기 바랍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주님처럼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백만 도시 울산시민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칠천만 동포를 위해서 함께 기도의 목청을 높이지 않겠습니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오대양 육대주의 흑암아래 있는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합시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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