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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에 참예합시다. / 고전 9: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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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9:16-27
복음에 참예합시다.


어떤 목사님이 교회출석의 동기를 기준으로 해서 5가지 유형의 교인들을 분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첫째 친교형 교인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회성 때문에 교회에 갑니다.
사람들을 만나서 교제하기 위해서 교회에 출석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동기로 교회 출석을 한다면 교회에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둘째 교양형 교인이 있습니다. 교회에 가면 좋은 소리듣고 그래서 교양있는 사람이 될 수있어서 출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좋은 교양을 쌓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 이 목적이 채워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셋째 순교형 교인이 있습니다. ‘나는 교회에 나가고 싶지 않지만 너 때문에 나간다“라는 것입니다. 아내를 위해서 자식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넷째 카타르시스형 교인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받은 분노 상처 맺힌 것을 풀려고 다니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자기 맺힌 것을 풀어놓습니다. 교회처럼 민주주의가 발달한 곳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직장같은 곳에서는 어디 함부로 말을 합니까? 그러나 교회에서는 내가 소리지른다고 누가 무어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화풀이 하고 교회에서 밀린 스트레스를 푸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다 모였다면 그 교회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다섯째 습관성 교인이 있습니다.
아무 동기없이 습관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것입니다. 그냥 교회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매주일 습관적으로 참석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왜 교회에 출석하십니까?
보편적으로 많은 경우에 우리가 살펴보는 것처럼 복음을 개인적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자기에게만 적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바울을 보면 평생을 전도에 미쳐 살았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위해서 자기의 자존심,물질,모든 정열을 아낌없이 다 바쳤습니다. 자신의 모든 자유와 권리를 내려놓고 오직 복음을 위하여 희생하고 수고한 바울은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되고 있습니다. 본문 9장 23절에 보면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새번역 성경에서는 ”나는 이 모든 일을 복음을 위하여 하고 있습니다.그것은 내가 복음의 축복에 동참하기 위해서 입니다“여기 복음에 참예한다는 것이 복음의 축복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복음의 그 축복에 동참하여야 합니까? 우리가 어떤 모습 어떤 자세로 복음을 위하여 살아갈 때 복음으로 말미암은 복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해마다 봄 가을 2번에 걸쳐서 태신자전도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2년정동 전도운동을 하면서 감사한 것은 그래도 참여하면서 전도를 위해서 수고하는 분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신자전도운동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전도되었습니다. 그리고 태신자 전도운동을 통해서 이제 구체적으로 전도할 수 있는 틀이 서서히 교회 속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도운동을 자꾸 하다보면 처음에는 좀 하려고 하다가 이것이 계속되면서 시들해지는 것을 봅니다. 교회적으로도 어떤 행사처럼 분위기가 식어버리고 개인적으로도 열기가 식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라는 것이 한번 두 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우리 삶에 계속해야 할 주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이 전도의 비젼과 꿈을 위해서 우리 무엇보다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그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꿈을 갖는 사람이 함께 복음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전도운동에 우리는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습니까?


1. 종으로 참예합시다.

19절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엿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종으로 복음을 위하여 참예합니다.
여기 바울은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를 위하여 자유를 내려놓았습니다. 바울은 사도의 직분이 있었습니다. 사도의 직분은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도를 위해 그 권리를 포기하였습니다.심지어 바울은 사도로서 돈을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누가 돈을 받는다고 무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해서 돈을 받는 일조차 거부하였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모든 이익과 자유함을 누리면서 철저하게 복음을 위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종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조금도 자랑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6절에서 바울은 “내가 부득불 할 일이라”고 합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복음을 증거하도록 일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맡은 자로서 바울은 사명감을 갖고 충성합니다. 값없이 죽기까지 바울은 하나님이 맡기신 복음을 위한일에 종으로 충성하였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복음을 증거할 때 종이 된 것은 여러 사람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었습니다. 율법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아래 있지 않지만 율법아래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없는 사람에게는 율법없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라고 합니다.
여기 종이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기 바울을 보면 사람들에게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다”고 합니다.이것은 자신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고 낮아지는 것입니다.자신이 손해보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고상하지만 가장 아래로 내려가서 그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그 사람이 예수 믿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져주고 일부러 양보하고 일부러 손해를 봐주는 것입니다.바울에게는 종으로서 영혼을 구원하기를 원하는 열심히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들 중에는 누군가 바울처럼 종으로 여러분들을 섬기신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이 목회자일 수도 있습니다. 또 장로님이나 집사님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 종으로 섬기는 사랑의 빚 때문에 우리가 전도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할 수 있었던 것을 아마 느끼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이 그 받은 사랑을 기억하시면서 바울처럼 복음을 위한 종으로서 전도에 참예하기를 바랍니다. 스스로 나를 높이는 자존심과 체면을 앞세우면 우리는 결코 전도할 수 없습니다. 철저하게 “나는 없습니다”라고 하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종은 주인이 맡기면 어려워도 힘이 들어도 합니다. 왜냐하면 종은 주인에게 구속당한 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왜 전도가 어렵습니까?
우리 스스로가 주인노릇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종이 되면 우리가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좀더 쉬워집니다. 지금 우리가 벌이는 태신자 전도는 사실 관계전도법입니다. 우리가 전도하기로 작정한 마음의 사람들은 전부 우리가 아는 사람입니다. 그 중에는 이미 교회를 잘 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그런데 우리가 불신자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까? 바로 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시는 어떤 집사님은 전도하기 위해서 전도대상자 집을 찾아가서 빨래도 해주고 청소도 해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어디 출타하면 아기도 봐주면서 완전히 종으처럼 섬깁니다. 그래서 결국 전도가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종처럼 낮아져서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이 되라는 것은 낮아져서 섬기라는 것입니다. 말로만 예수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종으로 낮아져서 그 사람을 높이고 섬길때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하루는 김익두 목사님께서 시골 대장간을 찾아가 전도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듣는데 한 대장장이는 시끄럽닥 듣지 않았습니다. 김목사님이 계속 전도하자 그는 몽둥이를 들고 나와서 때리려고 했습니다. 얼마후 김목사님이 근처 교회의 예배를 인도하러 가셨다가 근처 원두막에서 참외를 먹고 있는데 바로 그 대장장이가 지나갔습니다. 김목사님은 얼른 그를 붙잡고 “참외나 먹고 가시오”하면서 참외를 두개 대접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어느날 김목사님이 어떤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머리가 하얗게 센 어떤 한 노인이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김목사님이 “누구신지 잘 모르겠습니다”하자 그는 “몽둥이를 들고 목사님을 때리려고 했던 그 대장장이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그러고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예수를 믿게 된 것은 그때 원두막에서 주신 참외 두개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복음을 위해 섬길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랑의 종이 되어 섬길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제 우리 교회도 앞으로 이 지역의 종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지금 기도 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역을 섬기는 교회로서 사역하려고 합니다.무엇보다도 내년부터는 나이드신 분들을 위하여 무료식사,무료이미용,취미강습,관관여행등을 포함한 경로대학을 지금 계획 중에 있습니다.우리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 용량을 키워서 지역을 위한 청소년 공부방, 및 도서관운영,지역의 불신자들을 위한 무료 취미교실 운영등 다양한 것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언제 매료되고 감동을 받습니까? 겸손한 섬김,사랑의 섬김이 있을 때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섬김을 목말라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채워진 인격과 정신을 이제 우리가 실천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달음질하면서 참예합시다.

24절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얻는 자는 하나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달리기 운동선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운동선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히12:1에서“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고 합니다.

바울은 스스로가 감독이 아니라 코치가 아니라 운동장의 운동선수가 되어서 달리기에 참여했습니다. 말로만 이렇게 저렇게 지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전의 용사가 아니라 현역으로 지금 믿음의 달리기 운동장에서 달리는 입장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이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운동장에서 경주하는 경주자처럼 참여하였습니다. 말로만 복음을 전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이론만 가르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직접 몸에 복음을 위하여 운동선수처럼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힘을 다하여 경주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하여 힘껏 수고하였습니다.

종종 교회에서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가르치기는 하는데 자지자신에게는 실제로 적용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본인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잘 모입시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은 모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제일 중요한 믿음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습니다. 믿음은 행함이 있을때 살아나고 살아있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는 믿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전도할때도 중요한 것은 내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감독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코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수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같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한 두사람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좀 힘들고 어려워도 다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참여하는 것이 제일 큰 순종입니다. 이렇게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에 참여하는 것,봉사에 참여하는 것,훈련에참여하는 것,전도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한 두사람이 아니라 전부가 다 함께 참여할 때 복음의 기쁨을 경험하고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운동경기를 관람하는 것이 재미있습니까? 직접 경기를 뛰는 것이 재미있습니까?
못해도 참여할 때 재미있습니다.지난번 우리교회가 어버이날 전교인 야유회 및 체육대회를 했습니다.그때 그래도 70여명이 참석하여 함께 즐거운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런 행사를 할때 잘하는 사람만 하면 재미없습니다. 못하는 사람 잘하는 사람 다같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못하는 사람도 보고 또 재미가 있고 잘하는 사람 보고 또 재미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중요합니다.

이번주 목요일에 우리 강동노회 100회기 체육대회를 합니다. 전교인이 다하려고 하다가 너무 인원이 많아서 당회원가족으로 제한을 해서 좀 죄송합니다. 그날 족구도 하고 배구 여자축구 피구 줄다리기 다양한 종목을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준비가 되고 여러 종목 운동을 해도 선수로 뛰지 않으면 재미없습니다. 이런 교회행사는 잘하는 사람만 하면 안됩니다. 골고루 다 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함께 참여하도록 해야 합니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다함께 참여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바울은 복음을 전도하는 일에 참여하고 순종하기 위해서 그는 고난을 수고를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20:24에서는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노라”고 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하여 이땅에서 고난이 죽음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이땅에서 전도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렵고 힘이 들고 영광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바울에게 이런 포기하지 않는 열정과 실천을 가능하게 했습니까? 주님께서 주실 상급에 대한 확신입니다. 24절 운동장에서 달음질 하는 자들이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하늘 나라의 상급에 대한 거룩한 욕망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빌3: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에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합니다.여기 바울은 썩지 않을 면류관 영원한 하늘의 면류관을 소망하면서 또한 최선을 다해 수고하였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욕심을 갖아야 합니다. 세상 욕심은 버려야 하지만 영적인 욕심을 갖아야 합니다. 예배에 대한 욕심을 갖아야 합니다. 기도에 대한 욕심을 갖아야 합니다. 전도에 대한 욕심을 갖아야 합니다. 하늘 나라에 대한 욕심을 갖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래야 발전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면 우리가 받을 상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하늘 나라에 가서 어떤 사람이 큰 상을 받을지 우리는 모릅니다. 오직 상을 주실 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판단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누가 큰 상을 받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복음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수고하고 땀을 흘린 주의 백성들은 분명히 행한 대로 차등 상급을 주시는 것이 분명할 것입니다.


3. 복종하면서 참예합시다.

고전9:27 내가 내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여기 바울이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한다고 합니다. 여기 바울인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고 달음질하는 모든 일들을 하되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면서 한다고 합니다. 여기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고 순종하고 실천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그도 우리와 같은 성정입니다. 이 일은 철저하게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여 오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자고 내 육체의 욕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라고 해서 우리와 같은 그런 욕심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도 우리와 같은 성정의 사람으로서 여전히 몸의 소욕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성령님께 자기를 쳐서 복종하엿습니다.
그런데 복종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종종 알기도 합니다. 가슴도 있습니다. 그런데 복종의 의지가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지를 쳐서 복종해야 가능합니다.종종 주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이 부분에 우리가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가장 안타까운 인물로 꼽는 사람이 삼손입니다. 얼마나 좋은 조건의 사람이었습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미스터 코리아처럼 잘생긴 외모에 나실인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쓰시는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실패하였습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을 테니스를 너무 좋아합니다.
매일 아침마다 테니스를 칩니다. 물론 운동을 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목회보다 이것을 더 사랑한다면 문제가 됩니다. 충청도 괴산에서 목회를 하던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수요일날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러 왓는데 목사님이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사택에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계시냐”고 했더니 아들이 “목사님 지금 테니스 치러 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테니스장에 갔습니다.“목사님 지금 뭣하는 것입니까?” 그랫더니 목사님 왈 “ 장로님 보시다시피 테니스치고 있지요”라고 했습니다. "목사님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물었습니다. 목사님이 “오늘이 무슨 날이긴요” 했습니다. “오늘이 수요일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갈등이 생기고 결국은 떠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단적인 예를 말씀드린 것에 불과합니다. 나를 쳐서 복종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복음을 위하여 나를 쳐서 복종하는 자가 복음의 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전도는 우리의 의지적인 결단이 있어야 할 명령입니다.
의지적결단이 없는 분들은 안따깝게도 발전이 없습니다. 여러분 전도는 감정보다도 이성보다도 우리의 의지적인 결단을 통한 복종이 있어야 합니다. 감정적으로는 전도할 수 없습니다. 이성적으로는 전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결단하고 자기를 쳐서 복종하는 것입니다.
여기 바울이 내 몸을 쳐서 복종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여기 내 몸을 친다는 것은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이론,나의 자신감,나의 방법,자의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생각과 뜻과 지혜대로 복종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주님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기 위해서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아내를 데리고 다니며 가족을 거느릴 수 있는 자유함도 포기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한 수고의 댓가로 교회로부터 받을 돈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도로서 존경받고 대접받을 만한 모든 자유함도 포기하였습니다. 철저하게 자기를 쳐서 복종하여 주님의 복음을 위한 도구로 드렸습니다.

여러분 전도는 나의 몸을 쳐서 복종할 때 가능합니다.
사실 믿음의 능력은 복종에 있습니다. 바울은 고전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느니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백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한번 실천에 옮기는 것이 더 능력입니다. 여러분 복종이 능력입니다. 내가 복종하면서 복음의 축복에 참예하십시오.

금주 한주동안 “인간 아무개는 없다” 생각하시고 우리 함께 전도를 위해서 힘쓰는 삶이 되어보십시오. 자존심을 앞세우지 마십시오. 체면을 앞세우지 마십시오. 형편을 앞세우지 마십시오. 종이 되어 증거하십시오.경주자처럼 증거하십시오.자기를 쳐서 복종하면서 증거하시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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