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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엘리와 한나의 가정교육 / 삼상 2: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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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와 한나의 가정교육
사무엘상 2장 29~30절

오늘은 어린이주일이고 다음 주일은 어버이주일입니다. 그리고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오늘날 가장 큰 위기 중의 하나는 가정들이 무너지고 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 교실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이혼으로 말미암아 아이들이 버리워지거나 고아원에 갖다버려진 아이들이 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자녀교육에 실패한 제사장 엘리와 자녀교육에 성공한 한나를 대조해 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엘리는 자식들의 죄에 무관심했고
  한나는 자식을 거룩하게 키웠습니다.

엘리의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사장이 되었으면서도 두렵고 떨림으로 제사장직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제사를 짓밟고 신성을 모독했습니다. 백성들이 제사드리러 오면 세살 갈고리로 솥에서 찔러내어 구워 먹고 삶아 먹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헌금이 들어오면 마음대로 끄집어내다가 제멋대로 써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상 2장 17절에 보면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22절에 보면 소위 제사장들이란 사람들이 회막문에서, 즉 거룩한 성전 안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엘리는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무관심했습니다. 23~24절에서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하는 정도로만 이야기했지, 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야단을 치거나 심하게 책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3장 13절에 두려운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는 말이 히브리어에는 “그들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 아들들이 저주받을 짓을 했는데도 눈살도 찌푸리지 않았으니 어찌 죄의 심판을 받지 않겠습니까? 그는 평범하게 나무랄 뿐 호되게 꾸짖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그렇게 키우지 않았습니다.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았다”는 뜻은 거룩하게 구별해 키웠다는 뜻입니다. 어려서부터 성전에서 수종 들며 구별된 생활을 했습니다. 결국 제사장 엘리에게는 계시가 끊어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지만 어린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결국 엘리의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에나갔다가 법궤도 빼앗기고 자기들도 전사해서 나라를 망하게 했지만 사무엘은 큰 회개의 운동을 일으켜 나라를 구원했습니다.

  부모는 어려서부터 잘못을 바로잡고 죄를 지으면 징벌이 따른다는 것을 가르쳐줘야 합니다. 잠언 14장 9절에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 했고, 잠언 13장 24절에는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했습니다. 잠언 29장 15절에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 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을 툭하면 화풀이로 때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잘못된 교육철학이 나라들을 어지럽게 하고 부패하게 만듭니다. 체벌도 못하게 하고, 도적질하고 거짓말해도 때가 되면 다 고쳐지니까 가만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못된 짓 다 하고, 부모를 구타하거나 멀리 갖다버리기도 하고, 스승의 머리를 깎거나 구타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입니다.

 
  2. 엘리는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존중히 여겼고, 한나는 하나님을 더 존중했습니다.

  엘리는 자식들을 너무 사랑하고 귀중히 여긴 나머지, 하나님을 모독하고 거룩함을 짓밟는데도 심상히 여겼습니다. 사무엘상 2장 30절에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귀중히 여기는 것은 우상숭배의 죄요, 그 자식을 멸망케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장 29절에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고 하나님의 분노에 가득찬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전혀 그와 반대입니다. 한나는 기도 응답으로 받은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젖떨어지자마자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성전에서 자라며 수종 드는 일을 했습니다. 웬만하면 “서원은 그렇게 했지만 몇 년만 더 데리고 있겠습니다.” 했을 터인데 한나는 젖떨어지자마자 냉정하게 떼어 성전으로 보냈습니다. 결국 그 아들이 영적으로 큰 부흥을 일으켰고 나라도 구원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백 세나 돼서 받은 아들을 너무 귀히 여긴 나머지 하나님만 차지해야 될 마음의 지성소에 아들이 차지한 것을 보시고 “번제로 바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보시고 “네가 이제야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고 하시면서 아들을 돌려주실 뿐 아니라 엄청나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TV에서 연속극이나 보고 만화나 보면서 교회에 안 가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내버려두는 부모는 하나님께 큰 책망 받을 것을 각오하시기 바랍니다. 자식을 밥과 옷으로만 키운다고 다된 것이 아닙니다. 자식들이 일류 대학엔 못 가도 신앙교육은 바로 시켜야 합니다. 자식의 육신이나 정신의 교육보다 영원한 영혼을 바로 이끌어 주는 것이 정말 복 받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신앙으로 바로 키우지 못한 사람은 자식을 낳지 않으니만 못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만, 임마누엘 교회 김국도 목사가 초등학교 때 몹시 추운 겨울날 교회에 안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니까 저의 어머니께서 밥도 안 주고 옷을 다 벗기고 밖으로 내어쫓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영하 20도쯤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도 혼만 내고 금방 들어오게 한 것이 아니라 5분, 10분, 15분, 문을 꼭 잠그고 못 들어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감기 들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할 때 “얼쿠려면 바싹 얼쿠어야 감기가 안들지 찬바람만 쏘이면 도리어 감기 든단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7남매가 엄한 신앙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4형제가 모두 목사가 되고 딸들은 목사 혹은 장로의 부인이 되었고, 손자들도 모두 목사 혹은 목사 부인이 되었습니다. 평생 “너희들 공부 잘 해라” 혹은 “돈 많이 벌어라” 하는 말씀은 듣지 못했으나 “내 평생 소원은 너희들 예수님 잘 믿는 것이다” 하는 말씀만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때로는 말 안 듣고 속 썩히는 자식들이 있었지만 결국 다 예수님 잘 믿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는 “자녀들을 제멋대로 하도록 버려두는 부모는 마귀의 일을 하는 사람이며 신앙을 무의미하게 하며 구원을 불가능하게 하며 자녀들의 육신과 영혼을 멸망케 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3. 엘리는 기도하지 않았고
    한나는 간곡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장 12~13절에 보면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한나는 “오래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간절히 깊이 있게 기도하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으면 엘리가 “술 취한 사람”인 줄 알았겠습니까? 사무엘상 1장 15절에 있는 한나의 대답을 보십시오.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사무엘상 1장 16절에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한나는 어려운 문제를 기도로 해결한 사람이며 억울하고 분한 것을 사람에게 복수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기도로 하나님 앞에 물 쏟듯이 쏟아놓은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기도로 해결하는 것이 참 믿음의 사람입니다.

  엘리가 한나의 말을 듣고 감동을 받았는지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할 때에 한나는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한 말씀을 보면 한나는 참믿음의 기도를 드린 여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의 종 엘리의 축원하는 말을 듣고 그대로 될 것을 믿었습니다.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한 말씀을 보면 “주의 종의 기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였고”,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는” 기도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하신 것 같은 기도입니다.

  그런데 영적 지도자인 제사장 엘리는 기도했다는 말이 한 마디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영의 눈이 어둡고 영의 귀가 어두워서, 간절히 기도하고 오래 기도한 한나를 술취한 사람이라고 잘못 판단한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은 엘리의 자식들은 타락하고 방탕하다가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법궤도 다 빼앗기고 나라를 망쳤지만 기도의 사람, 한나의 아들 사무엘은 영적으로 큰 회개운동, 기도운동, 부흥운동을 일으켜 나라를 구원했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사람 배후에는 거의 다 위대한 기도의 부모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4형제가 다 목사가 되고 부흥사가 된 것은 저의 어머님의 기도의 영향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 Augustine의 어머니 모니카의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방탕한 아들을 위하여 여러 해 동안 기도하고 눈물을 흘려도 응답이 없어서 유명한 암브로드 감독에게 찾아가 상담을 했더니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의 자식이 망하는 법이 없으니 계속 기도하라”고 말씀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Augustine은 세계적인성자가 되었습니다.

  제사장 엘리는 자식들이 무서운 죄를 지어도 꾸짖지도 않고 안타까워하지도 않고 심상히 여기고 간절히 기도하지도 않았고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귀중히 여기더니 그 가정이 비참하게 망해서 제사장 대도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블레셋 군사의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엘리는 전쟁에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꼬꾸라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그 자부는 남편과 시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아기를 낳다가 “이가봇” 하고 죽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하루에 제사장 엘리와 두 아들과 자부가 다 죽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한나의 아들 사무엘은 나라를 구원했고 영적인 큰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이 나라의 장래는 여러분 부모들의 자녀교육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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