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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연보에 대한 교훈 / 고전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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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 연보에 대한 교훈
고린도전서16:1-4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고전16:1-4)


연보의 의미

  지난주까지는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부터는 16장의 말씀입니다.  16장은 연보에 대한 교훈(1-4절), 바울의 여정 계획(5-9절), 그리고 문안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그 첫 번째 부분으로 연보에 대한 교훈입니다.  부활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연보 얘기를 하니까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느낌이 듭니다.  신앙에는 天上的 요소도 있지만 地上的 요소도 있습니다.  천상만 바라보고 지상의 것을 소홀히 하면 안됩니다.  연보는 성도들의 地上 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연보"라는 용어에 대해서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연보"란 용어는 좀 생소한 느낌이 듭니다.  오늘날 가장 많이 쓰이는 용어는 "헌금"이란 말입니다.  "헌금"이란 말은 "돈을 바친다"는 뜻인데 상당히 상업적인 냄새가 납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헌금"이란 단어가 사용된 곳은 오직 한 곳 누가복음 21장뿐입니다.  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했다고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사용된 "헌금"이란 용어는 잘못된 번역입니다.  원문은 "δωρα"이면 "선물"이란 뜻입니다.  대부분의 영문 번역은 "gifts"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돈이 아닙니다.  인생 전부입니다.  성경에 헌금을 의미하는 단어는 아주 다양합니다.  "은혜"(χαρισ, 본문3절), "축복"(ευλογια, 고후9:5),  "모금"(λογειαs, 본문1절),  "교제"(κοινωνια, 롬16:26),  "봉사"(λειτουργια, 고후9:12), "구제"(ελημοσυνα, 행24:17) 등등 여러 단어가 사용됩니다.  여러 단어가 사용된다는 것은 그만큼 연보의 의미가 다양하다는 뜻입니다. 


연보의 목적

  그러면 연보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성경에는 연보의 목적이 여러 가지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분배적 의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연보"란 단어는 헬라어로 "λογειαs"로써 "모은다"(collection)는 뜻입니다.  있는 사람들로부터 모아서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일종의 분배적 역할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8:13-15)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평균케 한다"는 말입니다.  "평균"이란 "equality"(균등)을 나타나내는 말입니다.  부자에게 모금해서 가난한 자에게 나눠 줘서 균등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연보의 한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에든지 모든 인류에게 충분히 먹을만한 양식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런데도 현재 매년 10억이 넘는 인류가 하루 1 달러 미만의 소득으로 굶주리고 있습니다.  이유는 가진자들의 욕심입니다.  부자 나라는 가난한 나라를 제대로 돕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자 나라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나라는 더 가난해집니다.  잘 사는 나라의 일인당 소득은 3만 달러가 넘는데, 못 사는 나라는 300 달러도 안 됩니다.  소득 격차가 100대 1이 넘습니다.  남북한의 소득 격차를 보면 국민 총생산은 28대 1, 개인 소득은 14대 1 수준입니다.  이와 같이 소득 격차 때문에 생기는 간격을 메우는 것이 바로 헌금의 한 목적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일반 백성들에게 특별한 헌금의 의무를 부과했습니다.  "매 3년의 십일조"란 것인데, 항상 드리는 소득의 십일조 외에 3년마다 한 번씩 별도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말하자면 소득의 10분의 1을 떼어낸 후에 다시 10분의 1을 바친 겁니다.  "제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신26:12)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모든 구제의 중심에 항상 교회가 있습니다.  고아원, 양로원, 의료 사업, 교육 장학 사업, 각종 사회 사업에 앞장서 온 것이 교회입니다.  아마 한국 근대사에서 교회의 구제 사업을 빼면 사회 사업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교회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공명심 때문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공명심 때문에 구제 활동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명령이기 때문에 당연히 합니다.  헌금의 중요한 한 가지 목적은 바로 가진자와 못 가진자 사이의 나눔입니다. 

  둘째로, 축복의 의미입니다.  성도들은 연보를 통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9장 5절에서 "연보"란 단어를 헬라어로 "ευλογια"를 사용했습니다.  "축복"(blessing)이란 뜻입니다.  즉, 연보는 곧 드리는 자에게 축복이 됩니다.  연보는 도움을 받는 사람만 혜택을 입는 것이 아닙니다.  연보를 드리는 사람 자신도 하나님께 복을 받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정말 복을 받는지, 안 받는지는 연보 생활을 통해서 체험하시면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한 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고후9:8-11)  하나님의 목적은 성도들로 하여금 넘치는 생활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것이 넉넉하여 넘치는 생활!  그것이 바로 연보의 한 목적입니다.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잘 사는 민족은 유태인입니다.  은행을 비롯한 세계 금융업은 거의 다 유태인 손에 있습니다.  매스컴, 언론, 영화 산업 등등, 돈 되는 사업은 다 유태인들 것입니다.  유태인은 인색하기로 이름난 족속입니다.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주인공 샤일록도 유태인입니다.  그러면 유태인들이 돈에 인색해서 부자가 됐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유태인들의 생활 자세입니다.  그들은 십일조 생활에 철저합니다.  그들은 평생 십일조 생활을 합니다.  소득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재벌이든지 저소득자이든지 마찬가집니다.  비록 그들이 현재는 복음 밖에 있다 해도 그들의 물질 생활은 바르게 되어 있습니다.  번영은 인간의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십일조 생활을 통해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계 지도를 놓고 보세요.  미국을 비롯해서 물질적으로 잘 사는 나라들은 다 기독교 국가들입니다.  못 사는 나라는 거의 다 이상한 종교를 믿는 나라들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 12위의 경제 대국이 된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은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전무후무하게 복음이 전파된 나라입니다.  100년 만에 전 국민의 4분의 1이 복음화 됐어요.  아시아 지역 국가로는 전세계에 가장 많은 선교사들을 내 보낸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가만 놔두시겠습니까?  전쟁의 참화를 딛고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성장 신화를 이룬 나라가 됐습니다.  소득의 10분의 1을 바치고도 잘 사는 사람들과 평생 죽도록 움켜 쥐고도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모든 축복은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그 축복을 받아 누리는 것이 바로 올바른 연보 생활에 있습니다. 

  셋째로, 교제의 의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5장에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롬15:25-27)  바울은 여기서 연보를 가리켜서 성도를 "섬기는 일", 혹은 "동정"이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섬기는 일"이란 헬라어로 "διακονων"인데 "봉사한다"(serve), "돌아본다"(care for), "돕는다"(support)는 뜻입니다.  "동정"이란 말은 헬라어로 "κοινωνια"인데, "교제"란 뜻입니다.  즉, 연보는 성도 교제의 일환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 예루살렘 교인들은 상당히 어려운 처지에 있었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팔레스틴 지역에 가뭄이 극심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로마의 박해 때문입니다.  셋째는, 주로 가난한 계층 사람들이 믿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바울은 마게도니아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인들을 돕는 것을 성도의 교제로 생각했습니다.  교제란 서로 주고 받는 것인데, 그러면 예루살렘 교인들은 마게도니아 교인들에게 무엇을 줬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답변합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고전9:11)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 지역에 복음을 전해줬습니다.  영생을 전했습니다.  천국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려 줬습니다.  즉, 신령한 것을 줬습니다.  그렇다면 물질적 도움을 받는 것은 과한 것은 아닙니다.  성도의 교제는 물질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것을 주고 받는 일입니다. 

  물질적 도움은 영적 교제의 한 부분입니다.  구약 시대에 레위인들은 백성들이 바치는 십일조를 통해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주관했습니다.  영적인 일과 물질적인 것을 서로 주고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를 비롯한 교회 직원들과 성도들의 관계도 같은 맥락 속에 있습니다.  교회 직원들은 영적인 도움을 주고 성도들은 물질적인 도움을 줍니다.  물론 영적인 기도와 사랑의 교제도 마찬가집니다.  연보 생활은 성도 교제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넷째로, 신앙 고백적 의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세 가지 목적보다 더 중요한 목적, 연보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바로 신앙 고백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하나님 것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도 다 하나님 것입니다!  그 고백이 바로 연보입니다.  다윗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24:1)  사도 바울도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7-8)  우리는 이 세상에 빈 손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빌려주신 선물들입니다.  집도, 땅도, 자식도, 아내도, 남편도, 친구도 다 하나님 선물입니다.  직업도, 지위도, 권세도, 명예도, 재능도 다 하나님이 빌려주신 겁니다.  심지어는 건강도 생명도 다 하나님 선물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 것입니다!  그렇게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어떤 것도 다 하나님 것을 반환하는 것이지 내 것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표현이 바로 연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연보는 우리가 바치든지 말든지 본래 다 하나님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연보 생활을 하시면 바른 신앙고백이 되는 겁니다.  구약 말라기 선지자는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3:8-12)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하나님 소유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반납해야 됩니다.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연보요 헌물입니다. 


어떻게 연보할 것인가?

  오늘 말씀의 두 번째 주제는 연보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연보의 방법입니다.  연보는 바른 방법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교회는 바른 연보의 규칙이 있습니다.  성도들도 들쭉날쭉 제멋대로 연보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정해진 규칙대로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세 가지 바른 연보 방법을 제시합니다. 

  첫째로, 연보의 시기입니다.  헌금은 주일 예배시에 정기적으로 하라고 합니다.  "매주일 첫 날에"(2절)  이것은 연보가 예배의 한 부분임을 암시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에 따라 제물이 있었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의 제물이 예배 때마다 적절히 드려졌습니다.  어떤 면에서 연보는 헌신의 표시입니다.  몸을 드리고, 인생을 바치는 표식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시에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각자 임의대로 자선에 사용하고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 대신합니다.  개인의 명예가 드러나고, 자기 기호에 맞는 일이 될는지는 몰라도 적절한 예배 행위로 볼 수는 없습니다.  연보는 주일 예배와 함께 드려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둘째로, 연보의 액수입니다.  연보의 액수는 소득에 따라 적절히 해야 합니다.  연보 액수는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밭을 팔아 절반을 바치고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어떤 과부는 동전 두 개를 바치고도 칭찬을 받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 표준이 있습니다.  "너희 각 사람이 利를 얻은 대로"(2절)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대로 하라는 뜻입니다.  "set aside a sum of money in keeping with his income"(NIV)  "as he may prosper"(NAS,RSV)  "as God hath prospered him"(KJV)  연보는 순수한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연보에 불순한 의도가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성경이 금하는 연보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부정한 소득에 대한 연보를 금지합니다.  미국에서 어떤 사람이 엄청난 복권에 당첨이 됐습니다.  그는 십일조 헌금을 떼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독교 단체에 헌금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단체는 그 헌금을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소득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부정한 수입의 연보를 거절합니다.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신23:18) 

둘째, 外飾的, 과시용 연보를 거부합니다.  신앙은 없으면서 폼으로 바치는 헌금이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 때가 되면 신앙과 상관 없이 여러 교회에 헌금을 하는 후보자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1:11-12)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셋째, 억지 연보를 거절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연보를 해도 하나님 것이요, 안 해도 하나님 것입니다.  10분의 1을 바쳐도 하나님 것이요, 10분의 9를 바쳐도 다 하나님 것입니다.  연보는 신앙 고백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내 모든 것이 다 하나님 것인 줄로 여겨지고 감사한 마음이 들면 하나님께 마음에 정한 만큼 드리면 됩니다.  괜히 등 떠밀려서 하지는 마십시오.  어떤 분들을 보면 가족이 반대하는데도 억지로 하는 분들이 있어요.  억지로 하지 마세요.  신앙이 되거든 하세요.

  연보의 분량은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각자 신앙대로 하면 됩니다.  다만 성경에 정한 일반적 표준은 소득의 10분의 1입니다.  그것을 흔히 십일조라고 합니다.  아브라함도, 바리새인들도 이 표준을 지켰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 표준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든지 그것은 표준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소유에 대한 바른 인식입니다.  모든 소유는 하나님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산다면 언제나 바른 연보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 연보의 준비성입니다.  미리 저축해 두라고 합니다.  "저축하여 두어서"(2절)  "saving it up"(NIV), "store it up"(RSV)  연보는 예배의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준비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별의 개념입니다.  일단 하나님께 드리기로 작정한 몫은 따로 떼어 구별해 두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을 보면 연보에 대한 성별 의식이 없어요.  십일조든지, 감사 헌금이든지 따로 놔두기는 했는데, 아쉬운 일이 생기면 도로 꺼내 써버립니다.  그랬다가 돈이 생기기 않으면 연보를 그만 둬버립니다.  주일은 예배를 드리는 날이지만, 평일은 예배를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연보를 준비하는 것은 물질 성별, 헌신의 중요한 준비입니다.  항상 준비된 마음으로 예배에 참여하세요.  그리고 준비된 헌신을 하시기 바랍니다. 


결론입니다

  오늘날 돈은 몇 가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첫째는 가치의 척도입니다.  유형 무형의 모든 자산이 돈으로 환산됩니다.  둘째로, 돈은 가지 저장의 수단입니다.  모든 재화가 다 돈으로 저장됩니다.  셋째로, 돈은 교환의 수단입니다.  모든 재산, 모든 용역, 모든 무형 자산도 다 돈으로 교환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모든 불신자들에게 돈은 神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돈에 복종합니다.  돈의 명령대로 직업을 선택합니다.  돈의 명령대로 이사 다닙니다.  돈의 명령대로 배우자를 선택합니다.  돈의 명령대로 자녀의 진로를 결정합니다.  돈의 명령대로 사람을 사귀고, 돈의 명령대로 사람을 끊어버립니다.  돈의 명령대로 전쟁하고, 돈의 명령대로 화해합니다.  돈의 명령대로 거짓말하고, 사기 치고, 도둑질, 강도질합니다.  온갖 범죄가 돈의 명령에서 나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돈을 신으로 모실 때에 인간은 형편 없는 저질이 됩니다.  오늘의 세상을 보세요.  권위가 있습니까?  귀한 게 있습니까?  품위가 있습니까?  명예가 있습니까?  보이는 것은 온갖 저질 뿐입니다. 

  신앙은 돈과의 싸움입니다.  내 마음 중심에 돈을 모실 것인가, 하나님을 모실 것인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부자 청년은 돈 때문에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삭개오는 돈에서 해방되면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바른 연보 생활은 바른 신앙의 방향타가 됩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있다면 돈은 하나님께로 갑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돈에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돈 있는 곳으로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19-21) 

  다시 한 번 오늘의 말씀을 요약합니다.  연보의 목적은 네 가지입니다.  분배의 의미입니다.  축복의 의미입니다.  교제의 의미입니다.  신앙고백의 의미입니다.  연보의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연보는 정기적으로 주일 예배시에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연보 액수는 각자의 소득과 신앙에 따라야 합니다.  연보는 미리 준비하고 성별해 두었다가 드려야 합니다.  바른 연보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고, 사회에 기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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