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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구를 위하여 심습니까? / 갈 6: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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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누구를 위하여 심습니까?
본문  갈라디아서 6:6~10


오늘 본문 가운데 7절 뒷부분의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말씀이면서 동시에 엄숙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나는 과연 무엇을 심었는가?’ 하는 질문을 갖게 됩니다.
이 질문은 삶의 후반부에 이른 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청년들에게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질문입니다. 잘 심어야 잘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은 ‘나는 지금 무엇을 심고 있는가?’ 한 번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우리는 이 질문을 종종 자신에게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새날을 맞이하면서 ‘어제 무엇을 심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이제 새 주간이 시작되었는데 ‘지난 주간에 무엇을 심었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틀 뒤에는 9월이 끝납니다. ‘9월에 무엇을 심었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제와 무엇인가 다른 오늘, 지난 주일과 무엇인가 다른 새 주일, 9월과는 무엇인가 다른 시월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8절에 이르러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이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갖게 됩니다.
‘나는 무엇을 위하여 심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라고 말하고 있는데 성령은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을 위하여 심었는가?’ 하지 말고 ‘나는 누구를 위하여 심는가?’ 이렇게 바꾸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실 ‘누구를 위하여 심는가?’ 하는 것에 따라 ‘무엇을 심는가?’ 하는 것이 결정됩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고 하면서 나쁜 것을 심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누구를 위하여’ 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인류의 비극이 이 문제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에 시작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왜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셔서 아담과 하와가 그것을 따먹게 했는가?’ 하는 질문을 갖습니다.
여기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인데 가장 기초적인 답이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하나님은 선악과와 함께 선악과보다 훨씬 더 귀한 의지의 자유를 주셨다. 인간은 로봇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순간, 순간 윤리적인 결단, 신앙적인 결단을 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는 존재로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여러 가지를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귀한 것이 ‘의지의 자유’ 이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의지의 자유는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의지의 자유’인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로, ‘사람을 위한 자유’로 잘못 사용했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과 같아지는 일을 위하여 사용했습니다.
여기서 낙원 상실의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을 위하여’의 결론은 영생,
‘나를 위하여’의 결론은 낙원 상실,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위하여’라는 말을 참 많이 씁니다. ‘엘리제를 위하여’ ‘황제를 위하여’ 건배할 때도 ‘위하여“ 그 가운데에서 제일 좋은 ’위하여‘는 ’성령을 위하여!‘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명작이 있는데 교회는 불신자들을 위하여 천국 종소리를 끊임없이 들려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전 영지주의자들처럼 ‘육체는 악하고 영혼은 선하다’는 극단적인 사고를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몇 주 전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성경에서 ‘육체’라는 말은 대개 ‘세속적인 사고’ ‘세속적인 가치관’ ‘세속적인 행동’을 뜻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욥기에 나오는 욥의 세 친구 가운데 엘리바스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빌닷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엘리바스는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 자기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여러 가지 충고를 하고 말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엘리바스는 ‘내가 본 대로는 악을 갈아 재난을 뿌리는 사람은 그대로 거두더라’ 라고 합니다(욥4:8).
엘리바스처럼 경험이 풍부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말에 공감을 하게 됩니다.

잠언서 22장 8절에도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호세아서 8장 7절에는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사람들은 바람을 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광풍을 거두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심는가?’ 하는 질문과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답을 바탕으로 몇 가지 질문을 만들고 답을 찾는 가운데 은혜와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을 무엇을 말합니까?

이 질문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다른 이름입니다. 특별히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성령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것,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입니다.
특별히 전도하는 것,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찬송가 260장  “새벽부터 우리 사랑함으로써 저녁까지 씨를 뿌려봅시다”를 불렀습니다.
이 찬송가는 가사의 내용이 오늘의 본문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만 작사자의 생애가 더욱 그러합니다. 
이 찬송가의 가사를 지은 분은 미국의 노울스 쇼 목사(Rev. Knowles Shaw: 1834~1878) 목사입니다. 쇼 목사의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면서 가죽을 손질하는 사람이었는데 믿음이 대단히 좋았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 아들에게 ‘어머니에게 효도를 다 하고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는 유언을 하고 자기가 아끼던 바이올린을 주었습니다.
쇼는 음악적 재능이 대단히 많아 파티 같은 장소에서 아버지의 유물인 바이올린을 연주하여 많은 수입을 올렸습니다. 인기도 점점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의 마음속에 심어준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여라’ 이 말이 그의 마음에서 늘 떠나지 않았습니다.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어느 큰 파티 장소에서 회심을 하고 그 다음 주일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스물네 살 때부터 설교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쇼 목사님은 사실은 찬송가 작사자보다는 설교자로서 더 잘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분이 얼마나 설교를 잘 했든지 ‘쇼 목사님은 바울처럼 조리가 있었고 베드로처럼 담대하였고 요한처럼 상냥하였고 셰익스피어처럼 모든 면이 자연스러웠고 무디 같이 꾸준했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심어준 한 마디의 유언이 한 능력 있는 설교자요 찬송가 작사자라는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오랫동안 기복주의를 심었습니다. 기복주의는 복 받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복은 따라오는 것이지 바라고 나갈 것은 아닙니다.
이 기복주의라는 것은 뿌리가 좀 약합니다. 그 결과 지금 많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을 때 어떤 일이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께서 심을 것을 더 풍성하게 주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은 비와 눈을 주셔서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사 55:10).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9장 10절에서 하나님을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심을 것을 주시어서 풍성하게 하시고 의의 열매를 더하시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전도를 처음 할 때는 누구에게 전도할 지 몰라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런 고비를 겪으면서  한 사람, 두 사람에게 전도를 해 나갑니다.  전도를 많이 하면 전도대상자가 줄어들어야 하겠는데 그 반대입니다. 이 사람에게도 전도해야 하겠고, 저 사람에게도 전도해야 하겠고, 전도 대상자들이 점점 더 많아집니다.
111 전도대상자 카드를 내는 데 전도할 사람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억지로 한 사람을 생각해내서 카드를 냈습니다. 이제 전도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저 사람에게도 전도해야하겠다’ 그래서 전도 카드를 하나 더  냅니다. 이런 분들이  여러 분 계십니다. 다섯 번 낸 분도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더 신뢰하게 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선을 행하면 때가 이르매 거둔다는 것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이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운행에 대해 근본적인 신뢰를 갖게 됩니다.
농부들은 ‘땅은 진실하다’라고 말합니다. 애쓴 만큼 보답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보다 더욱 진실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당연하지요. 하나님은 땅을 만든 분인데 하나님이 신실하니까 피조물인 땅도 진실한 것입니다.

요약해서 말하면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더 많은 것을 심게 되고 믿음이 더욱 깊어집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합니까?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 5장 7절과 8절에서 이 일에 대해 강한 어조로 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선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지 않고 성령을 위하여 심은 사람으로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집요하게 유혹할 때 요셉은 이것을 단호하게 물리칩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39:9b) 하면서 물리칩니다.
만일 이 때 요셉이 그 여자의 유혹을 받아들였다면  요셉은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가 되었을 것이고 그는 썩어질 것을 거두고 말았을 것입니다.
시위대장의 아내가 요셉과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가졌겠습니까?
일시적인 정욕을 채운 다음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요셉을 해쳐 자기의 부정을 덮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육체를 위해 심는 일을 물리쳤는데 그 요셉은 오랫동안 고통을 참고 기다려야했습니다.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풀어준 다음에도 만 이 년 이상을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것을 참고 이겨냄으로써 그는 애굽의 국무총리가 될 수 있었고 굶주림에 시달리며 사라져 버릴 뻔한 동족을 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욥 역시 오랜 기간 고통을 겪으면서 그것을 이기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계속해서 심는 가운데 많은 것을 깨닫고 문제가 잘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안내 잘 한 인물의 본보기가 되어 “욥의 인내”라는 말이 생기게 했습니다.
아까 읽어드린 야고보서 5장 7절고 8절에 이어지는 10절과 11절의 말씀을 읽어 드립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우리는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잘못 심어서는 안 됩니다.
선악간에 금방 보응이 없다고 하여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보상이 없다고 부인하고 의심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까 소개해 드린 찬송가 260장의 작사가 쇼 목사님에게는 세 딸이 있었는데 이 세 딸이 모두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쇼 목사님은 그 슬픔을 이기며 묵묵히 말씀 전파 사역에 헌신하는 가운데 영감을 얻어 이 찬송시를 썼습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무엇을 거두게 됩니까?

본문은 영생을 거두게 된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만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밭 역할을 한 사람도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아셔야합니다. 성경에서 영생을 말할 때는 많은 경우 ‘현재적 영생’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한국 여권을 가진 사람은 다른 나라에 살아도 한국 사람인 것처럼 믿음을 가져 영생을 약속 받은 사람들은 이 땅에 살아도 영생을 누리고 기쁨과 소망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심습니까?

이왕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많이 심어야 합니다. 선한 일을 많이 해야 하고 전도도 많이 해야합니다.
많이 심어야 많이 거둘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6절은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동안 ‘교회는 양이 중요하냐? 질이 중요하나?’ 하는 것을 가지고 많이 토론했지요.
그 때 나온 말이 ‘양속의 질’입니다. 양이 많아야 질도 높아진다는 말인데 사실이지요.

우리는 어떻게 심습니까?

6절에 가르침을 받는 자와 가르치는 자의 말씀이 나옵니다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심는 일의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가르치는 생활을 여러 해 한 일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교사를 4년 반 했고 신학교 시간 강사를 십여 년 했습니다. 
불성실하게 가르쳤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런데 주인의식을 가지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부터 방송사에 출입하다가 목회를 해야하겠다고 그 길로 들어갔는데 깨져서 매우 낙심하고 지방에 가서 고등학교 교사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신학교에서 주로 담당한 과목은 국어였는데 신학교에서 국어는 중요한 과목이 아니지요. 교육부에서 정한 교육과정을 충족시키기 위한 과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변에서 맴돌았습니다.
그 때 가르친 사람들을 만나 ‘저 목사님에게 배웠습니다’ 하는 인사를 받을 때는 ‘그 때 주인의식을 가지고 좀 더 잘 가르칠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제 집의 막내딸 결혼식이 있어서 많은 분들이 왔는데 그 가운데는 그 때 가르친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연락해서 많이 왔습니다.  어제 준비한 인원보다 하객이 많아 불편을 드린 주된 이유는 목양교회 성도들의 사랑 때문인데 이것도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교회에서 가르친 사람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교회학교 교사는 성적을 매길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학부모 모시고 오라고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한 주일에 한 번 만나는 것인데, 그거 평생 갑니다. 아마 천국까지 이어지겠지요. 중요합니다. 교회학교 교사들, 이것을 분명히 아셔야합니다.
어제 하객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선생님, 선생님은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교회에서 선생님께 배운 사람입니다’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목사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더군요. ‘아, 한 번 교회학교 선생이면 영원히 선생이로구나!’ 알았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후회되는 것이 ‘아, 그 때 좀 더 잘 가르칠 것을! 좀 더 모범을 보이기 위해 힘쓸 것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기준으로 하면 ‘좀 더 잘 심을 것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실하게, 잘 심기 위해서 힘쓰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물욕과 정욕과 감정과 향락과 허영과 사치 등 자기 중심적 생활을 하여 멸망 당하지 말고 성령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하여 영광과 존귀와 영생의 축복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을 잘 살피면  9절과 10절에 와서 변화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앞에서는 “형제들아” “너희는” “너를” “너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6장 1절과 2절을 보세요.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정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는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손가락이 밖을 향하고 있습니다.

9절에 와서는 “우리는” 이렇게 바뀝니다. 9절과 10절을 보세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손가락이 안을 향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고 때가 이르면 거둔다는 이 진리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자신이 낙심하지 않고 선을 행하고 전도하도록 스스로를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은 바울의 속을 많이 썩게 만들었습니다. 애써 전도해서 믿음을 갖게 하고 교회를 만들었는데 유대주의자들의 꼬임에 빠져 바울을 배신하고 도로 율법으로 돌아가는 교인들이 많았습니다.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그 갈라디아교인들을 훈계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격려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표준새번역개정판」과 「공동번역 성서 개정판」은 9절을 좀 다르게 번역했습니다. 「표준새번역개정판」으로 7절과 8절을 읽어 드립니다.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기 육체에다 심는 사람은 육체에서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에다 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원어 해석의 문제인지, 사본의 문제인지 알 수 없으나 사람과 성령을 밭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 것을 읽으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네 가지 땅에 뿌려진 씨의 비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씨를 뿌리는데 길 가에 떨어졌고, 어떤 씨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졌고 어떤 씨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졌는데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한다는 것입니다(마13:1~9).
성령을 위해 심는 것, 성령에다 심는 것은 좋은 땅에, 가장 좋은 땅에 심는 것입니다

추수의 계절이 되었습니다. 올해는 풍년이 아니라고 합니다. 농민들을 어렵게 만드는 소식들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습니다. 마음이 쓸쓸해집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우리는 심고 거두는 일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올해 이렇게 농사형편이 좋지  않은 이유가 여럿이지만 제일 근본적인 것은 사람들이 그 동안 교만을 심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성령을 위해 심는 일에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하십니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제일 빠릅니다. 지금 새로 성실하게 성령을 위해 새로 심으시기 바랍니다.

농사는 심는 때와 거두는 때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농사는 늘 심는 것입니다.
일 년에 두 번 거두는 것을 이모작이라고 하고 세 번 거두는 것을 삼모작(三毛作)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농사는 여러분 상모작(常毛作)입니다. 늘 심고 거둡니다. 거두면서 오늘 본문이 진리인 것을 깨달으면서 다시 심는 것이 인생입니다.

삶의 농사, 믿음의 농사는  끝까지 심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호흡이 끝나는 순간까지 무엇을 심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어떤 분이 숨을 거두면서 기쁜 얼굴로 ‘나는 이제 하늘나라로 간다’고 했다면 그것은 천국의 존재와 영생의 확신이라는 씨를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심는 것이 됩니다.
그 사람은 하늘나라의 상급이라는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이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면서 원수를 용서하시고 가장 자격 없는 사람, 강도를 복 주셨습니다. 끝까지 사랑을 심으셨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위하여 심고 계십니까?
아니 누구를 위하여 심고 계십니까?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서 오래 참고 기다라십니까?
얼마나 심고 계십니까?
어떻게 심고 계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성령을 위하여 심고 있습니다.’
‘나는 오래 참고 기다리며 심고 있습니다.’
‘많이 심고 있습니다.’
‘정성을 다 해 심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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