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만족하십니까? (빌 4:10-13)

  • 잡초 잡초
  • 257
  • 0

첨부 1



만족하십니까?
(빌4:10-13)
 
 
  저는 지난 두주동안 여러분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유하십니까?, 행복하십니까? 이제 오늘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만족하십니까?, 자족하십니까?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합니다. 절제하기가 힘들고, 욕심을 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가져야 하고, 더 소유하고, 더 많이 업적을 쌓아야 합니다. 이런 세상에 사는 우리를 향해 성경은 만족, 자족, 지족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족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시대를 살던 신앙인들의 마음 한 복판에는 이것이 새기져 있었습니다. 본문을 기록한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11절에서 바울은 '자족' 이란 단어를 언급합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세계에 그는 참 좋은 모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족하며 살수 있을까요? 본문을 통해 그 몇가지의 중요한 교훈을 배웁니다.

  첫째는 현실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11절에서 바울이 지금 당면한 현실을 가장 잘 대변하는 단어로 '어떠한 형편에든지' 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한마디속에 바울의 현실과 상황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포함한 빌립보서는 바울이 옥중에서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혔습니다. 죄가 있어서 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때문입니다. 참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 같으면 사람을 원망하고, 환경을 탓하고, 나아가서 하나님도 원망할 상황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옥에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시작을 보면, '주안에서 크게 기뻐한다' 라고 문을 열고 있습니다. 빌립보서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말이 '기쁨'입니다. 그리고 여기 본문에서는 '큰 기쁨'을 강조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기쁨입니까? 지금 최악의 상황입니다. 그의 생애 가장 힘들 때입니다. 감사할 수 없고,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쁨을 말하고, 자족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그가 당면한 현실을 믿음으로 잘 수용하고 있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자족하는 삶의 우선적인 비결입니다. 어떤 형편이든지 현실을 수용하는 것에서 자족은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결코 우연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필연적인 시간속에 삽니다. 그 필연이 내가 기쁘고 좋은 일이 있을 때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필연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우연이 아닌 것을 믿어야 합니다. 고난과 역경가운데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쁠때도 감사하고, 또 어려울 때에도 현실을 잘 수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는 자로서 하나님앞에서 우리가 먼저 가져야 삶의 자세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서 있지 않으면 우리는 자족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불평이요, 원망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필연을 믿는다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도 믿어야 합니다. 늘 좋은 길, 좋은 것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결론을 믿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세상에 사기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줍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든 부모된 자의 심정입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좋은 것 주시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한 현실과 상황을 믿음으로 수용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계획한 것이 깨어질 때 실망할 수 있습니다. 뜻하지 않는 난관 앞에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살고 땀흘리며 노력하지만 노력한대로 안될 수도 있습니다. 내 인생을 늘 성공하며 살아야 하지만 때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 믿고 형통해야 하는데 때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걸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여러 가지 삶의 환란과 역경으로 몹시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자족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필연을 믿는다면 현실을 수용하고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이런 고백과 기도가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더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실제로 성경의 이야기를 보면, 주어진 현실을 잘 수용했을 때,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을 많이 엿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그는 왕이 되기 전에 사울의 시기를 받아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결코 자족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어진 현실을 잘 수용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더 좋은 길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망명생활중에 다윗이 이곳저곳을 전전긍긍하다가 정착한 곳이 '아둘람'이란 굴입니다. 거기에서 그는 자기에게 모여든 억울하고, 상처받고, 마음 아픈 사람들과 함께 신앙과 삶의 공동체를 이룹니다. 결국 그들이 훗날 다윗시대의 주역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윗의 위기때에 모두 떠나가는 때에도 끝까지 그의 곁에서 자리를 지켜준 충신들이었습니다. 쫓겨다니게 된 것이 벌이 아니었습니다. 아둘람의 생활이 고통만은 아니었습니다. 훗날 다윗을 다윗되게 만든 하나님의 필연이었습니다. 그 길은 더 좋은 길이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힘드십니까? 몹시 아프십니까? 눈물이 나도록 괴로우십니까? 이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맑은 가락이 울리도록 이런 찬송하고 기도를 하십시오. "하나님 아버지께서 더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분명 하나님은 우리를 더 좋은 길로 이끄십니다. 이 믿음을 가지시고, 어려울 때에도, 현실을 수용하면서, 자족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배우는 것입니다. 자족의 비결은 배우고 훈련받고 연습을 통해서 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 훈련과 연습을 통해 우리가 자족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12절에서도 반복됩니다. 바울의 자족이 저절로 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울이니까 가능했다고 그를 높이 평가하지 마십시오. 그도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어려운 형편에 처했을 때 아프고 괴롭고 힘들 수 있는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잘 극복하며 자족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배웠습니다. 뼈를 깎는 훈련과 연습을 한것입니다. 그의 표현처럼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킨 것'입니다.
자족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배워야 하고,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연습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바울이 위대했던 것은 일생을 통해 바로 이 훈련과 연습을 잘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배우지 않고, 훈련받지 않고, 자족할 수 길이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신앙은 훈련이요, 연습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4장 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신앙의 성장은 세월이 흐른다고 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생활이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된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연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족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지 않으면, 연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1988년 9월 27일 카나다의 CBS 방송이 나가던 날 아침뉴스는 "오늘은 우리 카나다의 국가적 수치의 날입니다" 라는 아나운서의 맨트로 시작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날 세계적인 육상선수 밴 존슨이 약물복용으로 모든 기록이 지워지고, 수치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밴 존슨은 카나다에서 국민적인 영웅입니다. 그는 전 세계적으로 유능한 육상선수로 인정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약물복용을 했다는 것이 판명된 이후, 그를 사랑했던 많은 사람을 실망시켰습니다. 사실이 밝혀진 뒤 기자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는 한마디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메달을 얻고, 명성도 받고, 기록도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저는 지금까지 훈련을 게을리해 왔습니다..."

  훈련없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특히 운동이 그렇습니다. 지금 대구에서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열립니다.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이 메달 경쟁을 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금메달을 목에 걸수 있습니까? 훈련을 잘 한 사람입니다. 그들이 메달을 목에 걸고 웃지만, 그 기쁨이 있기까지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피나는 훈련없이 얻어지지 않습니다. 축구 선수들이 수많은 관중들 앞에 열광적으로 환영을 받으며 뛰는 것을 보면, 모두가 부러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자리에 서기까지 뼈를 깎는 훈련과, 비자땀을 흘리는 연습없이 설수 없습니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군인들의 용감하고 늠늠한 모습도 훈련의 결과입니다. 더위를 이기고, 추위와 싸우며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기에 군인이 보기에 멋있는 것입니다. 훈련없는 군대는 군대가 아닙니다. 연습없는 군인은 군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자족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자족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바로 되기르 위해 연습해야 합니다.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끊임없는 자기 훈련과 연습을 통해 자족을 굳건히 세워 가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본문 13절에 아주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이것이 자족하는 삶의 최종 결론입니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만 모든 것을 할수 있습니다. 능력을 통해 자족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족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자족하지 않고, 욕심이 그치지 않고, 절제하지 못합니다. 무엇이 원인입니까? 바로 능력의 문제입니다. 내게 주시는 능력만이 가능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안에 그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이것이 주님의 선언이고,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세상이 할수 없고, 사람이 할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능력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천지창조에서부터 주님의 십자가까지,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까지 기독교의 모든 역사는 능력이 주관합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두드러진 특징이 능력인데, 과연 여러분은 어떤 능력이 가장 큰 능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도대체 능력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능력하면, 신비한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합니다. 방언하고, 예언하고, 은사받고, 어떤 신비로운 체험을 해야 그것이 능력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특징을 소개하는 사도행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성경에서 가르치는 진정한 능력은 바로 자족의 능력, 즉 절제의 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 요한은 처음 주님을 믿을 당시 그의 별명이 '보아너게'로 불리웠습니다. 이 말은 천둥과 번개를 가리킵니다. 그처럼 그는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베드로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실 요한도 베드로 못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다가 어느 마을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을 때, 요한은 예수님께 그 마을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자고 제안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요한이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받은 이후 그의 삶에서 보여주었던 가장 놀라운 모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요한이 기록한 성경인 요한복음, 요한일서의 주제가 사랑입니다. 요한이 전한 설교의 핵심이 사랑입니다. 그는 보아너게에서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어떤 경우에서도 성급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성령으로 자기를 잘 조절합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바울이 가진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바울이 능력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능력이 무엇입니까? 13절은 11절, 12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능력은 신비가 아닙니다. 바로 자족의 능력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운 것이 능력이라는 것을 강조입니다. 자족하고 절제하는 것보다 더 큰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면 자신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힘이 생깁니다. 우리 안에 끊임없이 솟구치는 욕심을 버리게 되고, 모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 집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능력을 무엇보다도 사모해야 합니다. 그 능력은 신비로운 것만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조절하고, 절제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있어야 사실 잘 훈련도 받고, 또 모든 현실과 상황도 원망없이 받아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자족하고 만족하고 절제하고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톨스토이가 문학작품 가운데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라는 것이 있습니다. 빠흠이란 사람이 어느날 마을의 촌장으로부터 하루동안 걸어서 표시할 수 있는 모든 땅을 주겠다고 제안을 받습니다. 그래서 빠흠은 새벽부터 쉬지 않고 앞으로 나갑니다. 쉰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땅이 줄어든다는 것을 알았기에 열심히 나갔습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가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결국 해가 지기 시작할 즈음에서야 황급하게 뒤를 돌아 뛰기 시작합니다. 숨을 헐떡이며 되돌아온 빠흠에게 촌장은 '정말 장합니다. 당신은 엄청난 땅을 취하셨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들음과 동시에 피를 토하며 쓰러져 죽었습니다. 그가 죽은 뒤 그에게 돌아간 땅이라곤 겨우 그의 관이 묻힐 반 평밖에는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욕심의 끝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인생이 비참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족해야 합니다. 이제 현실을 받아 드리는 자세를 가지십시오. 자족을 위해 연습하십시오. 그리고 자족의 능력을 사모하십시오. 그래서 이번 주간도 자족하고, 감사하면서 믿음안에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