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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녹의 믿음 - 하나님과의 동행 / 히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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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히브리서 11장 5-6절
제 목 : 에녹의 믿음 - 하나님과의 동행 

저희가 오늘은 에녹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믿음에 대하여 배우기 원합니다.

성경에 에녹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두 사람 나옵니다. 하나는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의 아들의 이름이 에녹이고, 이 사람은 그냥 이름만 나옵니다.

또 하나는 오늘 우리가 주목해 보고자 하는 사람, 아담의 7대 후손, 셋의 6대 후손인 에녹입니다.

이 에녹에 대한 이야기도 성경에 아주 조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창5:21-24>에서 에녹의 삶의 모습이 나오고 오늘 본문 <히11:5>에서 에녹의 믿음의 삶에 대한 평가가 나오고 그리고 <유1:14>에서 에녹이 사람들에게 예언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이 세 부분 외에는, <대상1:3>과 <눅3:37>에서 그 이름이 거론되는데 둘 다 족보에서 이름만 거론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5:21-24>, <히11:5,6> 그리고 <유1:14> 짧은 세 말씀을 통해서 에녹의 믿음에 대하여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창5:21-24> 말씀과 <유1:14> 말씀을 한번 찾아서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에녹의 믿음의 삶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고 하였고 창세기에서는 에녹의 믿음의 삶을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니"라고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믿음의 삶의 특징은 하나님과 동행이고, 그리고 그의 삶의 평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던 자라는 것입니다.

그의 믿음과 삶의 특징,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에녹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믿음의 진수(眞髓)에 대하여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모습은 도대체 에녹이 무슨 계기로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었는가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계기로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고자 하십니까? 사람이 쉽게 하나님과 교제하고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배우고 그러지 못합니다. 여러분도 그냥은 기도 잘 안하지요. 이 목사가 그렇게 성경읽고 기도하면서 살라고 해도... 여러분도 잘 안하지요. 저도 생각만큼 잘 못합니다... 정신이 바짝 들어야 잘 합니다. 옛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에녹에게도 뭔가 계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먼저 기억할 것은 에녹은 주변 환경이나 여건이 다들 경건하게 사는 영적인 분위기여서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그와는 정 반대입니다.

창5장을 자세히 보면, 에녹이 죽은 뒤 4년 후에 노아가 태어났습니다. 에녹의 시대문화나 노아의 시대문화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6장에서 노아의 시대를 죄악이 관영한 시대라고 규정하고 그래서 결국 심판을 하십니다. 노아의 때나 노아 직전의 에녹이 살던 때나 죄악으로 물들어 가는 세상 속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또 <유1:14-16>에 보면 에녹이 뭐하며 지냈습니까? 당대의 사람들에게 심판의 멧세지를 선포하고 다녔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요? 원망하며 불만을 토로하며 정욕대로 행하며 그 입으로 자랑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는 사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에녹의 주된 일과 중의 하나는 심판의 멧세지를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에녹이 사는 세상은 죄악의 물이 빨갛게 들어가고 있던 시대, 세속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에녹이 살았던 환경은 결코 경건을 독려하고 영적인 열망을 고취시키고 그런 환경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오늘날의 시대처럼, 죄짓는 것이 즐거움이고 쾌락이라 여겨지는 때이었습니다. 경건하게 살려는 자를 어리석은 사람 취급하고,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죄악의 낙이 팽배한 시대, 환경이었습니다. 

그는 주변의 좋은 분위기를 타서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의 삶을 위하여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에녹으로 하여금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였습니까? 뭔가 계기가 있었습니다. 사람의 일생에 뭔가 계기가 있으면, 영어로 IMPACT가 있으면, 사람은 종종 달라집니다.

예) 한참 방탕하며 쾌락을 즐기던 어거스틴이 32살 때에 한 친구가 그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이 땅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 질문이 가시처럼 마음에 돋혀서 지내던 중, 어린이의 울음소리 가운데 집어 들어 읽어라는 음성으로 들려 성경을 집어 들어 읽었을 때, 눈 앞에 선명히 펼쳐진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3,14>

이 말씀이 마음눈에 확 들어온 이 순간이 그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시험에 떨어진다거나, 감옥에 갇힌다거나, 사업이 망한다거나 갑자기 암 진단을 받아 사망선고를 받는다거나 혹은 어거스틴처럼 말씀이 빛처럼 마음을 깨닫게 하는 것...등등 죽음, 끝을 보거나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박히면, 정신이 바짝 들지요. 그러면 그 때부터 성경도 부지런히 읽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영적인 열심을 냅니다.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에녹도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에녹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였겠습니까? <창5:21,22>보십시오. "에녹이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처음 65년에는 그냥 살았는데,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 낳은 것이 계기가 되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입니다.(영어 성경 NIV, And after he became the father of Methuselah, Enoch walked with God ...)

사람들이 대개는 큐티 잘하다가도 아들 낳으면 아들 재롱 보는 재미에 더 안하기 쉬운데.. 에녹은 아들낳는 것이 계기가 되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합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것이 어땠길래 에녹이 아들낳고 하나님과 오히려 동행하였습니까?

므두셀라는 성경에서 제일 오래 산 사람으로 유명하지요. 969세까지 살았습니다. 므두셀라, 이름의 문자적인 뜻은 'man of dart' 창을 던지는 사람입니다. 창을 던지다, 무슨 뜻입니까?

뉴베리(Newberry)라는 신학자의 해석에 의하면, 이런 배경입니다. 고대에 마을과 마을에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그 마을 입구에서 창을 들고 마을을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창을 던지는 사람에게 마을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창을 던지는 저 사람, 므두셀라가 없어지면 그 마을은 끝장납니다.

그래서 므두셀라에게는 이런 예언이 붙어 있습니다. "므두셀라가 죽으면 세상의 끝이 온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고 그 므두셀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는데, "이 아이가 죽으면 세상에 심판의 창이 던져진다, 이 아이가 죽는 날, 세상은 끝을 볼 것이다.." 이런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므두셀라가 죽었을 때, 세상은 끝을 보았습니다. <창5:25-27절>에 보면, 므두셀라의 아들은 라멕이고 라멕의 아들은 누구여요? 노아, 노아입니다. 그러니까 므두셀라는 노아의 할아버지이지요.

므두셀라가 라멕을 낳은 때의 나이는 몇 살? 187세. 라멕이 노아를 낳은 때는 몇 살? 182세. 그러면 노아가 태어났을 때 므두셀라의 나이는 몇 살?187+ 182 = 369세.

노아가 몇 살 때 홍수가 일어났습니까? <창7:6>에 보면 600살 때. 그러니까 므두셀라가 몇 살 때 홍수, 세상의 종말이 왔습니까? 969세. 그 나이는 므두셀라가 죽는 나이입니다. 그가 죽자, 세상에 심판의 창이 던져졌습니다.

세상에 심판의 창이 던져진다는 예고를 에녹은 자기 아들, 므두셀라의 출생을 통해서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심판의 창이 던져진다는, 종말이 있음을 깨달았을 때에 그의 여생은 달라졌습니다. 종말의 예고는 그에게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삶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기억함이 정직한 믿음의 삶, 하나님과 동행의 삶을 세웁니다.

다른 동기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예컨대, 내가 잘 되기 위하여, 내가 영적으로 성공하기 위하여, 우리 교회를 제일 좋은 교회로 만들기 위하여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는 동기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 동기로서는 종교행사에 열심을 낼 수 있어도 그의 삶을 하나님과 동행에로의 열심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전임사역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 영적인 성공을 거두겠다는 그 동기로서는 교회경영은 열심히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과의 동행이라는 지고의 믿음에는 결코 미치지 못합니다.

저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를 멋있게 잘 세워보겠다는 그 동기로서는 우리 각자가 하나님과의 동행의 삶은 못세웁니다. 교회 일에 열심을 내게는 하겠지요. 교회가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우리 교회를 잘 세워보자는 우리들의 의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교회의 각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의 멧세지, 복음의 진리를 인식하고 그에 정직히 응답하는 마음일 때 비로소 세워집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지 못하면, 인간은 하염없이 미끄러질 수 밖에 없습니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현대인들이 심각한 도덕적 타락에 빠진 원인을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현대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로 현대인들은 천국과 지옥의 이야기, 심판의 이야기를 아이들 동화 속의 이야기로 희화화시켜 놓았습니다. 희화화시켜 놓았다는 것은 재미있으라고 하는 이야기이지 실재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랬더니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말할 수 없는 도덕적 붕괴를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전도서의 결론적 말씀, 결론적 반전(反轉)을 하는 부분을 아십니까? <11: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희를 심판하실 줄 알라"

이 말씀은 대단한 역설(逆說)입니다. 역설이 지나치면 독설(毒舌)처럼 들리는 데 이 말씀은 정말 독설에 가까운 선포입니다.

한번 네 마음대로 해볼려면 해봐라. 네가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지 않거든 한번 마음대로 해 봐라.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있어서 심판하실 때 딴 소리하지는 말아라.. 이런 선포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이 땅에서의 삶이 정말로 전부이라면, 니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쉽지만 최선일 것이다, 그러니 니 마음대로 해라..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실재로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 있다면, 사람은 마음대로 못합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심각한 도덕적 타락을 보이는 이유, 사람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동화 속 이야기로 유희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있으며 주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구약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선포할 때에 그 예언을 받아서 두루마리에 기록하고 증거하던 비서격인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바룩입니다. 벼룩이 아니라 바룩입니다. 여기 바, look here!해서 바룩입니다.

그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예레미야가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 양반 뒤를 이으면, 자기도 영적인 거장이 될 것처럼 생각해서 그의 마음에 야망이 피어 오르기 시작합니다.

야망은 암처럼 전염성이 강합니다. 한번 피어 오르면 금새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바룩의 마음에 야망으로 오염되고 있음을 아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바룩에게 한 말씀, 창을 던지십니다.

<렘45:5> "네가 네 일을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그러나 너의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로 생명 얻기를 노략물을 얻는 것같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직시하면, 야망에 치우친 마음을 벗고 하나님과 순종,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비로소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고 계십니까? 지옥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당신은 정말로 믿고 계십니까? 당신의 삶이 하나님 앞에 결산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의 느낌과 의견이 어떠하든,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 당신의 삶도 하나님 앞에서 결산됩니다.

<벧전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둘째로,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11:5,6은 에녹을 평가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이 하나님을 제일 기쁘시게 할 것이라고 믿고 계십니까? 신학교에 가서 전임사역자가 되거나, 이렇게 생각하는 유행(?)은 한 물 같습니다, 해외선교사가 되면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실 것같습니까?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은 근심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에녹의 믿음의 삶,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이었고 창세기에서는 뭐라고 표현하였지요? 하나님과 동행한 자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두 말씀을 기억하면, 자연스러운 논리로 사람이 무엇으로 하나님을 제일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마음, 삶이 하나님을 제일 기쁘게 합니다. 동행, 전체의 마음과 시간을 함께 함을 말합니다. 내 시간 중에 부분적으로, 내 마음 중에 부분적으로 보이는 그 모습의 열정이 아니라,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마음과 말과 태도와 행동이 어떠한가가 중요하고 정상적인 삶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을 제일 기쁘시게 합니다.

이 진리를 명확히 가르쳐 주는 성경말씀 있지요? 구약성경 <미6:6-8>, (찾아서 읽고)무엇이 하나님을 제일 기쁘시게 합니까? 당신이 어떤 직업, 어떤 환경에서 살았느냐는 관계가 없습니다. 교회 재정을 책임지는 집사가 되는 것이, 목회자나 선교사나 전임사역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관점은 그것과 다릅니다.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정상적인 삶에서 어떻게 정직하게 살아가며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며 어떻게 하나님과 대화하며 교제하며 함께 살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십니다.

또 이 말씀은 정상적인 삶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하나님과의 동행이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것임을 깨우쳐 주는 말씀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하나님과 동행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무엇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까? 공의, 올바름을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그리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의식하며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정의와 사랑과 겸손의 삶을 드려가는 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하나님과 동행을 이야기할 때 이 사람의 이야기는 정말 잊어버리지 말고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브러더 로렌스, 기독교 역사상 두 번째로 예수님을 제일 닮은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수도원의 잡부, 그의 일터는? 수도원 지하 주방. 그의 별명은? 후라이팬과 주전자의 황태자. 다른 수도사들이 지어준 별명입니다.

중세의 수도사는 하나님을 제일 기쁘시게 하는 직업으로 손꼽혔습니다. 브러더 로렌스도 처음에는 수도사가 되기 위하여 수도원을 찾았지만 면접에서 떨어져서 수도원에서 일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매일같이, 평생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느라고 로렌스가 지어준 밥을 먹으며 섬김을 받으며 수도에만 전념했던 그 많은 수도사 중에 지금까지 이름을 남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도리어 다른 사람들 수도에 전념하라고 매일, 평생토록 밥짓고 설거지하고 하느라고 시간을 다 보낸 브러더 로렌스는 기독교 역사상 두 번째로 훌륭한 신앙인으로 존경을 받습니다.

그의 일기 중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번철 위에 고기를 구을 때에도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처럼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란 이런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당신의 마음이 무엇을 기대고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의식하며 살아가는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기대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정의를 지키는 힘, 사랑할 수 있는 능력.. 바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또 하나 하나님과의 동행이 무엇인가 기억할 때, 우리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하나님과 동행하면, 얌전하고 정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을 연상하기 쉬운데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모습을 보면,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그렇게 수동적이거나 도피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살펴 볼까요? 여러분,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면서 그가 주로 무엇하며 살았겠습니까? 물론 적지 않은 시간 기도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찾고 그렇게 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의 노동, 가족들을 위한 그의 책임, 농사하고 양을 치는 일들을 행했을 것입니다. 직업적인 일을 외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상의 부지런한 삶 가운데도 조용히 하나님께 집중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 분명히 그의 삶의 획을 긋는 특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 못지 않게 그의 삶의 중요한 특징이 된 한 가지는, <유1:14>에 나와 있습니다. 무엇인지 함께 찾아 볼까요? <유1:14> 다시 읽고.

에녹은 죄악의 세속화로 미끄러져 가는 당대의 사람들을 그냥 좌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고고한 사람, 고상한 사람으로 얄팍한 존경을 받으며 지내지 않았습니다.

에녹은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멧세지를 증거하는 일, 그냥 죄악의 미끄러짐을 보이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치는 일,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공의, 정의를 세우는 것은 죄악을 깨우침에서부터 시작입니다. 이웃사랑, 사랑은 멸망을 향하여 가고 있는 이웃을 깨우치는 것에서부터 시작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에녹 당시의 사람들이 에녹이 이 예언을 잘 받아들였겠습니까? 안받아들였습니다. 그냥 안받아들이기만 했겠습니까? 심판의 멧세지를 안받아들이는 것은 그 멧세지를, 멧신저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웠습니다" 이 멧세지 앞에서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들려 주십시오."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회개하든지 아니면 에이 좋은 이야기, 긍정적인 이야기들 놔두고 왜 꼭 저런 이야기해서 마음 상하게 하고 불편하게 하나? 오히려 싫어합니다. 아니면 그래 너 혼자 잘났냐? 분노하거나 비아냥거리기가 일수입니다.

예) 오늘 아침 매일성경 큐티 - 스데반의 설교와 베드로의 설교

에녹도 당시의 사람들에게 많이 배척을 받았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반대와 멸시, 냉대 속에서도 에녹은 혼자 도피하여 고고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 세속적 사람들에게 적당히 관계를 좋게 하여 편하게 잘 지내는 그런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처세를 잘 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이 아닙니다. 공의를 행하며 하였듯이, 에녹은 심판의 멧세지를, 회개의 멧세지를 증거하며 살았습니다. 인자를 사랑하며 하였듯이, 죽어가는 이웃들을 그냥 편하게 놔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혼자 고고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을 고상한 척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산신령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영적인 폼잡고 살아가는 그 모습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치열한 증인으로서의 삶을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루 중 조용한 시간을 떼어놓아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집중하여 교제하는 시간을 갖았는가 한편, 세속의 세상에 회개의 멧세지를 불을 토하듯이, 증거하며 사는 것, 하나님 앞에 정적인 침잠과 세상을 향하여 역동적인 참여가 함께 하는 인생, 그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당신도 이 삶을 도전하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삶, 하나님과 동행의 삶을 추구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셋째로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의 삶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관계,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결혼을 해야 함께 사는 것이 당연하지요? 관계를 맺어야 동행이 가능합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습니까? 혹시 교회 오래 다니다 보니 그냥 교회생활에 익숙해진 것만은 아니십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내가 아버지와 자녀로 관계가 회복되어야 성령을 받고 그 성령님에 이끌리어 동행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의 동행, 우리의 열심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 이끌리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어떻게 받습니까? 성령은 우리가 떼써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을 낸다고 성령을 받는 것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십니다.

흔히들 행2장에서 사도들과 교회가 열심히 기도할 때에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행2장> 자세히 보면, 그들이 모였을 때에 성령께서 갑자기 임했다고 했지, 열심히 기도하니까 성령을 주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이 모였을 때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성령을 받는 조건은 아닙니다.

도리어 <행2:38>을 보십시오. 성령을 어떻게 받는가 명확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두 가지 명령과 두 가지 축복의 선물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 축복의 선물은 죄사함과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두 가지 명령은 회개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침례는 믿음, 예수님의 주인되심을 고백하는 의식입니다.

먼저 회개가 중요합니다. 회개가 있어야 성령을 받습니다. 내가 얼마나 오만하고 어리석고 잘못된 각도에서 생각을 하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기 위하여 무엇이 필요합니까? 사도행전 2장의 백성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깨달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제발 먼저 들으십시오. 당신의 오만한 판단으로 가위질하지 말고 들으십시오. 종종 사람이 듣고도 회개안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죄인됨이 마음에서 깨달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인정을 안해서 문제입니다. 회개는 나의 어리석음, 오만함, 꼴불견, 연약함 등을 깨닫는 것을 넘어서 인정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 회심이 있어야 예수님을 믿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얼마나 웃기는 존재인지 깨달아 아셨습니까? 잘난 것 하나도 없으면서 끊임없이 잘난 척하려는 존재, 남의 티는 보면서 내 눈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존재, 이기적 속내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데도 아니라고 우기는 존재,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강한 척 하는 존재... 결국은 이익이 목적, 자기 영광이 목적인데 아닌 것인양 꾸미고 우기는 존재, 정말 가관인 존재임을 깨달으셨는지요? 가면을 벗으십시오. 껍데기를 버리십시오. 당신이 아무리 초라한 모습일지라도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심을, 있는 모습 그대로의 당신, 생긴 모습 그대로의 당신을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사랑을 신뢰하고 가면을 벗고 예수님 앞에 나아오십시오.

회개하고 그렇게 당신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께 당신의 마음과 삶을 의탁하십시오. 그 믿음으로 침례를 받으십시오.

이 회개와 믿음의 마음에 하나님께서는 죄사함의 은혜를 베풀며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비로소 성령께서 내 안에 계셔서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참 믿음의 순례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으십시오.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십시오. 신앙인의 진수인 동행의 삶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떻게 동행의 삶을 세워갈 것인가 둘째로는,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과 집중해서 만나는 절대적인 습관을 갖으십시오. 하나님과의 동행은 늘 하나님 의식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종교개혁가들의 삶의 모토였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 예배당에 있을 때뿐만이 아니라, 직장에서도, 여가를 보낼 때에도 하나님 의식하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묻고 생각하며 사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은 우리 중심으로 생각하고 바라보는 데 너무나 많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동행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과 동행의 삶을 잘 세우도록 돕는 구체적인 방편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신실하게 지속해 가는 습관을 들여가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인물에서 이 예를 들면, 다니엘입니다. 그가 세상 관원들의 궤계 앞에서도 태연할 수 있었고 분노한 임금 앞에서도 분노로 맞대응하지 않을 수 있었고 또 사자굴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함으로 태연할 수 있었던 비결은, <6:10>에서 가르쳐 주듯이 "전에 행하던대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습관.. 거기에 능력의 비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 같으면, 일주일 168시간 중에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배우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 주일예배와 성경공부, 함께 기도하는 시간, 개인적으로 매일 말씀과 기도로 교제하는 시간... 이 시간은 신실하게 우선순위를 지켜가는 것을 말합니다.

지난 주의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 이 하나님을 배우고 교제하는 시간을 절대적인 습관으로 떼어 놓지 못하면, 하나님과의 동행, 그로 말미암은 은혜와 능력은 경험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입은 사람들의 간증을 한번 살펴 보십시오. 예) 국민일보사에서 나온 역경의 열매라는 책을 보십시오. 이들의 한결같은 공통적인 습관은 그들이 하나님을 배우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절대적인 시간, 습관을 들였다는 것입니다.

예) 우형철 형제, 에릭 리들 - LG 회사 입사했을 때. 직장에 아예 미리 이야기를 하십시오. "저는 주일에는 뛰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이 완성된 아름다운 건물이라면, 하나님을 배우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떼어놓는 것, 이것은 건물의 기둥과 같은 것입니다. 기둥없는 건물, 흔들려 결국은 무너집니다.

기둥을 세우십시오. 뼈대없는 집안처럼 이 바람에 흔들리고 저 바람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 시간은 하나님과 관계해서 절대적인 우선순위를 두는 시간에서부터 하나님과의 동행은 익혀집니다.


셋째로, 하나님과 뜻을 같이해야 합니다. <암3:3> "두 사람이 의합치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의기투합해야 동업을 하든지 동역을 하든지 동행을 하든지 할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설마 내 뜻에 하나님께서 온전히 동조해 주기를 바라는, 오만한 마음은 아니겠지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을 아는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로 가서 모든 사람으로 제자를 삼아 침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 형태가 다양한 모습일지라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임하도록 가서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믿게 하고 가르쳐 지키게 하여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목적이, 소원이 무엇입니까? 당신은 인생의 목적을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의기투합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당신의 인생을 걸 때에, 하나님의 뜻에 의기투합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해 주십니다. <마28:20>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과 뜻을 같이하는 삶, 하나님의 뜻에 인생을 건 사람, 그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경험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뜻을 같이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그 영광스러운 소명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하셔서 동행해 주시는, 그 스릴넘치는 신나는 삶에 성령님은 오늘 당신을 초청하십니다.

그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하나님과의 동행의 삶, 한번 함께 드려가 보시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세상, 세대에도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웠음을 기억한다면, 하나님과의 동행을 삶을 추구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에게 하나님께서 죽음을 건너 뛰어 하늘에 올리우시는 능력을 베푸셨다면, 오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에게 어떤 능력과 은혜인들 베풀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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