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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인의 삶 / 롬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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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로마서 5:1-5 00절 
제목 : 의인의 삶 조회:11
 
여러분!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그런데 무슨 의인입니까? 착한 일을 해서 의인입니까? 교회에 나온 지가 오래되었으니 의인이에요. 우리는 인간성 자체가 그렇게 선하지 못합니다. 언행자체에서 수없이 실수하고 범죄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의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의인이라 하면 의인인 것입니다.(아멘) 의인이라는 말에 실감나지 않기에 예를 들어봅니다.

어느 날 나폴레옹이 그의 군대들 앞에서 거칠고 사나운 말을 타는데 그만 순간적으로 말고삐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큰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한 병사가 대열에서 뛰어나와 말고삐를 잡아 말을 제어하여 나폴레옹을 위기에서 구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순간 “고맙다 대위” 그렇게 말했답니다. 병사는 “폐하, 저는 대위가 아닙니다.” 그때, 나폴레옹은 “너는 오늘부터 대위다.  내가 대위로 임명한다.”  그래서 병사는 자기 대열로 가지 않고 장교들의 대열로 서게 되었습니다. 다른 장교들이 “야, 병사가 어디로와 저리로 가” “아닙니다. 저는 오늘부터 대위입니다.” “어떻게” “저기 계신 나폴레옹 각하가 나를 대위로 임명했습니다.” 모든 장교들이 입을 다물었답니다. 그 날부터 대위입니다.
우리는 과거에는 죄인의 대열에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의 의를 믿었는데 주님이 너는 의롭다 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의인이 된 것입니다.
로마서 5: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어떻게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하였습니까? 믿음으로 입니다. 의롭다 하는 것은 잠깐 동안 죄에 대하여 못 본 것처럼 눈감아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옷을 갈아 입혀주신 것입니다. 죄인의 옷을 벗기시고 의인의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입을 열어 크게 외쳐야 합니다. 나는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의인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1. 화평을 누리자 라고 하십니다.

화평을 누리고 살아야 의인입니다.
1) 화평은 먼저 관계 회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퍽 오래 전입니다. 어린 나이에 어른 장로님들을 모시고 목회 하는데 힘들었습니다. 이쪽 장로님 댁에 가면 저쪽 장로님 측에서 목사님 소 당회 하셨어요. 그 쪽 장로님 댁을 갔다 오면 이쪽 장로님 댁에서 같은 질문을 합니다. 부흥회하면서 혹은 다른 시간에 두 분을 강단 위에서 같이 손을 잡고 기도합니다. 눈물로 회개합니다. 그런데 열흘도 못 갑니다. 왜 관계회복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무엇입니까? 사랑의 관계가 지속될 때에 부부입니다. 관계가 끊어지게 되면 이혼입니다. 사랑의 관계가 사라지면 불화입니다. 관계회복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자녀로서의 관계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에서 보여준 탕자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집을 나간 아들이 있습니다. 분명히 아들입니다. 그런데 아들 노릇을 못했습니다. 방탕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때 아버지는 그를 아들로 인정해 줍니다. 그가 돌아왔습니다. 죽었다가 산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소를 잡아라. 잔치를 베풀어라. 가락지를 끼워라. 아들이 아닌 것 같이 살았는데 아들로 인정해 줍니다. 그때 그 아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로 믿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다고 할 때에 적어도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 나와 하나님과는 끊을 수 없는 자녀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다.” 그러면 하나님과 화평하게 됩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하게 됩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은즉 화평을 누리자 그렇습니다. 화평은 즐거움입니다. 평화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인간은 불행해집니다. 로마서 12:18절에서 로마 교인들에게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라” 고 권면합니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 고 하셨습니다.(마 5:9)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라고 히브리기자가 말하고 있습니다.
2) 화평은 사랑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명령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지난날 나에게 아픔을 주고 수많은 큰 손해를 입힌 사람이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화평할 수 있습니까? 자기부터 사랑해야 합니다. 치유 받아야 합니다. 화평의 반대말이 무엇입니까? 불화요, 반목입니다. 그것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자신이 해를 봅니다.
미국의 저명한 심장의학 전문의인 ‘로버트 엘리오트’(Robert Eliot) 박사는 사람의 병중에 가장 무서운 게 심장이라고 하면서 그 원인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미워하고 싫어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 특히 성인들은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세요. 그러면 마음에 즐거움이 옵니다 사실 화목한 관계는 서로가 즐거움을 나누는 관계이어야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시어머니를 만나서 서로가 반갑고 즐겁다면 이는 화목 하는 관계입니다. 서로 좋은 관계였는데 무엇인가 원인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즐겁지 않아요. 이것이 불화입니다. 즐거움은 사랑할 때 나옵니다. 사랑은 논리가 아닙니다. 이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누가 잘했느냐 못했느냐 따지는 사람에게는 사랑이라는 말이 통용되지 않습니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 부부싸움 해본 일이 있으십니까? 화가 난 쪽이 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건 자기 입장이고 상대도 같습니다. 너무 한다는 것입니다. 섭섭하답니다. 화평 하려고 하면 무조건 받아야 합니다. 탕자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만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너 고생 많았지 그럴 줄 알았다. 너 꼴 좋다. 무슨 염치로 왔느냐.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버지가 할말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돌아온 것 그것 하나로 만족하고 고마웠습니다. 기뻤습니다. 아들도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사랑을 다 받았습니다. 이때 화평이 이루어졌습니다.
3) 겸손해야 화평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부부가 다같이 똑똑합니다. 그 부부는 행복하겠습니까? 부부싸움 잘하는 부부를 보세요. 둘 다 똑똑하면 틀림없이 싸웁니다. 한쪽만 똑똑하면 그래도 낫습니다. 겸손하면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부딪치지 않습니다. 성 프랜시스라는 성인이 있습니다. 그의 제자 중에 맛세오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기도원에 있는데 맛세오가 묻습니다. “프랜시스코여! 당신은 인물이 미남도 아니고 학식이 뛰어난 것도 아니며 귀족의 아들도 아닌데 어찌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좋아하고 따르는 겁니까? 그뿐 아니라 당신이여 하면서 보고 싶어하고 그리워하는 겁니까?” 이 말을 들은 프랜시스는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잠잠히 한참 있다가 하나님의 영광이 그에게 임하는 순간에 입을 열었습니다. 그때 “맛세오 형제여!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죄 많은 사람을 찾았지. 그리고 가장 불쌍한 자를 찾았지. 하나님께서 불쌍하고 죄 많고 가련한 사람을 택하여 그에게 큰 은혜를 주셨는데 그 사람이 바로 나였지.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죄 많은 자에게 가장 약한 자에게 주신 그 은혜를 보려고 나를 따르는 것이지. 나를 보려고 오는 게 아닐세.” 그때 맛세오는 “오 형제여 당신의 겸손을 내가 이제 알았나이다” 라고 말했답니다. 이렇게 겸손한 사람은 누구와도 화평을 누리게 됩니다
4) 무조건 용서하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화평합니다.
사랑하고 겸손하면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편을 사랑하는데 남편이 잘못한 것을 용서하지 못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화평하지 못합니다. 용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사죄함을 받아야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가 됩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습니다. 그때 그 사실을 말하고 용서하면 화평한 관계가 됩니다. 요즈음 흔히 하는 말로 용서하면 Win Win입니다. 같이 이기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싸웠습니다. 이겼다고 참피언 되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서로가 이겨야 이기는 것입니다. 즉, 나도 이기고 당신도 이겨야 합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이 말이 나와야 합니다. 화평케 하는 것이 의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 화평케 하는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의인입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의인은 다릅니다. 가치관이 다릅니다. 루키즘이라는 신조어가 나올 수밖에 없는 외적인 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위하여 다이어트를 하다가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가치가 미(美), 아름다움입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가 가치인 사람이 있습니다. 감투라는 감투는 다 뒤집어쓰려고 합니다. 무엇인가 되지 않으면 몸이 아픈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돈이 최고의 가치인 사람도 있습니다. 돈이라면 친구도 없고 형제도 버리는 사람입니다. 시대적으로 보면 현재에 만족하고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만 좋으면 다 좋다는 식입니다. 의롭다 함을 입은 사람들은 미래의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합니다. 미래를 위하여 오늘의 고생과 수고를 감수합니다. 여러분 주변에 잘 아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성공적인 사람을 보세요. 오늘의 어려움이 있다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위하여 오늘을 인내하고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 의인된 성도에게는 미래가 그 나라가 보여야 합니다. 그 나라 영광을 바라보면서 핍박과 고난을 극복해 나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삽니까? 인생은 길지 못합니다. 짧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마세요. 속습니다. 속으면 억울합니다. 분합니다. 원망스럽습니다. 이 세상에서 몇 백년 살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합니다.
세상에 소망을 둘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두어야 합니다. 그런 이들은 재물을 하늘나라에 쌓습니다. 교부 오리겐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땅에 재물을 취하여서 하늘의 통화로 바꾸는 환전과 같다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보화를 하늘에 쌓아 두라. 이것이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구인들 돈 아깝지 아니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님께 드리는 분들은 의로운 사람들인지라. 미래를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분들입니다. 오늘을 살아도 미래를 즐거워하면서 저축하고는 이들은 복되게 살아갑니다. 미래를 바라보고 즐거워하며 살아갑니다. 미래를 바라보는 게 비전이요, 꿈의 사람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템풀 대학교를 창설한 러셀 콘웰 박사는 미국에서 적어도 백만 불 이상 모은 사람들 4,043명을 조사하여 보았는데 놀랍게도 고등학교 이상 졸업한 사람들은 불과 63명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에 부족한 게 참으로 많은 사람들인데 어떻게 그렇게 놀랍게 성공하였는가 보았더니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더랍니다.

1) 삶을 출발할 때부터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뛰고 뛰었더랍니다.
2) 그들의 마음속에 열화와 같은 뜨거운 소원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3) 그들은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는 굳은 결의와 기도가 있었습니다.
4) 그들은 항상 비전과 미래 지향적이었답니다. 우리는 오늘 이곳만 바라보고 사는 게 아닙니다. 미래 그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소망이 있기에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바람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여건에서도 답답합니다. 소망이 있는 이들에게는 오늘은 이렇게 어렵고 힘들어도 즐겁기만 한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게 의인입니다.

3. 의인은 환란 중에서도 즐거워합니다.

이 세상은 환란의 골짜기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야기입니다. 염라대왕 앞에 세 사람이 불려 갔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명부에 그들의 이름이 없습니다. 아직 불려올 사람이 아닌데 저승사자가 착각한 것입니다. 염라대왕이 세 사람에게 사과하면서 내가 너희들을 세상에 다시 보내줄 것인데 사과하는 뜻에서 한 가지씩 소원을 말하면 들어 주겠노라. 각자 소원을 말하게나 첫째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돈이니까? 돈이나 실컷 쓰고 죽게 해주세요. 둘째 사람은 돈은 권세로부터 오는 것 나에게 높은 자리 하나 주세요. 권세를 주세요. 받았습니다. 셋째 사람에게 너는 저는 돈도 권세도 필요 없습니다. 눈물과 환란이 없고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단둘이 살게 해주세요. 그랬더니 염라대왕 왈 예끼 이놈 그렇게 좋은 곳이 있으면 내가 그곳에서 살겠다. 그러더랍니다. 이 세상은 어디라도 환란과 어려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의인 된 그리스도인들은 환난도 즐거워 하면서 삽니다.

사람이 즐거운 때가 따로 있지 어떻게 환란 중에서 즐거워한다는 말입니까? 본문 4절 끝 절에 “앎이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압니까?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부모의 마음을 알면 효도합니다. 부모가 매를 들어 때립니다. 그것을 알면 부모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고 느껴집니다. 부모가 매를 들었습니다. 매를 때리는 게 야속하기만 하고 왜 부모님이 매를 들었을까? 오해하고 섭섭하다가 이후에 알게 됩니다. 그때는 부모가 계시지 않습니다. 그때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환란의 의미를 모르기에 즐겁기는 그만두고 낙심하거나 시험에 듭니다. 환란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환란은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여러분 사람을 의지하고 믿고 있다가 실망한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사람처럼 간사하고 변덕부릴 수가 없습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합니까? 그래 인간은 믿을 존재는 아니구나. 사람은 내가 사랑할 존재일 뿐 의지의 대상은 아닙니다. 환란을 만나면 하늘나라에 소망을 갖게 됩니다. 현실에 빠져서 기도도 하지 않고 예배 생활도 등한시하다가 환란을 당하니까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의인입니까? 그렇다면 환란의 의미를 알고 그 가운데서도 즐거워하는 귀한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알아야 합니다. 환란이 왜 즐거움이 되는 겁니까?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환난 중에서 인내를 이룹니다. 우리의 약점 중에 하나는 인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내합시다.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말 한 마디 참지 못하여 큰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내하면 평화가 옵니다. 참아보세요.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살수는 없습니다. 참고 나면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때 잘 참았지 그럴 경우가 많습니다.

인내가 무엇입니까? ‘휴퍼모네’라는 헬라어인데 ‘어엿하게 대처한다.’ ‘넉넉하게 수용한다.’ 그리고 ‘사랑으로 대한다’는 말입니다. 문제가 생깁니다. 당황하지 않습니다. 좀더 생각해보자. 기다려보자. 이런 여유를 갖고 살아갑니다. 인내라함은 기다림을 의미합니다.

16세기와 17세기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일본은 여러 제국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때 세 사람의 장군이 있었습니다. 이 세 사람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뻐국새가 있는데 그 새가 울지 않으면 어떻게 하실 건지요?

첫째 장군은 울지 않는 뻐국새는 모가지를 잘라 버려라 고 말합니다.

두 번째 장군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울지 않는 새는 울도록 길을 들여서라도 울게 하겠다. 그럽니다. 그 장군이 한국을 두 번이나 침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켜 수많은 고통을 준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병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즉, 일본을 통일했으나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세 번째 장군은 울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그는 일본정국을 통일하고 300년 동안 막부정권을 세워서 일본을 번창하게 한 사람입니다. 이런 인내는 환난을 통하여 얻은 것입니다. 환란을 겪어본 사람은 인내하게 됩니다.

“인내” 그러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욥입니다. 성경은 욥의 인내를 배우라. 그럽니다. 그리고 본을 삼으라. 그리고 그의 결말을 보라. 말할 이유 없이 그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인내는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는 인내입니다. 인내는 환난에서 온 것입니다. 환란을 당할 때에 무슨 생각을 합니까? 이건 내 책임이다. 내가 억울하다. 분하다. 그럴 수가 있나? 이런 생각을 하면 환난에서 인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저명한 정신과 의사인 ‘스코트 팩(M. Scott Peck)’은 말하길 많은 정신병자들이 치유되는 일이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조사하여 보았는데 ‘내 불행은 나에게 있는 거다.’ 그것을 인정하게 될 때 병의 50%가 낫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런 환난은 나에게 유익한 것이다. 이 시련이야말로 나에게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할 때 인내하게 됩니다. 그 인내가 연단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강하게 만듭니다. 영국의 자연주의 학자 ‘알프레드 윌레스’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나방이 누에고치를 뚫고 나오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가 보기에 안타까웠습니다. 조그만 구멍으로 조그만 나방새끼가 누에고치를 뚫는 다는 건 너무나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는 웃으면서 내가 이 누에고치를 도와주어야 하겠다 라고 하면서 손으로 찢어주었습니다. 나방이 쉽게 빠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날개를 펴지도 못하고 죽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고통 중에 인내하는 것은 나를 연단 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환난에서도 즐거워합니다. 이것이 의인의 삶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고 성령으로 거룩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의인입니다. 그러므로 의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화목하며 살아야 합니다. 장래를 바라보고 즐거워하면서 능력 있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시련이 와도 즐겁게 여기고 소망 중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의인 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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