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다윗과 바르실래! / 삼하 19:31-39

  • 잡초 잡초
  • 2472
  • 0

첨부 1



다윗과 바르실래! / 사무엘하 19:31-39


오늘 우리는 큰 부자 한 사람을 만나려고 합니다. 그의 이름은‘바르실래’입니다. 사무엘하 19장 32절에 보니 그의 나이 팔십 세요 또한 거부였다고 합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그를 가리켜 굉장한 부자였다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얼마나 큰 부자였기에 성경이 거두절미하고 그를 거부라 부르는 것일까? 역시 32절을 보니 저가 왕을 공궤할 수 있을 만큼 거부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공궤(供饋)는, 이바지 할 공자에 먹일 궤 자, 곧 먹이는 일에 이바지한다는 뜻의 단어이지요, 그러고 보니 지금 거부 바르실래가 어떤 왕과 그 권속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는 뜻이군요. 그만큼 그는 나이 팔십이 되도록 굉장한 부자였다는 겁니다.

작은 부자는 자기 노력으로 될 수 있지만, 큰 부자는 하늘이 낸다 했지요. 그러므로 성경이 인정하는 거부 바르실래는 필경 하늘이 낸 큰 부자임에 틀림없다는 뜻인데요, 그렇다면 그는 과연 어떻게 거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 어떤 인격을 갖추어야 하늘이 내는 거부가 될 수 있는 것일까요? 어떤 신앙을 가져야 하늘이 내는 거부가 될 수 있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들과, “나도 성서가 인정하는 거부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가슴에 안고, 오늘 우리는 바르실래를 다시 만나려고 합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하신 여러분! 부디 오늘의 말씀을 통해 믿음 안에서 모두 거부가 되는 길을 찾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이 귀한 축복의 말씀, 마음에 새겨, 이번 한가위에 오랜 만에 만나는 친척들에게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무엘하 19장 31절에 보니 바르실래가 왕을 위해 로글림에서 내려와 요단까지 동행했다고 하는군요. 여기 등장하는 왕은 저 유명한 다윗 왕입니다. 그러고 보니 천하제일의 왕과 하늘이 낸 부자가 만나는 장면이군요. 여기서 먼저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확인하고 가렵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나의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해서 만남은 운명입니다. 해서 좋은 만남은 하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기억할 것은 그 만남을 내가 선택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 안에서 만남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와 자유를 주셨습니다. 물론 모든 만남이 선택의 결과인 것은 아니지만, 철이 든 이후 내 인생을 살아가며 대부분의 만남은 내가 선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선택권은 나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선택에 대한 책임도 자기 스스로 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랬습니다. 큰 부자 바르실래는 다윗 왕을 선택했던 인물입니다. 그 선택의 결과, 그는 나이 팔십이 되도록 평생 끝까지 거부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을 선택한 까닭입니다.

여기서 다윗 왕을 선택한 일이 무에 그리 복 받을 만한 일인가? 하는 반문이 가능합니다. 왕 중의 왕 다윗의 편에 서는 일은 오히려 정치적 계산이 빨라 출세하기 위해 줄을 잘 선 것이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선택한 것은 아니라는 반론입니다. 일견 그럴 듯한데,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 왕과의 만남을 선택한 것이 특별한 복을 받을 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르실래를 만났을 때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쿠데타로 예루살렘에서 도망쳐 나온 상태였습니다. 얼마나 급했던지 맨 발로 줄행랑을 친 다윗, 천하의 다윗이 아들의 칼에 쫓겨 지금 한 걸음에 요단강 건너 마하나임까지 달려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 마하나임 땅에서 그 지방의 큰 부자 바르실래를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르실래는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쿠데타에 쫓겨 온 다윗 왕을 섬길 것이냐, 쿠데타에 성공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한 새 왕 압살롬을 따를 것이냐, 중차대한 선택의 기로에 섰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로에서 바르실래는 다윗 왕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쫓겨 왔지만 여전히 하늘이 기름 부어 세운 왕은 다윗이요, 아무리 쿠데타에 성공지만 압살롬은 왕이 아니라 반역자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여 바르실래는 지극정성으로 다윗 왕을 공궤했던 것입니다.

천만다행으로 얼마 후 쿠데타 군이 진압되었습니다. 드디어 피신해 있던 다윗 왕이 다시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이 장면,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장면에 대한 기록입니다. 자, 그러면, 이런 배경을 가진 오늘의 말씀으로 더 깊이 들어가 성경이 인정한 거부 바르실래의 신앙과 인격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 동광 가족들 모두 성경이 인정하는 믿음의 거부들 다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 안에서 거부되시기를 바랍니다.>>

1. 바르실래는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습니다.

19:31 / (읽기) / 아하, 지금 바르실래가 다윗 왕을 배웅하려고 요단강을 함께 건너려고 하는군요. 그냥 자기 집에서 인사해도 이해할 수 있는 처지인데, 아쉬우면 동구 밖까지 배웅하면 될 일인데, 지금 큰 부자 바르실래가 팔십 노구의 몸을 이끌고 로글림에서 요단강까지 내려와 왕을 환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부둣가에 서서 환송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강을 건너, 최대한 예를 갖추어 왕을 보내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랬습니다. 바르실래는 기본이 갖추어진 인물이었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기본은 무엇입니까? 우리 소실 적에 즐겨 외우던 문장이 하나 있지요? 사람 인(人)자 여섯 개를 써 놓고 그 뜻을 풀이하던 내용인데요, 기억하시죠? “인간이 인간이면 다 인간이냐? 인간이 인간다워야 인간이지!”그렇습니다. 인간이 인간다워야 인간인데, 그 기본 중 기본이 예의를 갖추는 일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시지요. 지금 이 장면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쿠데타 군에 쫓겨 맨발로 도망쳐 온 초라한 왕, 그것도 아들에게 왕권을 빼앗긴 처절한 패배자, 그런 사람을 끝까지 왕이라 인정하며 지극 정성으로 공궤하더니, 이제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를 갖춰 환송해 드리는 모습,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기본이 갖추어진 자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라면, 아니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기본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기본 중의 기본이 바로 예의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예를 갖출 줄 아는 자를 기뻐하시며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뒤집으면 기본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에겐 큰일을 맡기지 않으시고 큰 복도 주시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절대로 인사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잘 되는 범은 없습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여기서 한 말씀만 드립니다. 먼저 내가, 나의 아버지 하나님을 향해 예를 갖추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예를 갖출 줄 아는 사람이 사람을 향해서도 예를 갖출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자를 복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가을, 주 안에서, 예의를 잘 갖춤으로 늙도록 부자 되시고, 하늘 생명록에 이름이 기록되는 큰 복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를 갖추어 부자 되시기 바랍니다.>>

2. 바르실래는 공궤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19:32 / (읽기) / 아하, 여기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군요. 바르실래가 마하나임에서 다윗 왕을 공궤했다고 말입니다. 공궤(供饋)는 먹이는 일에 이바지 하는 일이라 했습니다. 쉽게 풀면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을 먹여 살리는 일입니다. 그런데요, 누군가를 거두어 먹이는 일은 무조건 돈만 많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점에서 바르실래의 훌륭함이 드러납니다. 정말이지요, 기본이 안 된 거부일수록 공궤하는 일을 거부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많이 가졌으나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큰 부자이지만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도록 일해서 번 돈이니까 내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해서 땅의 작은 부자들은 주님을 공궤하고 이웃을 공궤하는 일에 참으로 인색합니다.

그런데요 바르실래의 공궤가 더 돋보이는 것은 나에게 불이익이 돌아올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다윗 왕을 먹여 살렸기 때문입니다. 그랬습니다. 다윗 왕의 일행을 거두어 저들을 공궤한 일은 목숨을 건 행동이었습니다. 자칫하면 다윗과 함께 숙청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여 바르실래의 공궤는 조건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되받을 것을 미리 계산하고 베푼 사랑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자기 눈앞에 먹여 살려야 할 대상이 나타났고, 내 수중에 먹여 살릴 수 있는 넉넉한 곡식이 있으니, 자연스레 그를 먹여 살린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귀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을 닮은 사랑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베풀 줄 아는 마음에 하늘의 복이 임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손을 펴서 하나님 주신 것을 잘 나눌 줄 아는 이에게 하늘은 더 많은 것으로 채워 주신다는 이 귀한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무 움켜쥐진 마시기 바랍니다. 자주 손을 펴고, 지갑을 열어 공궤하는 일에 봉헌하시기 바랍니다. 바르실래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멋진 부자, 다윗과 함께 그 이름이 만세에 전해지며,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렸던 하늘이 낸 부자였습니다. 더 많은 것을 맡기고 싶은 믿음직한 부자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부자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 가을, 부자 되시기 바랍니다. 단, 성경이 인정하는 부자, 하늘이 내신 존귀한 부자, 나이 많아 늙도록 기복 없는 진짜 부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두 번째 과제는 공궤하는 일입니다. 특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 끼니를 이어가는 일이 막막한 인생들을 공궤해야 합니다. 이 가을, 우리가 먹여 살려야 하는 이웃을 찾아 나서기를 원합니다. 위원회는 위원회대로, 선교회는 선교회대로, 교육부서는 교육부서대로, 구역은 구역대로, 우리 교회 모든 단위 마다 정성으로 차린 밥상을 들고 먹고 사는 문제로 인생을 저당 잡힌 이웃들을 찾아가 공궤의 사랑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늘이 내는 진짜 거부가 되는 길입니다.

<<잘 베풀어 큰 부자 되시기 바랍니다.>>

3. 바르실래는 자기 자리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19:33 / (읽기) / 지금 다윗 왕이 바르실래를 향해 예루살렘으로 같이 가자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바르실래는 다윗에게 큰 은혜를 베푼 사람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바르실래가 아니었으면 다윗의 오늘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인생이 실패로 끝나지 않고, 마침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가장 존귀한 삶으로 완성될 수 있게 해준 일등공신이 바로 바르실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만남은 기적입니다. 그래서 만남은 축복입니다. 만남은 쌍방적인 것, 나만 덕을 보거나, 나만 손해 보는 만남은 없습니다. 덕을 보아도 같이 보고, 손해을 입어도 같이 입는 만남, 그래서 내 옆의 당신이 소중한 것입니다. 당신이 내 생명의 은인이요, 바로 당신이 나를 거부로 만들어 주는 천사이기 때문입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만수무강하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바르실래는 못이기는 척, 왕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기만 하면 됩니다. 지금 왕이 무어라 말합니까? “예루살렘에서는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당신에게 그동안 신세졌던 것, 이제 예루살렘 왕궁에 가서 다 갚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어서 나와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가장 확실한 노후 대책입니다.

그런데 바르실래의 대답이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갑니다. 왜? 그는 자기 자리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었고, 또 그 자리를 끝까지 지켰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대답을 직접 들어봅니다. / 19:34-36 / (읽기)

지금 바르실래가 무어라 대답합니까? “왕이시여! 이 몸이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이 나이에 예루살렘으로 가겠습니까? 내 나이 이제 팔십인데, 좋고 흉한 일이 뭐 그리 많겠습니까? 좋은 일이라 한들 얼마나 좋고, 흉한 일이라 한들 또 얼마나 흉하겠습니까? 이 나이에 진수성찬은 또 무슨 소용이 있으며, 젊은 것들의 노래 소리는 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인생을 꿰뚫어 보는 거부의 예리한 통찰력이 번뜩이는 장면입니다. 역시 거부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닌 듯 합니다.

그런데요. 그 다음에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들어보니, 그가 거절한 진짜 이유가 달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짜 이유는 무엇입니까? 35절의 맨 마지막 문장인데요, 한 마디로 나의 주 나의 왕께 누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이 늙은 것은 왕께 누가 될 뿐이니 괘념치 마시고 어서 왕의 길을 가시라는 겁니다. 포상을 바라고 왕을 공궤한 것 아니요, 그저 왕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뿐이니, 사랑을 사랑으로만 받아 달라는 겁니다. 참, 여기까지 환송을 나온 것은 보상을 바라고 온 것이 아니라, 나의 왕이 가시는 그 마지막 모습을 가슴에 담고 싶어 온 것이니, 소인의 인사 받으시고 어서 길을 떠나시라는 겁니다.

정말 속내 깊은 사랑입니다. 참으로 넉넉한 사랑입니다. 참으로 고귀한 사랑입니다. 정말 그 속을 들여다볼수록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자기의 자리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 등장할 때와 퇴장할 때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 손을 펼 때와 손을 접을 때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입니다.

읽을수록 감동으로 다가오는 대목은 바로 35절의 맨 마지막 문장입니다.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오히려 누를 끼치리이까?”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한 일은 그저 당신의 종으로서 주인께 해야 할 마땅한 도리를 한 것뿐이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제 이 몸은 왕께 누가 될 뿐이니 이쯤에서 퇴장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입니다. 정말 눈물겹도록 고마운 사랑 아닙니까? 한 평생 살면서 이런 사람 하나쯤 친구 삼는다면 참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거부로 세워주셨던 것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나의 자리를 주셨습니다. 먼저 그 자리를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내 자리를 잘 지키는 것이 첫째 의무입니다. 여기서 한 말씀만 드리고 갑니다. 자기 자리를 잘 지키라고 하면 꼭 과욕을 부리는 사람이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 어르신들 문자로, “작은 자리 완장 하나 채워주었더니, 온 동네 죽창 들고 사람 잡으러 다니는 경우”인데요, 완장 차고 잘 섬기라 하는데 죽창 들고 군림하려 드는 것이 인간의 속성인가 합니다. 아니오, 그건 온당하지 않습니다. 그건 잘못된 일입니다. 그 때 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누(累)가 무엇입니까? 한자로 누끼칠 누 자인데요, 우리말 사전에서는 “남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정신적인 괴로움이나 물질적인 손해.”그렇습니다. 누를 끼친다는 것은 정신적인 괴로움과 물질적인 손해를 동시에 입히는 것입니다. 해서 바르실래는 다윗에게 누가 되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비단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다윗의 마음에 정신적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마음이 하늘에 상달되었습니다. 하여 그는 평생 끝까지 거부로 살았던 것입니다.

<<내 자리 잘 지켜 부자 되시기 바랍니다.>>

4. 바르실래는 내리사랑이 무엇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19:37 / (읽기) / 여기서 우리는 바르실래의 아들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랬습니다. 바르실래는 내리사랑이 무엇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흔히 노욕(老慾)이란 말을 자주 씁니다만, 그것은 나이 많아 늙어서도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아니, 나이 많을수록 더욱 조심하지 않으면 이전보다 더 큰 욕심을 부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연세 높으신 분들이 욕심을 부리는 경우, 상황이 아주 어려워진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쉽게 말릴 수도 없고, 무어라 말씀드리기도 어렵고, 자칫 노여움을 사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노욕이 많은 이들에게 누를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르실래는 노욕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노후생활 보다는 아들의 미래를 더 걱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일신상의 욕심을 아들을 향한 사랑으로 승화시킨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에게 청합니다. “저는 여기 고향 땅 부모님의 묘 곁에 묻히고 싶습니다. 왕이시여! 부족한 저의 아들 김함이 여기 있으니, 저 대신 데리고 가 주십시오. 앞으로 살아갈 인생이 구만리 같은 놈, 하늘이 내신 왕 밑에서 잘 배워, 저로 큰 인물 되게 해 주십시오.” 정말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내리사랑의 진수를 느끼게 해 주는 장면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사랑은 내리사랑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그렇게 흐르는 것, 그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이번 한 가위 내리사랑으로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가위 명절에 가정 마다 좋은 일만 계속 되시고,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곳마다 천국이 이루어지시길 축원합니다.

<<내리사랑으로 끝까지 부자 되시기 바랍니다.>>

5. 에필로그 - 다윗과 바르실래, 그 뒷이야기.

19:38-39 / (읽기) / 39절에 보니 백성이 다 요단을 건넜다고 하는군요. 바르실래가 먹여 살린 사람이 다윗 혼자가 아님을 알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드디어 다윗과 바르실래, 온 백성이 바라보는 가운데 눈물로 작별의 인사를 나눕니다. 얼싸안은 왕과 거부, 떨어질 줄을 모릅니다. 마침내 입을 맞춘 두 사람, 큰 부자는 자기 집을 향해, 왕은 왕궁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다윗은 바르실래의 아들이 원하는 대로 그에게 베들레헴에 있는 자기 집을 주었다고 합니다. 부자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지요. 그러자 아들 김함이 다윗의 집을 고쳐 여관을 만들고, 그 이름을 게롯김함, 곧 김함의 여관이라 붙였다고 전해집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 예수님이 바로 그 여관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입니다. 몰론 성경 아닌 고대 자료를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이지만, 정말 아름다운 일입니다. 여러분! 신세를 갚을 줄 아는 다윗의 마음과 자기 사랑을 끝까지 지킨 바르실래의 마음, 하늘이 낸 왕의 마음과 하늘이 낸 부자의 마음이 만난 바로 그 곳에서 우리 주님이 탄생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를 아는 마음과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이 만난 곳, 바로 기적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이번 한가위, 여러분의 가정이 바로 이런 곳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의 말씀 마당을 닫겠습니다. 여러분!

1. 바르실래는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습니다.

2. 바르실래는 공궤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3. 바르실래는 자기 자리를 알고, 그 자리를 끝까지 잘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4. 바르실래는 내리사랑이 무엇인 줄 알고 그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여 하나님은 그를 나이 많아 늙도록 거부가 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의 신앙과 인격을 기억하시고, 나도 그렇게 살아, 마침내 주 안에서 거부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