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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두가지 기쁨` (빌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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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두가지 기쁨" (빌4:4-7)


여러분들은 참으로 복받으신 분들입니다. 한 주간동안 비가 그렇게 오고, 오늘 또 오는데
무슨 마음이 들어 예배당까지 오셨습니까? 하나님이 은혜 주셨기 때문에 예배당에 오고 싶은 마음도 있고 (예배 전에 보니, 비가 많이 와서 바지가 젖으신 분이 많습니다.) 이런 우중에도 예배당에 온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마음이 있고 우리 한국 교회, 한남제일교회를 사랑하시는 귀한 증거인 줄 믿습니다.
이미 은혜는 절반은 받으신 것 같습니다.

오늘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두 가지 기쁨" 에 대해 가르칩니다.
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기쁨
② (때를 따라 내가 하는 대로 얻는) 기뻐할 수 있는 기쁨

이 말씀을 생각하며 같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4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 말씀은 `항상 기뻐하라`, 그것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보면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두가지로 설명했습니다.

1. 항상 기뻐하는 기쁨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기쁨은 절대적 기쁨이요, 상대적 기쁨이 아닙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인들에게 기뻐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항상이라고 하는 말은 `계속해서, 영원히`라는 뜻이 있는데, 우리에게 계속해서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고 싶어서 불로장생 약을 먹어도
사람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오랫동안 아내와 더불어 평생해로하며 살고 싶어도 언젠가는 아내가 먼저 가든지, 내가 먼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친구도 없습니다.
욥의 경우도 어려워 지니까, 친구들이 다 떠났습니다. 돈도 권력도 영원한 것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항상, 영원히 기뻐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기뻐하라` 는 말씀 속에서 그 앞의 내용을 잊어 버리면 안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주님이 주신 은혜로 인하여 항상 기뻐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절대적 기쁨이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기쁨입니다.
로마를 방문했을 때, 바울이 갇혔던 감옥을 찾아갔습니다. 자그마한 지하 동굴의 쇠사슬과 착고에 매여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자유롭게 지나며 쉬는가 생각했더니, 이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쇠사슬에 묶여있는 사람이 어떻게 `항상 기뻐하라` 고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환경이 주는 기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
쁨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얼굴 같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스데반은 그 피를 흘리면서도 아프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돌에 맞아 죽었으니, 엄청나게 아팠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조롱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런 고통을 토로하면서도 조롱하는 이들을 위해서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 광경을 보면서 로마의 백부장이 "저분은 과연 메시야구나" 말씀할 수 있었던, 그 주님만이 가질 수 있었던 기쁨과 여유로움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쁨입니다. 절대적 기쁨입니다.

복음 송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내 맘 속에 있는 참된 이 평화는 누구든 앗아 갈 수 없네
주님이 나의 구주 되시었네
오 주 없이 살 수 없네
주님이 날 구하셨네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 없이 살 수 없네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은 주 안에 있는 자만이 얻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갖고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기쁨, 그것은 `구원`입니다.
지옥 갈 죄인이 천국 백성 된 것입니다. 지옥 가지 아니하고 천국 가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찬송가에도 있지 않습니까?

큰 죄인 복받아 빌 길을 얻었네
한 없이 넓고 큰 은혜 베풀어 주소서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지옥 갈 사람들이 주님의 은혜 받아 천국 가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의 사람이 되고, 주 안에서 기뻐하는 기쁨, 누가 빼앗아 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주 안에 있는 자가 얻는 기쁨, 내가 주님을 택한 것 아니고, 주님이 나를 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 있는 것은 주님이 나를 택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복음의 핍박자인 사도바울을 붙잡아 복음의 증인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도바울이 늘 이야기 합니다. 난 붙잡힌 바 된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주님이 나를 붙잡아 주신 은혜가 너무나 좋아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산 것같이 주 안에 사는 것이 너무나 즐겁고 기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택하심을 받아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예수 믿은 사람 없습니다. 주님이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23년 전에 어느 교회 부목사로 있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 집사님이 예수 믿기 전에 무당 귀신이 들어와 도저히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꾸 사람들만 보면 귀신이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을 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외버스를 타도 공짜라는 것입니다. "당신, 과거에 이랬지요."하며 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택시도 거저 탔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택시를 탔는데, 운전기사 부인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그 운전기사의 부인이 집에서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되는데, 이야기할 까 말까 하다가 택시에서 내리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운전기사가 화를 내더라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집에 가서 내 말대로 맞으면 오지 말고, 만약에 틀리면 내가 당신에게 몇 배로 물어 주겠다." 그리고 자기 집을 가르쳐 주었는데, (운전기사가 찾아왔겠습니까? ) 운전기사가 두달만에 찾아 왔답니다. 그 말대로 집에 갔더니, 부인의 부정현장을 보고 이혼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탁이 있는데 믿을만한 여자를 구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귀신은 성경에 의하면 참소자요 헐뜯는 자입니다. 훼방자입니다. 잘 된 것을 흐트려 놓는 것이 귀신입니다. 귀신의 영에 들어간 자는 참소하고 훼방하는 일에 앞장 섭니다. 과거의 일을 들춰 내고, 이야기 안 해도 되는 것을 갖고 문제를 일으킵니다.

여러분, 흙탕물을 보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다 가라앉지 않습니까? 그런데, 미꾸라지 노릇 하며 그 물을 흐트려 놓으면 그 물을 못 먹습니다. 가라앉혀야 먹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들춰 내서 좋은 일이 있고, 넘어 가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귀신의 일은 남의 지나간 과거만을 들추어 내는데, 자신도 못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큰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그 무당이 그것 갖고 돈 벌면 될텐데 왜 그러냐고 묻습니다. "난 이렇게 해서 돈 버는 것은 싫다. 앞으로의 일을 할만한 능력이 없지 않느냐?" 무당이 해결방법을 이야기해 주는데, "이 귀신을 좇아내려면 교회에 가야 된다."
그래서 교회에 갔답니다. 나같은 죄인이 어떻게 예수님 믿을 수 있습니까? 예수 사랑이 너무나 크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찾은 것 같지만, 주님의 사랑이 나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 사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좋은지, 성령이 무엇입니까? 죽은 자를 살리는 영이 성령이요,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사람 살리는 일이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귀신 들린 자도 구원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에 붙잡힌 자로서 주안에서 살게 된 이들입니다.
벧전2:9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이유가 바로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십니까? 역사 박물관에 가면 과거의 인물들이 쓰던 물건들이 전시 되어 있습니다. 아무개 왕이 사용하던 것, 그것 하나 때문에 진열장을 만들어 놓고, 손도 못 대게 하여 구경합니다. 그것 볼려고 돈까지 내고 있습니다.
언제인가 책에서 본 내용입니다.
유럽을 여행하던 한 여행객이 벼룩시장에서 목걸이를 샀다고 합니다. 본국에 와서 그 목걸이의 값이 어느 정도나 될 까 해서 금은 방에 갔더니 금은방 주인이 하는 말이 이 목걸이를 자기한테 팔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팔지 않고 다른 곳에 갔더니, 또 돈을 많이 줄 테니 팔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질문을 했습니다.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목걸이인데 왜 사려고 합니까? 그러자, 금은 방 주인이 이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제가 이 목걸이를 사려는 것은 이 목걸이의 보석이 좋아서만은 아닙니다."하면서 목걸이의 뒤를 확대경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글시가 쓰여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죠세핀에게. 나폴레옹" 이 목걸이는 나폴레옹이 사랑하는 연인 죠세핀에게 준 선물인 것입니다. 그 후 경매에서 엄청난 돈을 벌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별 볼일 없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고 하나님의 소유를 만들었다고 했을 때에 우리의 소유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 것 하나만 갖고도 내 인생의 기쁨이 가득한 것입니다.
내 가치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주님이 주시는 그 기쁨이 자기로 하여금 기쁘게 한다는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감옥에 갇혀 쇠사슬에 묶인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이 나를 하나님의 백성 삼았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큰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송을 좀 많이 합니다.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 하여도 나도 역시 세상 사람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크신 은혜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영국 왕 루이스가 하루는 민정시찰을 갔답니다. 임금이 민정시찰을 하는 이유는 백성들이 잘 살고 있나, 자기의 정치가 바르게 되고 있나 하는 것을 알기 위함이 아닙니까?
어느 동네 물방앗간을 지나는 데 방아소리와 함께 한 여인이 부르는 즐거운 노래소리가 들립니다. 자연히 그 노래가 들리는 곳으로 발 걸음을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남루한 옷을 입은 할머니가 이 노래를 신나게 부르는 것입니다.
왕이 이 할머니에게 "그 노래의 2절을 불러 보시오!" 하니까 이 여인은 말하기를 이 노래는 1절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왕은 내가 2절을 가르쳐 드리리이다 하면서 이렇게 노래를 불렀답니다.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영국황제 루이스가 날 부러워 해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 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지금은 이 찬송이 조금은 다르게 불리고 있지만, 이 찬송이 가르치는 것은 우리의 기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은혜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계십니까? 과연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항상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큽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더 큽니까? 이사야49장 15절 말씀에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비유 가운데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기억해 보십시오. 아버지가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아들이 자신이 봐도 자신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갈 곳 없어 온 죄인인데, "이 집의 품군으로나 써 주세요."하고 사죄를 합니다.
형은 이런 동생을 보고 화를 내지만 아버지는 다릅니다. "품군이라니, 너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내 아들이다" 하면서 잔치를 벌입니다. 아버지의 자식을 향한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도를 향한 사랑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8-39절에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합니다.
부모가 젖먹이는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성도를 향한 사랑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만이 우리를 항상 기뻐하게 할 수 있기에 `항상 기뻐하라`, 어떻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항상 그 안에서 주님의 사랑 바라보며 항상 기뻐하는 하나님의 좋은 백성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2. 기뻐하라!

4절 말씀 다시 보겠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다른 수식어 없이 상대적 기쁨입니다. 때를 따라 내가 하는 대로 얻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에 살면서 얻게 되는 기쁨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편지, 향기, 대사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잘 살기를 원하는 표현을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 이로서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교우는 서로 사랑해야 주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그것이 잘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소문난 교회가 되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그 교회 속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불리어진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무엇이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받자, 흩어진 교회가 안디옥에 가서 교회를 세우지 않습니까?
핍박받아 이주 해 간 사람들의 피난 살이가 다 힘들고 어려울 텐데, 그 어려운 환경 속에도 무엇인가 다른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이 그리스도인 답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사랑을 잘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 가장 잘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그리 잘하십니까? 성경을 잘 아십니까? 교회를 몇 대째 믿었습니까? 남이 갖지 못한 직분을 가졌습니까? 그것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진짜 자랑은 예수 오래 믿었기 때문에 사랑 잘 할 줄 아는 것입니다. 성경 많이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을 나도 한다고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과 그리스도인의 구분은 사랑 때문입니다. 이 사랑의 삶이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기쁨도 얻는 것입니다. 상대적 기쁨입니다. 나 아닌 다른 곳에서 다른 분에게서 얻는 기쁨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두가지로 표현했습니다.

1)관용의 삶을 사는 것
첫째는 관용입니다. 5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여러 사람에게 알려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관용입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나의 이미지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교회의 이미지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대로 관용입니까?
세계 사회 속에 자랑하는 한국 교회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성장하는 교회입니까? 성경은 관용을 알게 하라고 했습니다. 관용이 무엇입니까? 너그러운 마음과 태도입니다. 인내하고 참아주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관용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정의로울 때입니다. 정의는 옳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옳은 일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옳은 일보다 더 큰 일이 있는데, 그것은 관용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참아주는 것입니다. 잘못된 사람, 그릇된 사람을 너그럽게 봐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아이를 가르칠 때에 잘못하면 때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잘못한다고 다 때리고 꾸짖으면 하루종일 야단만 치고 말 겁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아이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법입니다. 폭 넓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너그럽게 봐주라는 것입니다. 관용은 소위 정의로움보다 더 큰 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관용 때문에 모든 죄인이 사는 것이 아닙니까?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면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봐 주시기에 산다는 것을 아십니까? 누가 하나님의 정의의 잣대 위에 놓아서 온전할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이 관용하셔서 살 수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어떤 부인이 남편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합니다.
사실 남편 때문에 못 사는 사람이 한 둘 입니까? 우리 집도 그렇답니다.
그러나 이 부인은 너무 심각합니다. "남편이 이기적이고 독선적이고..."이혼하고 싶다고 합니다. 이혼 하는 분들을 무엇이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도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인에게 "남편이 철이 없어 그럽니다. 조금만 기다려 보십시오."라고 합니다.
언제쯤 철이 들지 묻습니다. 한가지는 분명하다고 대답했습니다. "남자들은 철 들면 죽는 답니다."
제 이야기는 남자가 변할 것을 기대하지 말고 아내인 내가 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정의로움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의로움보다 중요한 것은 관용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옳고 그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남편은 이래야 한다. 부인은 이래야 한다. 시어머니, 목사님은 이래야 한다." 세상에 그런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날로 기쁨이 사라지게 됩니다. 관용해야 합니다. 너그럽고 부드러운 마음과 태도, 자세로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지금의 문제로 보지 말고, 언젠가는 되겠지 하는 미래의 문제로 보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어렵습니다. 성장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게 된다 해도 믿지 않는 사람이 믿게 되는 회심성장보다는 더 좋은 곳, 더 편한 시설을 찾아가는 교인들의 수평이동에 의한 성장입니다. 세계교회가 한국교회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고무풍선을 누르면 저쪽이 커지는 식의 성장이기 때문입니다. 다는 아니지만, 그래서 신도시 교회가 커가고 있습니다. 소위 부자 동네는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많습니다.

몇 년 전 통계입니다만, 강남에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85%라고 합니다. 부자가 예수 믿는다, 예수 믿으면 축복받는다고 설명하면 되겠습니까? 관용의 말씀을 하면서 비판하는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만, 85%나 되는 강남의 그리스도인들과 강남의 큰 교회들이 만드는 이미지는 무엇입니까? 85%의 그리스도인이 사는 강남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습니까?
지금 IMF때보다 어려워지고 가난한 사람이 늘어가고 있다는데, 강남의 소위 부자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제 생각에는 검소하고 절약하고 인내하고 남을 도와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TV에 나오는 것은 강남의 백화점들만 나오면서 백화점의 손님은 없지만, 사치하고 소위 명품은 없어서 못 판다고 합니다.

강북사람이 주눅 들어 강남에 못 가겠습니다. 그 명품을 사는 사람들 가운데 85%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다고 하면 맞습니까? 명품을 쓰고, 수천, 수억을 갖다 쓴들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명품이 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명품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관용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요셉처럼 자신의 곳간을 털어 어려움 당하는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비싼 땅값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정말 땀흘려 노력하여 그 비싼 땅값을 만든 것입니까?
갖고 있으면 1년에 몇 억씩 버는 그 돈을 어디에 쓰려고 합니까?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기회입니다. 한국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책망만 받는 교회가 될 까 두렵습니다. "네가 부자라고 하지만 실상은 가난한 자다, 가련하고 곤고한 자여"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이 들리지 않습니까?

요즘 기독교의 사회적 이미지는 너무 힘이 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는 모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성장만을 강조하고 성장이 한국교회의 목표가 되다 보니, 나도 성장, 너도 성장에 관심만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은 주눅 들어 예수 믿기가 힘이 듭니다. 가난하고 희생하고 긍휼히 여기고 위로해 주고 십자가 지는 그 섬김의 모습을 찾는 건 쉽지 않습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이렇게 죄처럼 느껴질 때가 업습니다. 가난이 복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섬김이 아닌 그 큰 힘을 가지고 `옳고 그르다` 판단을 합니다. 요즘 일어나는 일 가운데, `너는 깨끗하냐?`하지 않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만들었다." 그 분을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좀 더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을 안 해야 합니다. 적게 해야 합니다. 정치, 경제에 관여하고 사사건건 옳다 그르다 합니다.

교회는 선지자의 사명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는 사명이 더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신약의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입니다. 우리는 자꾸 구약으로 가려고 합니다. 구약에 가서 이사야가 되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 힘을 자꾸 내 세우다 보니 서로의 힘만을 자랑합니다. 10년 전 이야기를 꺼내어 감옥에 가둡니다. 세상이 악하니 싸워야 합니까? 교회와 정부가 서로 싸우면 되겠습니까?
교회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가 이기면 승리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이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주님이 가깝다면 무엇을 갖고 판단하십니까?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 내쫓고", 주님은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이 불의를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교회가 성장이 안 됩니까? 얼마나 관용을 베풀었는가를 생각하십시오.
과연 나의 이미지가 무엇입니까? 문제는 내가 예수를 닮아가야 합니다.
세상을 섬기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내가 죽고 세상을 살리는 예수 정신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목사 되고 장로 된 것은 권력 잡은 것이 아닌데, 권력자처럼 행세합니다.
오히려 좋은 종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좋은 종은 지혜로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손님이 필요한 것을 알고 센스 있게 섬기는 사람이 진짜 종 아닙니까?
음식점에 가서 손님이 왕이라는 이야기 하지 마십시오. 왜? 손님이 왕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자가 되야 합니다.
어떤 분은 그럽니다. "왜 목사님하고 가면 더 줍니까?", 그 분이 내가 목사인줄 압니까?
나는 종업원이 왕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여름 수련회 때 같이 가면서 서부해안 도로 횡간도 휴게소에 가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전쟁터를 방불합니다. 한군데 먹을 곳이 있긴 한데, 지저분 해서 다 치운 후 앉아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준비 해 간 국수와 김밥을 다 먹고, 먹은 자리를 다 치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어나자 마자, 다른 사람들이 와서 자리에 앉는데, 다른 곳은 자리가 없나 살펴 보았습니다. 다른 곳에도 자리가 있는데, 그 곳은 전쟁터 같이 먹고 남은 쓰레기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종업원들이 나와서 청소를 해도 다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어난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잘했다 하겠습니까? 못했다 하겠습니까?

제가 제일 싫은 것이 "예수 믿는 것들,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없네." 하는 소리입니다. 세상 사람처럼 여기 저기 어지럽혀 놓고 돌아가는 것 보기가 좋지 않습니다. 우리 한식 먹는 것이 참 사람 품위 없게 만듭니다. 해물탕 같은 것 먹고 나면 왜 그리 지저분 합니까? 어떻게 하면 깨끗하게 먹을지 고민이 됩니다.

비행기를 타면 처음엔 얼마나 깨끗합니까? 한 두시간 지나면 지저분 합니다. 화장실 같은 경우 휴지 많이 있지 않습니까? 깨끗하게 닦아 놓고 나옵니다. 뒤 사람이 와서 쓸 때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만이라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예배드리고 돌아 가는 그 자리에도 쓰레기가 있구나 생각만 하지 말고
그것을 주워야 합니다. 청소는 내 일이 아니다 합니까? 식당에 내려가서도 깨끗이 먹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 국물을 버리면 얼마나 환경이 나빠집니까? 음식 쓰레기 처지 곤란입니다. 먹은 후 식탁과 의자도 좀 정돈 해 놓으시고 말입니다.

교육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관리부장은 아니지만, 교육관 사용 후 잘 치우십시오. 유치부, 아동부, 중고등부, 청년부는 교육관을 쓰고 나면 잘 치워야 합니다. 그것이 관용하는 마음이고 섬김입니다. 토요일 결혼식을 한다 치면, 주일 전 예배를 위해서 얼마나 밤 늦게까지 청소하는 줄 아십니까? 이 분들에게 "수고합니다." 봉투 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말 감사하고 격려하고 인사 해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혼식 하면, "또 결혼식이야?" 하면 되겠습니까? "결혼식 하는구나"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 관용이 있어야 합니다.

지난 주 뉴스를 보니, KAL기 소유의 담요를 잃어 버린 것이 1년 동안 21만장이라고 합니다. 비행기 정도 타면 괜찮은 사람들 아닙니까? 무엇이 아쉬워서 그 담요 없으면 못 살 것처럼 다 훔쳐 갑니까? 올해도 지금까지 15만장이 없어졌답니다. 우리 교인들 가운데 혹여나 갖고 오신 분이 있다면, 당장 돌려 보내십시오. 그런데도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옛날 부자집 잔치에는 거지 잔치도 했습니다.
좋은 일 있으면 예단 하지 않습니까? 요즘에는 그것이 좀 심하게 되었습니다마는, 제가 만약 부자라면 결혼식 때 부주 안 받을 겁니다. 나는 목사라도 부주 받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아직 집사람과 의논은 못 했습니다.
장례식 때도 부주 받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좀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남보다 좀 있다고 생각하면 관용해야 합니다. "나는 겸손하고 온유하니 와서 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라 " 관용하면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왜 이리 설교가 길어지나 했더니, 휴가 갔다 와서 그렇습니다. 아침에도 설교, 저녁에도 설교, 비가 와도 그쳐도 설교 생각만 했더니, 좀 길어집니다.

6절 말씀 같이 보겠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달마야 놀자`란 영화를 보셨습니까? 거기에 보면 스님과 깡패들이 게임을 하는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게임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으면 채워집니까? 안 채워 집니까? 채워지는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물 속에 같이 들어 가는 것입니다.

어니젤린스키라는 분이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는가?`에 대해 연구를 했는데, 그 연구 결과가 이렇습니다.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미래의 일을 염려한다.
30%은 이미 지난 과거의 일을 염려한다.
22%는 염려하지 않아도 될 사소한 일을 염려한다.
나머지 8%중 4%는 사람의 힘으로 감당 할 수 있는 일이다.
4%는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이다.
결국 사람들은 그 4%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염려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염려를 냉철하게 판단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일어나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는 것이 40% 최고로 많습니다. 그리고 지난 과거를 걱정하는 것이 30%입니다. 거기에 사소한 걱정까지 하니 92%를 걱정하고 삽니다.

우리가 하는 회의를 냉철하게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가 계획하는 것들을 볼 때 냉철하게 판단해 보십시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염려하는지, 지나간 과거를 염려하는지, 사소한 일을 염려하는 지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염려하는지, 4% 때문에 그렇게 심각합니까? 그 4%를 하나님께 맡겨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기도와 간구를 하는데 말입니다. 염려가 너무 많다 보니, 원망과 불평을 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고 했습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시편121편을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 서로다" 이 시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성도가 부르는 노래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실족지 아니하시며 나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는도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며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나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는 내 오른 편에서 내 그늘이 되셨다"

실족할 기회가 많았는데, 실족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지키셨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낮의 해가 나를 상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여러분이 오늘 이렇게 나온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마귀 역사가 많고 우는 사자처럼 다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 지켜주셔서 이렇게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셔서 나왔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나의 출입도 지켜 주셨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우리는 진흙입니다. 하나님이 빚고 계십니다. 무엇을 만드실지 어떻게 압니까? 내가 무엇을 하겠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십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골리앗과 싸워 이겼다, 성전건축을 계획했다는 것이지만,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간음죄를 지었다고 책망 했을 때에 밤새 침상이 젖도록 울며 회개한 것입니다. 그런데, 간음해서 나은 자식이 병에 들었습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죽었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벌떡 일어나 일을 했습니다. 그의 신하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아이가 병들 었을 때에는 하나님이 고쳐주실 까 해서 열심히 기도했지만, 하나님이 그 생명 데려가셨으니 그 일을 어떻게 하리오", 벌떡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자신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옵소서. 세상사람들은 안 되면 조상 탓이고, 잘 되면 자신이 잘 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잘 되면 자기가 잘 나서 된 것이고, 안 되면 하나님 때문인 것처럼 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일에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관용하는 것이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신다고 했습니까?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셔서 우리는 참된 기쁨을 누리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수 있도록 기쁨의 삶을 잘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두가지 기쁜 말씀이 있습니다. "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 "관용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룀으로 기뻐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기쁨으로 충만케 하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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