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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비결 / 잠 2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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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비결
  본문 / 잠언 25:13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지금은 보리를 별로 재배하지 않습니다만 제가 어렸을 적만해도 5월말 쯤에 보리베기를 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요셋처럼 기계가 없던 때라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보리를 베어 추수를 했습니다.
  학교에서는 가정학습이라는 것을 주어서 바쁜 농촌 일손을 돕도록하는 한 주간의 기간이 있습니다.
  5. 6월의 한 낮 태양이 얼마나 뜨겁습니까?
  뜨거운 태양빛 밑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어른들이 베어논 보릿단을 날라다 한쪽으로 모으기도 하고 때로는 낮을 들고 보리를 베기도 하였습니다. 땀이 나서 온 몸이 젖은데다 보리에 붙어있는 길다란 꺼스럼이 몸에 달라붙으면 어찌나 따갑고 가려운지 그래도 열심히 일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제일 기다려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겠습니까?
  커다란 얼음 통을 메고 "아이스께끼" 라고 소리치면서 지나가는 얼음장수입니다.
  설탕물에 노란색 색소를 넣어 나무 젓가락 같은 막대기를 꽂고 얼린 얼음이였습니다. 한 참 땀흘리고 목마르던 때에 아버지가 사주는 그 아이스께끼 맞은 얼마나 맛있고 시원한지 아마 여러분도 그런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다" 는 내용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추수하는 날 흘린 땀을 속으로부터 시원하게 갈증을 채워주는 얼음 냉수 같은 사람 그 사람은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설교의 제목을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비결"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섬기는 주님의 마음을 아주 시원스럽게 해드릴 수 있을까요?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이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본문에서 그 비결을 찾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주시는 음성을 들으시기를 축복합니다.
 
  1. 충성됨입니다. 
  본문에 그랬습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잠25:13)
  충성된 사자가 그를 보낸 이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자는 보냄을 받은 사람 즉 종을 의미합니다. 종의 충성스러움은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도 그렇습니다.
  충성됨으로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주인의 마음을 읽어낼 줄 알기 때문입니다. 즉 한 가지를 시키면 다른 것까지도 주인의 의도를 읽어냅니다.

  우리는 마25:15절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두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장사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각 각 배로 이익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의 의도를 잘 못 알았습니다.
  이익을 남기라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익을 남기지 못했을 때 돌아올 불이익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잔꾀를 부렸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땅에 파고 묻어두었다가 원금만 가지고 왔습니다.
  주인은 그 종을 보면서 아주 답답해 하고있습니다.
  마25:24-25절에 보면 그 주인과 한 달란트 받았던 자와의 대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종은 자신의 입장을 설명합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이러한 종의 변명에 우리는 마25:26절에서 주인의 말을 듣습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이 말은 네가 나를 잘 못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 종은 주인이 이익을 위해 자신에게 달란트를 맡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러한 종의 생각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마25: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말입니다.
 
  이것은 그 종의 불성실함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지 결코 돈 얼마를 벌지 않았다고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 충성하는 자가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아서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충성된 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주님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마음을 시원케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고전 16:17-18 절에 나오는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입니다.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 주라" (고전 16:17-18)

  바울은 그들이 자신에게 올 때 마다 자신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에게 방문하는 것을 기뻐하였다고 솔직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로 이러 고전 16:18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다고 말하고 이런 사람들을 고린도 교인들이 알아서 대접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주님을 필요한 때만 찾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필요한 것처럼 주님도 나를 필요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이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주의 종이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필요만 따라 주님을 찾고 목사를 찾고 교회를 찾지 말고 주님의 필요, 교회의 필요, 목사의 필요에 따라 응답합시다. 그것이 주님이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것이라고 일찌기 바울은 자신이 체험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아가서 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우리를 사랑하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므로 병이 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 건포도와 사과로 나를 시원케하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필요로 하듯이 주님도 나를 필요로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필요를 채워서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합시다.
 
  3. 선교하는 일입니다.
  슥 6: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북방으로 나간 자들이 북방에서 내 마음을 시원케 하였느니라 하더라"
  북방은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황무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 건장한 사람들이 말을 타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은 그 북방으로 나간 자들 즉 복음의 사자들이 그곳에서 "내 마음을 시원케 하였다"고 말하고있습니다.
  북방은 우리 곁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가족 친구 이웃 모두가 우리의 북방입니다. 그리고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저 외지의 모든 나라와 민족이 북방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생명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복음을 듣지 않으면 다 멸망 당합니다. 

  교회는 구원선이 되어야 합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급하게 구하러가는 영혼의 119구급차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전도하지 않는 교인 선교하지 않는 교회가 문제입니다.
  교회는 유람선이 아닙니다.
  생명을 구원하러 싸이렌을 울리며 거리를 질주하는 구원의 구급차가 되어야 하니다.
  유유히 흐르는 죄악의 강물에, 초호화 여객선 뛰우고 희희락락 즐기려는 유람선의 승객, 유람선의 선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편안하다. 편안하다 하면서 죽어 가는 수 많은 생명들의 부르짖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교회 문을 닫아걸고 안에서 부어라 마셔라 잔치를 즐겨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교회는 죽어가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 경광등을 켜고다급하게 달리는 구급차가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계 3:20절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 주님의 모습에 귀를 귀울여야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어째서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주님이 문밖에 서계셨을까요?
  도대체 예수님은 왜 안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처량하게 잠긴 문 앞에서 문이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까?
  도대체 라오디게아 교회는 무엇 때문에 주님을 문밖으로 몰아내고 안에서 빗장을 걸어놓고 그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입니까?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이유는 전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영력을 잃고 있는 것도 전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선은 호화롭지 않습니다.
  기동력이 있어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주님의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하시는것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와 같이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릴 수 있을는 비결은 ① 충성스러움에 있습니다. ② 주님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③ 선교하는 일이야 말로 주님의 마음을 가장 시원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신앙 생활을 잘하시고 주님 앞에 설 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는 칭찬을 듣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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