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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 그 이후 / 히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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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믿음, 그 이후
본문 : 히브리서 12:1-2
 
  네덜란드의 화가 고흐는 목사 아들이었습니다. 화가가 되기 전 그는 벨기에의 한 조그만 탄광에서 말씀을 전하며 광부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어느 날 고흐의 눈에 노동자가 입고 있던 옷이 눈에 띄었습니다. 물건을 포장했던 천으로 만든 옷이었는데, 등 쪽에는 본래 쓰여 있던 문구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깨지기 쉬운 물건이니 취급에 주의할 것’ 그 순간 고흐는 깨달았습니다. ‘그렇다. 인간이란 정말 깨어지기 쉬운 존재구나. 나는 전도자라고 하지만 얼마나 자주 깨어지는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나를 지켜야 한다.’ 그의 일기에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옆에 앉은 분들을 한번 보십시오. ‘깨지기 쉬운 물건들’임을 서로 확인해 보시고 조심스럽게 만져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들은 얼마나 깨지기 쉬운 존재입니까?  말 한마디에 우리 평안은 깨집니다. 관계도 부서집니다. 주님을 향했던 믿음도 조그마한 일 앞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깨어지고 부서지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 주 이름으로 구원해 날 구원해 받으소서’하는 찬송가의 가사와 같은 심정으로 주님 앞에 나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연약한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동안 몇 주간에 걸쳐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을 보았습니다. 이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1장을 통해 믿음의 영웅들을 소개하면서 단순히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았다는 사실 자체를 증거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떻게 그들처럼 승리하며 살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데에 더 큰 초점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믿음의 영웅들이 처한 자기 시대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만, 그것을 뚫고 승리하였던 믿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이 아닐까요? 그 승리의 길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설명합니다.

첫째,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2절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합니다. 그냥 사는 것도 힘들지만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너무나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길에서 실패합니다. 넘어질 때도 많습니다. 낙심할 때도 많습니다. 이 믿음의 길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돈도 아니요, 사람도 아니요, 명예도 권세도 아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여러 가지로 비유하고 있지만, 오늘 본문은 마라톤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마라톤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달려야 합니다. 한순간만 잘해서 반짝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목표지점이 있어서 그 곳에 이르기까지는 경주를 쉴 수가 없습니다. 중단 할 수가 없습니다. 멈추어 설 수가 없습니다.  경주 과정에는 가파른 언덕길도 나오고 때로는 멀리 볼 수 없는 굽어진 길도 나올 수 있습니다. 나와 함께 출발한 사람이 여기저기 탈락하여 쓰러지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와 함께 출발했던 사람이 나보다 앞서 가게 되면 열등감에 휩싸여 의욕을 잃기도 합니다. 경주의 마지막에는 상이 있습니다. 또 인생의 경주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규칙을 어기면 어김없이 탈락하게 됩니다. 규칙 안에서 원하든 원하지 않던 통과해야만 되는 길이 있고 거쳐야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길을 잃어버리면 목표지점까지 갈 수도 없지만, 중간에 포기하면 지금까지 달려 온 모든 것이 허사가 됩니다. 장거리를 뛰는 사람들은 체력의 안배를 통해서 끝까지 잘 뛰는 것이 중요합니다. 뛰는 동안 내내 자기 자신과 싸워야만 하는 고독의 질주, 이것이 마라톤입니다. 우리 믿음의 인생길이 바로 이와 같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그냥 걷기도 힘든데 믿음을 가지고 걷기란 정말 쉬운 일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권면합니다. ‘승리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이 말을 원어로 해석한다면, ‘믿음의 창시자이며 그 믿음을 이끄시고 완성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의 경주를 본인이 직접 시작하셨습니다. 본인이 그 경주를 다 뛰셨습니다. 본인이 완수하고 완성하셨습니다. 승리하셨고 이 모든 일을 마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나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십자가에서 다 사하여 주심으로 믿음의 경주로 초청해 주셨습니다.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오늘도 걸어갑니다. 이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마칠 것을 확신하며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무엇을 바라봅니까? 나 자신을 바라보지 않습니까? 우리의 환경을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낙심과 실망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규칙을 잘 지키셨습니다. 그 규칙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앞에 주어진 십자가를 끝까지 짊어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소망이 됩니다. 우리의 구원이 됩니다. 기쁨이 되고 오늘 내가 믿음의 길을 걸어야 되는 이유가 됩니다.

지치고 힘들고 믿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에게 오늘 3절 말씀은 권면합니다. 생각해 보라고. ‘생각해 보라’는 이 의미는 무엇입니까? ‘아날로기조마히’ 라는 단어는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셨던 믿음의 여정과 오늘 나의  여정을 비교해 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아버지 없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인생이 아무리 비천하다 할지라도 마구간에서 태어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구간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부모에게서 자랐습니다. 어릴 때는 생명의 위협을 받아 도망 다녀야만 했습니다. 고향에 살지도 못했습니다.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젊은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형제자매를 부양해야만 했습니다. 가난하고 비천한 한 이름 없는 도시에서 태어나 같은 지역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집도 없었을 뿐더러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위에는 언제나 고통당하고 귀신들린 사람들, 아픈 사람들로 가득 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 취급 받기도 했습니다. 정신 이상자로 몰리기도 했습니다. 가족들로부터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 결국 배신을 당했고 가장 고독한 순간, 십자가에서 고통과 아픔을 겪었습니다. 결국 그는 죽임 당했습니다.

믿음으로 살기가 너무나 힘들고 때로는 지치고 어려워 포기하고 싶을 때, 이런 주님의 인생여정과 비교해 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다하신 주님, 인생의 고비마다 우리보다 앞서 가셔서 아픔과 고통을 체험하신 그 주님과 오늘 나를 비교해 본다면 이 경기를 포기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다시금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 믿음은 단순히 믿음으로 사는 것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베드로 후서 1장 5절에서 7절까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앞서 경주하신 주님의 모습, 그 삶의 모습을 우리도 본받기 원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믿음의 경주 중에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실패자의 모습, 깨어진 자의 모습으로 이 자리에 있지는 않습니까? 비틀거리며 오늘의 경주를 하고 계신 분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 눈을 다시 떠야 합니다. 나를 보지 말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보지 말기를 바랍니다. 환경을 보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온전케 하시는 그 주님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둘째로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경주에 장애가 되는 것을 벗어 버려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본문 1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경주하는 인생여정에서 경기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요? 환경입니까? 우리의 실패입니까? 고난입니까? 질병입니까?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흔히들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고난이, 이 어려움이 믿음으로 살기에는 너무나 어렵게 만든단 말이야. 이것만 아니면 믿음의 길을 잘 걸어갈 수 있을 텐데.’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고난은 믿음의 여정을 조금 힘들게 할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더 붙들게 만듭니다. 고난을 통해서 내가 가진 믿음을 다시 돌아봅니다. 고난으로 흐트러졌던 신앙생활을 다시 묶습니다. 내 삶 속에 정리해야 될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면서 내어버리는 용기를 갖게 만듭니다. 순종하지 못했던 내 자신을 주님과의 깊은 교제로 돌아가게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바라보게 만들면서 믿음의 경주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고난입니다. 늘 태양만 비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땅은 곧 사막으로 변할 것입니다. 인생의 고난과 어려움은 우리로 자라게 해 줍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경주에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고난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방해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거운 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과도하게 무거운 것이나 거대한 짐을 말합니다. 운동선수는 가능한 한 무게를 줄이기 위해 러닝과 팬티까지도 가볍게 만듭니다. 짐을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는 죄가 되지 않습니다만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하나님과 사귀고, 하나님 음성을 듣고, 말씀대로 순종하고 그리고 찬양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우리 육신은 즐거워할지도 모르지만- 즉, 믿음 생활 하는 데에 무거운 짐이 되어 이로 인해 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때로는 휴식과 오락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필요 이상의 시간과 정력을 들여서 휴식과 오락에 몰두한다면 육신을 즐겁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있어서는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것 보다 물질과 세상을 더 추구하는 것도 신앙생활을 어렵게 만듭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방해하는 영화가 있습니까? 텔레비전을 좋아합니까? 여러분의 취미생활이나 운동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을 정도로, 주일 예배를 지킬 수 없을 정도로 하고 있다면 믿음의 경주에 있어서 무거운 짐입니다. 무거워 달려갈 수 없습니다. 육신의 길은 잘 걸어가겠죠. 그러나 영적으로는 가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 또 ‘얽매이기 쉬운 죄’라고 말씀합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란 무엇입니까? 경주자를 따라다닙니다. 그의 마음을 분산시킵니다. 에워싸고 넘어지게 만드는 죄를 말합니다. 죄는 경주자가 달릴 때 펄럭거리는 옷을 상징합니다. 펄럭거리는 옷을 입고 뛰다가 옷이 몸에 휘감겨 넘어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죄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즐거움이 없다면 죄 지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 빠져들기 시작하면 우리를 얽어맵니다. 자유 없는 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한번 걸리면 우리를 절대 놓지 않습니다. 끊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죄의 수학 공식이 있습니다. 더하기, 죄는 여러분의 문제를 더합니다. 죄 된 방법을 쓰면 쓸수록 더 얽히고 복잡하게 얽힙니다. 빼기, 죄는 여러분의 정력을 빼앗습니다. 죄가 깊어질수록 의욕은 빠지고 무력해집니다. 곱하기, 죄는 여러분에게 아픔을 곱합니다. 죄의 생활이 마취제가 될 때가 있지만 깬 뒤의 아픔은 이전보다 더합니다. 나누기, 죄는 이웃을 나눕니다. 죄는 가족을 쪼갭니다. 죄는 친구를 잃게 합니다. 결국 여러분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을 것입니다. 죄는 무섭습니다.

양을 치는 목자들 얘기를 들어보면 양이 잘 뒤집힌다고 합니다. 양이 뒤집어 지면 사지가 하늘로 향하면서 짧게는 네 시간 많게는 하루도 채 안되어 질식사 한다고 합니다.  선한 목자에게 뒤집힌 양을 바로 세워주는 일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양이 왜 잘 넘어지는가를 조사해봤더니 어딘가에 기대고 싶은 양이 약간 웅덩이가 파진 쪽에 기대다가 벌렁 넘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언제 잘못되는지 아십니까? 모든 것이 평탄합니다. 잘 되어 갑니다. 조금 편하게 믿어보려고 하다가 신앙의 길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야, 기도할 것도 없구나. 기도 안 해도 모든 것이 다 잘 되는구나. 특별히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고 헌신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아도 잘 되는구나.’ 하면서 하나님과 교제를 점점 멀리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평안한 것 같지만 신앙적으로는 넘어져서 감각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더 이상 필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말씀 보는 것이 즐겁지 않고 귀찮습니다. 그렇게 점점 신앙의 길에서 멀어지고 결국 믿음의 경주에서 탈락하게 됩니다.

또 양이 어떨 때 뒤집어지는가 하고 보니 양의 털에 배설물이 너무 많이 붙어서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는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뒤집어지는 것입니다. 목자가 와서 양의 털을 깎아주면 그제야 가볍게 자기 갈 길을 걸어간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너무 많은 고통과 어려움은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없게 합니다. 우리 마음이 죄로 얽매여 무거워진다면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사람은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버려야만 됩니다.

요즘 한 통신 판매업자가 이민 상품을 내놓았는데 불티나게 팔렸다고 합니다. 결과가 너무 좋아서 또 모집했는데 이 또한 조기에 마감되었다고 합니다. 기회만 있으면 한국을 떠나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보니 이민 와서 성공하는 사람이 있고 실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성공하는가 하면 세 가지를 버리는 사람들입니다. 먼저는 체면을 버려야 합니다. 한국 문화는 체면 문화이지 않습니까? 제 낯을 봐서 조금 봐 주십시오, 면목 없습니다, 볼 낯이 없습니다, 등등. 체면 문화로는 미국생활에 적응 못합니다. 그곳은 실용주의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버려야 하는 것은 해묵은 자기 명함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럽디다.  “목사님, 미국에 와서 자기전공을 찾아 먹는 사람은 목사님밖에 없더군요.” 제가 있던 교회의 지휘자님도 음악 공부를 많이 하셨지만 세탁소를 하고 계셨습니다. 한 때 무엇을 했다는 해묵은 명함 버리지 않으면 힘듭니다. 100% 실패하는 분이 어떤 분인지 아십니까?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역임하셨던 분들, 적응 잘 못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버려야 할 것이 있는데, 성질입니다. 미국은 시스템이 다릅니다.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답답합니다. 성질이 자꾸 나게 되지요. 성질내다 보면 적응 잘 못합니다.

이렇듯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이민 가서 적응하는데도 버려야 할 것이 있는데 오늘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믿음의 경주를 걸어가기 위해서 구습을 버리지 않고 어떻게 경주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좋아하고 즐기던 모든 것을 버리고 경주자로서 바르게 서기를 원한다면 버려야 될 것을 분명하게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무거운 죄의 짐은 어떻게 할까요? 죄의 짐은 회개하셔야 합니다. 회개는 믿음의 경주를 하다가 죄에 얽매여서 더 이상 경주할 수 없게 된 사람들에게 다시금 경주할 수 있도록 열어 놓으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회개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용서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라(요일1:9)고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에 좋지 않은 습관과 사고방식 그리고 생각을 버리십시오. 무거운 죄책감을 버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믿음의 경주자로 승리할 수가 없게 됩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셋째, 승리하는 자에게 주어질 상급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승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을 바라보아야만 됩니다. 왜냐하면 이 경주는 너무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결승점에 도달할 때까지 인내함이 없이는 완주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앞에 주어진 그 소망, 우리에게 주어진 그 상급을 바라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힘들고 지쳐 중단할지도 모릅니다.

본문 2절 말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말씀합니다. 인내란 ‘휘포모네’로 참을성, 일관됨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내가 걸어가는 걸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입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무엇이 있어야 됩니까?
지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인지,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한지를 알지 못하면 인내를 못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그 고난과 고초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끝까지 참으신 이유는 바로 고난과 고초를 통해서 죄인들이 놓임 받고 자유하며 참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있을 때 인내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소망 없이는 인내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너머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어떤 즐거움입니까? 어떤 상급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장차 그를 부활시키셔서 보좌 우편에 앉히실 상급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하는 사람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함께 나아갈 것입니다. 그 소망이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 이름 앞에 모든 족속으로 무릎 꿇게 만드실 놀라운 소망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소망이 없으면 믿음의 길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오늘 걸어가는 이 믿음의 걸음에는 분명 상급이 있습니다. 구원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그 삶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우리를 위해서 준비된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상급을 바라보셔야 됩니다. 계시록 3장 10절에서 11절 보면,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응원부대가 있어야 인내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경주가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또 하나의 장면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두운 시대를 살았지만 믿음으로 승리하며 결국은 승리의 월계관을 썼던 믿음의 영웅들, 그들이 이미 경주장을 떠나 스탠드에 서서 오늘 믿음의 경주를 하는 우리들을 격려하며 응원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에는 그동안 이미 살폈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셉은 뭐라고 얘기할까요? ‘저요 저는요 태어나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우리 엄마가 둘째 동생을 낳다가 죽었어요. 배다른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결국 팔렸어요. 아무도 없는 버림받은 몸이었어요. 애굽에서도 열심히 살려고 했지만 미움을 받아서 나는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살아날 길이 있었지만, 잊혀진 존재가 되었고 그대로 감옥에서 썩는 줄 알았어요. 그러나 저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결국 나를 세우셔서 애굽의 총리로 삼으셨어요. 보세요. 나는 인생의 출발이 험난하고 어려웠어요. 내 인생의 여정 가운데 가족들에 의해 팔려가는 비참함이 있었어요.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수많은 인생의 유혹이 왔어요. 그러나 그것에도 나는 넘어가지 않았어요. 나는 믿음을 붙들었어요. 어렵고 힘든 가정에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힘들게 자랐으면서도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했다면, 여러분도 할 수 있단 말이예요. 용기를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저하지 마세요.’ 우리에게 외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라합이 뭐라고 할까요? ‘여러분 저를 아시죠? 저는 창녀였어요. 이 남자, 저 남자 품에서 내 인생의 쾌락을 채우며 생활했어요. 희망이 없던 사람이었어요. 어느 날 내게 다가왔던 그 믿음의 경주 나는 그것을 붙들었어요. 낙심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여자라고 나를 멸시했어요. 차가운 눈초리, 나는 포기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믿음의 경주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어요. 사람보지 않았어요. 환경보지 않았어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최선을 다해서 경주했을 때에 유다지파의 왕족으로 메시야의 조상이 될 수 있었지 않아요? 기생인 내가 창녀인 내가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했다면 여러분도 할 수 있어요. 낙심하지 마세요. 일어서세요.’

다윗은 뭐라고 외칠까요? ‘여러분 나는 목동이었어요. 손님이 와도 형제들이 나를 부르지 않을 정도로 나는 가정에서도 하찮게 여김 받았어요. 나라에 큰 공을 세웠지만 그것이 화근이 되어 사랑하는 아내도 빼앗겨 버렸어요. 10년간 집에 있지도 못하고 나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동굴 속에 숨어 다니며 힘들게 살았어요.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힘들게 살았어요. 수없는 전쟁 속에 겪은 위기와 어려움, 조여 오는 포위망 속에 움츠러들었던 내 영혼, 하루도 수십 번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런 순간. 평안도 있었지만, 나는 사랑하는 장군 우리야를 죽이고 말았어요. 아내 밧세바를 빼앗아서 내 아내로 삼았어요. 나는 끝난 인생이었어요. 완전히 끊어졌어요. 죄로 말미암아 회복될 길이 없었어요. 그러나 나는 회개했지요. 침상이 젖도록 회개했지요. 하나님께서 다시 나를 회복시켜 주셨지요. 그래요 완전히 끊어졌던 내가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면 여러분이 지금 좌절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녜요. 여러분의 죄는 아무것도 아녜요.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나를 보세요. 나를 보세요.’

여러분 응원군들이 우리를 향해서 외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은 마라톤입니다. 잠시 잠깐 있다가 끝날 것이 아닙니다. 그냥 살기도 힘든데 믿음으로 사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없습니다. 살아가는 인생 여정 속에서 믿음의 걸음 중도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주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믿음의 경주에 우리를 초청해 주신 주님, 주님은 오늘 나와 함께 동행해주십니다. 나로 하여금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제시해 주십니다. 용기를 주십니다. 무거운 짐을 대신 져주십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를 끊어 주십니다. 그리고 응원군들을 통해서 승리할 수 있도록 권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고든 맥도날드 목사님의 한 이야기를 전해드리며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미국 애팔래치아 산맥을 여행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여행하는 도중에 나무로 작은 개들을 멋지게 조각하는 장인을 만났습니다. 장인을 보니 큰 통나무를 가져다가 칼로 조각을 하는데 멋진 개가 조각되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아! 선생님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개를 조각해 낼 수가 있습니까?” 장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개가 아닌 부분은 다 깎아주면 되니까요.”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도 나를 깎고 계십니다. 내가 아닌 부분을 깎아내고 계신 것입니다.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부분을 깎으실 때 아플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고난일 수도 있습니다. 내게 있어서는 안 될 부분을 하나님 앞에 영광스런 모습으로 다듬어지기 위해 오늘도 잘라내실 때 아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경주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믿음의 경주에 우리를 초청해 주셨습니다. 경주의 의미를 압니다. 세상에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사람과는 분명히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낙담하지 마십시오. 혹시 실패자로 이 자리에 서계신 분이 있습니까? 무거운 짐에 눌려있는 분이 있습니까? 죄에 묶여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까? 주님께 맡기십시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오늘도 우리보다 앞서 기생, 창녀 그리고 부모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 등이 믿음으로 승리했다면 우리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다시금 믿음의 경주 그 출발선상에 다시금 서야 합니다. 주님께서 붙들어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다시 일어서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인들이 이로서 증거를 얻었느니라’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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