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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은 지금도 기도하신다 (요 17: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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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지금도 기도하신다 - 옥한흠 목사
요17:6-26

'내 것'이라는 애착심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바로 직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아주 유명한 기도입니다. 이 마지막 기도를 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제자들을 세상에 두고 떠나시면서 기도하신 예수님이라면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십니다. 대제사장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보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4절 말씀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시는 자"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어떤 기도를 하고 계실까요? 우리는 오늘 본문의 내용을 통해 이것을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제자들과 교회를 위해서 마지막으로 기도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기도하셨다면 그 내용은 틀림없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열 한 명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다음에(6-19절) 계속해서 장차 지상에 나타날 교회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20-26절). 그러나 이 두 가지 기도를 굳이 구별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가지 기도의 내용 모두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너무나 필요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도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기도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라 분명히 믿습니다.

이제 본문의 기도 내용을 좀더 자세하게 살펴봅시다. 우리가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 내용을 살필 때 제일 먼저 감동으로 다가오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내 것'이라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여러분이 집에 돌아 가셔서 17장 전체를 한번 잘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가리켜 '내 것'이라고 하시면서 '내 것'이 된 자에 대해 한 열 가지 정도의 특징을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우리가 원래 하나님의 것이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것인 자들을 예수님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6절). 예수님은 자기 것인 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의 입술에서 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지켰고,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줄 믿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처럼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고, 그들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 마지막까지 그들 중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주님은 단언하셨습니다. 이렇게 대충 보기만 해도 '내 것'이라고 불리는 자들의 특징을 열 가지 정도는 족히 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 한 제자를 비롯하여 오늘 우리 모두는 바로 이와 같이 열 가
지 놀라운 은혜로 특징지어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놓고 주저하지 않고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것'이라는 이 한 마디만으로도 우리는 예수님에게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만유의 주가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별 볼 일 없는 존재에 불과한 우리를 보고 '내 것'이라고 부르시며 놀라운 은혜와 영광을 안겨주시다니 이 얼마나 감동적인 일입니까?

우리를 '내 것'이라 부르실 정도로 소중한 존재로 보시기 때문에 예수님
께서는 남다른 애착심을 가지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애착심을 가지고 계시는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여기서 '내게 주신 자' 안에는 열 한 명의제자들은 물론이고, 우리 역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해서 내가 기도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애착심이 얼마나 강하겠습니까?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하시지 않고, 우리만을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합니다. 더 좁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나만을 위해서 기도하셨고, 지금도 기도하신다는 말입니다.

또 12절에서는 우리 가운데서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주님께서 우리를 보전하여 지키신다고 했습니다. 그 애착심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아무도 우리에게 손대지 못하도록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그와 같은 애착심을 가지고 자기 것인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말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으십니까? 오늘도 예수님은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참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만 나를 위해 매일 기도한다는 사람만큼 마음에 감동을 주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며칠 전에도 저는 참 대단한 분을 한 분 만났습니다. 그 분의 남편은 목사님인데, 6.25전쟁 때 참전했다가 그만 실명을 했습니다. 더욱이 그 몸의 건강도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거의 폐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소명을 받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분은 이 맹인 목사한테 시집 간 여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대단한 분입니까? 설상가상으로 시집을 가보니 남편은 몸에 어떤 결함이 있었는지 자녀를 가질 수도 없었습니다. 평생을 둘이서 살수밖에 없는 기구한 운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저를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요. 지금까지 수십 년 살았지만 한번도 본 일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날마다 자기 마음에 드는 어떤 여인상을 그리면서 날 보지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참 행복해요." 이렇게 말하는 그 모습이 마치 소녀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분은 남편과 함께 미국에 가서 한 13년 동안 사역을 하다가 미국 장로
교의 파송을 받아 10년 전에 일본에 선교사로 들어왔습니다. 맹인 목사님과 사모님이 선교를 한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역에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겠습니까? 더욱이 선교를 시작하자마자 유방암에 걸려서 한 쪽을 잘라내고, 또 전이가 되어 다른 쪽도 잘라내면서 치열한 영적 싸움을 싸워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분들은 사탄의 그러한 방해 공작에 절대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칠십이 가까워져 사역을 그만 두셨지만 지난 10년 동안 그 사역을 너무나 훌륭하게 잘 감당하셨습니다.
지난 연말에 사모님 되시는 분이 사역을 마무리하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
가는 길에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대뜸 저를 보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옥 목사님을 한번도 본 일이 없어요. 사진은 어디서 한번 본 일이 있지만요. 그러나 한 7,8년 전에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그 때 '설교 테이프를 듣고 이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해드려야겠다.'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 지금까지 7,8년 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고, 목사님을 위해 기도해 왔습니다. 오늘 이렇게 직접 만나니 참 좋네요."

저는 이런 말을 들으면 너무 감격스러워 숨이 끊어지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가끔 이와 비슷한 사람을 만날 것입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준다는 말만큼 감격스러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도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제가 설교하는 모습을 비디오로 보면서 기도해 주는 중보기도팀이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 준다는 말만 들어도 해도 코끝이 찡해질 정도로 감동을 받는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다. 아무도 손대지 마. 내가 기도한다.' 하는 애착심을 가지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신다는 데 우리가 어찌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감동하시면, 우리가 비록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모
습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지만, '나 같은 것을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가슴은 감동으로 가득 차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겁나는 것이 없어집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 나는 예수님의 것이다.' 하는 사실만 확실하게 믿고 이 세상을 산다면, 어떤 고통 앞에서는 우리는 이깁니다. 그만큼 놀라운 은혜란 말입니다. 왜 우리 모습이 초라해집니까? 왜 우리가 고독을 느낍니까? 왜 우리가 어떤 조그마한 일 앞에도 사시나무 떨 듯 떱니까?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나 같은 것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하고 계신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설혹 안다고 해도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만큼 확실하게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이 말씀을 받고 있습니까? 다시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을 가지고 받으면 여러분은 삽니다. 믿음을 가지고 않고 그저 적당히 들으면 이 말씀은 여러분에게 아무런 은혜도 안되고 힘도 안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셨던 주님, 세상을 떠나시면서 기도하셨던 그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계속 기도하고 계십니다. 더욱이 그 기도 대상에는 나 같이 별 볼일 없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늘 나와 함께 하는 주님의 이 기도 앞에 세상의 그 무엇이 감히 맞설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지면 다시금 힘차게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나 되게 하옵소서

그렇다면 주님은 우리를 위해 어떤 기도를 하고 계실까요?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중요한 내용은 무엇일까요?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에 제자들과 우리 모두를 위해서 하신 기도 내용을 보면 우리가 이 내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주님께서 네 가지 중요한 제목을 놓고 기도하신 것을 봅니다.

첫째는, "하나되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여기서 '우리'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삼위 하나님은 완전한 하나요, 한 분이십니다.
"완전한 하나가 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우리와 같이 저희들도 이 세
상에 있을 동안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하는 이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요? 

21-22절에 보면 주님은 이 기도를 또 한번 반복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하나가 되나 둘, 셋이 되나 그게 그거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이 너무나 중요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만 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면 우리는 복음으로 이 세상을 이길 수 없을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도 없습니다. 적 앞에서 분열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은 필연입니다. 주님께서 두 번이나 반복해서 우리의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신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됨은 무슨 획일적인 조직으로 교회를 하나로 묶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온 세계 교회를 한 조직 밑에서 움직이는 그런 단체로 만들라는 뜻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교회의 하나됨은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진리로 하나 되는 것에 대해 에베소서 4장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진리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 곧 지식과 믿음이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진리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하나 되기 위해서는 똑같은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됩니다. 그럴 때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되는 공통 분모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 모두를 묶는 끈입니다. 에베소서 4장 16절을 보십시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우리 모두는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들입니다. 몸을 하나로 세우기 위해서는 각 지체가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세워주어야 합니다. 사랑의 띠로 서로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의 몸 된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가 하나 되기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진리로 하나 되고, 사랑으로 하나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난폭해지기 쉽습니다. 반면 진리가 없는 사랑은 위선이 되기 쉽습니다. 진리로 자라는 심령은 사랑으로 넓어져야 합니다. 지식만 있으면 교만하게 되기 쉽고, 사랑만 있으면 어리석게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지식과 사랑이 똑 같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식으로 하나가 되는 동시에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읽어보십시오. 특별히 신약 성경이 지상 교회에 대해 말씀하시는 부분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고립된 한 사람의 교회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절대 발견할 수 없습니다. 고립된 한 사람의 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면 개인의 신앙이 절대 그 자체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교회 안에서 혼자 노는 사람 치고 건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보셨습니까? 교회 안에서 나 홀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 치고 예수님의 마음에 들만큼 그 인격이 성숙하고, 그 삶이 거룩한 사람을 보셨습니까?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저는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면 우리 신앙이 건강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격도 성숙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교회 안에서 혼자 노는 분들에게 분명히 경고합니다. 여러분 개인은 구원받을 지 모르지만 여러분은 주님 앞에서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라고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제 이야기를 듣고 마음에 가책 받고 돌이키는 분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다락방이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소 모임들이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봉사 단체들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하나 되는 것을 싫어해서 예배만 겨우 참석하고는 일 주일 동안 나 홀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우리가 하나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의도를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다락방에 들어가십시오. 교회가 크다고 변명하지 마십시오. 교회가 아무리 커도, 우리 교회처럼 2만 명, 3만 명이 모여도 하나 될 수 있는 터전은 얼마든지 있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교인이 백 명 모이는 작은 교회인데도 하나 될 수 없는 풍토를 가진 그런 교회도 있습니다. 사이즈를 가지고 핑계 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한 분도 빠짐이 없이 봉사 모임이나 성경 공부 모임, 서로가 교제하고 기도하기 위해 모이는 모임 중에 적어도 한 곳은 참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서로가 하나 되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여러분의 삶이 되살아납니다. 여러분의 얼굴 표정이 달라집니다. 여러분의 생각에 혁명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새로운 평화가 찾아옵니다. 지금까지 어렵고 고되다고 생각하던 많은 문제들을 쉽게 건너 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왜 여러분이 인생을 힘겨워 합니까? 왜 여러분의 신앙 생활이 맥이 없습니까? 하나 되게 하려는 주님의 노력과 그 기도에 여러분이 동참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와가 혼자 있다가 뱀의 유혹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당시는 인구라고 해 봐야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은 헤어지면 안 됩니다. 어디를 가도 꼭 같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날 어떻게 서로가 기분이 안 좋았는지, 아니면 서로가 잠시 혼자 있기로 합의하고 나누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와가 혼자 있다가 뱀한테 유혹을 받고 죄를 범한 결과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합니까?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신앙 생활 혼자 하면 당합니다. 아무리 기도 많이 한다해도 소용없습니다. 혼자 하면 당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은 우리가 하나 되기를 계속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악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둘째는, "악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15절을 보십시
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두고 가셨고, 우리도 세상에 두셨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 악한 세상에서 우리가 악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남겨 놓고 떠나시면서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날 세상에 남아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도 이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세상은 악한 곳입니다. 세상에는 악한 세력이 여전히 건재해 있으면서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공격합니다. 우리는 이 악한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은 우리를 표적으로 삼고 24시간 쉬지 않고 공격을 합니다. 우리를 유혹해서 죄에 빠지게 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신앙 생활 할 수 없도록 하려고 온갖 함정을 파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에 빠지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악의 유혹을 피하고, 악을 대적해서 막아야 합니다.

단순히 죄 짓도록 유혹 받는 것만을 악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에서 살면서 당할 수 있는 모든 환난도 악입니다. 북한의 폭정도 악입니다. 북한의 굶주림도 악입니다. 특별히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고 인권을 유린당하는 소수 그룹입니다. 이들은 굶는 것을 밥먹듯이 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악입니다. 수단은 예수 믿는 사람이 25 퍼센트나 되는, 기독교가 흥왕(興旺)했던 나라였습니다만 지금 10년이 넘도록 무시무시한 기근으로 그 나라 국민의 거의 절반이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렇게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것도 악입니다. 폭정 밑에서 시달리는 것도 악입니다. 인도네시아에 기독교와 회교간에 종교 분쟁이 일어났지 않습니까? 이것도 악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려고 하면 이와 같은 환난의 바람이 마구 불어옵니다. 이 모든 것이 전부 악이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악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이 모든 악을 다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들을 보전하사 악에서 지켜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똑같은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악에서 건져주시옵소서."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 건재한 것도 다 이 기도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이 기도가 없다면 오늘 우리가 어떻게 이 악한 세상에서 이만큼 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은 자신만 이 기도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보고도 이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6:13).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이는 절대 우리가 악한 세상의 가공한 공격을 이기고 살아 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악한 세상이 두렵습니까? 지금도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환난과 핍박 앞에서 여러분의 마음이 공허하고 염려와 근심에 쌓여 있습니까?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악에 빠지지 않도록 나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주님의 그 낭랑한 음성을 듣는 영의 귀가 활짝 열리기를 바랍니다. 때로 주무시고 계시는 것 같아도, 우리가 필요할 때 찾아오지도 아니하시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가 살려 달라고 소리칠 때 아주 멀리 계시는 것처럼 보여도, 주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이상, 이 악한 세상에서 우리를 삼킬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메리 앤 베이커라고 하는 믿음 좋은 여성이 있었습니다. 19세기에 살던 사람인데, 그의 집안에 이상하게 어떤 병이 들어와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똑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자기 남동생도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는 그 역시도 그 병에 감염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폐결핵 같은 병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래도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면서 살아 왔는데 집안이 이 모양이 되어버렸으니 그 마음이 오죽이 괴로웠겠습니까? 그래서 어느 날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떼를 썼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 가정을 돌보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고, 또 주님을 위해서 헌신한다고 헌신했는데 이게 무슨 꼴입니까? 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을 친 것입니다.
그 때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펴게 만드셨는데, 그가 읽은 곳
은 마태복음 8장이었습니다. 23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시는데 갑자기 폭풍이 불었습니다. 파도가 높게 치더니 나중에는 물이 배 안으로 마구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제자들은 물 퍼내랴, 노 저으랴 정신없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예수님은 고물에서 잠을 자고 계셨습니다. 너무 상황이 급박해 지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왜 주무시고 계십니까? 일어나십시오." 예수님은 일어나시자마자 제자들을 보고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하고 책망하시고는 바다를 향하여 "잔잔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비단결을 깔아 놓은 것처럼 잔잔해졌습니다.
베이커 여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에 큰 평안을 얻었다고 합니다.
'아, 그렇구나!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시는 것 같아도 주무시는 분이 아니구나! 그분이 한번 잔잔하라 하시면 그 어떤 세상의 악한 파도도 그 명령에 복종해서 잔잔해지는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자 그는 가슴이 뜨거워져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쓴 찬송시가 바로 419장 찬송입니다. 여러분이 가사를 기억하실 지 모르지만 참 은혜스러운 찬송입니다. 2절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구주여 떨리는 내 맘 저 풍랑과 같아서/ 늘 불안에 싸여서 사니 날 붙들어 주소서/ 세상의 풍파가 나를 삼키려 합니다/ 지금 죽게 된 날 돌아보사 곧 구원해 줍소서/ 큰바람과 물결아 잔잔해 잔잔해/ 사납게 뛰노는 파도나 저 흉악한 마귀나 아무 것도/ 주 편안히 잠들어 누신 배 뒤엎어 놀 능력이 없도다/ 주 예수 풍파를 꾸짖어 잔잔해 잔잔해/ 주 예수 풍파를 꾸짖어 잔잔하라." 지금도 나를 위해 "악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하시는 그 음성 앞에서는 우리의 모든 파도가 잔잔해 질 것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셋째는,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17절을 보십시
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거룩하기를 기도하고 계십니다.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거룩을 지키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존재들입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는 '아이고, 나는 어제도 죄 짓고, 오늘 아침에도 죄 지었는데 거룩하기는 뭐가 거룩하냐?'하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아직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소유요, 예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사람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안에는 성령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이 거룩을 지켜야 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악한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거룩을 잃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거룩을 지키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지킬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켜야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항상 그 말씀을 지킬 때 우리는 거룩할 수 있습니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시119:92). 그렇습니다. 환난의 바람이 불어오고 고난의 풍랑이 일어날 때 나 자신을 말씀으로 지키지 아니하면 우리는 거룩한 존재로 살아 남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라. 의의 흉배를 붙이라. 구원의 투구를 쓰라. 성령의 검을 손에 쥐고 거룩한 싸움을 싸우라."고 단호히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다른 세 친구와 함께 십대 때 바벨론에 볼모로 잡혀갔습니다. 바벨론 나라의 일종의 괴뢰를 만들기 위해서 특별 교육을 시키는 프로그램에 그들이 끌려간 것입니다. 가서 보니 왕이 제공하는 진수성찬을 매일 먹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음식들은 전부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고기나 우상 앞에 놓고 술을 뿌린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신앙 양심상 하나님의 율법을 배운 자로서 그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단을 했습니다. "우리는 못 먹겠습니다." 그렇다고 앉아 단식을 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맡고 있는 상관에게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못 먹습니다. 그 대신 우리에게 채소와 물만 주어 먹게 해 보십시오. 그래서 우리 얼굴이 다른 청소년들과 비교해서 나쁘면 우리가 고기를 먹겠습니다. 그러나 나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먹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결국 그들이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네 명의 황제가 바뀌는 역사의 변천 속에서도 유아독존으로 살아남아 바벨론의 모든 중요한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우리에게 자기의 거룩을 지키는 더 없이 좋은 모델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컴퓨터나 영화를 통해서 혹은 여러 가지 문화 매체를 통해서 음란하고 폭력성이 강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더러운 것들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접하게 됩니까? 저는 여러분이 '쉬리'라는 영화를 보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합니다. 물론 인기가 있어서 다들 보니까, 또 그 작품이 소문이 나니까 보는 것은 막을 수야 없지만 폭력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왜 우리 크리스천들이 그런 것을 즐겨야 하느냐 그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거룩을 지킵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우리
가 어떻게 우리의 거룩을 지켜야 되는지가 다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세상의 어떤 유혹이 찾아옵니까? 여러분의 거룩을 더럽히려고 하는 개와 돼지들이 주변에 우글거리고 있습니까? 내 힘만으로는 절대 나의 거룩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위해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 음성을 들으면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릴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내 영광에 참여하게 하옵소서

넷째는, 주님의 영광에 우리 모두가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입니
다. 24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께서 지금 누리고 계시는 그 영광은 도무지 우리가 상상 할 수도 없는 차원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을 따라서 산으로 올라갔다가 갑자기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바뀐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영광스러웠던지 그것을 보자마자 제자들은 요사이 말로 뿅 가버렸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보는 순간 얼마나 정신이 돌아 버렸는지요. "주여, 우리 내려가지 말고 여기서 삽시다. 제가 나무 가지로 텐트 몇 개 칠 테니까 여기서 삽시다." 세상에 이런 멍청한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텐트 하나 달랑 가지고 어떻게 살자는 것입니까? 침대가 있습니까? 화장실이 있습니까? 무슨 먹을 음식이 있길 합니까? 얼마나 그 영광이 대단했으면 살 수 없는 곳에서 살자고 했을까요?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를 완전히 황홀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누리고 계신 그 영광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사실 우리
에게 있어 가장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가장 최상의 행복은 아직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앞에 있습니다. 뒤에 지나간 것보다도 우리 앞에 있는 것은 굉장히 우리를 기분 좋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가 그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자기가 누리는 그 영광을 함께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저는 이 17장을 묵상하면서 '오늘도 주님께서 이 네 가지 기도를 가지고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는구나.'하고 생각할 때면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서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어머니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애착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새벽에 교회에 나오면 담임 목사를 위해서도 기도해야지요. 또 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해야지요. 그러나 그런 기도는 전부 서론입니다. 한 5분 안에 다 끝내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본론이 누구입니까? "주여, 우리 집의 철이를 아시지요? 이 아들..."하고 입을 열면 1 시간도 좋고, 2 시간도 좋은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도 그런 사람 중 하나입니다. 새벽에 나오시면 2 시간 앉아
기도하시는데 그 기도야 뻔하지요. 전부 자녀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60년 이상을 그렇게 기도해 왔으니 이제 그 병을 어떻게 고치겠습니까? 식탁에 앉을 때 식구들이 돌아가며 기도 하다가 가끔 어머니에게 기도를 시키지 않습니까? 그러면 음식을 놓고 감사하다는 기도를 하셔야 할텐데 식탁에 앉아서 눈을 감고는 큰아들부터 시작해서 줄줄이 엮어 나가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밥이랑 국이 모조리 식어버릴 것은 뻔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시간은 바쁠 때는 얼마나 신경질이 나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집의 막내는 할머니한테 제발 기도시키지 말라고 투덜댑니다.
그래서 한번은 어머니께 조용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머니, 식사 기도
할 때는 식사 기도만 하세요."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만 감으면 그 기도가 나오는데 어떻게 하냐?" "그래도 그것은 조심 하셔야지요." 그러나 그 다음에 또 한번 기도를 시켰더니 여전히 똑같았습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게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애착이 얼마나 강한지요. 눈만 감으면 자식 기도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어머니를 보면서 저는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이 생각납니다. '내 것'이라 그랬지 않습니까? 우리를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얼마나 집요하게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 배후
에 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기도가 뒤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가 있는 이상 세상에 우리를 당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절대로 낙망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을 비겁하게 살지 마십시오. 하늘에 계시는 우리 주님께서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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