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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인의 삶 / 롬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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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의 삶
로마서 1 : 17


종교 개혁자로 후세의 사람들에게 화려한 명성을 얻은 루터는 당시 어거스틴 사제단의 한 사람으로 로마를 순례하면서 예수님께서 빌라도 재판장에 올라갔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의식화된 고행의 허구에 대해 깨닫게 되었고습니다.

집에 돌아온 루터가 본문에 기록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한 말씀을 묵상하는 동안 그를 깊이 가두어 놓았던 당시 로마 카톨릭의 교황주의와 의식주의의 벽들이 하나하나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 의롭게 되는 방편으로 율법과 도덕적인 삶에 초점을 맞추는 펠리기안 주의자들을 우리는 정죄합니다. 인간이 의롭게 되는 방편을, 인위적으로 조작된 의식에 따른 자기 학대를 통한 고행을 강조하는 로마 카톨릭을 우리는 정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덧입혀진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의를 덧입음에 있어서 어떤 인간의 조작이나 가장된 행위도 구원의 빙거가 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있을 뿐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언약에 의해서였고 그들의 행위나 공로가 선민의 조건이 될 수 없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하여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라고 리델보스(Ridderbos)는 말했습니다. 『오직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을 의미합니다(요 3:16, 5:24). 이 말은 의인의 가치가 곧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의인의 평가도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결과는 구원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의인의 삶'이란 제목으로 설교하기 원합니다.
의인의 삶은

Ⅰ. 복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삶입니다.

본문 1장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이것은 복음에 대한 설명의 시작이자 마지막 결론입니다.
복음( )은 '좋은'( )이라는 의미와 '소식'( )이라는 뜻의 합성어로 '기쁜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Gospel은 좋은(Good)이라는 말과 말(Spell)이라는 말의 합성으로 좋은 말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은 구약에서 약속되고 예언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장 2절에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의 본질은 그 아들의 화육과 죽으심과 부활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장 3-4절에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그의 고난과 함께 십자가에 죽으심과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셔서 보좌우편에 계심과, 영광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에 대한 성경의 표현은 실로 다양합니다.

천국복음 (마 4:23; 9:35; 26:13; 24:14),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막 1:1), 하나님의 복음(막 1:14; 롬 1:1),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행 20:24), 그의 아들의 복음(롬 1:9), 그리스도의 복음(롬 15:19), 나의 복음(롬 10:25), 우리 복음(고후 4:3), 영광의 복음(고후 4:4), 내가 전한 복음(갈 1:11), 구원의 복음(엡 1:13), 평안의 복음(엡 6:15), 주 예수의 복음(살후 1:8), 화평의 복음(행 10:36)이라고 했습니다.

1) 하나님에 대한 의입니다.
본문 1장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3장 5절에는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라고 했습니다.
요한1서 1장 9절에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6장 5절에는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라고 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의입니다.
요한1서 2장 1절에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3장 14절에 『…거룩하고 의로운 자…』라고 했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도들의 의입니다.
로마서 3장 25-26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칭의(稱義, Justification)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공유적 속성에 속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영감받은 사도 바울은 의(義)를 항상 구원과 관련시켜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삶이란 바로 칭의의 삶입니다. 인간은 모두 의롭지 못한 죄인인데 복음을 믿음으로 그 복음이 우리를 의롭다고 불러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 자체가 의로운 삶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의인된 그리스도인이 연약에 빠져 죄악된 삶을 사는 것은 성도 자신이 회개하고 분발해야될 문제이지 복음의 책임은 아닙니다.
의인의 삶은

Ⅱ. 믿음으로 말미암은 믿음의 삶입니다.

본문 1장 17절에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칼빈은 믿음에 대한 반복 기술은 신앙의 성장과정에 대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따라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성도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진 영생을 의미합니다(요 3:16, 5:24). 여기 『믿음』이란 단어의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1) 의인의 믿음은 행동화된 실천적 삶으로 나타납니다.
로마서 1장 8절에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로마 교회가 믿음으로 인하여 신앙의 열매가 맺히는데 대한 바울의 감사입니다.
골로새서 2장 5절에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이 믿음으로 충성하는 것을 칭찬하는 말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4절에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란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그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불굴의 충성으로 나타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 짓는 일을 행동화했습니다(히 11:7).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믿음으로 그 일을 실천했습니다(히 11:7).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칠일동안 여리고 성을 도는 일을 행동화했습니다(히 11:30). 기생 라합은 믿음으로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는 일을 행동화했습니다(히 11:3). 우리의 앞서간 신앙의 열조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데 행동화한 결과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했습니다(히 11:35).

희롱과 채찍을 감수했습니다.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습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이들의 행동화된 실천적 삶은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히 11:33-40).
차라리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행동화된 실천적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주시는 믿음의 힘과 담력과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인간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절에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2장 8절에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2) 의인의 믿음은 모험적인 순종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아브라함은 그 땅에서 인간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려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야 된다고 할 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모험을 감행한 위대한 본보기가 바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의인의 믿음은 모험적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시글락에 숨어 있는 다윗을 찾아오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용사들은 모험적인 신앙이었습니다(대상 12:1-40). 느부갓네살 왕 앞에 끌려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믿음으로 평소보다 칠 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모험적 신앙의 힘 때문이었습니다(단 3:16-17). 민족의 생존을 앞에 놓고 규례를 어기면서 왕에게로 나아가는 에스더의 충성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모험적 순종의 신앙으로 나타났습니다(에스더 4:16).

마게도냐 교인들은 믿음으로 환란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오히려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고후 8:2).
존 번연은 그가 감옥에 누워 있을 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처형을 앞에 놓고 있었습니다. 그는 교수대에서 비겁해 지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는 영원 속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님 나는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모험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의인의 믿음입니다. 의인의 믿음은 언제 어디서나 그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험적인 신앙으로 나타납니다.
그 모험적 행위는 바로 믿음이 행동화 된 것입니다.

3) 의인의 믿음은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결과적 삶 으로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9장 29-30절에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그 눈이 밝아진지라 …}고 했습니다.
두 소경이 예수를 따라오며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했습니다(마 9:27).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의 의미는
① 예수님을 메시야 구원의 주로 고백한 것입니다. ② 예수님을 왕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③ 예수님을 사랑의 주로 고백한 것입니다. ④ 예수님을 승리의 주로 고백하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했습니다(마 9:28). 두 소경은 그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8절에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수로보니게 족속인 가나안 여자는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어 예수님께 소리질러 애원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마 15:22). 이 여자의 소리를 들은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이 여자를 제자들마저 거절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애원에 두 번째 거절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마 15:26). 자기에게 개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주여 옳소이다"라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다시 한 번 주님에게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했습니다(마 11:27). 그 때 주님은 그 믿음이 크다고 하시고 그 여자의 소원을 이루어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소원이 없다면 신앙도 없습니다. 기독신자는 소원의 피조물입니다. 소원이 있는 곳에 뜨거움이 있습니다. 소원이 있는 곳에 기도가 있고 봉사와 희생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믿음대로 되는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을 주신 이가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삶은

Ⅲ.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최우선하는 삶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는 말입니다.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은 그의 의는 칭의인데 칭의를 구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칭의는 하나님의 주권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의 의를 구한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칭의에 대한 보은적 삶 즉, 하나님 앞에 바르고 선한 삶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그의 몸된 교회(골 1:24), 그의 의는 하나님의 의(롬 3:5; 요일 1:9; 계 16:5)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요일 2:1; 행 3:14)를 말합니다. 따라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 운동을 말합니다.
여기 『먼저』( , 프로톤)라는 말은 세속적 욕망과 세상을 얻기 위한 노력은 먼저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최우선으로 추구할 때 인생에 필요한 모든 조건들을 반드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최우선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없으면 죽는 우리의 양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32절에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 34절에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양식은 자기 사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택자들을 찾는 일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자 의의이자 가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양식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 그 자체가 우리의 삶을 계속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택자를 불러모으는 교회적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골 1:24).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양식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욥기 23장 12절에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가지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양식입니다. 그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요 4:14)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떡(요 6:32), 하나님의 떡(요 6:33), 하늘에서 세상에 내려온 떡(요 6:33), 생명의 떡(요 6:33, 35)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스스로 지어 입었던 나뭇잎 옷 대신에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 하와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혔습니다(창 3:21).
세겜의 수치를 씻기 위해 야곱은 옷을 바꾸어 입으라고 자신의 식솔들에게 명령했습니다(창 35:2).
야곱이 여러 아들보다 깊이 사랑하여 요셉에게 지어 입혔던 채색(彩色)옷이 있습니다(창 37:3).
제사장의 거룩한 옷(출 28:2-4; 스 3:10), 빛나고 깨끗한 옷(계 19:8), 전신갑주의 옷(엡 6:11, 13-17), 빛의 갑옷(롬 13:12),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롬 13:14),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새사람이 입어야 할 옷(엡 4:22-24; 골 3:10)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옷을 빼앗기시고 우리에게 새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옷을 입음으로 의인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의인은 의인의 삶을 살아야 될 의무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은 믿음의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최우선으로 하는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여기 의인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적 삶입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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