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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단계-1 / 구원의 확신과 기쁨 / 요일 5: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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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단계 1/ 구원의 확신과 기쁨 
성경본문: 요한일서 5: 11-13


사람은 태어나면서 부모의 양육을 받아 자라가기 시작합니다. 부모의 사랑으로 태어나고 부모의 보호와 양육을 받으며 신체가 자라가고 사회성이나 정서도 성숙해 갑니다. 그리고 성년이 되면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사회를 위해 봉사합니다. 그리고 불혹의 나이가 되면 그 인격이 성숙하여져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어르신”이 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이러한 단계들을 잘 거치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어릴 적에는 다른 이들로부터 구박을 받게 되고, 자라서는 다른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거나 눈총을 받습니다. 그러나 정상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사람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장해 가고 “사람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도 성장의 단계가 있습니다.

  1단계/ 거듭남의 단계-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구원의 확신 속에 거하는 단계

  2단계/ 성장의 단계(은혜의 단계)- 갓 태어난 아기가 젖을 먹고 부모의 사랑과 관심 가운데 자라가듯 말씀과 기도를 통해 훈련되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능력도 경험하고 말씀을 통해 말씀의 비밀을 깨달아가고 기도의 깊이를 경험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는 단계입니다. 이 기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는 단계입니다.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단계/ 사역의 단계(일꾼의 단계)- 영혼을 살찌운 채 가만히 있으면 영적 비만이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교만하게 됩니다. 이제 성장의 단계를 넘어서서 사역으로 옮아가야 합니다. 주님과 교회와 다른 이들을 위해 섬기고 봉사하는 단계입니다.

  4단계/ 성품의 단계(인격의 단계)- 이 단계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참으로 어려운 단계입니다. 목회자도 사역의 단계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 성품의 단계에까지 올라가야 참된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최종 목적은 이 성품의 단계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단계입니다. 즉 성화(聖化)의 단계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단계를 밟아 성장해 가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1단계나 2단계에서 머무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3단계까지 가기는 하지만 거기서 머무는 사람이 많습니다. 4단계에까지 이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는 한국 교회 성도들의 대부분은 잘 봐줘도 2단계 정도에서 머무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부터 몇 주 동안 신앙의 단계가 어떤 것들이 있나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신앙은 어떤 단계에 놓여져 있는지를 돌아보고 다음 단계를 향하여 성숙을 촉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그 첫 단계로서 거듭남의 단계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1. 우리는 거듭남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합니다(11, 12절).

  마치 어린 아이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와서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출생신고를 합니다. 그러면 호적(戶籍)에 올려지고 주민등록번호가 나오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여 구원받았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듭난 경험,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셔 들인 경험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달리기 경주를 할 때 출발선에서 출발을 해야지 그 선수가 선수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출발선에서 출발하지 않은 선수는 실격이 되고 맙니다. 제대로 출발을 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도 거듭남의 경험으로부터 신앙생활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 거듭남의 경험이 없이 두루 뭉실 어느 틈엔가 그리스도인이 저절로 되어져 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 거듭남의 경험은 사람에 따라 놀라운 경험으로 분명하게 드러나고 어떤 사람에게는 잘 느껴지지 못하게 경험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거듭남의 경험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 생활에 아주 열심을 냅니다. 찬양대도 하고 교사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집사가 되기도 합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성경공부도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거듭난 체험이 없다면 마지막 날 주님은 그를 모른다 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출발선에서 제대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열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집사 중에도 거듭남이 없는 집사가 꽤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교회에 나오면 침례 주고 집사를 주기 때문에 직분은 집사인데도 거듭남의 경험이 없는,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 꽤 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은 자인가를 항상 점검해 봐야 합니다. 출발을 잘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거듭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마음속에 모셔 들인 경험이 있습니까? 만약 이 경험이 없다면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했다 하더라도 모두 무효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구원받으셔야 합니다.


2.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13절).

  오늘 본문에 보면 요한 사도는 13절에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구원받았음을 알기를 원한다.”
  확신은 확실히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과 구원받았는데도 확신이 없는 사람은 살아가는 태도가 다릅니다.

예화) 유월절날의 가정
  출애굽할 당시 열 가지 재앙 중에서 마지막 재앙은 애굽에 있는 모든 장자를 죽이는 재앙. 이스라엘 사람들도 애굽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 재앙에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그 피를 보고 그 집은 그냥 넘어가겠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죽음의 사자가 그냥 넘어갔다는 말로 유월절(逾越節)이라 합니다.

  첫 번째 유월절 때에 어떤 세 집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집은 양의 피를 문에 바르면 안 죽는다는 말을 안 믿고 양의 피를 바르지 않고 그냥 잤습니다. 두 번째 집은 그 말을 듣고 피를 발랐지만 불안해서 밤새도록 한숨도 못 자고 뜬 눈으로 새웠습니다. 세 번째 집은 그 말을 듣고 문에 양의 피를 바른 후 평안하게 잠을 잤습니다.

  어느 집의 장자가 죽었을까요? 첫째 집만 죽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러한 사람들이 많지요. “뭐?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간다고? 그걸 어떻게 믿어? 죽어봐야 알지”하면서 제멋대로 삽니다. 그러나 심판 날에는 영벌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집과 세 번째 집은 모두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두 집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두 번째 집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밤을 지냈고 세 번째 집은 평안하게 밤을 보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구원받은 자인가? 이것에 대한 확신이 있으십니까? 없다면 말씀을 통해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확신은 신비로운 체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체험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습니다.
예화) 소 밭갈이

  어떤 부자(父子)가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반듯하게 밭을 잘 가는데 아들은 늘 삐뚤빼뚤하게 밭을 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왜 아버지는 반듯하게 가시는데 저는 삐뚤빼뚤하게 갈아지는 거지요?” 그러자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나는 한 목표를 바라보면서 갈기 때문에 반듯이 갈게 되는 것이란다.”

  아들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다시 밭을 갈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자신은 삐뚤빼뚤하게 갈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말씀하신대로 목표를 바라보면서 갈았는데도 삐뚤빼뚤하게 갈아지는데 왜 그렇지요?” 아버지가 다시 아들에게 묻습니다. “뭘 목표로 바라보면서 갈았지?” 아들은 “저기에 있는 염소를 향해서 갈았지요.” 그러자 아버지가 대답하였습니다. “얘야, 움직이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해서 갈아야지 반듯이 갈 수 있는 거란다. 염소는 자꾸 움직이니까 그것을 보고 가는 밭도 이리저리 움직여져서 반듯이 갈 수 없는 거란다. 나는 저 앞에 있는 소나무를 보면서 밭을 갈고 있단다.”

  감정은 자주 바뀌는 것입니다. 신비로운 체험도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움직이는 것, 변하는 것에 우리 구원의 근거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음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것에 그 근거를 두었을 때에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확실한 말씀에 근거를 두어야 합니다. 식언치 아니하시고 변개치 아니하시는 영원하신 말씀에 근거를 둘 때 우리의 확신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신약 378쪽)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3. 구원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는 콧물, 눈물 흘리며 감격에 젖어 있다가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그 감격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거듭난 사실에 대한 감격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그저 건강한 사람은 건강한 것이 얼마나 감격적인 것인지를 모릅니다. 그런데 주변에 누가 아파서 심하게 고생하며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내 자신이 건강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여러분에게 또다시 하루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다는 사실에 감격해 보았습니까? 생명이 있는 사람은 생명의 고귀함을 모릅니다. 그런데 자동차 운전을 하다가 앞서가던 차가 가드레일을 들이받으며 전복되는 사고를 목격하고 자동차에 탄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모습을 보게 되거나 젊은 사람이 사고로 인해 죽는 모습을 옆에서 보게 되면 내가 생명의 호흡을 하고 잇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제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부부가 서로 사랑하여 결혼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그 첫 사랑의 감격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자주 다툼이 나고 그 다툼이 해결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부란 사랑이 기초가 되어 있는데 그 기초가 무너져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상실하면 주님과의 관계가 소원(疎遠)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뿌리를 찾듯이 우리 거듭남의 뿌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보혈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구원의 감격 앞으로 다시 나아가야 합니다.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십시오. 그러면 기쁨이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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