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인생의 태풍속에서 / 마 14:22~33

  • 잡초 잡초
  • 1705
  • 0

첨부 1



인생의 태풍속에서
마태복음 14:22~33

초등학교 1학년 산수 시간,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덧셈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1더하기 1은 얼마죠?” “2지요?” “2더하기 2는 얼마입니까?” “4지요?” 그리고 아이들에게 약간 어려운 질문을 합니다. “6더하기 6은 얼마입니까?” 1학년짜리 꼬마들이 손가락으로 덧셈을 해보자니 손가락 두 개가 모자랍니다. 하다가 안 된 한 어린이가 하는 말. “쉬운 건 지가 다하고”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나면 제대로 배웠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점검을 받아봐야 합니다. 그것을 테스트라고 합니다. 테스트를 통해서 더 배워야 할 것은 없는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테스트는 배우는 사람에게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가르치는 선생님도 이를 통해 바르게 가르쳤는지 점검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신 후 질문을 자주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혹은 엉뚱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알고 싶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의 본질적인 모습은 말씀 듣고, 기도하고, 예배드릴 때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신앙인다운 선택과 행동을 할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주님께서는 신앙인에게 어려운 일을 때때로 허락하셔서 우리가 진짜 믿음의 사람인지를 확인하고자하십니다. 오늘 제자들이 받는 테스트를 보면서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찾고 다시 읽는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22절에서 아주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고 난 제자들을 예수님은 서둘러서 배를 태워 건너가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여 배를 탄 제자들은 가는 길이 평탄할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상 밖의 엄청난 태풍과 폭우에 시달려 무려 9시간 동안 사투를 벌입니다. 예수를 믿다보면 이런 경우를 종종 당합니다. 예수를 믿고 순종함으로 인생이 평탄하고, 안고 있던 문제도 해결되고, 생활은 더욱 편안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태풍과 어려움으로 정신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당신의 말씀에 순종한 제자들에게 인생의 태풍을 허락하셨을까요? 주님은 왜 주님 말씀 따라 살고자하는 우리에게 어려운 일을 겪게 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몇 주간 계속해서 인생의 광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복잡한 세상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하나님 음성을 듣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 음성에 집중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기회로 주신 것입니다. 인생 광야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속에서 들으면 들을 수 없고, 들어도 쉽게 잊어버릴 음성에 대해 ‘주목(attention)’하라고 태풍을 통해 또한 경고하십니다. 광야와 마찬가지로 태풍 속에서 우리게 진정 하고 싶은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때는 하나님께서 항상 세 가지를 보이시는데, 첫째는 환경을 살피게 하시고, 둘째는 우리 자신의 실체를 보게 하시고, 셋째는 그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게 하십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태풍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인생에 대해서 알기를 원하십니다. 24절 말씀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고 했습니다. 인생의 길을 항해에 비유합니다. 인생은 순탄하게 흘러갈 때도 있지만 걸음걸음 마다 역풍이 불어올 때도 많습니다. 모든 것이 순탄하면 좋으련만 역풍이 불어올 때 마다 거스르고 나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물결이라고 표현된 단어를 분석하면 큰 파도가 쉴 새 없이, 끊임없이 몰아치는 것을 표현하는 헬라어입니다. 또 ‘고난을 당하였더라’는 뜻은 임신한 엄마가 아이를 해산할 때의 울부짖음과 괴로움을 말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불어오는 역풍을 맞으며 피곤하고 지치도록 노 젓던 제자들이 고통스러워서 해산하는 여인이 고함을 지르는 것과 같은 괴로움 중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한밤중’이란 단어에서 쉴 곳을 찾을 수도 볼 수도 없는 우리 인생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어려움과 고난을 이기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이 세상은 원래가 시험과 고통이 많은 세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우리는 보통 이 땅이 아름답고 아름답기 때문에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땅의 것으로 여기서 새로운 멋진 인생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세상은 어느 한 순간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고는 고통과 아픔으로 몰아갈 수 있음도 압니다.

몇 주 전, 예쁜 얼굴과 모습을 사고로 다 잃어버린 이지선 자매의 조용하지만 중요한 충고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자매는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저는 고통이나 불행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도서관에서 나올 때만 해도 새로운 미래를 생각하며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분이 채 안되는 짧은 순간 제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불행이라는 운명이 왔습니다. 여러분, 제가 그랬듯이 불행의 주인공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될 수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마시고 그들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덧붙입니다. “그래도 저는 얼굴에 화상을 입었기에 겉으로 쉽게 드러나니 이야기라도 할 수 있지만, 말 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로 말도 못하고 끙끙거리며 고통 받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인생은 우선에는 대단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날 불어온 태풍은 소중한 것을 다 빼앗고 맙니다. 배의 방향을 바꿔버리기도 하고 파손시키기도 합니다. 욥은 한순간에 인생의 폭풍으로 재산과 자녀, 아내와 건강까지 잃게 됩니다. 이렇듯 세상에는 사랑할 것도, 자랑할 것도 없는 곳입니다.

이번 ‘매미’의 영향으로 130여명의 사람이 사망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태풍에 휩쓸려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던 한 예비부부의 죽음은 많은 사람을 비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사랑과 미래가 함께 사라졌습니다. 부서진 희망의 조각들만 부모 가슴에 상처로 남기고 그들은 그렇게 떠나가 버렸습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로 두 딸을 잃은 40대 어머니는 아픔을 견디지 못하여 방황하다가 이번 태풍에 휩쓸려 함께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아버지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남겨진 아버지의 몸부림 속에 바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비단 이 가정만의 불행입니까? 우리에게도 언제든 닥칠 수 있는 불행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렇듯 고통이 가득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안 먹고, 안 입어 가며 모았던 무려 5조 5천여억 원 상당의 재산상 피해도 입었습니다. 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는 다시 복구 할 수 있다지만 무너진 마음의 둑은 누가 재건해 줄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만난 태풍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을 피상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곳곳 깊숙이 죄로 말미암아 신음하게 된 이면을 직시하라 말씀하십니다. 전도서 2장 22절부터 23절까지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알게 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이 땅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태풍을 통해서 제자들이 자기 자신들을 살피기 원하셨습니다. 26~27절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무서워하고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은 제자들은 어부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다를 잘 압니다. 거친 태풍을 여러 번 겪어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태풍 앞에서 너무나 무기력한 모습으로 사투를 벌이며 죽음만이 마지막 종착역인양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큰 문제없는 평소에는 물질이나 경험, 권력, 지식 등이 자신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나 정작 태풍이 불 때 도움을 얻지 못하고 비참해질 뿐입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무서워한 이유는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려울 때 도와줄 사람이 있다면 그토록 힘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배는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떨어져 있습니다. 때는 밤입니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사실이 태풍을 만난 사람들을 더욱 고독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태풍을 벗어날 희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희망은 바로 곁에 있었지만 볼 줄 아는 눈이 없었습니다. 그들을 도와 줄 주님이 계셨지만 찾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가끔 신문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의 기사를 보며 우리는 ‘왜 자살을 할까? 그래도 살길이 있었을 텐데......’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 눈에는 살 길이 보이지만 당사자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보십시오. 그들은 슬픔과 절망으로 젖어있었기 때문에 주님이 동행하셨건만 알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난을 당할 때 아무리 둘러봐도 희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절망하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같이 두려워하는 우리를 두고 성경은 ‘둔하여졌다’고 말합니다. 존 맥스웰 목사님은 두려움이라는 것은 '무기력을 낳고, 모든 일을 미루어서 행동하지 않게 하고,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게 하며, 변명으로 그의 삶을 살게 하며, 에너지를 잘못 사용하여 오히려 자신을 죽이는데 에너지를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모습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평소 자랑하며 스스로 대단한 것처럼 여기던 우리는 태풍 앞에 한갓 보잘 것 없는 피조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진짜 모습, 우리가 있던 진짜 삶의 자리를 명시해주는 장면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가 베드로가 배를 떠나 물위를 걷기 위해 배에서 발을 떼는 순간 발견되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 주인으로 신뢰하기 전에 있던 삶의 자리는 ‘배 안’인 것입니다. 배가 태풍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것이라 아주 자연스럽고도 의심 없이 믿습니다. 우리를 보호해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품위와 삶의 안전을 약속해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 안락과 안주의 배 안에서 태풍을 맞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배가 나를 태풍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시카고의 윌로우크릭 교회에서 설교 목사로 계셨던 존 오트버그 목사는 ‘당신의 배는 무엇입니까?’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배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당신에게 안락과 안전을 보장하는 모든 것이다. 배는 당신이 유혹 받을 때, 인생의 폭풍이 일 때 의지하고 싶은 모든 것이다. 타고 있으면 너무 편안해서 물 위에 계신 예수님께 가지 못 한다 해도 포기할 수 없는 모든 것이다. 배는 극한적인 제자훈련의 모험으로 가려는 당신을 붙드는 모든 것이다. 당신의 두려움이 그것을 말해준다. 자신에게 물어보라.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딛으려할 때 가장 버리기 두려운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당신의 직업인가, 관계인가, 명예나 자존심인가, 또는 은밀한 사생활인가, 아니면 성공인가 아니면 인정받고 싶은 욕구인가?’

존 목사님의 말씀처럼 배 안에 머무는 것은 안주하는 것입니다. 배 안에 안주하게 되면 5달란트와 2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 중 한 달란트를 받은 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물위를 걷는 것이 두려워서 자신이 가진 한 달란트를 붙들고 안주하려 한다면 반드시 슬퍼하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경고하신 주님의 경고를 듣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믿음의 걸음을 걷지 않으면 우리는 실패를 경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실패 없는 길이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죽음의 길이 될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니고데모도 배를 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젊은 부자 관원인 그에게 예수님을 따르기 원한다면 안주의 배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가진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르라 말씀하시지만 니고데모는 아주 고급스러운 요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배를 떠날 수 없습니다.”라고 선언하고는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대로 배를 떠나서 물 위를 걷는, 주님을 의지하고 나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 할 참 된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껏 지켜준다고 믿었던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물 위를 걷는 그의 걸음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걸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나로 물 위를 걷게 하시는 주님의 테스트에서, 주님을 의지하며 태풍 가운데서도 한 걸음 한 걸음 내 딛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답하시지 않으시렵니까?

진정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 자신의 참된 실체를 볼 수 있는 사람 그 사람만이 겸손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 하나님께서 태풍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려 하셨던 것은 참된 주님을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27절 말씀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말씀합니다. 또 33절 말씀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는 고백이 나옵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을 바르게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경험하고 난 후 제자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 경제적 메시아로 이해하며 왕으로 세우고자 했습니다. 본문 첫 구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시는데 앞서 제자들을 빨리 건너편으로 가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이해하여 왕으로 세우고자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주님을 그렇게 알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예수님 당신의 모습을 온전히 발견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가복음 6장 48절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지나가다’는 헬라어로 ‘파레르코마이’인데, 이것은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옮길 때 사용된 단어로 ‘하나님의 나타나심, 신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전문 용어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노 젓고 있는 제자들 옆을 지나가신 것은 ‘나는 물위를 걸어 다니고 있다. 너는 태풍에 시달리고 있니?’ 하며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에 메시야로서 나타나기 위한 의도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구원해줄 사람 없을 때 그 고통과 고난에서 건져줄 메시야로 말입니다. 여러분, 이 원어는 모세와 엘리야에게 나타나셔서 그들 앞을 지나가실 때도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실 때 불타는 떨기나무나 바람으로 혹은 물 위로 걷기 등을 통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셨습니다. 그 부름 앞에 응답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즉,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 앞을 지나갔던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기 위한 의도가 있었습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라고 말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원래 헬라 원어는 주어를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동사 속에 이미 주어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굳이 주어를 쓰는 경우는 강조할 때입니다. 태풍 속에 노 저으며 사투를 벌이는 그들에게, 또 유령이라 외치는 그들에게 ‘내니 두려워 말라’의 ‘에고 에이미’라 말씀하심은, 모세가 하나님께 ‘하나님, 저 백성에게 나를 누가 보냈다고 할까요?’ 라는 질문에 ‘스스로 있는 자’가 보내었다고 하라신 하나님의 말씀과 같습니다. 고통과 괴로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다가가셔서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메시야다! 나는 너희의 제사장이요 왕이요 너희의 선지자다! 너희의 짐을 대신 져주고 너희를 인도하고 보호할 참 진리의 하나님이다!’라는 사실을 확고히 해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럴 때 다른 제자들은 주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보았습니다. ‘주여’라고 부릅니다. ‘구세주여, 제가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다면 물의를 걸으신 주님의 능력으로 능히 나도 물 위를 걷게 하실 수 있습니다.’ 태풍이 불고 배 안에서도 안전할 수 없는 때에라도 베드로는 물 위를 걷게 하실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고난과 절망과 좌절의 현장 속에서 구세주 되신 하나님을 알고 바로 고백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가장 어렵고 심각한 상황 속에서 주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며 태풍 가운데 걸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14장에서 한두 장 지나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곳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시는 유명한 질문과 고백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는데 이 고백은 본문의 물위를 걷는 사건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아무도 도울 수 없는 가운데 찾아오셔서 도와주시고 구세주가 되셔서 물 위를 걷게 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야 말로 전능하신 구세주라는 것을 결론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단순히 우리가 주님을 선지자나 선생 정도로 알고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이미 밤은 깊었고,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태풍은 불고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그 때에 물 위를 걸어오셔서 친히 하나님이 되어주실 분으로 우리의 인격과 마음을 다해 받아들이고 또한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야곱은 벧엘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잤습니다. 이 돌 베개는 말씀 드렸던 것처럼 두려움과 외로움, 고독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곳에서 그가 하나님을 발견했을 때 돌베개는 오히려 주님을 섬기는 전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름을 붓고 섬기는 제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많은 이유 중에 삶의 폭풍과 어려움 가운데서 만났던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오늘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깨닫기를 원하시고,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이 땅의 썩어질 것에 집착하지 말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눈에 좋아 보이는 것들도 영원히 간직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시고자 하십니다. 또한 진정한 우리 모습을 보게 만드십니다. 배 안에 안주하고 있는 나, 내가 의지하고 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결국 파선하고 말 것이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진정 의지해야 할 바는 내 자신이 아니며 고난과 역경 속으로 걸어오시는 주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의지합시다.
 
인생의 태풍을 만나셨습니까? 그동안 배워온 주님 신뢰하는 믿음을 테스트해 볼 기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물 위를 걷게 하시듯 능력의 주님을 체험할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인 것입니다. 풍랑으로 인해서 세상 줄이 끊어졌을 때 진정 믿고 사랑해야 할 그 분, 의지할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나아간다면 오늘 우리 삶은 태풍 가운데서도 물 위를 걷는 베드로의 삶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보기 원하십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개인 개인을 통해서 물 위를 걷는 베드로의 삶을 보기 원하고 계십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