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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상들의 최후 / 호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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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제목 :  우상들의 최후 
> 본문- 호 10: 1-8

서로 인사하겠습니다. ‘성령의 사람이 됩시다’ ‘성령 충만으로 사명감당 합시다’ 오늘은 우리 감리교회를 시작한 요한 웨슬리 목사님께서 런던의 올더스케잇이라고 하는 거리의 한 작은 집회장소에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마음이 뜨거워졌던 감격을 되새기는 웨슬리 회심 265년 주년 기념주일입니다.

특별히 올해는 웨슬리가 태어난 지 300년이 되는 해이기에 감리교 본부에서는 300만 총력전도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이고 있고, 이에 발맞추어 우리 중부연회도 6월9일부터 11일까지 인천 시립 실내체육관에서 28개 지방이 함께 참여하는 큰 연합집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웨슬리의 탄생 300주년과 회심 265주년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영적 변화를 통하여 자신과 이웃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구해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 중에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귀중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소원하시느니라" (딤전 2:4) 우리가 요한 웨슬리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시는 줄 믿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75세에 불러내시면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시작되었고, 80세에 모세를 광야에서 부르시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은 시작된 줄로 믿습니다. 85세에 갈렙에게 비전을 주셔서 ‘이 산지를 내게 주옵소서’ 라고 척박한 땅 헤브론을 구했던 그를 통해 다윗의 초기 도읍지로, 결국에는 이스라엘을 통합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든 곳이 된 줄로 믿습니다.

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성령의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많은 역사가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바로 300년 전에 하나님께서 영국 땅에 요한웨슬리하고 하는 귀한 믿음의 아들을 주셨고, 그가 목회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과 영국 국교회 목사로서 미국 조지아주에 선교사로 파송받아 일하는 등, 일련의 사역을 통하여 헌신해 오던 중에도 웨슬리의 마음속에는 말할 수 없는 번민과 힘든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능력의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압박감과 스트레스는 그로하여금 깊은 좌절감에 빠지게 하였고, 구원의 확신에 대한 회의를 갖게 하였습니다. 영국국교회(성공회)의 목사로서, 옥스퍼드 대학을 나온 최고의 수재이었지만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사역이 점점 더 어렵고 힘들기만 했습니다.

1738년 5월24일 오후 8시가 넘어 시련과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런던의 올더스케잇 거리를 거닐고 있을 때 작은 소그룹모임에서 찬송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 집회에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순서가 진행되면서 사회자가 로마서 서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씀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 대목을 듣는 중에 웨슬리의 심장은 뛰기 시작했습니다. 큰 성령의 감동에 사로잡힌 줄 믿습니다. 그는 그 날밤 돌아와서 자기의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 날 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노라.’

그 날 이후 그의 설교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설교의 제목도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란 복음적 제목으로 달라졌습니다. 영국국교회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교회가 쇠퇴하고 있던 차에 교회를 떠나던 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국교회는 그것을 반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복음적인 설교를 하려면, 그런 성령 충만한 설교를 하려면 우리 국교회 강단에 설 수 없다며 강단권을 박탈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결국 그는 공원으로 나가야 했고, 공장의 빈터나 거리로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웨슬리 목사님이 가는 곳곳마다 공원은 가득 차고, 공장의 마당은 사람들로 인산인해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찍은 사진을 웨슬리 박물관에서 보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영국은 공원이 많은 도시라 공원은 말씀을 증거하는데 좋은 장소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



그는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이제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던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이 아니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성령에 사로잡히면, 성령의 능력에 붙잡히면 우리도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증거하기 시작한 줄 믿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웨슬리와 그의 사람들을 가리켜서 ‘Methodist'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기도하는 것도, 말씀을 전하는 것도, 그들의 삶도 규칙적이고, 일상생활에서 준비되고, 규모있는 모습을 보면서 ‘Methodist’라고 별명을 붙여 주었는데, 오늘 그것이 감리교회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감리교회의 특징은 복음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중요하고, 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인간의 이론과 사상에 의해서도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천지는 변하겠거니와 하나님의 말씀은 변할 수 없다 라고 하는 아주 분명한 신앙고백적인 기초 위에 감리교회는 탄생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교단에 대한 특징을 이야기 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감리교회를 가리키기를 뜨거운 난로 옆에 있는 교회다. 감리교회가 뜨거운 교회이기 때문에 감리교 성도가 뜨겁기 때문에 그렇게 비유했습니다. 또 다른 한 교단은 이렇게 비유합니다. 냉장고 옆에 있는 교회다. 차디차다는 이야기지요. 감리교회의 이 복음주의적인 뜨거운 열정은 감리교도로 하여금 무엇을 고백하게 했느냐 하면 말씀과 우리의 삶 속에서 언제나 아멘이라고 하는 고백을 늘 하나님 앞에, 그리고 우리의 신앙에서 고백하게 만드는 줄로 믿습니다.

감리교회의 특징은 아멘이 살아있는 그런 것입니다. 아멘할 줄 모르는 교인은 감리교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 아멘이라고 하는 것을 어느 다른 교단에 빼앗긴 거 같아요. 그래서 아멘 잘 하고, 뜨겁다고 하면은 ‘아, 어느 교단!’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거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자기 것을 빼앗기고 잃어버리고도 멍청하게 있다고 하면은 그것이 바로 바보가 아니겠어요? 신앙적인 바보지요.

지난번 중부연회 기념강연에서 웨슬리 신학을 전공한 목사님이 강연을 하면서 우리 감리교회가 이제는 아멘을 고백해야겠다고 강조할 때, 전 연회원으로부터 박수를 받았어요. 평안의 성도들도 아멘신앙을 회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을 할 줄 모른다면 교인이라고 할 수 없어요. 뜨거운 겁니다. 감리교회를 비유할 때에 뜨거운 난로 옆에 있는 교회, 뜨거운 난로 옆에 있는 교인이라고 말할 정도로 뜨거움이 있어야 됩니다.

감리교회에 두 번째 특징은 감리교회가 전도하는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말을 타고 전도를 다녔는데, 300년 전에 영국의 상황은 이제 영국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끊임없이 남북전쟁을 하면서 서로 죽이고 죽이는 그런 피비린내 나는 전쟁 끝에 결국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를 이겨서 영국이 대영제국으로 통일이 되었습니다. 웨일즈와 북아일랜드를 포함해서 영국은 4지역이 있는데, 지금도 그 사람들은 자기 나라의 언어를 따로 쓰고, 자기 나라의 국기를 따로 걸고, 자기 나라의 돈을 따로 쓰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잉글랜드의 기가 따로 있고, 스코틀랜드의 기가 따로 있고, 잉글랜드의 파운드가 따로 있고, 스코틀랜드의 돈이 따로 있습니다. 웨일즈로 가면 영어로 쓰여 있지 않고, 웨일즈의 그들이 따로 쓰는 언어로 되어있습니다. 지금도 그 정도이니까 전쟁을 통해서 통합이 물리적으로 되었지만, 그 마음속에 있는 지역적인 감정이 얼마나 엄청 났겠어요.

우리나라도 한 20년 전만 해도 호남과 영남이 얼마나 피터지게 싸웠습니까? 서로 선거유세만 가도 돌을 던지고 계란을 던져서 대통령 후보자들이 피난을 가야할 정도로 그런 상황을 연출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더 심각했습니다. 그런 지역들을 요한 웨슬리는 잉글랜드 출신이지만,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나 웨일즈까지도 마다않고, 말을 타고 복음을 증거했는데, 그가 복음을 증거한 거리를 환산할 때 지구를 수십바퀴를 돌 만큼 그는 많은 전도의 생활을 했습니다. 감리교회의 특징은 전도하는 것입니다.

지난 40일 특별 새벽 기도회를 통해서 70명의 자원하는 성도들이 생겼고, 이제 그들을 지원하는 재정적인 후원자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습니다. 감리교회가 전도의 은사를 가진 그런 공동체인 것처럼, 우리 평안의 교회에 전도가 중심이 되고, 기도가 중심이 되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내일 아침에 전도대원들은 훈련을 갑니다. 과천에 가서 현장훈련을 합니다. 화요일부터는 매일마다 오전 10시에 나사렛 성전에 모여서 전도자들 기도회가 있고, 한 시간 기도 후에 한 시간 전도가 있습니다. 70인 전도대 뿐만 아니라 전도를 사모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어요. 매일 모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매일 나오실 필요는 없어요. 매일 나오는 것 저도 원하지 않습니다. 살림은 언제 하구요, 가정생활 사회생활은 언제 합니까? 일주일에 한 번만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는 매일 10시에 기도회를 하고, 전도를 하지만 여러분들은 하루만 그 중에 시간을 내어서 기도회 참석하고, 전도하시면 됩니다. 70인 전도대에게는 빌라 한 동씩 2명에게 맡겨드렸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여러분들은 최선의 경주를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 빌라 한 동이면 열가정인데, 열가정이면 다섯 식구라고 하면, 오십명인데, 저 오십명을 우리 두 사람에게 맡겼으니, 둘씩 짝지어서 주의 제자들을 내어 보내신 것처럼, 우리가 짝이 되어 저 가정을 우리가 맡았으니, 저 50명의 영혼을 주여 우리에게 맡기시옵소서. 그런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그 빌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전도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열매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돈도 써야 되겠지요? 시간도 내야 되겠지요? 여러분의 헌신과 정성도 다해야 합니다. 전도에 나오실 분들은 절대로 시장 가는 복장으로 나오지 마세요. 몸빼 입고 나오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정장을 하시기 바랍니다. 남자는 넥타이를 매고 정장하시기를 바라고, 여성들은 한복이든, 양장이든 최고의 모습으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전도자는 너절해서는 안 됩니다. 전도사님, 우리 전도자들 복장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는 사람들 내보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전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최고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화장도 잘 하셔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혼을 구원하는 그 영혼 구원의 사람들, 영혼 구원의 사람들, 내게 있어서 최고의 사람들이어야 하고, 상대방이 나를 바라볼 때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배려가 최고임을 느껴야 합니다.

교회가 잘 준비될 때에 건물이 전도한다고 말합니다. 맞는 이야기지요. 교회가 너절한데 어느 누가 들어와서 기도할 마음이 들겠어요. 우리 자신이 전도의 도구입니다. 우리 자신이 준비된 모습을 가질 때, 그 준비된 모습을 통해서 전도가 될 줄로 믿습니다. 거기에 성령이 충만한, 기도가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말씀을 증거하고, 당신의 영혼을 내가 책임지기를 원합니다 라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능력들이 나타나겠어요?

요한 웨슬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복음적인 교회로, 전도하는 교회로, 기도하는 교회로 삼으신 줄을 믿습니다. 그 놀라운 감리교의 전통이 한국에도 왔어요. 한국은 지금 5000교회 145만, 150만에 가까운 감리교회 성도들을 우리가 공동체로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감리교회 감독 회장님께서 일만교회 삼백만성도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 교회가 줄어가고 있는데, 지금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가고 있는데, 현상유지만 해도 대단한 것인데, 삼백만이 애들 이름이냐! 그렇지요. 지금까지 120년동안 전도한 열매가 150만명인데, 2년 동안에 150만명을 전도하겠다고 하니까 잠꼬대 같은 소리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믿음의 사람, 언제나 주님 앞에 ‘나는 부족하지만, 주님 나와 함께 하시면 할 수 있습니다. 하겠습니다. 가겠습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헌신을 결단했던 사람들을 통해서 주의 역사는 이루어진 줄로 믿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올해와 내년에 우리 감리교회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해라고 확신하고 참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시기에 감리사가 된 것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외형적인 행사만 잔뜩 늘어놓고, 자기의 명예심만 추구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은데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전도하자고 하는데...

여러분, 목사가 성도들에게 아무리 강조해도 성도가 시험 들지 않는 2가지가 있습니다. 알고 계시죠? 기도합시다 하는 이야기는요 아무리 강조해도 시험 들지 않아요. 기도하자고 했는데 시험 들었다고 하면 그 사람이 바보지요. 그런 장로님부터 오늘 들어온 새신자까지도 기도합시다라고 해서는 시험들 수 없어요.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전도합시다. 목사님이 전도하라고 해서 나 시험들었다 라는 이야기를 아직까지 우리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땅 끝까지,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증인이 되라.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래요.

전도하는 교회입니다. 요한 웨슬리의 마음을 뜨겁게 했던 성령의 마음은 웨슬리로 하여금 전도하게 만들었고, 무지와 부패와 질병으로 삼류국가로 전락하고 있는 영국을 그래서 어떤 역사학자는 영국이라는 나라가 대영제국이 완전히 침몰해서 선수만 조금 남아있는 그 위태위태한 상황에서 웨슬리가 유혈혁명이 아닌 복음이라고 하는 무혈혁명으로 영국을 건졌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국은 웨슬리가 살린 거예요. 아니 영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영국을 살린 줄로 믿습니다.

지금 대한민국도 다시금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전도의 열정으로, 기도의 열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외형적으로는 먹고 살기가 좋아졌어요. 너무 좋아졌습니다. 아무리 경제가 어렵다고 해도 그건 부자가 어렵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어려워도 어려운 수준이 있지요. 이제 우리는 먹고 살만 합니다. 문화생활도 즐깁니다. 자기실현을 위해서 여러 가지를 아낌없이 시간과 돈을 투자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가 영의 사람,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사람이 아닌 세상적인 것에 점점 우리가 삶에 빼앗겨서 육에 속한 사람으로 되어 간다면 이것은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셨습니다. 시편 80편에도 보면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호세아 10장 1절에도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본래적인 히브리 원문의 의미는 ‘이스라엘은 자기를 위하여 열매 맺는 포도나무’라고 번역을 하면 좀 더 정확하다고 할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이고, 포도나무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열매를 맺는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 영광을 위해선 인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건강과 여러분의 재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여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를 위하여 열매를 맺었다고 호세아 선지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질을 벗어난 것은 창조의 목적에 벗어난 것입니다.

자기들의 시간과 건강과 지혜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결과가 생겼습니까? 1절 중반에 보면 이스라엘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제단을 많게 한다는 말은 우상의 제단을 많게 한다는 말입니다. 주상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우상을 새겨놓은 상을 말합니다.

점점 하나님이 열매를 주셔서 경제적으로, 육신적으로, 사회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세워 주실 때마다 우리는 그 많은 돈을 들여서 우상의 제단을 동네마다 세워갑니다.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는 벧엘에도 우상의 제단이 세워집니다. 길갈에도, 여리고에도 세워집니다. 그리고 우상의 여러 가지 조각들을 세워놓고, 좀더 아름답게 좀더 멋있게 그들은 돈을 사용합니다. 열매가 많을수록 그들은 점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과는 먼 삶들을 그들은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면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10장 2절에서 말씀합니다.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

두 번째 이스라엘의 문제는 저들이 두 마음을 품었다고 호세아가 선언한 것처럼 오늘은 하나님께로 내일은 바알 우상에게로 그들은 갈팡질팡합니다. 어느 때는 주님 앞에 가는 게 더 될 것 같고, 어느 때는 바알에게 가야될 것 같아서 그들의 발걸음이 제대로 정해지지를 못합니다. 마음이 나뉘었다고 하는 히브리어 할라크는 속인다, 기만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와서는 바알을 속입니다. 바알에게 와서는 하나님을 속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하나님, 나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라고 하지만, 마음의 반쪽은 바알에게 가있기 때문입니다.

바알에게 와서 바알에게 모든 풍요로움을 구합니다. 하지만 마음의 반쪽은 다른 데 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아내를 사랑합니다.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반쪽은 숨켜놓은 다른 여자에게 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그 아내를 속이는 것 아닙니까? 속이는 사람의 특징은 눈동자가 고정되어 있지 않아요.

제가 성도들을 만나보면 성도들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에 나를 향한 온전함이 없기 때문이지요. 자신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건방지게 두 눈 똑바로 뜨고 보는 그런 자세와는 다른 것입니다. 자신이 부끄럽지 않으면, 편안한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남편이요, 바람 피는 남편 어떻습니까? 절대로 아내와 눈을 맞추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의 영이 하나님만을 바라보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 앞에 내 시선을 고정할 수가 없어요.

그들은 두 마음을 품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마음이 고정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고정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108편에 보면 다윗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고정하였으니 내가 노래하며 찬송하리이다.’ 하나님께 마음이 고정된 자만이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마음이 고정되어야 합니다. 적당하게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을 속입니다. 목사를 속입니다. 성도들을 속입니다. 얼마는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삶은 평안이 없고, 그의 눈동자는 중심을 잃어서 피곤하기만 하는 거예요.

그리고 예배 마치고 인사하는 분들을 보면 재미있지요. 어떻게 해서라고 목사하고 악수 한 번 해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피해갈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제가 다 알지요. 저 사람 지금 나를 피해 가는구나. 안타깝지요. 목사 앞에 떳떳이 설 수 없는 성도라면, 참 불행한 것입니다. 목사 앞에 떳떳하지 못한 인생이라면, 세상 나아가서 누구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온전히 정하지 못하고, 두 마음을 품은 이스라엘처럼 방황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 마음을 정리하시고, 하나님께로 고정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 이스라엘의 문제는 3절에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놀랍지요? 순결한 주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교훈이 경천애인(敬天愛人)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하자’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말은 두려워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무서워 한다는 것과 다른 의미입니다. 긍정적으로 하나님을 존경하고,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을 아끼고, 하나님만이 가장 내게 중심이라고 고백하는 그런 마음을 가졌을 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습게 생각하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홀이 여기면 그런 경외의 마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자기를 위해서 열매를 맺기 시작하고, 두 마음을 품고 어디를 가서 내 인생에 유익을 얻을까? 갈팡질팡하다가 결국은 강심장이 되었어요. 하나님도 무섭지 않답니다.

왕을 세웠을 진대 왕이 내게 무엇을 말하리오. 왕의 왕 되신 하나님을 향해서 그들은 그렇게까지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목사 당신이 내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만약에 성도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건 끝난거 아니겠습니까? 성도가 목사의 말을 어렵게 듣지 않는다면 제가 무슨 말씀을 드렸을 때 ‘목사님 일리가 있지만은’ 이러고 딴소리 한다면 심각한 거 아니겠어요?

가끔씩 제가 어떤 부서에 오더를 줍니다. 이거 이렇게 한 번 의논해 보세요. 이렇게 하세요. 이렇게 해라! 명령하는 것 보다는, 요즘에 리더쉽에 중요한 것은 권면형이고, 부탁형입니다. 이렇게 했으면 어떨까요? 해 보시지요? 그렇게 권면형이지만, 내용은 사실은 명령이지요. 그런데 어떤 땐 이런 이야기가 들려요. 목사님 우리가 의논했는데, 안 하기로 했습니다. 기절초풍할 일이지요. 어떻게 해야 이 오더를 잘 이루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고민하라고 줬는데, 자기들이 의논해 보고 안 하기로 했대요. 기절할 노릇이지요. 정신차려야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상태가 이런 거예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이제 당신의 말도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갈 대로 간 거지요. 이런 이스라엘을 향해서 우리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내가 이제 너희들이 갖은 재물과 정성을 들여서 도시마다 쌓아왔던 제단과 주상들을 내가 깨뜨려 버릴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소망이라고, 우리의 꿈이라고 세워놓았던 우상들, 인간적인 우상들, ‘나는 인간적인 배경이 많기 때문에 사업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저 많은 부분에 인간적인 배경이 있기 때문에 내 인생은 든든하다’ 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 인간적인 우상을 깨뜨려 버리겠다는 거예요. 물질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든든하게 ‘나는 안전하다. 보험을 몇 개씩 들어놨고, 좋은 아파트 내 집으로 등기해 놨고, 내 자식들을 위해서 몇 평, 몇 평 땅도 사놨고, 내 삶은 안전하다’ 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깨뜨려 버리겠다는 거예요. 왜? 그것을 하나님보다 우상으로 삼고, 자기 하나님으로 삼으니까...

깨뜨리시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백성은 복이 있도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여호와 그 분이 우리의 구주가 될 때 그것을 고백하는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산성이 되시고, 반석이 되시고, 그들의 울타리가 되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상들의 최후를 봅니다. 더 이상 우상들은 그 도시에 우뚝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수겠다고, 깨뜨리시겠다고 하면 그것은 부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웨슬리 회심 기념주일을 맞이해서 요한 웨슬리의 마음속에 성령의 충만함으로 그의 마음에 성령의 불길의 불이 붙어서 전도하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주신 은혜들을 하나님을 위해서 아름답게 그의 삶을 사용했던 것처럼, 웨슬리 목사님이 88세에 운명할 때까지 주님을 위해서 온전히 그의 삶을 드리고, 운명하면서 내 인생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셨던 임마누엘이라고 했던 그 고백이 오늘 여러분들의 인생에 결론적인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스라엘입니다. 두 마음을 품어 마음이 나뉘었던 하나님께로 마음이 고정되지 못 했던 이스라엘입니다. 풍성한 열매를 주셨지만, 자기를 위해서 열매를 맺고 사용했던 이스라엘입니다. 주님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오늘 이 시대의 인생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주님 요한 웨슬리 회심 주일을 맞이해서 웨슬리 한 사람의 마음에 성령의 충만함을 주셔서 영국을 구원하고, 세계를 구원한 그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오늘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의 가슴 속에도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전도하는 교회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로 우리의 마음이 고정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에 기본적인 모습, 하나님 뜻대로 하지 않을 때에, 내 뜻대로 할 때에 두려워하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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