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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견고한 기초 위에 영적 성숙을 위하여 나아가십시오.② / 히 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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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견고한 기초 위에 영적 성숙을 위하여 나아가십시오.②- 영적 성숙의 과정 
본문 : 히 5:11 - 6:12


지난 주에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어떤 특징이 있는가를 보았고 오늘은 그러면 어떻게 영적 성숙을 이루어갈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영적 성숙은, 다시 말씀드리면, 순간적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두르지 말라, 그러나 결코 쉬지말라"는 존 번연의 권고가 잘 적용되는 곳이 영적 성숙의 영역입니다. 영적 성숙은 점점 더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인격과 삶의 성숙의 과정을 자세히 살펴 보면, 다양한 경험과 많은 신앙의 칼라들, 여러 가지 삶의 양상들 가운데서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맥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영적 성숙은 내 안의 모순을 깨닫고 극복해 가는 과정입니다.
영적 성숙은 내 안의 모순을 깨닫고 극복해 가는 과정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런 말씀 기억하시지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잘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잘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것이 모순입니다. 또 <마18장>의 일만 달란트 빚을 용서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잔인하게 대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8억원의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몇 십만원 빚진 것을 용서하지 않는 마음, 이런 류가 모순입니다.
우리 사회에, 사람들이 사는 곳에 이런 모순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정부에서 부동산 투기를 근절한다고 하여 부동산 업자들을 단속하니 부동산 업자들이 이번에는 부동산 투기를 하는 정치인들을 공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부동산 투기 방지법을 결정하는 국회의원들이 뒤로는 다들 부동산 투기를 하고 있는 것, 모순이지요. 군대가면, 쫄병때 고참들이 무식한 언행을 하면, 속으로 죽일 놈, 죽일 놈 하면서 속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고참이 되면 절대로 저러지 말아야지.. 그러나 그가 고참이 되면 왕왕 더 죽일 놈이 됩니다. 그래서 군대가 몇 십년이 지나도 고참이 쫄병 못되게 구는 군발이 문화는 쉽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목사가 맨날 설교 시간에 졸지 말라, 졸지 말라 하면서 자신이 다른 사람 설교를 들을 때에는 꼭 조는 것, 자신이 모임 인도자이면, 모임에 빠지지 말라, 지각하지 마라 하면서 자신이 조원으로 참석할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빠지고 지각하는 것, 시아버지처럼 잔소리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뭐라고 하면 조금도 못 듣는 것, 부모에게 마구 반항적이었던 청소년이 훗날 어른이 되어 자기 자식은 아주 더 잡는 것, 다른 사람이 하면 죽일 짓, 내가 하면 기분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등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직장 상사와 직원 사이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나에게 적용하는 기준과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기준이 다른, 이중적 거짓을 보이는 것이 모순입니다.
혹시 당신은 당신 안에 이런 모순을 깨달으셨습니까? 영적 성숙은 자기 안의 모순을 깨닫고 이를 돌이켜 가는 과정입니다. 자신 안에 모순의 단면들을 많이 깨달을수록 영적 성숙의 은혜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현대의 서구 교회가 물량과 배금사상으로 세속화되었음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속화된 세상 가운데서 복음을 성공과 쾌락, 기복의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고 있는 또 거부되고 있는 성경의 핵심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회개"라는 단어입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회개란, 자기 안의 모순을 깨닫고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 성숙은 자기 안의 모순을 깨닫고 돌이키는 경험이 많은, 많이 회개하는 자에게서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한 획은 인간에게 자기 안의 모순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깨달으라"하셨고 또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하셨습니다.
나아가 이 자기 안의 모순을 깨닫게 하는 극명한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행2장>에서 베드로가 설교합니다. 그 설교의 요지는 <36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것이 너희 마음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제일 큰 신성모독임을, 그들 신앙의 모순을 깨우쳐 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 안의 모순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영적 성숙은 자기 안의 모순을 깨닫고 돌이키는 과정 가운데 진행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당신 안의 모순을 깨닫게 할 때에, 가리우지 마시고 포장하지 마시고 애써서 우기지 마시고... 회개하십시오. 인정하고 돌이키십시오. 그 과정이 당신으로 하여금 아름다우신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아름다움을 창조하시기 위하여 내 안의 모순을 깨우쳐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여러 관계들 가운데서, 삶의 여러 단면들 속에서 우리로 아름다우신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시기 위하여 내 안의 모순을 밝혀 주십니다. 그래서 나의 모순을 깨달을 때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손길을 바라봄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안의 모순을 깨닫게 하시고 밝혀 주실 때에, 인정하고 돌이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모순된 존재가 아님을 주장하기 위하여 거짓의 가면을 씁니다. 가리우는 것이지요.
예) 장안의 어느 교회가 기도원을 신축했습니다. 이 기도원이 세인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 기도원 안에 대형 목욕탕이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울 근교의 녹지에 대형 목욕탕이 들어선다는 것, 당연히 관계당국에서 허가를 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자 이 교회에서 기도원에 목욕탕을 건립해야 하는 사유서를 제출했는데, 그 사유서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기도원에 목욕시설 비슷한 것을 건립하는 것은 목욕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종교의식인 세례를 거행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교회가 침례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로교의 세례는 한 컵의 물도 충분합니다. 저는 아직까지 침례교회의 침례탕도 두 사람이 한꺼번에 침례를 받을 수 있을만큼 큰 것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가면을 씌운 것이지요? 적나라하게 말하면, 둘러 댄 것이지요.
아담이 그랬지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책임이 아닌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기 안에 모순이 생성되는 때에 그는 거짓을 말합니다. 거짓으로 자신의 모순을 감추려고 합니다.
이렇게 거짓으로 자신의 모순을 감추려고 하는 것, 자기 안의 모순을 인정하지 않고 모순이 엄연히 밝혀짐에도 불구하고 모순이 없는 사람인양 보이려고 하는 것을 통칭하여 한 단어로 말하면 "허영"이라고 합니다.
허영, 문자 그대로 헛된 영광, 거짓된 영화를 말합니다. 예컨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실상을 밝힐 때에, 이런 말씀 하시지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음과 입술이 서로 다른, 자신이 원하는 자아상과 실제의 자신의 모습은 맞지 않는 모습을 말합니다. 아무 것도 아님에도 자신이 별 것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마음은 아닌데 입술로 떠 벌리는 것, 폼 잡기 좋아하는 것, 척 하는 것, 자랑하기 좋아하는 것...이런 것이 허영입니다.
종교 심리학자들이 순교자 증후군 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순교자가 못되어서 열등의식을 갖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현실에서 신앙의 수준에 잘 못 사니까, 자신은 순교자가 되겠다고 말합니다. 요새 같으면, 오늘의 현실에서 그리스도인으로의 삶을 못 사니까, 선교사가 되겠다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순교자가 되겠다고 하는 말로써, 선교사가 되겠다고 하는 말로써 오늘의 초라한, 모순된 자신의 삶을 위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양 생각하지만, 실상은 무력합니다.
그러나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다는 속담처럼, 허영, 거품이 많은 사람이 실상은 무력한 경우가 많습니다.
CNN 뉴스가 전세계적인 뉴스매체로 권위를 갖게 된 것은 91년 걸프전 때부터입니다. 미사일이 건물에 떨어지는 전쟁의 상황을 생중계한 모습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저희 나라의 방송도 CNN 뉴스를 그대로 전하여 방송을 하였는데, 문제는 CNN 기자의 빠른 영어를 바로 통역해 주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모방송국에서 당시 장안에 제일 잘 나가는 영어회화 선생, 왠만한 사람은 테이프와 책을 한번쯤은 다 보았을 유명한 M선생님을 생방송 뉴스시간에 모셨습니다. 동시통역을 의뢰한 것이지요. 그러나 유명한 M선생님, 그날 방송을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쩔쩔 맸습니다.

그 방송국에서 그래서 찾은 곳이 외대 통역대학원입니다. 외대 통역대학원생들, 방송에는 나올 생각도 못하였던 젊은 그 사람들이 CNN기자의 빠른 말과 동시에 우리 말로 줄줄줄 동시통역을 하였습니다. 
대단한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무력했습니다. 아무도 몰랐지만 실상은 대단히 많이 준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선교사가 되겠다고 하지만, 자신의 삶에서 전도해 본 경험이 없습니다. 그러고도 자신이 선교사로 헌신했다는 것 때문에 자기 안의 모순에 눈이 먼 것, 이것이 허영인데, 대개는 이런 종교적 허영의 가면은 더 찔깁니다.
그러나 그 방송때의 모습처럼, 허영의 가면이 벗겨지고 실상이 드러나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실재에 직면해 보는 경험이 필수적입니다. 예컨대, <마17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간질로 고생하는 어린아이를 고치지 못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부모가 제자들에게 실망하여 예수님께 데리고 오니 예수님은 금방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조용한 자리에게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왜 못 고쳤습니까? 그 때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이 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이 무엇입니까? 실재적 능력의 통로입니다.

제자들, 예수님의 제자라고 폼잡기는 좋아하였는데, 그러나 실제의 능력은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제자들에게 이 경험은 대단히 좋은 약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실제에 직면했을 때, 자신이 믿음이 없는, 실제적 능력은 준비가 되지 않은 초라한 자신을 깨닫는, 제자라고 폼잡는 허영을 벗는 아주 소중한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옛날 어른들이 처녀신앙은 가짜신앙이라고 하는 말 들어 보셨습니까? 20대때의 비젼, 아름다운 꿈 참 좋지만,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하며 인생의 만만치 않은 현실에 직면해 봐야, 그 가운데 신앙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 만만치 않은 것임을 절감하게 되고 그 때의 신앙이 참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숙은, 허영의 거품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허영을 벗어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정직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초라하게 생각되는 자신의 실상을, 하나님께서 조건없이 사랑하심을 받아들이고, 애써 꾸미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 성숙은 내 안의 허영을 벗어가는 과정입니다.

<골2:17>에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우리 말 성경에는 몸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에 보면, reality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실상, 실재라는 의미입니다.
형식이나 그림자, 껍데기와는 대조되는 알맹이, 실재라는 것입니다.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는 우리에게 실상을 깨우치고 실재의 능력을 좌우해 주는 분은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후의 말씀, 껍데기에 연연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붙들어라, 그리스도와 온전한 연합을 추구하라는 멧세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 성숙, 강건함은 껍데기의 허상을 벗고서 그리스도를 추구할 때에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 붙드는 것 그것은 정직해 지는 것입니다. 허영의 가면을 벗는 것을 말하며,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잘 보이게 하려는 추구에서 돌이켜, 실재에 충실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 성숙은 내 안의 허영을 벗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모순을 인정하고 돌이키며 허영을 벗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사람이 스스로는 행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모순을 인정하고 돌이키며 허영을 벗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조건없이 정죄하지 않고 용납하시고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할 때에,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사실은 꼭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이 아무런 이쁜 짓을 안했어도, 미운 짓만 골라서 해 왔을지라도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피곤하게 허영의 가면을 쓰려고 하지 마십시오. 척 하지 않아도 되고 폼 잡지 않아도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고전 명화, 러브 스토리에 보면 이런 유명한 대사 있지요. "Love means never say I'm sorry."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자적 해석보다 의미해석을 해야 합니다. 잘못을 하고 실수를 했음에도 "미안합니다" 말해서는 안된다거나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은 변명으로써, 약속으로써 잘 보이는 관계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가 이것을 하겠다고 이것을 해 드리겠다고 변명과 약속으로써 우리 행위로 의로움을 나타내지 않아도, 우리에게 넉넉히 베풀어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사랑은"우리가 여전히 모순을 위장하고자 허영을 추구하려고 하고 있을 때에도 넉넉히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오. 예수님께 당신의 인생을 의탁함으로써, 예수님을 당신의 주인으로 모셔 들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들이십시오.
어린 아이들이 제일 못하는 것이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어린아이처럼 가만히 있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뒤로는 바로의 병거들이 쫓아오고 앞으로는 홍해가 가로 막고 있는 어찌할 줄 모르는 불안의 한 복판에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잠잠하라 고요하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조건없이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잠잠히 바라보십시오. 허영의 가면을 쓰려는 피곤한 몸짓을 그치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주인되어 주시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오. 당신의 생각이 앞서서, 판단이 앞서서 분노와 불안에 시달리지 마시고 가만히 예수님께 의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의 모순된 존재, 그 모습 그대로 용납하시는 사랑입니다. 아무런 화장기없는 그을린 얼굴마냥, 수수한 삶의 모습, 어디에도 아무런 내세울 것이 없는 삶의 모습일지라도 넉넉히 사랑하시는 그 사랑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은 허영의 가면을 뒤집어 씌우는 거짓된 치유가 아니라, 회개의 아름다움으로 모순을 바로 잡으시는 은혜의 치유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눅5:30,31>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치유는 허영의 허울을 뒤집어 써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치유는 회개의 열매입니다. 치유는 자아연민을 부추겨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 앞에서, 허영을 벗고 모순을 돌이키는 회개의 심령에 누려지는 은혜입니다. 성숙한다는 것은 건강해지는 것이고 치유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반대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 역겨워 하셨듯이, 하나님은 허영의 탈로써 모순을 감추는 악을 미워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당신의 모순을 허영으로 가리우려고 하지 말고 회개와 치유의 아름다운 여정을 시작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함으로 영적 성숙의 참된 여정에 발걸음을 내딛어 보십시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당신의 마음에 간절한 소원, 기도는 무엇입니까? 혹시 당신이 간절히 원하는 소원은 더 유치찬란한 허영의 가면을 쓰고자 하는 것은 아니신지요?

잠언 30장은 아굴이라는 지혜자의 지혜서, 인생의 지혜서입니다. 그가 평생을 살면서 깨달은 진리, 그 진리에 따라 그 마음의 간절한 소원을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잠30:7,8> "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그는 진정으로 잘 사는 것, 가치있고 인생답게 사는 것은 그의 마음과 삶에서 허탄과 거짓말을 멀리 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야망도,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신나고, 더 많이 자랑하고 싶고.. 이 열망도 진정으로 잘 살게 하는 것이 아님을 그는 알았습니다.

당신도 이 기도를 절실한 마음으로 들이고 싶습니까? 당신의 마음 깊이에서 심금을 울리며 드리는 기도라면, 당신도 영적 성숙의 바른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제 안에 모순을 깨닫고 돌이키게 해 주십시오. 허영의 헛된 가면을 벗고서 정직한 몸짓으로 실상을 추구하며 살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해 보고 싶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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