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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증인이 되라 / 행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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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증인이 되라 
사도행전 1 : 8

지금 한국교회가 극복해야 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정한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우상숭배자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기복적 행위는 작금에 경제적 위기와 영합하여 기독신자들의 정체성마저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1929년에 일어난 세계 대공황은 주요 자본주의 국가의 공업생산지수를 1908∼1909년 수준으로 되돌렸습니다. 정확히 20년 후퇴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급격히 증가되는 실업자를 감당할 길이 없었습니다. 실업자가 거리마다 홍수를 이루었습니다. 여기에 기독신자들은 시대적 역사(歷史) 의식을 가지고 대처했습니다. 이때 미국 남장로 교회는 평신도 200명당 선교사 한 명씩을 파송할 것을 결의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된 뜻있는 성도들의 저력이 유감없이 나타나고 있는 때를 맞이했습니다. 그 저력은 복음의 본질을 믿는 믿음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이 세대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적 혜안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경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모아 놓고 말씀하신 고별사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행 1:4). 당시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성이 아닙니다. 선지자를 죽이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그야말로 살풍경한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했으면 차라리 부담이 없겠는데 오히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진리운동의 중심지로 구약을 연결하는 신약의 터전이라는 지리적 의미보다도 이곳에서 제자들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곧 성경강림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Ⅰ. 역동적인 성령 역사가 우리를 증인되게 합니다.

1) 성령은 곧 권능입니다.
본문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성령}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 오실 보혜사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에는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이라고 할 때 앞에 나온 동사 {권능을 받고}(렘프세스테, )라는 말과 동시성을 띄고 있습니다. 성령이 임한다는 말은 곧 사도행전 1장 5절에 나오는 성령세례를 뜻합니다. 말하자면 성령 속에 잠김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곧 성령의 충만한 사람이 되어진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강림하심과 동시에 권능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본문에 {권능}(뒤나민, )은 '권능'(power), '힘'(might), '세력'(force)을 의미하는 말로 폭발하는 힘을 말합니다.
성령이 곧 권능이요, 세력이요, 힘입니다. 바로 이 힘은 하나님 자신께로부터 온 힘입니다. 이 힘은 초자연적인 힘입니다.
권능은 성령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 성령은 성자를 증거하는 힘입니다. 곧 성령은 오실 예수와 오신 예수를 기록한 성경을 조명하며 또 증거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그 능력을 발휘하여 증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했습니다. 이 {복음}은 듣는 자들로 하여금 폭발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복음을 듣는 기능이 정상이라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이 믿어지는 사람은 이미 성령을 충만히 받은 능력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믿는다고 할 때 칼빈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믿는지 믿지 않는지를 자기 자신이 모르는 사람은 그것을 진단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는 야고보 사도의 말은 진리입니다.

2) 성령은 신앙 공동체를 탄생시켰습니다.
사도행전 2장 1절에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2:3). 거룩한 공동체 탄생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모였다고 했습니다(2:44). 전투하는 사랑의 공동체의 탄생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했다고 했습니다(2:46). 순종함으로 결속하는 공동체의 탄생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신앙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습니다. 특히 목회자는 자신이 속한 단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바로 받은 사람은 신앙 공동체를 귀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신앙 공동체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존재 의미와 존재 목적을 확인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기능을 공동체 속에서 확인 받게 됩니다. 그 기능은 자기 자신이 공동체라고 하는 조직사회에 표출하는 자신의 일체의 투명성입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자기자신이 공동체 앞에 나타나는 일체의 신앙인격입니다.

Ⅱ. 증인의 활동 영역은 온 땅(세계)입니다.

본문 1장 8절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한 때 주님은 사마리아에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5절에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러한 장벽을 모두 부수고 사마리아는 물론이고 땅 끝까지를 지적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핵심입니다. 사도행전은 바로 이 말씀의 전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7장까지는 예루살렘 선교, 8장에서는 스데반의 순교로 성도들이 흩어지고 9장에서는 사울의 회심이 있고 10장에서는 베드로를 통하여 가이사랴에 있는 로마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11장에서는 안디옥에 있는 헬라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11장에서 28장까지는 바울이 체포된 채로 긴 항해 끝에 로마에 도착하는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는 선교 영역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전파의 순서를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전파의 순서가 의미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기록은 아무리 평이하다 할찌라도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① 예루살렘이라고 했습니다.
이곳은 살풍경한 곳입니다. 예수께서 잡히시고 심문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곳입니다. 예루살렘이야말로 죄 많은 곳입니다.

② 온 유대라고 했습니다. 이곳은 남쪽 가나안 지역이요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곳입니다.

③ 사마리아라고 했습니다. 이곳은 선민 유다와 대적했던 곳입니다.

④ 땅끝까지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방세계 전체와 전 인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땅 끝입니다. 예루살렘이 먼저이고 땅 끝이 나중입니다. 이것은 애써 복음 전파의 우선 순위를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곳부터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지극히 합당한 전파 방법입니다. 복음전파의 순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까운 곳부터 복음으로 완전히 정복한 후에 한 단계씩 복음전파 영역을 넓혀 가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지닌 말은 아닙니다.

때에 따라서는 먼 곳 다시 말하면 사상적으로 멀어져 있는 이국에도 먼저 복음이 전파되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지구촌은 날이 갈수록 거리감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가하면 생명 없는 이방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나라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기독교는 타 종교적 문화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와야 했습니다. 최근 권위있는 The Time지 리서치에 의하면 1980년에 전세계의 기독교인은 약 14억으로 세계인구의 32.8%였는데 2010년에는 세계인구의 32.3%인 20억이 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렇다면 0.5% 감소입니다. 무슬림은 전 세계 162개국이상 퍼져있는데 2000년에는 세계 인구의 19.2%, 2010년에는 22.2%로 상승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힌두교는 1990년에 13.3%였는데 2010년에는 13.7%로 0.4%가 증가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무슬림, 힌두교, 불교는 증가하고 있고 기독교는 감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세계인구 60억 가운데 타종교가 차지하는 비율이 30억이 될 전망이고 보면 타종교권에 대한 복음 전파는 불가피합니다.
향후 우리 교단 선교전략에 간과해서는 안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Ⅲ. 증인은 순교적 각오로 증거해 야 합니다.

본문 1장 8절에 {…내 증인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내 증인} (무 마르투레스, )은 영어로 순교자들을 뜻하는 martyrs도 이 단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 48절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증거의 내용은 나를 위하여, 나를 사랑하사 세상에 오시고,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해 계시고, 성령을 보내시고, 교회를 세우시고,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요일 1:1).

이러한 복음 증거 사역은 타협이나 대화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복음은 선포해야 하는 일방적인 방법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이스람교도처럼 한 손에 코란을 잡고 한 손에 칼을 잡는 방법도 아닙니다. 자신이 믿는 바를 선포하다가 당하면 그만입니다.

대화로서 이방인들이나 타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진부(陳腐)한 방법을 우리는 단호히 극복해야만 합니다. 대화가 타종교인들에게는 꼭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화는 선교의 한 방법일 뿐이지 결코 복음 선포는 아닙니다. 선포는 생명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절대로 듣는 자의 반응에 상관하지 않고 듣는 자의 형편에 상관하지 않고 믿는 바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불가항력적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증거하는 자도 자신의 처지와 형편이 고려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 증인이 되라'고 하는 지상 명령 앞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장소가 어떠하든지 지역이 어떠하든지 교회를 세워내야 합니다.
복음전파는 일방적인 만큼 순교적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간도 물질도 무한대로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고 우리 자신이 호흡을 계속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1세기를 향하는 한국교회는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달라져야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모든 것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아니합니다. 이것보다 더 요긴하고 더 급한 것은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인적자원과 물적자원과 공간자원이 이 일을 위해 선용되어야 합니다. 교인들에게 이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현하 한국 장로 교회는 마치 1930년대 이후 미국 장로 교회의 역사를 재현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못내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겉으로는 보수의 망토를 걸치고 있으나 내용적으로는 많이 좌경되었습니다. 교회의 가치관이 세상과 너무 비슷해졌다는 말입니다. 요시야가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고 크게 운 것은 당시의 신앙형편이 하나님의 말씀과 너무 차이가 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의 동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루터와 루터 이전의 개혁자들에게 비친 교회 역시 세상과 너무 닮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데 GNP 추락과 총체적으로 경제 사정이 나쁜 것과는 알고 보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GNP 추락은 복음의 문을 여는 돌파구가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목회현장에 신학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목회현장에는 기독교에 대한 세련된 변증이 있어야 합니다. 그 변증은 교파마다 양상을 달리 합니다. 우리 교단은 우리가 받은 변증철학이 있습니다. 목회현장은 바른 신학운동과 바른 신앙 운동이 깊은 우정관계를 맺고 있어야 합니다. 한국교회 목회현장에 바른 신학이 없어졌습니다. 바른 신학에 대한 긍지나 애착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신학논쟁은 찾아볼 수 없는 형편입니다. 신학 부재의 목회현장이 되고보니 바른 설교가 없습니다. 오늘날 정보는 넘치는데 메시지가 없는 시대입니다. 여기에 곧바로 나타나는 병리현상은 교회 행정부재로 교회 운동의 무질서를 초래하게 됩니다.

교회행정이 뒷받침 안되면 교회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교회의 무질서는 다함께 망하는 첩경입니다. 조직사회에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무서운 적입니다. 현하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제1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인간의 주장이나 인간의 연구결과가 제1의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바로 목회현장에 신학이 없어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오늘날 한국교회 대부분의 신학교 교육은 사변적인 신학이론으로 치닫고 있는 실정입니다. 철저히 신학 교육은 목회 현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합니다.
가능하면 신학교 교수들은 목사라는 명분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신학과 병행해서 목회 현장 감각이 있어야만 합니다. 목회현장에는 신학이 뒷받침되고 신학교육에 목회현장의 감각을 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한국교회의 신학교육이 지금에서 개선되지 아니하면 신학을 이론적으로는 성취할 수 있으나 복음을 선포하는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기에는 아쉬운 것이 너무 많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론 신학만 가지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목회 현장에는 신학적 이론만 가지고는 해결 못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목회현장에 신학이 바닥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와서 장로교 목사님들이 즐겨보는 책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저는 그 책에서 너무 많은 잘못된 신학적 해석을 발견했습니다. 아무 책이라도 읽고 설교에 참고해서는 안 되는 시대입니다. 의식이 있는 성도라고 하면 설교를 듣는 중에 어떤 교파의 메시지인지 알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성령을 정확하게 받은 사람은 능력있는 사람입니다. 성령을 정확하게 받은 교회가 힘있는 교회입니다. 성령받은 사람은 신앙 공동체를 귀하게 생각합니다. 성령 충만히 받은 자들의 활동영역은 지역적으로 전세계적이요, 사상적으로 모든 종교적, 비종교적 이데올로기를 다 포용하고 계도해 나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은 순교적 정신이 아니고서는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도 나를 통하여 복음이 선포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의의를 찾고 거기에 자기 존재가치와 존재목적을 찾아야 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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