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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는 나보다 옳도다] 창 38: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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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보다 옳도다> 창38:24-30
새문안교회 2003. 9.21 주일예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다와 다말은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24절에서 보는 대로 어느날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그의 며느리 다말이 음행을 저질렀고 그 결과로 임신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말은 들은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끌어내어 불살라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본문 26절에서 보는 대로 잠시 후 생각을 바꾸어 “그는 나보다 옳도다” 하고는 다말을 살려주었습니다. 왜 유다는 다말에 대한 그의 판단을 이렇게 180도로 바꾸었습니까? 이러한 극적인 상황변화와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창세기 38장 전체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이 미디안 사람 상인들에 팔려 애굽으로 끌려간 후에 요셉의 넷째 형 유다는 자기 형제들을 떠나갔고 한 가나안 여자를 아내로 맞아 세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세 아들의 이름은 엘과 오난과 셀라였습니다. 유다는 그의 장자 엘이 장성하자 다말이라고 하는 여자를 그의 아내로, 즉 자신의 며느리로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엘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둘째 아들 오난에게 말하기를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했습니다. 즉 죽은 형을 대신해서 형수를 아내로 맞아 형의 대를 이을 자식을 낳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소위 시형제 혼인의 관습에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신25:5-6에 보면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오난은 자신으로 인해서 형수가 낳을 첫 아들이 자기의 아들이 되지 않을 줄 알았으므로 형수와 부부관계를 갖되 형수가 임신할 수 없는 방법으로 부부관계를 갖곤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자연피임법 중 한 가지 방법의 원조 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난의 이 행위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 또한 죽게 하셨습니다. 오난의 그 행위가 뭐 그리 죽을 만큼 악한 행위가 되는지 사람들은 의아해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낳게 할 아들이 자기 아들이 되지 않을 것을 싫어한 것이 그렇게 악하고 과연 죽을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난의 행위는 단지 자기가 낳게 할 아들이 자기 아들이 되지 않을 것을 싫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난의 그 행위 뒤에는 장자권과 이에 따른 아버지의 유산분배에 관한 계산이 깔려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난의 그 행위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장자는 나머지 아들들보다 두 배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게 되어있었던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만일 형수가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은 죽은 형의 아들로 인정될 것이고, 따라서 유다의 장손이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아버지 유다의 재산의 절반이 그에게 물려질 것이고 자신과 자신의 동생 셀라에게는 나머지 절반의 절반씩, 곧 각각 4분의 1의 유산밖에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오난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형수가 끝까지 아들을 갖지 못하면 형의 장자권은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고 따라서 자기가 아버지의 재산의 3분의 2를 차지하게 될 것인데, 형의 아들이 될 아이를 형수로 하여금 낳게 해줄 경우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은 거의 3분의 1 정도로(보다 정확히는 8:3으로) 줄어들 것임을 오난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싫어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재산상의 손실이었습니다. 그 재물욕 때문에 오난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형수에게 해야 할 마땅한 법적, 인간적 도리를 저버림으로써 형수에게는 씻을 수 없는 슬픔과 절망감을 주었고 아버지와 가족 전체를 기망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의 두 아들이 연달아 죽자 며느리 다말을 무슨 남자 잡아먹는 마녀라도 되는 듯이 여기게 되었고 그녀 때문에 나머지 아들 셀라마저 죽게 될까 두려워 그 또한 며느리 다말의 새 남편이 되지 못하게 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 말하기를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했습니다. 이것은 “셀라가 아직은 어려서 남편 구실을 할 수 없으니 친정에 돌아가서 수절하며 지내면 나중에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 남편으로 맞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암시적인 약속을 하면서 사실은 하나 남은 아들을 그녀에게 남편으로 주어 또 죽게 만드는 일을 피해보자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말은 시아버지의 그 말에 순종하고 친정아버지 집에 가 있었습니다.

그 후에 유다의 아내가 죽었습니다. 아내의 장례를 마치고 유다는 그의 한 친구와 함께 양털을 깎으러 딤나라고 하는 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다말에게 말하기를 “네 시아버지가 자기의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고 전해주었습니다. 시아버지 유다의 말대로 친정아버지 집에 가서 막내 시동생이 더 성장하여 자기의 세 번째 남편이 될 날을 아무리 기다려도 시아버지가 셋째 아들을 자기에게 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음을 안 다말은 비장한 계책을 꾸몄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과부의 의복을 벗고 창녀처럼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는 유다가 지나갈 길목을 지키며 기다렸다가 그를 유혹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다말의 계책은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 홀아비가 되어 오래 동안 적적했던 유다는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앉아있던 그녀를 창녀로 여기고 접근하여 흥정을 했습니다. 흥정은 염소 새끼 한 마리로 낙착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말은 몸을 내주는 대가로 염소 새끼 한 마리를 받기까지 유다가 담보물을 자기에게 맡길 것을 요구했습니다. 유다는 다말이 무슨 담보물을 원하는지를 물었고, 다말은 유다에게 그의 도장과 그 끈과 그의 손에 있던 지팡이를 담보물로 달라 했습니다. 도장은 그 소유자 혹은 사용자가 누구인지를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아마도 원통형 막대기의 형태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이 도장에는 그 소유주의 이름이나 고유한 문양이 새겨져 있어서 물렁물렁한 토판에 대고 눌러서 밀면 그 토판에 그 도장의 소유주의 이름이나 고유한 문양이 압인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도장을 그 가운데로 끈을 꿰어서 목에 걸어 지니고 다녔던 것입니다. 또 지팡이는 그 소유주의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그 손잡이 부분에 그 소유주 개인의 문양을 새기거나 고유한 장식을 함으로써 역시 그 소유주가 누구인지를 금방 알아볼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말이 유다의 도장과 그 끈과 그의 손에 있던 지팡이를 담보물로 달라 한 것은 그가 꾸민 계책이 성공할 경우 그 후에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 대비한 영리하고 확실한 대비책이었던 것입니다. 다말의 그 숨은 계책을 알 리가 없었던 유다는 다말의 그 요구를 들어주었고, 다말은 유다와 가진 관계로 인해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유다는 약속대로 염소 새끼 한 마리를 그 친구에게 맡겨 그 여자에게 보내고 그 여자의 손에서 담보물을 찾아오게 하려 했지만 그 친구는 그 여자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유다가 다말을 만났던 그 곳 사람들에게 물어 그 여자를 찾으려 했으나 그곳에는 창녀가 없다는 대답을 들었을 뿐입니다. 할 수 없이 유다와 그의 친구는 그 여자 찾기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알려주기를 그의 며느리 다말이 음행을 저질렀고 그 결과로 임신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그녀를 끌어내어 불살라 죽이라고 했습니다. 다말은 사람들에게 끌려 나갈 때에 한 사람의 손에 시아버지 유다로부터 받아두었던 담보물들을 건네주며 유다에게 가서 “내가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보십시오 이 도장과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입니까”라고 말하게 했습니다. 유다는 두 말 할 것 없이 즉시 그 물건들을 알아보았으며, 그 때 한 말이 “그는 나보다 옳도다” 한 것입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라는 말은 어떤 일에 관계된 두 사람 사이에서 누구의 행위가 더 옳은 것인지를 가리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다말과 유다 두 사람의 잘잘못이 무엇인지를 바로 살펴야 합니다. 유다 자신이 처음에는 다말을 불태워 죽일 여자로 판단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자칫 잘못하면 다말을 일방적으로 정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단순히 다말을 새로 시집가지 못해서 안달이 나다 못해 속임수로 시아버지를 유혹해서 욕정을 채운 음탕하고 패륜적인 여자로 봐서는 안 됩니다. 물론 다말이 행한 일이 대단히 잘 한 일이라거나 도덕적으로 흠 잡을 데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행위는 그 당시의 관습과 법에 따라 그녀가 누려야 할 권리를 시동생과 시아버지로부터 부당하게 박탈당했고 그녀가 며느리로 들어온 가문의 대를 잇게 하고 자손을 번식시켜야 할 책임을 다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쩌면 그녀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니었겠는지 우리는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한편 유다는 어떻습니까? 흔히 사람들은 “상처한 남자로서 오래 동안 억눌러왔던 성욕을 창녀와의 한 차례의 관계로서 해소시킨 것이 뭐 그리 큰 흠이 되느냐? 그 여자가 창녀가 아니라 자기의 며느리인 줄을 알았다면 그런 관계를 결코 갖지 않았을 것이다. 고의로 시아버지를 속여서 유혹하고 성관계를 가진 여자가 나쁜 것이라”고 하며 유다에 대한 관용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잘못을 단지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유다 자신이 “그는 나보다 옳도다” 하며 이어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말했듯이 그의 잘못은 본질적으로 한 차례 창녀와 지낸 것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셋째 아들 셀라까지도 며느리 다말에게 남편으로 주어야 할 도리를 의도적으로 회피한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들의 생명을 지키는 일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보다 더 중요시한 죄인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권리와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스스로 떠맡으려 한 죄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아이 한 번 낳아보지 못하고 남편을 둘씩이나 잃은 가련한 며느리에게 뼈아픈 배신감과 절망감과 상처를 안겨준 죄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시아버지 유다의 잘못이 며느리 다말의 잘못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보다 옳도다” 한 유다 자신의 인정과 고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창세기 38장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거기 등장하는 인물들의 참으로 추악하고 민망스러운 모습과 행위를 목격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도대체 이런 기록이 왜 창세기 37장부터 시작되어 마지막 50장까지에 이르는 요셉의 그 뛰어나고 아름다운 행적에 관한 기록들 중간에 끼어 나오는지 의아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추악한 인간들의 행태만을 볼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어리석고 부끄러운 행태에도 불구하고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37장부터 50장의 내용은 아버지가 총애하는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하여 열 명의 형들이 열일곱 살의 어린 동생을 미디안 사람 상인들에게 팔아먹고 생면부지의 먼 나라 애굽으로 끌려가게 하는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들의 행태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상상도 못한 놀랍고 은혜로운 일, 즉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셔서 7년간의 혹심한 가뭄과 기근으로부터 야곱의 온 가족과 애굽을 비롯한 인근의 모든 나라 백성들을 구하시는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38장의 이야기는 그것과 맥을 같이 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유다가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다말을 가리켜 “그는 나보다 옳도다” 선언함으로써 다말은 죽음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쌍둥이를 임신하였었고, 때가 되어 두 아들 세라와 베레스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 베레스의 혈통에서 훗날에 나온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다말 같이 부끄러운 일을 저지른 이들로 말미암아 태어난 베레스이지만 그를 통하여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고 용감한 군왕인 다윗이 나오게 하셨고 그 위에 이스라엘의 왕조를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더더욱 의미 있는 사실은 무엇이겠습니까? 베레스가 다윗의 조상이라는 것은 곧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우리는 오늘 본문의 이야기 속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은혜의 하나님께서 그의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데에 사용하신 한 가지 사실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유다는 비록 처음에는 며느리 다말을 용서할 수 없는 죄인으로 판단하고 그녀를 죽음의 형벌로 다스리려 하였으나 곧 그녀의 죄적 행위의 근본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었음을 깨닫고는 그녀를 자기보다 의롭다고 인정하였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유다는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다말이 제시하는 증거물에도 불구하고 양심을 속이며 자신의 무관함을 주장하고 다말의 행위의 불가피성을 전면 부인하며 서둘러 다말을 죽여 없앰으로써 자신의 범죄와 수치를 영원히 은닉하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 베레스는 태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베레스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뒤늦긴 했으나 유다의 자기 자신의 잘못에 대한 깨달음과 솔직한 고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는 나보다 옳도다” 한 이 유다의 깨달음과 고백을 귀히 여기시고 그의 자손 가운데에서 다윗을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고, 또 그의 혈통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게 하시는 크고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갖 추악한 일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인 교회에서조차도 어리석고 부끄러우며 낯 뜨거운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네가 잘했느니 내가 잘했느니 싸우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서로 자신이 옳고 남이 틀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갈등하게 되며 오해와 미움을 증폭시키기도 합니다. 저는 최근 제 자신 또한 바로 그런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그리하여 우리 교회의 당회원들을 위시한 교우 여러분에게 큰 심려를 끼쳐드렸음을 깨닫게 되었고, 이 자리를 빌어 여러분 모두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유다로 하여금 “그는 나보다 옳도다” 말할 수 있게 한 그의 깨달음을 저에게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다른 사람을 향해 “그는 나보다 옳도다” 말할 수 있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크나큰 은혜와 복을 베푸시리라 믿습니다. 새문안교회의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의 의만을 내세우던 그간의 모든 논쟁과 비방을 그치고 “그는 나보다 옳도다” 여길 줄 아는 공동체를 이룰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로부터 다윗과 같은 지도자도 나오게 하실 것이며 이 사회와 민족을 구할 인물들도 나오게 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 교회창립116주년을 맞으며 우리 모두 “그는 나보다 옳도다” 여길 줄 아는 마음으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선한 일을 이루시며,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깨달을 때에는 우리를 더욱 더 크게 쓰시는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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