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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로 나를 위한 복음 / 행 8:34 ~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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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5월18일 말씀 
제목 : 바로 나를 위한 복음 
본문 : 행 8 : 34 ~ 40   

얼마전 김수환 추기경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작가 최인호씨에게 했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긴 여행이 무엇인지 아세요?” “모르겠습니다” 하고 최인호씨가 답하자 김 추기경은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바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지요. 나 역시 평생 이 짧은 것처럼 보이는 여행을 떠났지만 아직도 도착하기엔 멀었소이다. 기독교인들은 항상 자기반성과 회개를 통해 조금씩 조금씩 우리 마음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하나님께 나아가고 예수를 닮아가야 합니다.”

이 글을 읽고 마음에 공감을 갖게 된다. 머리로는 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는 왜 그렇게 여러 갈래가 있는지 모르겠다. 니고데모는 공부를 많이한 유대인의 관원이다. 머리에는 많은 지식으로 가득차 있었다.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다. 나름 데로는 무엇이 정통인지 자부심을 갖고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니고데모의 마음 속에 해결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기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와서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니고데모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머리로는 많은 것을 알지만 마음에는 늘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바울을 보라. 바울은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다.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 머리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 바른 복음적인 삶을 알았다. 무엇이 바른 믿음인지 바울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늘 바울의 마음 속에는 두 갈래의 마음이 있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 잡는 것을 보는 도다.
우리는 모두가 어떻게 사는 길이 착하게 사는 길인 것을 알고 있다. 무엇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인지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인생의 길 인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여러 갈래로 찢겨져 있어서 방황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존웨슬리는 감리교의 창시자이다. 웨슬리를 통해서 하나님은 큰 일을 행하셨다. 웨슬리는 옥스퍼드에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다. 많은 지식을 갖고서 미국의 조지아에 인디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3년 동안 선교사로 가서 일을 하였다. 예수의 복음을 전했지만 그는 실패하고 돌아온다. 돌아올 때 그의 고백을 들어 보라. “나는 아메리카로 인디안을 회개시키러 갔다. 오! 그러나 누가 나를 회개시킬 것인가? 누가 나를 이 악한 불신앙의 마음에서 구해낼 것인가? 나는 맑은 여름 하늘의 종교를 가지고 있다. 나는 말을 잘 할 수 있다. 아니 위험이 가까이 있지 않을 때에는 나 자신을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이 나를 직면할 때 내 마음은 흔들린다.”

웨슬리는 많은 공부를 통해서 신앙의 내용을 잘 정리하고 있었다. 자신의 머리를 통하여 인디언을 회개시키러 갔는데 돌아오는 그의 마음은 너무나도 허전하였다. “나는 인디언을 회개시키러 갔는데 누가 나를 회개시킬 것인가?” 참으로 솔찍한 웨슬리의 고백이다.

미국으로 돌아오는 항해 중에 풍랑을 만나 침몰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두려워서 너무나도 불안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함께 배에 탔던 모라비안 들은 함께 모여 평안하게 찬양을 하며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복음의 내용을 잘 알고 있다. 누구든지 예수 안에서 죽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됨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왜 나의 마음은 이렇게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가? 웨슬리는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자신의 무력해진 믿음을 보고서 한탄에 빠지게 된다.
그 후에 웨슬리는 영국으로 돌아와 많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분명히 복음의 내용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왜 나의 마음은 이렇게 여러 갈래로 찢겨져 있는가?

이러한 웨슬리의 마음은 바로 우리의 마음과도 같다. 무엇이 복음에 합당한 삶인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유혹 받고,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어려운 시험에 넘어질 때가 얼마나 많은가? 내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왜 나의 마음은 이렇게 여러 갈래로 찢겨진단 말인가? 복음데로 살려고 몸부림치면서도 왜 우리의 마음은 하루에도 수 십번씩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갈라진단 말인가?

비슷한 상황에 처한 바울이 고백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한탄하였다.
이렇게 여러 갈래로 찢겨진 마음을 갖고 있었던 웨슬리가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에 올더스게이트 거리를 지나가다가 선교회 단체가 모인 곳에 가게 되었다.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라 억지로 갔다. 마침 그곳에 갔을 때에 루터가 쓴 로마서 주석의 서문을 읽고 있었다. 그 내용은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구원하셨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이 내용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우리의 머리 속으로는 수십번, 수백번 반복해서 알고 있다.

그런데 웨슬리의 마음에 변화가 왔다. 머리에 머물러있던 복음의 내용이 마음으로의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웨슬리가 그 날 일기에 쓰기를 “나는 내 가슴이 강렬히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되었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원자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나의 죄와 심지어는 내 자신까지도 가져가시고 구원의 확신을 주셨다. 그리고 죄와 죽음의 율법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셨다.” 그 동안 머리로 알고 있었던 복음의 내용이 마음을 뜨겁게 하였다.
바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곧 나를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라는 것을 마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마음에 확신이 생기게 된 것이다.

본문의 말씀을 보라.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여왕을 모셔야 되었기에 거세를 당한 내시였다. 이 사람도 역시 자기에게 막강한 권력이 있었지만 채워지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몸부림을 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다가 결국은 이사야의 글을 읽게 된다.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읽게 되었다. 읽었지만 그는 깨닫지 못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인가? 라고 빌립에게 질문하였다. 빌립이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였을 때에 이 십자가의 사건이 바로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복음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마음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바로 나를 위한 복음인 것을 확신케 되었다.
우리는 예배드릴 때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말씀을 듣는다. 예수님의 구원의 사건에 대해서 말씀을 듣는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하심에 대해서 말씀을 듣는다. 우리는 많이 들어서 머리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마음에 이 은혜의 감격에 대한 뜨거운 감사가 얼마나 있는가?

나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내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나는 과연 내 마음 속에 얼마나 뚜렷한 확신을 갖고서 말씀을 전하는가? 풍랑의 위기가 닥쳤다면 나는 과연 주님께 기도하고 찬양할 수 있는 그러한 확신이 나에게 있는가? 욥처럼 모든 것을 빼앗기는 고통을 당할 때에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할 수 있는 확신이 과연 나에게 있는가? 어떠한 위기 속에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확신에 찬 믿음이 있는가? 베드로처럼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미련한 목자는 아닌가?

이러한 질문을 나에게 했을 때에 얼마나 내 자신이 부족한지 모르겠다. 하나님 나의 마음에도 웨슬리처럼 뜨거운 마음을 주옵소서. 웨슬리의 마음에 임하셨던 확신을 주셨던 성령이시여 나의 마음에도 임하셔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을 주옵소서.

사람들은 '결심'으로 변하고 성숙하는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결심이나 의지가 아니라 믿음으로 성숙한다. 봄에 농사를 시작하는 농부는 마음으로 결심을 하거나 의지를 품고 들녘으로 나서지 않는다. 봄이 오면 얼었던 땅이 풀리고 쟁기를 깊숙이 넣어도 흙이 부드럽게 일어나리라 믿고 아무 의심없이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 세상의 모든 결심은 언젠가는 무너진다. 하지만 확고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결심만 한다. 우리는 마음에 결단만 한다.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은 하루에 몇 번씩 약해지고 넘어진다. 농부는 결심하고 씨를 뿌리지 않는다. 씨를 뿌리면 분명히 가을에 추수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서 씨를 뿌린다.
웨슬리의 회심은 이렇게 확고한 믿음을 갖게된 계기가 된 것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머리로 결심할 수 있다. 마음으로 잘 해봐야겠다고 결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심은 오래 가지 못한다. 하루에 몇 번씩 변한다.

머리로 믿는 신앙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뜨거운 믿음을 주옵소서. 살아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웨슬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신 성령이여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셔서 확실한 믿음에 서게 하옵소서.
이렇게 확실한 믿음으로 회심한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난다. 순간 순간마다 찾아오는 마음의 시험을 이길 수 있다. 어두움의 권세를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된다.

다니엘을 보라. 왕이 명령하기를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다고 하였다. 다니엘은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이렇게 하면 사자굴에 잡혀가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다니엘은 굴하지 아니하였다. 마음에 결심으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확실한 믿음 때문이다. 확실한 믿음은 어두움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끊임없이 사탄의 권세가 있다. 악의 세력이 있다. 우리는 이 악의 세력을 이겨야 한다. 악을 이길 수 있는 분명한 것은 뜨거운 믿음의 힘인 줄로 믿는다.

새가족이 자기 자녀들의 이름을 바꿔 달라고 요청해 왔다. 그런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지방에서 이름에 관한 강의를 듣고 상담을 하였는데 큰 아들의 이름은 머리는 좋지만 오래 살지 못하고 단명할 이름이고 그 이름이 엄마의 이름과 부딪치는 이름이라서 큰 아들은 계속해서 엄마에게 야단을 많이 맞으면서 자라게 된다는 설명을 들었다. 둘째 아들의 이름에 의하면 머리는 좋지만 인생 밑바닥에서 헤매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이러한 설명을 들은 후에 엄마가 늘 고민하다가 이름을 새롭게 지어 달라고 나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렇지만 나는 이름을 지어준다고 하지 않았다. 이유가 있다. 이름 때문에 일찍 죽고, 이름 때문에 밑바닥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은 잘못되었다. 물론 이름이 중요하다. 이름이 주는 의미를 가볍게 여길 수는 없다. 그러나 이름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결정되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어떤 이름이든지, 어떤 죄를 지었든지 간에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러한 확신이 있으면 우리는 이 세상의 악한 세력과 싸워서 이기는 승리의 사람이 된다.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기를 바란다. 머리로만 아는 믿음이 아니라 머리에서 뜨거운 마음으로 깨달아 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바로 나를 위한 복음임을 깨닫고 늘 어두움의 세력을 물리치는 승리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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