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믿음의 대장부가 되십시오(왕상 2:1-2)

  • 잡초 잡초
  • 291
  • 0

첨부 1



제목: 믿음의 대장부가 되십시오(왕상 2:1-2)

시리아에 오헬로라는 장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꿈은 세상에서 최고의 강자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왕이 최고 강자였습니다. 그래서 왕을 찾아가서 충성을 맹세하고 왕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왕은 어떤 소리 한 마디만 들으면 벌벌 떨었습니다. 바로 악마라는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왕보다 악마가 더 강하구나."라고 생각해 악마를 찾아가 악마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오헬로는 악마를 따라 온갖 못된 일은 다했습니다. 그렇게 따라다니면서 오헬로는 그 무서운 악마도 하나만 보면 꼼짝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래서 오헬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예수님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그는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나루터의 사공이 되어 매일 오고가는 사람들 중에 예수님이 없는가 하고 살펴보았습니다.

어느 날,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습니다. 갑자기 밤에 한 소년이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습니다. 오헬로가 문을 열어주자 그 소년은 말했습니다. "아저씨! 저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지금 강을 건너게 도와주세요." 물결이 세서 배를 띄울 수 없는데도 이 소년은 애처롭게 부탁했습니다. 너무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그는 말했습니다. "할 수 없다! 내 등에 업혀라!" 그리고 소년을 등에 업고 아는 물길을 따라 강을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강에 깊숙이 들어갈수록 소년이 점차 무거워지더니 나중에는 너무 무거워 발을 옮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헬로가 "얘야! 너 참 무겁구나! 왜 그렇게 무겁지?" 그러자 갑자기 등 뒤에서 신비하고 자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세상 죄를 모두 걸머져서 무거운 것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오헬로는 "이분이 내가 그토록 찾던 예수님이시구나!"하고 직감하고, "예수님! 뵙고 싶었습니다!"라고 외치며 돌아서자 그분은 어느덧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오헬로는 그 다음에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 있는 성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에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크리스토퍼(Christopher)라고 바꾸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업은 대장부'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힘과 능력과 소유를 잘 활용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대장부가 될 것입니다.

< 어떤 사람이 대장부일까요? >

오늘 본문에는 다윗이 죽으면서 남기는 유언의 일부분입니다. 그 유언의 첫 번째 당부가 무엇입니까?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으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다윗은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기면서 "힘써 대장부가 되라!"고 했습니다. 이 유언의 말씀대로 오늘 이 시간에 참석한 모든 분들도 힘써 믿음의 대장부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대장부일까요?

첫째, 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대장부입니다.

우리는 몸집은 크지 않아도 생각은 커야 합니다. 그리고 생각이 희망으로 넘쳐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수시로 부정적인 생각과 긍정적인 생각이 다가옵니다. 그때 부정적인 생각을 붙잡으면 우리의 삶은 위축되고 상처가 생기고 영혼이 왜소해 지지만, 그때 긍정적인 생각을 붙잡으면 우리의 삶은 조금이라도 확장되고 상처가 아물게 되고 영적인 키는 커질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상상력이 사실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생각의 폭을 넓히는 것이 아파트 평수는 넓히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꼼수를 부리지 않고 땀을 흘려서 성공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확실히 생각이 다릅니다. 대개 생각이 긍정적이고 큽니다.

우리 나라 말에 "잔머리를 굴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존재가 되어야지 잔머리를 굴리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지혜와 잔머리는 다릅니다. 지혜는 정도를 정당화하는 것이고, 잔머리는 변칙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왜 정치인들이 욕을 먹습니까? 변칙을 정당화하는 잔머리에 능하다고 일반 국민들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잔머리를 굴리며 이당 저당 기웃거리는 사람은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자로 재고, 계산하고, 여기 저기 기웃거리는 모습은 거의 죽은 모습입니다. 죽기 전에 좀더 살고 싶어서 버둥거리는 그 모습이 참으로 가하게 보입니다. 크게 생각하고 과감히 결단해야 합니다. '썩어도 준치'라고 했습니다. 큰 생각을 가지고 과감히 결단하면 썩어 없어져도 평가는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쓰기 힘든 사람은 기웃거리고, 머뭇거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믿음생활에서 '썩어도 준치'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화끈하게 결단해야 합니다. "노인정 고돌이를 치면 꿀밤이 열 대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결단이 없으면 꿀밤을 맞게 됩니다. 그러나 과감히 결단하는 사람은 자신 안의 놀라운 가능성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국제상공회의소가 뽑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 10인"에 선정된 앤쏘니 라빈스는 원래 고졸 출신 가난뱅이 뚱보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극적인 기회가 왔습니다. 그 기회에 집중했습니다. 결국 그는 성공하면서 집중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자기 내부에 엄청난 거인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는 책을 쓰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을 집중을 하면 천재성이 나타나고, 사람이 바뀌고, 인생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는 얼마나 놀라운 존재가 되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버림받은 존재라도 주님의 손길이 스치기만 하면 달라집니다.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능성을 인정해 주시고 '우리 안에 있는 거인'을 깨워주시는 주님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이 있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집니다. 우리의 이력도 달라집니다. 이제 크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크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대장부입니다.

둘째, 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대장부입니다.

잠언 4장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우리가 넓은 마음을 가질 때 우리에게는 무한한 생명의 능력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넓히고 이해하며 살아야 합니다. 시원시원하게 살아야 합니다. 좀스러운 마음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작은 이견(異見) 앞에서도 조급하게 화를 내는 자에게 지혜는 머물지 않고, 반대자를 귀찮다고 무조건 잘라내는 자에게 리더십은 머물지 않습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과거의 친구를 존중하면서 새로운 친구를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 사이에 생기는 사소한 차이들을 증오와 배타와 편견의 구실로 삼지 말고 큰 마음을 가진 대장부가 되어야 합니다. 졸장부는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생각하고 금방 편견을 가집니다. 그러나 대장부는 '틀린 것'을 보고도 '틀린 사람'이라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졸장부는 강한 자에게는 비굴하고 약한 자는 무시합니다. 그러나 대장부는 강자의 위치에서는 자비를 가지고, 약자의 위치에서는 배짱을 가집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거룩한 배짱을 가져야 합니다. "쥐면 깨질까? 놓으면 날아갈까?"하는 마음을 가지면 항상 남에게 이용만 당합니다. "지면 그만이지!" 하고 거룩한 배짱으로 나갈 때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믿음의 대장부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고 변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해도 삶의 자세가 일정해야 합니다. 잘 살아도 높아지지 말고, 못 살아도 낮아지지 말아야 합니다. 칭찬을 받아도 우쭐하지 말고, 책망을 받아도 시험에 들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바른 생각이 변치 않고, 인간관계가 변치 않는 사람이 대장부입니다.

어떤 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처럼 꾸준합니다. 한번 맡았다 하면 꾸준히 자기 자리를 지킵니다. 힘들어도 자기 자리를 지킵니다. 책망을 받고 병들고 시험을 당해도 흔들리지 않고, 손해가 생기고 핍박을 받아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처럼 어려운 중에도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도 미소를 지어주실 것입니다.

어떤 분은 힘들고 낙심이 될 때마다 거울 앞에 서서 슬며시 웃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자신의 가슴도 따라 웃는 것을 느낀다고 합니다. 미소를 띄면 답답한 가슴이 뚫립니다. 그러나 인상을 쓰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큰 마음을 가지십시오.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동행하심을 생각하고 미소를 짓고 살면 신기하게도 환경의 닫힌 문이 스르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이틀 전에 인터넷을 통해 웨렌 위어스비(Warren Wiersbe)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승리를 향해 행진하는 사람이 아니라 승리하고 행진해 나오는 사람들입니다(We do not march toward victory, but from victory)."

우리는 이미 승리한 존재입니다. 어떤 정치가는 "역사를 믿는 자에게는 패배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 역사를 다스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더욱 패배가 없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패배한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롬 8:28).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주님은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한 자로서 큰 마음을 가진 믿음의 대장부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큰 손을 가진 사람이 대장부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잠시 왔다가 잠시 후에는 떠날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물질보다는 신앙을 더 생각하고, 땅보다는 하늘을 더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왜 인생에 밤이 있습니까?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사명을 따르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네게 주어진 사명에 필요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물질도 따르게 하실 것입니다.

미국의 한 가정에서 기르던 애완용 거북이가 죽었습니다. 어머니가 마음이 상한 아이를 위로하려고 말했습니다. "얘야, 우리가 훌륭한 장례식을 치러주고, 친구도 초청하고, 맛있는 과자 파티를 열어줄 테니 너무 울지 마라!" 그 말을 할 때 죽은 줄 알았던 거북이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아이가 "Let's kill him(거북이를 죽이지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Doyle Sager).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지만 그 믿음 안에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없고, 과자 파티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없는 삶에는 참된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는 '잘 사는 것'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게 꼭 필요한 기쁨의 조건과 행복의 조건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한 부자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는데 욕심이 많았습니다. 천국 가면서 하나님께 부탁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재산도 가져갈 수 있게 해주세요!" 너무 졸라대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서 "가방 하나에만 넣어 가지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부자는 잔머리를 굴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금덩어리로 바꿔 가방에 넣고 천국행 열차를 탔습니다.

드디어 천국 역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베드로가 "가방 좀 보자!"고 했습니다. 보니까 금덩어리가 가득했습니다. 부자가 말했습니다. "사도님! 이거 밀수한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져와도 좋다고 하셨어요." 그러자 베드로가 웃으며 "아니, 천국까지 오는데 보도블록은 왜 가져왔나?"라고 말하며 천국 안으로 들이니 길이 온통 황금길이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물질은 천국 영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의 것에 연연하여 인격도 잃어버리고, 신앙도 잃어버리는 모습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신앙은 세상 신분을 상승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을 상승시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셨다면 우리도 힘써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주 전에 인터넷을 통해 로드니 부캐넌 목사님 글을 읽을 때 어니스트 쉐클턴(Ernest Shackleton)에 관한 글을 보았습니다. 그는 아일랜드 탐험가였는데, 1908년 남극 탐험대를 이끌고 남극 정복에 나섰다가 남극 목표를 97마일 남기고 되돌아와야 했습니다.

남극 정복에 실패하고 돌아올 때 대원들의 몸은 지쳤고 음식물은 거의 고갈되었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할당량으로 건빵과 말린 비스킷이 각 대원들에게 나누어졌습니다. 몇몇 대원들은 눈을 녹여 차를 끓인 후 마지막 비스킷을 먹었습니다. 반면에 몇몇 대원들은 그들의 음식 백에 그 건빵을 집어넣었습니다. 마지막 힘이 소진될 때 먹으려고 저축해 둔 것입니다.

차를 끓이면서 주변 공기가 따뜻하게 되자 지친 대원들은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각자 슬리핑백으로 들어갔습니다. 쉐클턴도 슬리핑백으로 들어갔지만 탈진과 배고픔으로 오랫동안 잠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한참 지난 후에 그는 인기척 소리를 듣고 샛눈을 떴습니다. 그러자 가장 신뢰하던 대원이 일어나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자기 옆 대원의 음식 보따리로 서서히 접근했습니다.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샛눈을 뜨고 보는데 그가 자기 옆 대원의 음식 보따리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장면이 그를 더욱 충격으로 몰아갔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친구 대원의 음식 보따리에 자기 건빵을 넣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때의 그 장면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이 바로 주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살도록 기꺼이 죽으시며 자신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희생의 본보기를 우리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위해 내 것을 희생할 수 있는 큰 손을 가진 믿음의 대장부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인색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은 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보다 더 가난한 사람은 줄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인색함은 영혼의 질병입니다. 인색하면 자기 영혼은 죄수가 되고, 자기 육체는 감옥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으로 인색한 마음의 한 부분을 허물면 비로소 내 영혼은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속적으로 이웃을 도울 거리를 만드는 교회가 되자!"고 했습니다. 그런 교회의 방침대로 금년에도 지금까지 여러 선교사님과 농촌 교회 목사님들을 많이 도왔고 구제에도 힘썼습니다. 백혈병에 걸린 찬수 군을 위해서도 지금까지 우리 교회의 처지로서는 과분할 정도로 도왔습니다. 찬수 군 아버지인 목진훈 목사님이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도와도 찬수 군이 지금 백혈병이 다시 재발해서 많이 위험한 상태라고 합니다.

지난 주에 우리 선교팀 4명이 목진훈 목사님을 다시 방문해서 그 동안 모은 재정을 전달했고, 며칠 전에 저도 목사님과 통화를 했습니다. 많이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지금 방사선 치료를 하고 있는 중인데 20-25일 치료비만 800-1000만원 든다고 합니다. 개척교회 목사님이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작은 정성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힘써 도와도 의사 선생님들의 말에 의하면 생명을 구할 확률이 반반 이라고 하는데, 실의에 빠진 목사님 가정에 의료혜택의 기회는 드려야 하지 않습니까?< 후원계좌 : 신한은행 642-12-079560 이승연(요삼일육선교회) >

< 믿음의 대장부가 되십시오 >

신앙이란 인색함을 깨는 작업입니다. 자기만 아는 성도가 되어서도 안되고, 자기만 아는 교회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재물은 쌓으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흩어 구제하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 나눈 것만이 영원까지 메아리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움켜쥔 손을 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 생깁니다. 움켜쥔 손을 펼 때, 마음도 펴지고, 가슴도 펴지고, 얼굴도 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계산적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계산의 세계는 너무 뻔합니다. 지나친 계산은 우리의 영혼을 타락시킬 수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계산은 결정적인 순간에 무력하다는 것입니다. 큰 병에 걸린 사람들을 보십시오. 큰 병에 걸리면 비로소 계산적인 삶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주판알을 튕기며 살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축복'이 믿음의 목적이 되도록 하지 말고, '주님의 존재 자체'가 목적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인생의 목적에서 유형적인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무형적인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유형적인 것은 그저 덤인 줄 알아야 합니다. 덤은 없어져도 좋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끝까지 남아야 합니다.

인생의 어려운 순간에 남는 것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최후의 순간에 남는 것도 믿음밖에 없습니다. 죽어서 천국까지 유효한 것도 믿음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어떤 회의가 있어도, 어떤 안락한 생활이 유혹해서 믿음을 포기하지 말고, 선한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발전이 있고, 선한 열매도 주어질 것입니다.

가끔 다이어트를 하다가 포기하는 분들을 봅니다. 그분들은 물만 먹어도 살이 찐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건강의 길, 보다 좋은 모습으로 남에게 보여질 수 있는 길은 너무 쉽게 포기합니다. 그러나 식사와 음료를 줄이면 점차 위의 크기가 줄어들고, 위의 크기가 줄어들면 헐렁하게 된 위가 팽팽하게 하게 되고, 그러면 식사를 조금 먹어도 배고픔이 덜 느껴지고 만족감이 생겨서 자연히 살은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식사할 때 께작께작하게 먹으면 보기가 싫다고 하지만 다이어트에는 그것이 최고입니다. 음식을 적게 입에 넣고 음미하며 여러 번 씹으면 위가 커질 수 없기 때문에 배가 나오지 않고, 살이 찔 수가 없습니다. 음식을 적당히 입에 넣고 15번 씹는 사람은 살이 찔 수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물만 먹어도 살이 찐다는 미신에 사로잡히지 말고, 결단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다이어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적인 다이어트입니다. 살은 빼지 못해도 욕심은 빼야 합니다. 신앙은 욕심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욕심의 주머니를 작게 만들면 만족감이 커지고 감사한 마음도 커집니다. 그런데 그 길은 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 신앙생활을 해도 얻은 것이 없다"고 하면서 신앙생활을 포기하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우리 앞에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못해! 안된다!"고 행복의 길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순간, 하나님도 우리를 믿어주시고, 밀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등에 업은 믿음의 대장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모든 분들이 영적인 크리스토퍼(Christopher)가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