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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은 자 (롬 9: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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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롬9:27-29)

우리가 역사를 살펴보면 역사는 다수에 의해서 보다 꿈이 있고 의식화된 창조적인 소수자에 의해 발전하였고, 위기에서 구원 받았던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백성이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은 미디안의 손에 7년간 붙이셨다. 그 후 사사 기드온을 세워 미디안을 치게 되었는데,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32,000명의 군대 중에 22,000명을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셨다. 다시 남은 10,000명 중에서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지 않고 손으로 물을 핥아 마시는 300명 군인들만 데리고 나가 싸우라고 말씀하셨다. 기드온은 300명의 정예대원을 이끌고 나가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오늘 우리시대도 오합지졸의 다수보다 기드온 300명 군대 같은 소수자를 하나님은 찾고 계신다.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되고 믿음 안에서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나가 싸울 수 있는 창조적인 소수자를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 중에 찾고 계신다. 

  오늘 읽은 로마서 9장 27절 이하와 로마서 11장 5절에 보면 <남은 자>, 레이마(remnant)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로마서 9장 27절의 말씀은 이사야 6장에서 인용한 말씀이다. 대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 이상으로 의지하고 힘이 되어주었던 웃시야왕이 죽자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한 좌절감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인 위기와 좌절은 하나님을 향해 눈을 뜨고 마음 문을 열 수 있는 새로운 기회이다. 그는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고,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복하게 된다. 그때 그는 <누가 이 백성을 위해 갈 것인가?>하는 주의 부르심을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게 된다.
그의 응답에 대해 하나님은 장차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되어 멸망할 사실을 보여 주신다. 그러나 <남은 자>(remnant)들이 다시 하나님의 백성을 형성할 것을 예언하셨다. 이 예언을 인용하여 바울은 현재에도 이런 <남은 자>만이 구원을 얻을 것을 밝히며,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와 뜻이 실현된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로마서 11장의 내용은 열왕기상 19장에서의 인용이다. 선지자 엘리야가 이스라엘이 아합과 이세벨의 치하에서 전적으로 바알 경배에 빠진 것을 송사했을 때 하나님은 아직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이 있다고 말씀했다. 바울은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현재에도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남은 자(remnant)>가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1) <레이마>는 소수자이다.

  엘리야 당시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경건한 신자들이 7천명이 되었다고 하지만 전 이스라엘 민중에 비하면 극히 소수였다. 또 귀한 기의 이스라엘 백성은 불과 수만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다윗 왕의 전성기에 장정만 130만을 헤아렸던 데 비하면 실로 소수의 <남은 자>들이었다. 어느 시대이든 구원 받은 무리는 다수 Majority가 아니라 소수 Minority였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잡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하셨다. 구원의 길은 좁고 구원 받을 사람은 소수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실 때도 먼저 소수를 부르시고, 그 다음 그 소수를 통해 다수에게 전하시는 방법을 택하셨다.

사단에게 한 번만 절하면 한꺼번에 천하를 주겠다는 시험을 물리 치시고 갈릴리 해변에서, 유대와 사마리아 땅에서, 제자를 한 사람씩 부르셨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기적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길을 택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길을 택하셨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교회가 위기에 처하고 그 명맥이 흔들릴 때 확신을 가진 소수가 단합하여 위기를 구출해 준 예는 얼마든지 있다. 중세기 암흑시대에 진리의 휏불을 든 루터의 종교개혁이 그러했고, 칼빈과 존낙스의 개혁운동이 그러했으며, 18세기 웨슬러의 부흥운동이 그러했다. 영국이 말할 수 없이 타락하고 부패일로를 걷고 있을 때, 옥스포드의 몇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영국을 뒤집어 놓는 영적 대각성운동과 부흥의 불을 붙였고 전 세계를 새롭게 하는 정화운동을 펼쳤다.
남은 자는 모든 사람이 대로로 걸어가도 이 길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길이요, 진리와 생명의 길이라면 목숨 걸고 걸어갈 수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2) <레이마>는 환난을 극복한 승리자이다.

엘리야 당시의 <레이마>들은 이세벨의 무서운 박해를 피하여 지하에서 인내한 성도들이었다. 터키에 가면 기독교인들이 박해와 핍박을 피해 지하로 들어가 거대한 지하도시를 만들어 살던 그 모습이 그대로 보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과 신앙을 위해 자신들의 모든 세상적인 부귀영화를 다 포기하였다. 그들은 기꺼이 순교의 삶을 살았고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단순한 공동체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행복했고 염려와 근심이 없었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 했다. 오히려 내면적인 부요를 누렸다.

  계시록 7장 14절에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구원 받아 흰 옷을 입은 무리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라 하였다. 계시록 7장과 14장에 보면 구원 받은 자의 수 144,000이 나온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숫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예를 들어 3은 하나님의 숫자이고, 4는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땅의 숫자이며, 6은 인간의 수이고, 7은 3과 4를 합한 완전수이다. 그리고 12도 3과 4를 곱한 숫자로 완전수를 나타낸다. 144,000은 12,000을 12로 곱한 수에서 나온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세상의 환난을 이기고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한 남은 자들을 나타내는 것이다.


3) <레이마>의 구원은 아직도 미래에 속한다.

엘리야 시대의 남은 자(레이마)나, 귀환기의 남은 자(레이마)는 현재 구원 받고 승리한 자들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또한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구원 받을 성도들의 그림자가 되는 것이다. 즉 성도들의 궁극적 구원은 아직 미래에 속한다는 말이다. 과거의 역사는 미래의 예언이 된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단순히 지나간 사건을 알려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역사의 대원칙을 발견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칙에서 미래에 대처하는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엘리야 시대의 <레이마>나 귀환기의 <레이마>에서 장차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레이마>의 자격을 명백히 파악하고 이를 우리의 생활에서 실천 준행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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