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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양심을 따라 섬기는 성도 / 행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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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23:1 
양심을 따라 섬기는 성도

전에 어떤 과학자가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사방으로 다니며 연구를 해서 사람의 손으로 사람을 만듭니다. 그리고 버튼만 누르면 사람이 움직이게 만들어 놓고는 여러 친구들과 유명한 과학자들, 정치가들,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다 초청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마 축사도 했겠지요. 여러 가지로 예식을 한 다음에 버튼을 눌렀어요. 아 그러니까 사람 만들어 놓은 것이 우물우물합니다. 눈을 번쩍 뜹니다. 눈을 굴립니다. 아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앉습니다. 일어나 섭니다. 보니까 키가 9척이요 또 얼굴을 잘 만들어서 미남인 아주 진짜 같은 사람이 됐습니다. 그런데 인공 인간이 어정어정 기어 나옵니다. 과학자와 그 부인이 서 있는 곳 까지 어정어정 오더니 손을 번쩍 들어 다짜고짜로 과학자 머리를 내려칩니다. 단번에 쓰러졌습니다. 아 그러더니 과학자를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그러나 정치가니 과학자의 친구니 모두가 혼비백산이 돼서 사방으로 도망합니다.

이처럼 그 과학자가 사람을 만들기는 만들었는데 한 가지만은 실패를 했다고 그럽니다. 뭔고 하니 그 속에 양심을 못 넣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우스운 예기지마는 현대 문화의 풍자입니다. 현대문화가 모든 인간의 외부적인 것은 다 만들지마는 인간 속의 양심은 못 넣어 준다는 말입니다. 과학은 새 사람을 만들지 못합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한경직- 양심을 넣어주지않은 로봇)

양심(良心 Conscience suneidesis)은 선악의 판단위해 인간에 내재하는 기능(롬2:15,고후4:2)입니다. 양심(슈네이데-시스)은 어원적으로는 어떤 일을 누구와 함께 안다(슈노이다)는 말에서 발전한 개념으로서, 보편적인 선의 공지(共知) 곧 같이 아는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글자대로 말하면 사람에게 내재해 있는 지식으로서 이것은 마치 [이성]이 진리와 허위를 구별하는 기능이듯이 선과 악을 식별하는 기능입니다(롬 2:15,고전 10:25,딤전 4:2).

양심은 인간에 대하여 재판관의 입장에 있습니다.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양심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율법의 지식이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복종을 명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의 행위를 율법의 명령과 비교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의,불의의 판결을 스스로 내리게됩니다. 선한 양심은 신앙싸움의 무기가 되고, 신앙의 배로서 항해 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귀중한 것이 됩니다(딤전1:5,19) 이 새로워진 예리한 양심을 갖지 못하거나 그 가졌던 것을 버릴 때 신앙의 싸움은 패배되고 배는 파선됩니다. 착한양심 새로워진 양심으로 예리해지지 못했거나 이것을 버리는 자는 또한 악을 행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게 되고 또 헛된일 의의없는 일에만 마음을 두어 마침내 믿음에 파선되어, 파멸되고 맙니다(딤전 1:18-19)

보다 중요한 점은 양심은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신약에 있어서의 양심은 보편적 선에 대해 같이 아는 일이 아니라, 구체적 실제적 행위 및 일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뜻을 같이 아는 일입니다.

양심의 기능은 우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벧전 4:19). 이방인도 그 양심에 의해 율법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롬 2:15).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행치 않을 뿐더러,(롬 1:32) 그 양심은 더러워지고, 양심이 화인 맞아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로 되었습니다(딤전 4:2,딤 1:15,히 9:9).

또한 이런 양심은 다만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만 깨끗해지고 사람은 하나님께 쓰이는 자로 됩니다(히 9:14). 즉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사람은 그 이성을 바꾸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롬 12:2,벧전 4:19). 그리하여 사람은 그 깨끗한 양심, 선한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하나님께 쓰이며(행 23:1,딤후 1:3) 세상의 정치적 권위에도 복종합니다(롬 13:5). 이러한 양심은 신앙과 결합되어 있습니다(딤전 1:19,3:9)

그리하여 양심은, 성령과 함께 자기의 진실을 증거하고(롬 8:16,9:1,고전 4:4,행 23:1) 또한 다른 사람의 진실도 증거합니다(고후 4:2, 5:11). 즉 양심은 자기를 초월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과 함께 자기와 관계하고, 또한 다른 사람과 관계합니다.

다시 양심은 자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약한 양심] 위해 쓰이고, 사랑하며, 모든 사람과 함께 하나님을 찬미 감사합니다(고전 8:7-8,10:28,29).

선교하시던 바울 사도께서 산헤드린 공회에서의 대제사장들과 대화를 하며 변호를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율법 종교의 지도자들 앞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나는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겨'(1절)왔노라고 증언합니다. 그는 담대하게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향하여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1절) 살아왔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양심을 따라 섬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는 성도로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주야에 기도 함으로 은혜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시험을 참고 섬기지고 했습니다. 이 달은 양심대로 섬기자 입니다. 

그래서 양심을 다라 섬기는 성도라는 제목으로 말슴을 kd고 하며 은혜를 사모 하고자 합니다. 

  먼저 항상 양심에 거리낌 없이 섬깁시다

행 24:16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고합니다.

바울은 손상되지 않은 훌륭한 양심을 지니고 있었고 그러므로 그의 믿음 또한 순수하게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믿음의 신비는 믿음의 순수한 양심 안에서 최고도로 유지됩니다. 거짓이 없는 양심은 그의 자랑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목적과 소망은 "꺼리낌 없는 양심을 지니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범죄를 유발시키지 않는 양심을 지니고 싶다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죄를 유발시키지 않는 양심 악을 가르쳐 주지도 않고  아첨하지도 않으며 기만하지도 않으며 무슨 일에든지 오도하지 않는 양심을 지니고자 애써 왔다"는 뜻입니다.

더럽혀지지 않는 양심을 지니려고 애써 왔다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의 고백은 "내 마음이 나를 꾸짖지 아니 할 것이라"는 욥의 고백과 같은 내용입니다. "양심을 꾸짖을 일을 결코 아니하고자 힘쓸 것입니다. 결백한 양심을 지니는 것, 또한 영혼의 선함을 더럽히지 않는 것, 그리고 그 어떤 행동으로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소망하는 것입니다. 양심이 거리낌이 없도록 힘써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늘 사귀는 친구에게 거리낌이 없도록 힘써 왔습니다. 그리고 속해 있고 의존하고 있는 정부의 통치자들에게 거리낌이 없도록 힘써 왔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은 영혼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대리인인 까닭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바울의 세심한 노력을 힘쓰노라고 합니다. 즉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지니는 것을 평생의 과제로 삼을 것이며 이 취지에 따라 생을 다스릴 것이고 자신을 훈련시켜 법도대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내 성향이 유혹하는 많은 요소들에 대해 자제할 것이요 가장 영적인 신앙의 실행에 전념하여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 것이라"는 뜻입니다.

힘씀의 정도는 "항상" 힘썼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양심에 거리낌 없이 하려고 힘썼고 또 큰 죄를 없이 하려고 힘썼다."고 합니다. 그가 대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거리낌이 없고자 힘썼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양심의 거리낌이 없고자 힘써 왔습니다. 그는 자기의 의무 전반을 이행함에 있어서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힘씀의 동기는 죽은 자의 부활과 장차 있을 세계에서의 생명을 믿는 까닭으로 나는 이와 같이 애쓴다고 합니다. 미래의 삶에 대한 염려는 현재에서의 우리의 삶을 양심적이게 하는 큰 요인이 됩니다.

우리도 항상 양심에 거낌 없이 섬기는 성도가됩시다.

밀턴이 그의 청년기 시절 6년 가량을 중서부의 한 작은 도시에서 보냈었는데, 거기서 그는 정신 지체를 갖고있는 마이런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시기는 마이런에게 있어 무척이나도 우울해 보이는 시기였고 집 이외에는 갈 곳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거기서 자기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고 도시 근교에서 할 수 있는 특이한 일을 하면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식물을 키우는 재능이 유달리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일하는 곳은 아주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잔디 깎기, 우거진 관목, 그리고 울타리를 치는 것과 꽃을 키우는 일 등은 세심한 주의와 기술 그리고 사랑이 필요한 것들입니다. 마이런은 그런 일들을 자원해서 했습니다. 그는 과부나 스스로 일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잔디를 깎고 잎사귀를 긁어내며, 꽃들을 심곤 했는데 그가 아니었더라면 그곳은 아무도 찾지 않을 그러한 곳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기름 통"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항상 그의 뒷 주머니에 불을 피울 수 있는 조그마한 기름통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삐걱거리는 문이나 돌쩌귀, 그리고 대문 같은 곳이 있으면 마이런의 기름통을 "공짜"로 발라 주었습니다. 그러나 주일에는 반드시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가기 때문에 그는 아무 곳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꼬마 아이들은 그를 놀려대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주 낙천적이며 유머기질이 뛰어났고 아주 침착했기 때문에 아무도 마이런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마이런은 밀턴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그 곳을 떠난 지 몇 년 후에 죽고 말았습니다. 시간을 내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밀턴은 그의 장례식을 보러 갔습니다. 그는 자기가 보았던 것에 대해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도시에 살고 있던 사람은 누구나 장례식에 참여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으므로 그 장례식에는 다른 사람의 배나 되는 인원이 참석했습니다. 왜냐하면 밀턴처럼 아주 먼 거리에서 그 곳에 온 사람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마이런은 그 작은 도시에서 정말로 중요한 생활을 해 왔었습니다. 아니, 그는 유명하지도, 부유하지도 않았고 그리고 존경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로빈 리치는 그에 대해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노동자였고 낙관론주의자였으며 "긴장을 풀어주는 사람이었고" 예수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였습니다. 또한 자신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섬김의 정신덕분에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애를 "극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섬김의 자세)

위도 항상 양심 따라 섬기는 서도가 됩시다.

  다음 범사에 양심을 따라 섬깁시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고 합니다

이말은 원래 '국민적 의무를 잘 감당하는 생활'의 뜻으로 쓰인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섬기되 모든 일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어진 사명과 의무에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노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유대교 관원들처럼 '형식주의'로 하나님을 섬긴 것도 아니고 개인적인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섬긴 것도 아니라 '오직…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빌 1:20)는 목적으로 살아왔다는 고백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인의 신앙은 그리스도로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에 생명을 건 '전인적인 응답'이 되어야 합니다(빌 3:14 약 2:20-22).

바울이 유대교의 최고 법정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변론을 하면서 담대합니다. 그는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더욱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신앙대로 살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항상 도덕적인 선과 악을 구별해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행한 것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는 교활한 사람이 결코 아닌 제 분수에 맞게 살아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양심의 지시하는 바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말하였습니다(1절).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에도 목적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보다 하나님을 앞세우며,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비록 실수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떳떳하게 말하고, 떳떳하게 행동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항상 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는 항상 떳떳하게 살아가며, 그런 양심을 항상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오늘날까지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든지 간에 그는 한결같이 양심을 지켜나가는 자입니다.


20세기 정신적 거성중의 한 사람인 슈바이처 박사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공부하던 중에 행복한 자기는 불행한 자들을 위해서 살고 무엇인가 봉사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30세 까지는 자기를 위해 살고, 그 후부터는 남을 위해 살겠노라고 결심한다. 30세에 이미 목사로, 신학자로서, 대학교수로서 또 음악가로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러면 남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 무슨 일로 인류에게 봉사할 것인가? 생각하다 어느 날 신문을 보고 그의 인생의 사명을 발견했습니다. 아프리카 콩고 지방에서 흑인에게 의료 봉사를 할 하나님의 일꾼을 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할 일을 깨닫고 의학공부를 7년간 한 후에 부인과 함께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거기서 90세가 되도록 흑인들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우리도 범사에 양심 따라 섬기는 성도가 됩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의 제자 한 사람이 어느 날, 가게에서 신발을 한켤레 사고 난 후 주인에게 "돈은 내일 주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이 제자가 돈을 들고 찾아가니 주인이 죽어 있었습니다. 그는 신발을 공짜로 갖게 되었다고 속으로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잠깐, 양심에 걸려 매일 고통 속에 보내야 했습니다. 그렇게 좋아보이던 신발이 '흉측한 가시' 같았습니다. 결국 그는 돈을 들고 다른 사람이 주인이 된 그 가게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가 죽었지만 제게는 살아 있습니다."

  한 철학자의 제자가 양심 따라 살았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는 더욱 양심 따라 섬기는 성도가 됩시다


그리고 청결한 양심으로 섬깁시다.

딤후 1:3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라고 합니다.

  "청결한 양심"은 '거짓 없는 양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그 일에 있어서 거짓이 섞여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심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를 경배해야 됩니다.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마 5:8) 이들만이 '하나님을 볼 것'(마 5:8)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결국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과 그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수 없었던 것은 이 '청결한 신앙 양심'을 소유치 못했기 때문입니다(딤전 1:5-7). 그리고 그처럼 '청결한 양심'을 소유하지 못한 것은 아직까지도 저급한 세속적 욕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포기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포기는 곧 영원한 사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이것을 끊어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에 포로된 양심'을 따라 오직 범사에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다(갈 2:20).


일군의 자격을 말할 때에 딤전 3:9에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라고합니다.

  여기서 '깨끗한 양심'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은 양심으로서( 히 10:22)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이 없이 행동하는 것입니다(행 24:16). 하나님이나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이 없이 사는 깨끗한 양심을 소유하는 일입니다.

  1787년 10월 28일 27세의 젊은 영국 국회의원 윌리엄 윌버포스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내 앞에 두 가지 큰 목표를 두셨다. 하나는 노예 무역을 금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습을 개혁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 사회를 개혁하려는 이러한 윌버포스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하여 그를 '영국의 양심'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의 영향으로 영국의 젊은 국회의원 3분의 1이 복음주의 기독교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매우 부유한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랐고 20대 초반에 유능한 의원으로 의회에 진출했습니다. 그런 그가 친구 밀너를 통해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상류 사회에서는 기독교를 품위를 위한 교양 이상의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그는 앞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로 결심했고, 그 날 이후 자신의 개인적인 야망을 모두 떨쳐버렸습니다. 당시 영국은 노예 무역을 통해 국가 수입의 3분의 1을 얻고 세계 최고의 해군력으로 아프리카 흑인들을 마구 잡아들였습니다. 그는 암살 위협, 중상 모략 비방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매진했습니다. 결국 의회에서 싸워온 지 50여년만에 노예 무역 폐지라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또한 조지 3세를 독려해서 '관습 개혁에 대한 포고문'을 발표하도록 했고 몸소 개혁에도 힘썼습니다. 그는 "나로 하여금 영국 노예 제도를 통해 얻는 2천만 파운드의 돈을 포기하는 날을 목도하고 죽게 하시니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란 고백을 남기고 그분께로 갔다고 합니다.

프랑스 사상가 루소는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양심! 양심! 본능이며 하늘의 소리요, 지성 있고 자유로운한 존재의 확고한 안내자여, 선악에 대한 올바른 심판자여, 인간을 신과 닮게 하는 자여, 그대야말로 인간 본성의 우수성과 인간 행위의 도덕성을 낳게 하는 자다. 그대가 존재하지 않으면 단지 규율 없는 이성의 도움을 빌어서 잘못만을 저지르는 슬픈 특권을 느낄 뿐이며 그때 나는 하나의 동물일 따름이다."

우리의 양심이 청결한 양심 고침 받은 양심이 되기위해 할일이 있습니다.

영국 화가 레이놀즈는 양심 치료법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첫째,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와 진리에 순종함으로 밝은 양심을 갖게 된다.

둘째, 양심을 건강하게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

셋째, 반성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자문하여 심사숙고하는 마음으로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실 지를 생각해 보라.

넷째, 믿음이 좋고 경험이 많은 분들께 상담을 하라. 왜냐 하면 좋은 경험이 많은 사람의 지도를 받는 것은 양심을 강하게 하는 영약이 되기 때문이다."(양심치료법-인터넷 정보클럽)


성경은 말씀 합니다.

딤전 1:5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히 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벧전 3: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딤전 1:19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합니다.

단 마음으로 섬기되 항상 범사에 청결한 양심으로 섬기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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