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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녀들아 / 욜 2:23-26, 골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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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아
(욜 2:23-26, 골 3:20 )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이 주일은 꽃주일이라고도 합니다. 1870년 미국 한 회중교회에서 어린이주일에 예배당을 꽃으로 장식하였습니다. 그리고 “샤론의 꽃, 어린이”라는 제목으로 어린이 주일 예배를 드린 데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어린이들이 꽃처럼 아름답게 자라기를 바랍니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인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꽃을 한 송이만 받아도 감격하고 꽃의 향기를 사람들은 즐거워합니다. 저와 같은 꽃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물론 예외입니다. 꽃가루 알레르기는 콧물과 재채기를 유발하지만 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린이에 대한 알레르기를 가진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린이는 다 좋아합니다. 어린이는 어른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요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이런 인간으로서의 향수를 어린이들로부터 얻습니다. 어린이는 고귀합니다. ‘어린이 헌장’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어린이 권리 선언문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 내용에 보면 “어린이는 완전한 인격자로서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어린이는 말과 행동과 생활전반에 있어서 어른과 동등한 인권상의 보장을 받아야 한다. 어린이는 양육 받을 권리가 있다. 어린이는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어린이는 평화를 누릴 권리가 있다” 등등의 권리를 적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의 이러한 권리를 잘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어린이들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신명기 6:4에는 “이스라엘아 들으라”고 하면서 6:7에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라고 합니다. 자녀에게 가르칠 책임이 주어졌음을 밝힙니다. 그것도 부지런히 가르칠 책임이 있습니다. 어린이의 고귀함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마태복음 18:3에는 “너희가 돌이켜 이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의 가치를 최상으로 올려주십니다.

어린이의 중요함과 천국의 주인임을 확실하게 인정하십니다. 어린이는 천국의 주인으로서의 책임을 가지고 있음을 또한 밝힙니다. 동시에 어린이도 가정과 사회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어린이주일에 아이들에게 잘 하라고만 하지 말고 오히려 어린이로서, 자녀로서의 책임을 가르쳤으면 좋겠습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자녀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자녀들아“라고 부르는 호칭을 잘 듣고 잘 따르게 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골로새서 3:18에서 4:1까지는 새 사람의 가정생활을 권하고 있습니다. 특히 새 사람의 가정 생활을 부부간의 생활, 친자간의 생활로 나누어 권면합니다. 자녀에게 주시는 중요한 권면의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자녀가 부모에게 해야 할 일은 순종입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바울은 권합니다. 이 말씀은 엄격한 명령입니다. “휘파쿠에테”라는 헬라어 원문의 말씀은 선택적 사양이 아닙니다. 강한 필수적인 명령입니다. 반드시 따라야 할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명령입니다. “순종할래?” 혹은 “순종하는 것이 좋지 않겠니?”라는 정도의 명령이 아니라 아주 강한 명령입니다. 에베소서 6:1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라고 권합니다. 왜 순종해야 합니까? 이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옳은 일이기 때문에 해야합니다. 옳은 일인 순종은 자녀에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부모에게 대한 순종의 의무를 동시에 가집니다. 부모는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모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자녀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창조의 질서입니다. 자녀는 순종하게끔 지어진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삭을 보세요. 아브라함의 믿음만 훌륭한 게 아니라 이삭도 대단히 훌륭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할 때 이삭의 나이가 17세였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117세입니다. 17세 된 이삭이 117세 된 아버지를 못 이기겠습니까? 그런데 아버지에게 순종하여 손발이 묶여서 제단 위에까지 올려지게 되었습니다. 정말 이삭의 순종은 탁월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도 그 부모에게 순종하여 받드시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인간의 몸에서 볼 때 요셉과 마리아가 부모였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인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 대하여도 극진한 효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부모님께 순종한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존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는 자녀 교육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수산나는 다음과 같이 자녀 교육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의 고집을 꺾어라. 이것을 빨리 꺾을수록 더욱 좋다. 자녀들에게 지나치게 친절하고 그들을 제 멋대로 하게 내버려두는 부모는 사실상 잔인한 사람이다. 이런 부모는 타파되어야 할 악습을 자녀들에게 기르게 한다. 그리고 자녀들을 제멋대로 내버려두는 부모는 마귀의 일을 하는 사람이며 신앙을 무의미하게 하며 구원을 불가능하게 하고 자녀들의 영혼과 육신을 멸망케 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고집으로 부모를 꺾기 전에 자녀를 꺾어야 합니다. 순종보다 자기 생각이 앞서는 자녀에게 순종이 자기 생각보다 앞섬을 가르쳐야 합니다. 어느 흉악한 강도가 사형 언도를 받았습니다. 그는 죽기 전 어머니 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면회 온 어머니와 철장을 사이에 두고 면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형수는 갑자기 일어나 어머니의 얼굴을 철장 사이로 끌어당기어 코를 이빨로 물어뜯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을 채찍질하지 않고 버려 둬서 이렇게 강도가 되었다고 하는 원망 섞긴 행동이었습니다. 부모를 순종하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마태복음 15:4에는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이라고 합니다. 당시의 법이 얼마나 지엄합니까?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녀를 죽이게 한 것이 당시의 법입니다. 신명기 21장에는 자녀가 부모의 말을 순종치 않으면 잡아다가 장로에게 데려가서 어머니가 “내 아들은 순종 않고 방탕하다”고 외치고, “성읍 사람들은 돌로 치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같으면 죽을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로마서 1:30에는 이교도들의 죄를 바울이 공격합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이 말은 당시로서는 가장 불온한 내용이었습니다.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이교도,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하는 일입니다. 순종을 아는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그리고 늘 형통합니다.


둘째,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할 내용은 모든 일입니다.

“모든 일에”란 말의 의미는 절대 순종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선별하여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말에 무조건 순종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모에 대한 절대 순종을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입니다. 전적 순종이란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온전함은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48에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완전선입니다. 부분적인 선이 아니라 완전한 선을 요구하십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빌 4:8). 바울이 권하는 것도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온전한 것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14에는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점과 흠이 없는 것은 순전한 것을 의미합니다. 온전하게 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정의하는 사랑도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견뎌야 사랑입니다. 어떤 것은 참고 어떤 것은 참지 못하면 사랑이 아닙니다. 온전한 인내가 사랑인 것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절대로 선별하지 마세요. 모든 것을 순종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순종이란 말은 이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순종하면 이미 순종이 아니지요. 순종이란 말은 가리지 않고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리가 긴 기린은 서서 새끼를 낳습니다. 새끼 눈으로 볼 때 어미 배에서 땅까지는 얼마나 높겠습니까? 그 높은데서 등을 밑으로 하여 땅에 떨어집니다. 잘못하면 낙사할 만한 높이가 아닙니까? 그런데 어미에게서 태어나자마자 몇 초 되지 않아 새끼 기린은 웅크리고 앉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어미는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합니다. 발로 새끼를 차서 발랑 넘어지게 합니다. 어미는 새끼가 일어날 때까지 계속해서 찹니다. 일어서면 다시 발로 차 넘어뜨리기를 반복합니다. 새끼가 초원에서 살아남으려면 무리를 지어 다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맹수의 먹이감이 되고 맙니다. 엄마 기린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빨리 스스로 일어나 움직일 수 있도록 훈련하는 일입니다. 때로는 야속하고 고통스럽지만 어미는 새끼를 사랑해서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자녀 여러분, 부모에게 불평하지 마십시오. 부모의 호된 훈련과 꾸지람은 정글 같은 세상에서 견딜 수 있게 하는 훈련입니다. 비록 현재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순종하십시오. 불평보다 순종이 앞서야 합니다. 순종하면 세상을 이기는 강한 승리자 됩니다. 불평이 앞서면 스스로 망합니다. 불평은 망하는 길입니다. 어떤 아이가 학교 미술시간에 크레용을 안 가지고 갔습니다. 이 아이는 너무 가난하여 크레용을 가지고 갈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은 번번이 말을 듣지 않는 이 아이에게 야단을 쳤습니다. “훔쳐서라도 가지고 와야지”. 그 아이가 장차 커서 무엇이 되었겠어요? 아이가 큰 도둑이 된 겁니다. 아이에게 순종만 강요할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을 순종하도록 옳은 것을 지시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셋째, 자녀는 부모를 주 안에서 기쁘게 해야 합니다.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자녀의 순종은 부모님을 기쁘게 합니다. 자녀의 순종은 부모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의 순종은 부모를 기쁘게 하지만 불순종은 슬프게 합니다. 가정은 아기의 울음소리와 어머니의 노래 소리가 멋진 화음을 이루는 곳입니다. 따뜻한 심장과 행복한 눈동자가 서로 만나는 곳입니다. 상함과 아픔이 싸매지고 기쁨과 슬픔이 나누어지는 곳입니다. 어버이가 존경받고 어린이들이 사랑 받는 기쁨의 공동체입니다. 조촐한 식탁일지라도 왕궁이 부럽지 않고 돈도 그다지 위세를 부리지 못하는 곳입니다. 사랑이 무엇이며 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어린이들의 맨 처음 학교입니다.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그 관심을 고맙게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렇게 좋은 곳이 가정입니다. 가정에서 보세요. 자녀가 얼마나 부모에게 큰 기쁨입니까? 부모가 자녀에게 “내가 너를 낳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고 고백하는 것을 많이 들어보았습니다. 정말 그 출생 때의 기쁨이 지속되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3:17에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기뻐하는 자는 기쁨의 대상이란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 예수님께 기뻐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기쁨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복음성가에도 “내가 너로 인하여 기뻐하노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고 합니다. 가장 큰 기쁨의 대상이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스바냐 3:17을 보세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면 부모의 기쁨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 어른들이 자녀에게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낳지 말아야 했는데, 실수로 낳았다”, “아들이 아니라 원수다”, “이게 애물단지다”, “나가서 죽어라”는 등의 말입니다. 순종하지 않다가 이런 때에만 순종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진짜 나가서 죽는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자녀에게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네가 나의 아들 딸 된 것 감사한다”, “네가 내 기쁨이다”, “네 때문에 내가 살맛이 난다” 등입니다. 이런 말들은 자녀들에게 용기를 주고 사랑으로 자라게 만듭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빌 4:1)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20)고 합니다. 정말 우리의 자녀가 나의 사랑, 나의 기쁨, 나의 면류관, 나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자녀가 다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1889년 역사에 남을 만한 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한 아이는 오스트리아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들은 사촌 남매인 불법부부였습니다. 아버지는 몹시 성미가 급했고, 어머니는 주부로서나 엄마로서의 일에는 흥미가 없고, 바깥 사교 생활에만 흥미를 느껴 나다니기만 했습니다. 그후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는 이 아이를 알코올 중독자인 숙모에게 맡기고 달아났습니다. 16세가 된 소년은 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했습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연명하다가, 결국 독일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후, 그는 정치계에 투신하여 극렬 분자가 되었습니다. 반란 음모에 참여했다가 투옥되어 다시는 정치계에 나서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감형 출옥의 혜택을 받았으나 더욱 맹렬히 정치 활동을 했고, 마침내 1933년에 독일 국민의 절대 영도자인 총통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였고, 그로 인해 독일과 전 세계가 전쟁에 휘말렸고, 그 후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인류가 이 아이가 내뿜은 독기의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같은 해에 다른 한 아이가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소년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흡족히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부모는 이 아이를 데리고 캔자스 농촌으로 이사했는데, 그 이유는 농촌 생활이 아이의 신앙 교육에 유익하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소년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가훈을 전해 주었고, 가족 모두가 교회의 가장 적극적인 봉사자로서 이름이 높았습니다. 소년은 어른으로 성장해서도 어머니의 두 팔에 안겨 간곡하게 기도하던 매일 저녁의 일과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년도 군대에 흥미를 느끼고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 입학하였고 훗날 훌륭한 장군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이었으며 2차 세계대전의 승전장으로서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1944년 이들 두 사람의 동갑내기는 전투에서 대면하였습니다. 11개월에 걸쳐 히틀러는 연합군 사령관 아이젠하워와 싸웠습니다. 패전한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지하 방공 대피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 소식을 접한 전 세계는 박수 갈채를 보냈습니다. 한편 아이젠하워는 히틀러보다 25년을 더 살았고 1969년 80세에 평화롭게 눈을 감았으며, 그의 죽음을 전 세계가 애석해 했습니다. 이 두 동갑내기 아이의 이야기는 부모들의 신앙과 가르침이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가를 역사적으로 증명합니다. 성경은 “자녀들아”라고 하나님의 소리로 부르며 권합니다. 자녀들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들으세요. 자녀 된 자는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세요. 부모의 기쁨이 되세요. 부모님께 기쁨을 드리세요. 자녀의 인생은 부모와 자녀가 합작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작품입니다. 신앙적 삶을 살고 존경받는 자녀가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자녀들로 말미암아 부모님이 기뻐하고, 가정이 기뻐하고, 교회가 기뻐하고, 사회가 기뻐하는 자녀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녀 여러분, 여러분 때문에 이미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십니다. 이제 부모님의 기쁨이 되세요. 모든 일에 순종하는 자녀가 되세요. 부모님이 세상에 계시는 것은 잠깐입니다. 순종하는 자녀는 이 땅에서 장수하는 복을 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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